“건후는 좋은 사람이지만 좋은 남편은 아니었죠.”육하경이 코웃음을 쳤다.“남한테는 정의로우면서 아린 씨한테는 냉정했으니까요.”도아린의 호흡이 미세하게 멈췄다.육하경은 시선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어둠 속에 가려진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건후 얘기... 듣고 싶어요?”도아린은 입술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듣고 싶었다. 하지만 육하경이 자신을 떠보는 것일까 봐 두려웠다. 그가 의심을 품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하경 씨가 얘기하고 싶으면 하세요. 전 상관없어요.”육하경이 그녀의 앞머리를 젖히고 머리를 뒤로 넘겨 귀 뒤에 눌렀다.“건후는 구조 작전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구조 대상은 강재희 씨였죠. 재희 씨를 찾았을 때 재희 씨는 지하실에 갇혀 출산을 강요받고 있었어요. 상황이 처참했죠. 간신히 구출해 냈지만, 구조팀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었어요. 하지만 그 마을은 너무 가난한 나머지 며느리를 돈 주고 사 오는 때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도망간 며느리가 있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붙잡는 거예요.”“구조팀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다들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게 됐고 대치 상황에서 건후를 보호하려던 분이 맞아 죽었어요. 그들이 건후를 해치려던 찰나에 구조대가 도착해서 고액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강재희를 데려왔죠.”“하지만 사건이 마무리된 후, 건후가 가설을 하나 제기했어요. 자기를 보호하려 나섰던 사람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었죠. 구조팀이 잘못된 시간 정보를 받은 것도 그가 일부러 흘린 거고 혼란 속에서 죽은 척했을 수도 있다면서 말이죠.”그의 말을 들을수록 도아린은 미간이 좁혀졌다.‘하경 씨가 어떻게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거지? 현장에 있었거나 그 작전에 참여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게 분명해.’도아린은 망설이며 물었다.“그 사장님이 사실은 인신매매 사건의 주모자였던 거예요?”배건후가 그의 돈줄을 끊었기 때문에 그는 배건후에게 복수하기로 한 것이었다.‘하지만 배씨 집안을 뒤
도아린의 머릿속이 ‘웅’ 하고 울렸다.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욕실로 달려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다리가 풀려서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그대로 무릎을 꿇을 뻔했다.몸은 나른하고 피곤한데, 온몸에는 치열했던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그녀가 직접 겪은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거울 속 풍경만으로도 어젯밤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짐작했을 것이다.도아린은 세면대를 짚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육하경은 도대체 언제 약을 탄 걸까.어젯밤 그가 방에 들어온 이후, 그녀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다. 설마 마취약을 문신 잉크에 섞었을 리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제일 먼저 기절했어야 할 사람은 육하경이었을 테니까.순간, 도아린은 번쩍 고개를 들고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주시했다.입술이 평소보다 더 붉었다.육하경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꼬리를 눌러 문지르는 걸 좋아했고, 그녀는 입술을 무는 버릇이 있었다.지난번에도 그가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지자마자 몸이 이상하게 반응하기 시작했었다.마취약은 그의 엄지손가락에 묻어 있었던 거다!도아린은 힘없이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 당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다행히도 육하경이 그녀를 완전히 차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 완전히 미치지는 않은 것이다.율이를 빨리 구해야 했다!도아린은 재빨리 씻고 나왔다.찬물로 세수를 하니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옷장은 전부 목이 깊이 파인 옷뿐이라 실크 스카프로 가릴 수밖에 없었다.“도아린 양.”복도에 서 있던 자상훈이 마치 유령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선생님께서 바쁘신 일이 있으니, 방에서 기다려 주세요.”“그가 율이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 도아린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율이를 데려오든지, 아니면 나를 보내든지 해.”“도아린 양.”자상훈은 냉정하고 단호한 태도로 복도를 가로막았다.“제게 곤란한 일을 시키지 말아 주세요.”도아린은 자상훈 앞에
도아린은 큰 배의 갑판에 많은 사람이 서 있는 걸 이제야 발견했다.그녀의 스카프는 ‘예술가’의 손에 떨어져 있었다.‘예술가’ 옆에 있는 ‘대머리 뻐드렁니’는 변비에 걸린 듯한 표정으로 등을 돌린 채 남자와 고개를 젖히고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예술가’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선글라스 뒤의 두 눈은 도아린의 목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도아린은 이렇게 먼 거리에서 그가 자기 목에 있는 흔적을 볼 수 있을지 몰랐지만, 그 불길한 시선이 상당히 불편했다.그녀의 목이 간지러웠다.육하경이 그 흔적 위를 손가락으로 눌렀고, 웃음은 더욱 밝아졌으며, 심지어 뭔가를 자랑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내가 데려다줄게.”그렇게 말하며 육하경은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배의 다른 쪽으로 돌아가 작은 보트를 타고 율이가 있는 배로 이동했다.배에 오르자 육하경은 자상훈에게 손짓을 했다.자상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떠났다.“율이! 율이!”도아린은 재빨리 선실 안으로 들어가 방 하나하나를 찾기 시작했고, 육하경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어느 방에는 투석 장비가 놓여 있었지만, 병상에는 아무도 없었다.불안한 감정이 몰려왔다.도아린은 육하경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율이!”도아린은 복도의 끝, 마지막 방 문 앞에 도착했다.그녀는 문손잡이를 잡고도 쉽게 열지 못했다.두려웠다.혹시 이곳에도 율이가 없을까 봐.“육하경, 날 원망하게 만들지 마.”육하경은 여전히 부드럽고 우아한 태도를 유지하며, 조급해하지도 않고 그저 도아린이 문을 열길 기다렸다.도아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단숨에 문을 열었다.역시나, 율이는 없었다.“육하경, 약속을 어기다니, 너무 실망이야!”“도 언니!”육하경의 등 뒤에서 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눈을 의심할 필요도 없이 율이는 그녀를 향해 작은 걸음으로 뛰어왔고, 육하경의 손을 잡고 도아린 앞에 섰다.“도 언니, 나 보러 온 거야?”“너 어디 갔었어! 얼마나 놀랐는데!”
“유자차?”도아린은 겉으로 평온해 보였지만 사실 마음속은 엉망진창이었다.‘설마 저쪽 큰 배에서의 계획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도아린은 주스를 손에 들도 코앞에 가져가더니 향을 맡았다.“돌아가면 제가 직접 유자차를 만들어 줄게요.”“좋아요.”육하경이 입꼬리를 올렸다.“기다리고 있을게요.”한동안 동화책을 넘겼지만 율이가 돌아오지 않자 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찾으러 가려고 했다.“대체 율이한테 뭘 먹인 거예요? 의사한테 약이라도 달라고 하세요.”그러자 그녀의 손이 갑자기 육하경에게 붙잡혔다. 그는 힘을 주어 그녀를 옆자리에 앉혔다.“우리 얘기 좀 해요.”도아린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육하경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깊은 사랑이 가감 없이 담겨 있었다.“돌아가고 나면 우리 그거... 할래요?”“뭔데요?”“연애요.”도아린은 재빨리 손을 뺐다.‘돌아가면 사귀자고?’지금까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그는 잡혀서 처벌을 받을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마치 두 사람이 같이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행동했다. 돌아가면 연애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기라도 할 듯이 말이다.육하경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의 눈빛에는 기대가 가득 차 있었지만 그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은 불안함 때문에 주먹을 꽉 쥐었다.도아린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하경 씨, 저를 여기로 데리고 오면서 도망칠 방법을 마련해 둔 거예요?”육하경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서 무릎 위를 문지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아린 씨만 원한다면 저는 아린 씨를 데리고 아무런 방해도 없는 곳으로 갈 수 있어요. 경치도 좋고 먹고 살 걱정도 없는 곳으로 말이죠.”“만약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요?”육하경은 고개를 들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린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저 혼자 가야죠. 아린 씨도 알잖아요.
도아린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하경 씨가 육씨 가문에서 겪은 불공평함은 그 사람들에게 가서 따져야죠! 왜 아무 잘못 없는 아이들에게 화풀이해요? 지금 하경 씨가 하는 짓이 그 사람들보다 더한 거 알아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은 개미만큼도 여기지 않고 있잖아요!”육하경은 조용히 웃었다.“내가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라윤주를 만났기 때문이에요. 라윤주는 내게 기회를 줬고 LY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줬어요.”도아린은 숨이 막혔다.‘내가 하경 씨를 조직에 끌어들였다고?'육하경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달래듯 속삭였다“라윤주가 그때 나에게 빵을 건네줬던 그 여자아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감동했는지 알아요? 이건 하늘이 내게 준 기회였어요. 나는 라윤주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고 그녀의 가장 충실한 개가 되기로 했어요. 하지만...”그는 도아린의 놀란 눈빛 속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럴 기회도 없이 라윤주는 결국 은퇴해야 했어요. 권력 앞에서 정의는 아무 소용도 없었던 거죠. 라윤주가 차마 쓰지 못했던 방법과 수단, 나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난 그 사람들의 목숨으로 그들이 내린 결정에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어요!”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려오자 도아린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대의 고속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맨 앞쪽 보트 위에서 한 남자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과 수염을 한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육하경도 그를 발견하고 천천히 도아린을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웃었다.“우리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이렇게 방해하다니 정말 눈치가 없네요.”그의 시선이 도아린의 얼굴에 고정됐다“놀라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알고 있었군요. 건후가 살아 있다는걸.”도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하경이 쓴웃음을 지었다.“전에 나는 아린 씨가 이미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하고 힘들어할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요. 건후가 그렇게 아린 씨를 속였는
도아린은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 무릎을 꿇고 갑판 위에 주저앉았다.빠르게 다가오는 요트의 엔진 소리가 귀를 울렸고 요트 위의 사람들은 민첩하게 큰 배로 기어 올라왔다.‘예술가'는 가장 먼저 도아린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마치 만지기만 해도 사라질 것 같은 비눗방울을 대하듯 그는 차마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충격에서 벗어난 도아린의 눈빛은 점차 공허해져갔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다만 눈이 시리고 아픈 느낌에 바닷바람 탓일 거라고 그녀는 자신을 달랬다.난간 쪽으로 다가온 고민성을 바라보며 도아린은 겨우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율이는 괜찮아요?”고민성은 힐끗 ‘예술가'를 보며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려 했지만 도아린은 고집스럽게 고민성을 응시하며 대답을 요구하며 남자의 자책으로 붉어진 눈시울 애써 무시했다.“수술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상황을 통제했어요. 다행히 그 아이도 정말 똑똑해서 협조를 잘해줬습니다.”하지만 그는 율이가 지나치게 차분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열 살 남짓한 아이는 살아남았다는 기쁨도 없이 마치 검사를 받는 듯한 태도로 평온하게 있었고 검사가 끝나면 그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듯했다.“넌 도아린 씨 곁에 있어. 난 사람들을 데리고 육하경을 인양하러 갈게.”고민성은 짧게 말하고는 조타실로 향했다.배를 조종하던 선장과 부선장은 경찰의 요청에 순순히 응했다. 경찰이 배를 접수하고 선실을 점검했지만 육하경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도아린은 여전히 멍하니 갑판에 앉아 있었다.광활한 바다에서 사람을 인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육하경의 부상은 가슴에 집중되어 있어 설령 물에 빠지지 않았다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밤이 되자 잠수부들은 몇 차례 교대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예술가'는 긴 수염을 밀고 길게 자란 머리를 뒤로 묶었다. 도아린의 예상대로 그는 배건후였고 얼굴은 여전히 위엄이 가득 보는 이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아린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배건후는 조용히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고 주변을 정리했다. 도아린이 완전히 잠들기 직전, 낮은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들려왔다.“고 팀장님이 그 총을 검사했는데 안에 총알이 없었대요.”도아린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육하경은 애초부터 그녀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단지 가장 처절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고 그녀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려 했을 뿐이었다.그가 남긴 흔적은 결국 도아린과 배건후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 것이었고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도아린이 눈을 떴을 때 배는 이미 항구에 도착해 있었다. 밤새 갑판에서 잠든 그녀의 몸에는 익숙한 체향이 밴 코트가 덮여 있었다. 무심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고 배 앞쪽으로 나아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진씨 가문의 가족들, 강재민, 그리고 막내까지. 모두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누나!”도지현이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는 두 팔을 힘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진씨 부부를 향해 외쳤다.“우리 누나 돌아왔어요!”윤명희는 딸을 본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남편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진범준은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곧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진수혁과 진경수도 부두로 걸어 나와 배에서 내리는 도아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제 집에 가자.”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오며 울컥했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집으로 가요.”배건후는 선체에 기대어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도아린을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엔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고민성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도아린 씨한테 내가 가서 설명해 줄 수도 있어. 언제든 말만 해.”“아니, 됐어.”배건후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 사이에 필요한 건 단순한 설명이 아니었다. 그는
율이의 부탁에 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를 지었다.그 온화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마치 육하경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율이는 순간 멍해졌다.도아린이 경찰서를 나서려 할 때, 경찰이 율이의 보호자인 듯한 사람에게 연락을 하며 아이를 데리러 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아린은 흠칫하다 곧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진씨 가문의 차가 경찰차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도아린은 강렬하고 집요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도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너도 따라왔어?”“누나! 재민이 형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우린 전부 누나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을 거야.”도지현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눈가가 붉어진 채로 울먹였다.“난 이제 누나밖에 없는데...”도아린은 그의 짧은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그땐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딸, 혹시 누가 괴롭히진 않았어?”윤명희가 조수석에서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 네 아빠랑 나는 절대 가만히 안 있을 거야!”도아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육하경의 시신도 못 찾았는데 더 이상 뭘 할 수 있을까?’한편, 주현정은 요양병원의 요청으로 병원으로 향했다.요양병원에서는 배지유가 다른 환자들과 TV를 보던 중, 단지 상대방이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는 이유로 젓가락으로 한 남자의 목을 찔렀다고 했다.피해자의 아들은 지역의 악명 높은 불량배였고 요양원 측에 책임을 묻겠다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주현정이 급히 차를 몰고 요양원으로 도착했을 때, 몇몇 불량배들이 병실을 가득 메운 채 배지유를 위협하고 있었다.“이년, 오늘 제대로 맛 좀 봐야 정신 차리지!”그 순간, 배지유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현정을 발견했다.그러나 그녀를 향한 눈빛엔 반가움이 아닌 차가운 냉소가 서려 있었다.“잠깐만! 보상받고 싶으면 저기 뒤에 있는 우리 엄마한테 말해!”배지유가 손가락으로 주현정을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내가 바로 배씨 가문 딸이야! 모건 그룹 알지?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