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습니다.”고유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시간이 되자 도아린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려고 했다.그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도아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윤가인 일 거라 생각한 그녀는 무심코 말했다.“윤 비서님, 점심 뭐 드실 건가요?”“닭볶음탕이랑 계란찜.”도아린은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배건후가 도시락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어 도아린 앞에 내밀었다.“먹어봐.”도아린은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꼭 쥐었다.“건후 씨가 만든 거예요?”“응.”배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너 매운 거 좋아하잖아. 일부러 좀 맵게 했어.”“운영팀 일도 바쁠 텐데 일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나요? 굳이 이런 걸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도시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요리를 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오전에 고유리와 함께 감독 기관과 도시 정비국 사람들을 만나러 갔으니 이 음식들은 분명 아침에 준비한 것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요리한 게 분명했다.배건후의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에게 혼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그는 도시락을 쥔 손을 거두지 않고 고집스럽게 말했다.“한 입만 먹어봐.”도아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다 검은 무언가를 집었다.“고기가 탔잖아요. 불이 너무 세서 겉은 탔는데 속은 덜 익었어요. 그리고 이런요리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는 거예요. 이렇게 도시락에 넣어두면 눅눅해지잖아요.”배건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한숨을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왜 아침부터 이런 걸 준비했어요? 소중한 시간까지 낭비해 가면서...”‘건후 씨 시간뿐이 아니라 내 시간도 낭비한 셈이지. 배달을 시켰으면 벌써 도착했을 텐데...’배건후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예전에 에이트 맨션에 살았을 때는 아침 몇 시에 일어나든 항상 따뜻하고 맛있는 아침밥이 준
“대표님...”윤가인이 말을 하다 말고 배건후 손에 들린 도시락을 보았다.그녀는 재빨리 포장 봉투를 뒤로 숨기면서 말했다.“배달 음식을 시켰는데... 대표님은 굳이 가져다드릴 필요 없겠네요.”도아린은 사실 그녀가 든 음식을 두고 나가라고 하고 싶었다. 배건후가 만든 음식은 보기만 해도 영 별로였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윤가인은 이미 문을 닫고 도망쳤다.“배달 음식 먹고 싶어?”배건후가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다시 가져오라고 할게.”“됐어요.”도아린은 젓가락을 들고 닭고기를 집었다.“이거나 먹죠.”‘정말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정도면 식당에 가면 되니까.’배건후는 미소를 지으며 재빠르게 도시락을 열었고 둘은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비주얼은 별로였지만 의외로 맛은 괜찮았다. 맵고 자극적인 맛이 도아린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그녀가 식사를 하는 사이에 배건후는 그녀에게 따뜻한 꿀물을 한 잔 타주었다.배건후가 지금의 절반만큼이라도 도아린을 배려했더라면 이혼까지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배건후는 매운 음식을 못 먹는 편이었다. 그래서 닭고기 하나만 먹고도 매워서 기침을 했고 얼굴이 새빨개졌다.“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요.”도아린이 닭고기를 자기 쪽으로 모두 옮기자 배건후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예전엔 네가 항상 맞춰줬잖아. 이제 나도 네 입맛에 익숙해져야지.”말을 마친 그는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화제를 돌렸다.도아린이 프로젝트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자 배건후는 매우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현실적이지는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몇몇 포인트는 꽤 괜찮았다.그는 전혀 비웃거나 깎아내리려는 의도 없이 중립적인 태도로 그녀의 아이디어에 대해 평가했다. 오히려 격려와 긍정적인 피드백, 조언을 해줬다.오후가 되자 다시 업무가 바빠지기 시작했다.도아린은 자신이 맡은 일을 마무리한 후, 브레인팀을 불러 작은 회의를 했다.그녀는 자신의 아이디어와 배건후의 조언을 결
“어제도 술에 취해서 강씨 가문 경호원들한테 들려 나갔거든요.”진수혁이 서류를 찾고 자리로 돌아가자 변슬기는 황급히 휴대폰을 돌려주며 미소를 지었다.“도 선생님,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게요. 대표님과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도아린은 그녀의 눈빛을 읽고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했다.변슬기가 떠나자 진수혁도 물었다.“걔가 너 괴롭혔어?”“아뇨. 그냥 안 맞아서 헤어진 거예요.”진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연남시 프로젝트 말이야. 내가 참여한 부분도 있었거든. 지금은 한경 그룹이 맡고 있으니까 인수인계를 해야될 텐데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다줄게.”“그럼 올 때 슬기 씨 데려와요.”도아린의 말에 진수혁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내 비서를 데려갈 거야.”“비서는 오빠 일 도와야 하니까 데리고 오는 거고 슬기 씨를 데려오는 건 제 부탁이에요.”도아린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약속했잖아요. 잊어버리면 안 돼요.”그녀가 유쾌하게 미소 짓는 걸 본 진수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데려갈게.”두 사람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도아린은 진범준과 윤명희의 근황을 물었다.윤명희가 스스로 본가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진범준은 도우미를 붙여 그녀를 돌보게 했다. 회사는 큰아들에게 맡겼고 보석점은 작은 아들에게 맡긴 후, 그들 부부는 자가 여행을 떠났다.출발하기 전 그들은 두 아들에게 당부를 전했다.“아린이 혼사부터 해결하고 그다음이 너희 차례야. 너희들이 동생을 내버려두고 먼저 연애하는 건 절대 용납 못 해.”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 도아린은 윤명희의 SNS를 열었다.제일 최근 게시물은 3일 전이었다. 그들 부부가 커플 운동복을 입고 산에 오르는 모습이었는데 사진만 봐도 넘치는 애정이 느껴질 정도였다.첫 번째로 '좋아요'를 누른 사람은 뜻밖에도 주현정이었다.한때는 그녀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을 했었다.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식들도 건강했고 사업도 성공적이었다.하지만 이기적인 사람들로 인해 그녀의 결혼은 완전히
“배석준 씨가 배건후 씨에게 연락을 해다고 합니다. 회사를 다시 가져갈 방법도 있다고 말이죠.”모건 그룹이 도아린에게 그냥 넘어가는 걸 배석준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되찾을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었다.도아린은 배건후의 태도를 묻지 않았다.배석준은 그의 친아버지였기에 배건후가 아버지한테 효도하는 건 그의 권리이자 의무였다.하지만 그녀도 모건 그룹은 절대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그가 어머님을 괴롭히지 않게 감시만 하면 돼.”다음 날, 진수혁이 연성에 도착했다.도아린은 그들을 아파트로 데려가 임시로 머물게 했고 변슬기와 송 비서는 주방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진수혁이 도아린을 테라스로 불렀다.“너한테 숨긴 게 하나 있어.”그는 난간에 두 손을 올린 채 좌우를 둘러본 후 말했다.“이 아파트는 강재민이 네게 준 거야. 네가 안 받을까 봐 내가 샀다고 하라던데...”도아린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표정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진 건 사실이었다.“오빠...”진수혁은 그녀에게 일단 끝까지 들어달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계속 말했다.“너희 헤어졌다는 거 알고 내가 강재민한테서 사들였어. 강재민이 손해 본 건 없어.”그제야 도아린은 안도한 듯 가볍게 웃었다.“그러니까 이 집은 네 소유야.”진수혁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도아린은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그녀가 결혼하든 안 하든, 누구와 결혼하든 간에 이 아파트는 그녀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그녀만의 공간이라는 의미였다.“고마워요, 오빠.”진수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도아린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오빠가 웃었다고? 늘 무뚝뚝하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오빠가 이렇게 부드럽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고? 혹시 빙의라도 된 건가? 무슨 충격을 받은 거지?’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이 아파트에는 방이 두 개뿐이에요. 오빠랑 송 비서님이 여기서 주무시면 될 것
그래서 도아린은 진서윤이 했던 더러운 말들이 녹음되고 그녀가 대중 앞에서 사과하는 건 모두 배건후의 수작이었다.도아린은 알고 있었다. 배건후가 이대로 그들을 놔둘 리 없다는 걸 말이다.“네 표정을 보니까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진수혁이 묻자 도아린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몰랐어요. 하지만 건후 씨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건후 씨는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야. 서윤 씨의 도발이 없었더라도 프로젝트에 진 국장님처럼 직권을 남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그럼 아파트 밖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 것도 이상할 거 없다고?”“누가요?”도아린이 뒤를 돌아봤다.진수혁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맞은편 아파트 단지 입구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요즘 연성의 온도는 많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직장인들은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었다.지나가는 젊은이들은 저마다 포장마차에 들렀다.한 커플도 포장마차로 다가갔고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너도 먹을래?”남자는 손을 내저었고 여자는 자기 먹고 싶은 걸로 골랐다.그들이 종이컵을 들고 떠나려 할 때, 남자는 갑자기 그녀가 손에 쥔 어묵을 한입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그러자 그녀는 즉시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까 물어봤을 때는 안 먹는다고 하더니 왜 이제 와서 또 먹겠다는 거야?”여자가 살짝 짜증을 내자 남자는 웃으며 그녀를 꼭 안으면서 달래주었다.아파트 입구에 서 있던 남자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전에 도아린이 자기에게 어묵을 사줬던 때를 떠올렸다.‘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은 사 먹지 않는 게 좋다고 그랬었지. 아린이한테도 먹지 말라고 했었나?’사실 배건후가 도아린에게 그런 식으로 안 좋게 말한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성대호가 보낸 사진 속에서 다른 남자랑 어묵을 나눠 먹고 있는 도아린을 보고 속이 뒤집혀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다.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자 커플은 서둘러서 자리를 떴다.그의 시선이 서서히 올라가더니 마침
변슬기가 돌아올 때, 배건후도 함께였다.그녀는 도아린에게 배건후를 쫓아낼지 말지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도아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그녀가 들고 있던 물건을 받아 함께 주방으로 갔다.“저녁에는 우리 집으로 가요.”변슬기는 시선을 진수혁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그의 뜻은 어떤지 물으려 했지만 도아린의 말에 깜짝 놀라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남자 친구 생겼어요?”“아, 아니요.”변슬기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봉투 속 재료를 꺼내 냉장고에 넣었다.도아린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녀 손목에 있는 팔찌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티파니 주얼리에서 올해 밸런타인데이에 많이 팔았던 시리즈거든요.”그녀의 말에 변슬기는 귀가 빨개져서 눈을 피했다.“도 선생님, 오해하셨어요. 전 그냥 예뻐서 산 거예요.”“아, 그렇군요.”그녀 실망한 척하며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나 해서 기뻐했는데...”도아린은 변슬기를 도와 가방 속 물건을 꺼냈고 변슬기는 그것을 냉장고에 넣었다.도아린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이제 곧 인턴 기간이 끝나는 거 아니에요? 회사에 남을 건지, 아니면 대학원으로 진학할 건지 생각해 봤어요? 회사는 어때요? 사내 연애 금지라든가 그런 규칙은 없어요?”변슬기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아직 고민 중이에요. 아빠는 저한테 패스트푸드 집을 물려주고 싶어 하거든요.”도아린은 변슬기의 속마음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했다.배건후는 진수혁을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우리 여동생이랑 다시 사귀고 싶으세요?”진수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네.”배건후가 대답했다.“사실 건후 씨가 지금까지 한 행동만 보면 사실 저는 반대하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제 동생의 결정을 존중하거든요.”진수혁은 차 한 잔을 배건후 앞에 놓으며 무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건후 씨가 알아둬야 할 게 있어요. 건후 씨가 아린이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다면 우리 가족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배건후는 차를 들려고 했던 손을 다시 내려 무릎 위에 놓았다.그
그는 모든 잘못을 배건후 탓으로 돌렸다.계획이 실패하자 고성만은 성형수술을 받았고 손보미와 손잡고 배씨 가문의 자산을 빼앗으려 했다.하지만 육하경과는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육하경에게 장기 밀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는지, 아니면 육하경에게 원래 그런 계획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우연인 건지... 자세한 건 아직 조사하는 중이었다.송 비서는 요리를 잘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다.배건후는 도아린이 손에 쥐고 있는 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가 마지못해 물었다.“먹을래요?”“응.”배건후는 손을 뻗어 그 귤을 받았다.급하게 먹은 것 때문인지 그는 기침을 세게 해댔다.배건후는 사실 신 것도 잘 못 먹는 편이었다. 하지만 도아린이 좋아하는 과일이었기에 그도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저를 가지러 갔다.그러자 배건후도 그녀 뒤를 졸졸 따라갔다가 식탁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변슬기가 도아린에게 수상한 행동을 하는 배건후의 의도를 물었다. 그러자 도아린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는 와인 한 병을 꺼냈다.“오늘은 다들 푹 쉬세요. 내일 일을 끝내면 제가 사람을 보내서 연성을 구경시켜 줄게요.”“도 선생님, 주말에는 뭐 하세요? 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변슬기는 진수혁을 힐끗 쳐다보고 도아린에게 물었다.진수혁은 송 비서와 내일 스캐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도아린은 주방에서 작은 그릇을 들고나오는 배건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주말은 저도 쉬는 날이에요. 오랜만이니까 저도 같이 가죠.”배건후는 작은 그릇을 도아린 앞에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 주려고 만들었어.”진수혁은 도아린 앞에 놓은 작은 그릇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그릇 안에 담긴 양념을 보고는 다시 테이블에 있는 음식을 둘러보았다.송 비서는 자극적인 음식을 선호하지 않았기에 오늘 저녁 메뉴는 살짝 싱거운 것들이었다. 도아린은 매운 음식을 좋아했기에 테이블 위에 있는
“대표님, 내일도 스케줄이 있으시잖아요. 이만...”변슬기는 시험 삼아 말을 꺼냈지만 진수혁의 눈빛에 제지당했다.그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려줄 수 있길 바랐다. 도아린이 시선을 진수혁에게 돌렸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안심해도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배건후도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스치면서 자기도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도아린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자 또 하나의 와인병이 금세 비었다. 배건후는 초점이 흐려진 듯했고 진수혁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도아린이 눈치를 주자 송 비서가 나서서 진수혁을 침실로 데려갔다.그녀는 배건후를 바라보며 물었다.“괜찮은 거 맞아요?”“응.”배건후는 힘껏 고개를 끄덕얐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도아린은 변슬기와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고 배건후를 데리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 변슬기가 갑자기 말했다.“두고 온 게 있는 것 같아요. 먼저 가세요. 전 나중에 택시 타고 가면 돼요.”말을 그렇게 했지만 도아린은 그녀가 진수혁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제가 집에 도착하면 일북이한테 슬기 씨 데리러 가라고 할게요.”변슬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아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위로 올라갔다.앞으로 걸어가던 도아린은 배건후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먹이를 주면 자꾸 따라오는 강아지처럼 말이다.“대리기사 불러줄까요?”그녀가 멈춰 서자 배건후도 제자리에 섰다. 그에게서 우드 향과 술 냄새가 섞인 향이 났다.밤바람이 차가웠기에 배건후는 손을 들어 도아린의 옷깃을 여몄다.그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건후의 깊은 눈동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도아린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려와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배건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묵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래?”도아린은 오늘 밤 배건후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