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점심시간에 소희가 떡볶이를 한 입 먹고 고통스러워할 때, 네가 혜성처럼 나타나는 거야. 한 손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대용량 쿨피스를 들고 말이지. 매워 죽으려고 할 때 구원자처럼 음료수를 딱 건네면, 그 청량함과 고마움에 네가 얼마나 멋있어 보이겠냐?"
민우는 잠시 상상에 빠졌다. 불타는 입안을 달래주는 달콤한 복숭아 맛 음료수. 그리고 그것을 건네는 따뜻한 남자의 손길.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완벽한 구도의 로맨스였다. 이번 작전은 기계를 조작할 필요도 없고, 장소를 무너뜨릴 위험도 없는 아주 단순하고 안전한 신사적인 방법이었다.
"좋아. 점심시간 시작하자마자 매점으로 달린다."
4교시 종이 울리자마자 민우는 전교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매점으로 돌진했다. 냉장고 구석에서 가장 차갑고 거대한 복숭아 맛 쿨피스를 찾아내 계산을 마쳤다. 음료수 표면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마치 승리의 여신이 흘리는 눈물 같았다.
민우는 쿨피스를 교복 마이 안쪽에 소중히 숨긴 채 급식실로 향했다. 급식실은 이미 떡볶이를 받으려는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매콤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저 멀리 창가 쪽 테이블에 소희가 친구들과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이 보였다. 소희의 식판 위에는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새빨간 떡볶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민우는 기둥 뒤에 숨어 타이밍을 노렸다.
드디어 소희가 떡볶이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소희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손으로 입을 거칠게 부채질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물을 마셔도 소용이 없는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지금이다!'
민우는 품속에서 차가운 쿨피스를 꺼내 들고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전교생의 시선이 급식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민우에게 쏠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심장이 요동쳤지만 이번엔 확실하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소희야, 많이 맵지? 이거 마셔."
이 한마디를 건네며 음료수를 건네면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정리될 터였다.
소희의 테이블까지 남은 거리는 단 다섯 걸음. 긴장한 탓에 민우의 손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빨리 다가가야 한다는 조급함에 발걸음이 빨라진 순간이었다.
급식실 바닥은 누군가 흘린 국물과 기름기로 인해 매우 미끄러운 상태였다. 민우의 실내화 바닥이 중심을 잃고 허공을 향해 홱 미끄러졌다.
"어? 어어?"
민우는 중심을 잡기 위해 양팔을 격렬하게 휘저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몸은 앞으로 사정없이 고꾸라졌다. 넘어지는 궤도의 바로 앞에는 학교 급식실 안전을 위해 설치된 거대한 업소용 대형 분말 소화기가 세워져 있었다.
민우의 두 손이 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화기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하필이면 그 순간, 민우의 엄청난 몸무게와 돌진력이 소화기의 안전핀을 그대로 부러뜨리며 손잡이를 강하게 압착해 버렸다.
푸슈우우우욱!
기괴하고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소화기 주둥이에서 엄청난 압력의 하얀 분말 가루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압도적인 백색의 연기가 순식간에 급식실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악! 이게 뭐야?"
"쿨럭! 콜록! 눈이 안 보여!"
급식실은 순식간에 화재 현장보다 더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분말 가루는 스프링클러라도 터진 것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민우는 소화기를 붙잡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리저리 휘둘렀고, 그 결과 하얀 분말 폭탄은 소희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정밀 타격하듯 직격으로 날아갔다.
몇 초간의 광란의 분사가 끝나고 소화기 가스가 바닥을 드러냈다.
자욱한 하얀 연기 속에서 급식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곳에 있던 전교생과 조리사 아주머니들, 그리고 감독을 하던 선생님들까지 전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채 밀가루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가장 비참한 것은 소희의 테이블이었다. 매운 떡볶이는 하얀 설산처럼 변해 있었고, 소희 역시 앞머리와 교복 어깨 위에 하얀 가루를 잔뜩 얹은 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매운 맛은 확실하게 잡혔을지 몰라도, 그녀의 몰골은 그야말로 눈사람 그 자체였다.
민우는 한 손에 여전히 쿨피스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다 찌그러진 소화기를 든 채 하얗게 변한 얼굴로 소희를 바라보았다.
"소, 소희야... 쿨피스 마실래?"
민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음료수를 내밀었지만, 소희는 대답 대신 머리 위에 쌓인 분말 가루를 툭툭 털어내며 떨리는 입술로 민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매운 떡볶이보다 훨씬 더 뜨겁고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강민우! 너 오늘 진짜 나랑 해보자는 거야?"
소희의 단군 이래 가장 분노에 찬 목소리가 화재경보기 소리와 겹치며 급식실에 메아리쳤다. 저 멀리서 영양사 선생님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학생부장 선생님이 숟가락을 든 채 하얀 귀신 같은 모습으로 민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졸업식을 이틀 앞둔 점심시간, 민우는 소희의 매운맛을 구원하려다 급식실 전체를 동계 올림픽 경기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백의 성공 확률은 이제 마이너스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서윤은 도진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거칠고 흉터가 많았던 도진의 손은 매일 밤 서윤이 발라준 핸드크림 덕분인지 제법 부드러워져 있었다. 도진은 서윤의 따뜻한 손길에 가슴 가득 차오르는 행복감을 느꼈다.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던 황제 자리를 내려놓고 선택한 평범한 삶. 처음에는 오직 서윤의 곁에 머물기 위한 거대한 거짓말로 시작된 춤이었지만, 그녀의 순수한 사랑은 도진의 가짜 옷을 진짜 인생으로 바꾸어 놓았다.이제 그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서윤을 지킬 수 있는 진짜 기사가 되었다.식사를 마쳐갈 때쯤, 도진은 품 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서윤의 눈이 커졌다.“도진아, 이게 뭐야?”도진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햇살을 받아 눈부신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도진은 은테 안경을 살짝 치켜올리며, 28년 인생 중 가장 진지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서윤아. 15년 전에는 네 등 뒤에 숨어 울기만 하던 약골이었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네게 떳떳하지 못한 비밀을 가진 남자였어. 하지만 이제는 네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 당당한 사람이 되었어.”도진은 반지를 꺼내 서윤의 약지에 조심스럽게 끼워주었다. 사이즈가 마치 맞춤처럼 딱 맞았다.“내 남은 인생이라는 가장 큰 비즈니스의 유일한 파트너가 되어줄래? 평생 네 앞에서는 안경 안 벗고, 네 눈물 닦아주는 착한 도진이로만 살게. 나랑 결혼해 줘.”도진의 진심 어린 프로포즈에 서윤의 눈가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이 아닌 완벽한 행복의 눈물이었다. 서윤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도진의 품으로 와락 안겼다.“응! 당연하지, 이 울보야. 평생 내 뒤에 서서 나 지켜줘야 해.”“약속할게. 목숨 걸고 지킬게.”도진은 서윤을 품에 더 꽉 안아 통째로 들어 올렸다. 식당 안에서 지켜보던 철구와 사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고, 주방에서 나오던 영춘 아주머니도 훔치던 눈물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도진의 고백에 서윤은 참지 못하고 빵 터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맑은 웃음소리에 도진의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서윤은 상자를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도진의 앞치마 깃을 부드럽게 정리해주었다.“와, 대표님이 직접 배달까지 오시고 영광이네요. 그럼 오늘 점심은 대표님 취임 축하 기념으로 내가 제일 맛있는 제육볶음 곱빼기로 대접할게요.”“고맙습니다, 서윤 씨. 아, 그리고…”도진은 주머니에서 소중하게 보관해두었던 비타민 사탕 두 알을 꺼내 서윤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앞으로 내 비즈니스는 평생 서윤 씨 하나뿐입니다. 내 모든 주식을 서윤 씨한테 양도할 테니까, 평생 내 곁에서 경영 자문 좀 해줘.”도진의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프러포즈에 서윤의 얼굴이 잘 익은 망고스틴처럼 붉어졌다. 서윤은 사탕을 꼭 쥐며 도진의 가슴팍에 살짝 머리를 기대었다.은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도진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오직 소꿉친구를 향한 15년 만의 완전한 사랑만이 가득할 뿐이었다.두 사람의 따뜻한 실루엣 위로 식당 안의 구수한 냄새가 축복처럼 감돌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이야기, 그들의 완벽한 해피엔딩뿐이었다.* 울보 소꿉남친의 완벽한 비즈니스따스한 봄 햇살이 새로 단장한 ‘영춘식당’의 투명한 통유리창을 통해 부드럽게 쏟아졌다. 재개발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난 식당은 이제 동네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깔끔하게 리모델링된 내부에는 세련된 원목 테이블이 놓였고, 한쪽 벽면에는 ‘청룡 무역 공식 지정 급식소’라는 위트 있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오전 11시 30분이 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이 열리며 번듯한 셔츠 차림의 사내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왔다.“안녕하십니까, 사장님!”이제는 어색함 없이 완벽한 직장인의 아우라를 풍기는 철구 대리와 사원들이었다. 그들의 목에 걸린 사원증은 더 이상 위장용 가짜가 아니었다. 진짜 열대 과일 수입 왕으로 거듭난 ‘청룡 무역’의 정 직원 증명서였다.“철구 씨, 어서 와요! 오늘도 제육볶음으로
식당 문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원은 씁쓸하게 고개를 돌렸다. 법과 논리로는 결코 끼어들 수 없는, 15년이라는 시간과 지독한 순애보가 만들어낸 단단한 세계가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주원은 자신이 이 싸움에서 완벽하게 패배했음을 인정해야 했다.도진은 참지 못하고 서윤을 제 품에 거칠게 끌어안았다. 등 뒤의 호랑이 문신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품은 따뜻했고 떨림은 간절했다.“서윤아, 나 진짜 변할게. 네가 싫어하는 짓 안 해. 합법적으로 살 거야. 진짜 무역 회사 사장 될게.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줘.”서윤은 도진의 넓은 등에 손을 얹으며 미소 지었다.“그래. 내 뒤에 숨던 울보가 내 앞에 서는 기사가 됐는데, 내가 어디 가겠어? 대신 약속해. 이제 내 앞에서는 절대 안경 안 벗기로.”“어, 약속할게. 절대 안 벗어.”도진은 서윤을 더 깊이 안았다. 빗속에서 두 사람의 실루엣은 하나로 겹쳐졌고, 거짓말로 시작된 위태로운 춤은 마침내 진짜 사랑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다.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한 합법화와 해피엔딩을 향해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호랑이의 아주 특별한 사직서비가 그친 강북의 아침은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 영춘식당의 깨진 유리창은 밤새 감쪽같이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골목길은 청소차라도 다녀간 듯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청룡파의 기동력과 자금력이 발휘된 결과였다.같은 시각, 청룡 빌딩 5층의 집무실. 강도진은 어제 서윤이 신신당부했던 대로 알이 굵은 은테 안경을 꾹 눌러쓴 채, 책상 위에 무거운 가죽 가방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 안에는 조직의 모든 이권이 걸린 장부와 구역 대장이 들어 있었다.“형님… 아니, 팀장님. 진짜 다 넘기시는 겁니까?”철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에 걸린 청룡 무역 사원증이 눈물에 젖어 덜렁거렸다. 도진은 담담하게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착지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그에게 망설임 따윈 없었다.“그래. 삼거리파 놈들은 어제 부로
그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서윤을 향해 세상을 다 바칠 것처럼 미련하고 무모하게 구르고 있었다. 방법이 무역 회사 팀장에서 조폭 두목으로 바뀌었을 뿐, 도진의 세계는 여전히 이서윤이라는 단 하나의 태양을 축으로 돌고 있었다. “서윤아, 빨리 가야 돼! 저놈들 진짜 미친 자식들이야!” 주원이 서윤을 다그치며 뒷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서윤은 잡힌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안 가. 나 안 가, 주원아.” “뭐? 미쳤어? 저 남자가 누군지 방금 보고도 그래?” 서윤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빗속에서 어깨에 깊은 자상을 입고도 굳건히 식당 앞을 막아서서 싸우는 도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 때문에 피 흘리고 있잖아. 저 바보가… 또 나 때문에 저러고 있잖아.” 서윤은 깨진 유리 파편을 밟으며 식당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주원이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서윤의 발걸음은 도진이 만들어낸 피와 비의 전쟁터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었다. 결말을 향해 폭주하는 전개 속에서, 두 사람을 묶고 있던 거짓말의 실은 끊어졌지만, 그보다 더 지독하고 붉은 진실의 실이 빗속에서 엉키기 시작했다. * 거짓말의 대가와 빗속의 고백 장대비가 아스팔트를 사정없이 때려눕히던 밤, 영춘식당 앞 골목은 아수라장이었다. 청룡파 최정예 요원들인 ‘청룡 무역 사원들’이 뒤늦게 들이닥치며 삼거리파 놈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조폭이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야. 하지만 널 다시 만나서, 네 곁에 있고 싶어서 평범한 남자인 척했던 내 마음은… 단 한 순간도 거짓이 없었어." "오지 마! 끔찍해… 15년 만에 나타나서 이런 사기극을 벌여?" 서윤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뒤로 물러섰다. 도진은 다가가고 싶은 손을 간신히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터질 듯 불거졌다. 그때, 식당 밖에서 수십 대의 차량이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쇠파이프와 각목을 든 삼거리파 용역들이 식당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한주원의 추격과 삼거리파의 기습이 동시에 맞물리며, 절체절명의 위기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도진은 서윤을 향해 등을 돌려 섰다. 그의 넓은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면서도 위태로워 보였다. "한 변호사, 서윤이 데리고 주방 뒷문으로 나가. 여기는 내가 정리한다." 도진은 셔츠 소매 단추를 풀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서윤은 멀어지는 그의 등 뒤로 언뜻 보이는 거대한 호랑이 문신의 실루엣을 보며,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 등을 돌린 기사와 빗속의 붉은 실 미닫이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거친 함성과 가로등 불빛이 영춘식당의 빛바랜 장판을 어지럽게 불태웠다. 삼거리파 용역 놈들이 몰고 온 트럭의 전조등이 강도진의 등을 무자비하게 비추고 있었다. 안경을 벗어 던진 그의 눈매는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예리했다. 서윤은 주방 문턱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 자신에게 부드럽게 물병을 건네고, 넥타이를 매만지며 얼굴을 붉히던 그 ‘강 팀장’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셔츠 깃 너머로 드러난 거대한 호랑이 문신과 사정없이 불거진 주먹의 핏줄.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식당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강도진! 이 사기꾼 새끼, 여기서 회사원 놀이 하느라 정신없었지?” 삼거리파의 행동대장이 쇠파이프를 바닥에 긁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칠이 벗겨진 문틀을 잡은 도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우드득, 하는 불길한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 좁혀오는 포위망과 숨 막히는 숨바꼭질청룡 무역의 가짜 팀장실. 강도진은 짙은 차콜 그레이 정장 재킷을 거칠게 벗어던지며 이마를 짚었다.적들의 움직임과 한주원의 추격 속도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박해졌기 때문이다."팀장님! 큰일 났습니다!"철구 대리가 사원증이 비뚤어진 것도 모른 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제이 건설과 삼거리파의 비밀 회동이 찍힌 사진들이 들려 있었다."삼거리파 놈들이 제이 건설 뒷돈을 받고 이번 주말에 영춘식당을 강제로 철거하겠다고 용역들을 대거 모집 중입니다. 게다가… 한주원 변호사가 그 정보망을 캐다가 우리 청룡 무역의 진짜 법인 등록 주소지를 캤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도진의 은테 안경 너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주원의 집요함은 예상했지만, 설마 조직의 본거지 냄새까지 맡았을 줄이야. 조폭 두목이라는 정체가 서윤에게 들통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용역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 주말까지 기다릴 것 없어. 그리고 한주원… 그 새끼가 서윤이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내가 직접 서윤이의 안전을 확보해야 해."도진은 책상 위에 놓인 은테 안경을 고쳐 썼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정체가 탄로 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서윤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같은 시각, 영춘식당 안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서윤은 테이블을 닦는 둥 마는 둥 하며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어제 도진이 했던 "서윤 씨를 지키는 데는 누구보다 철저하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때 식당 문이 거칠게 열리며 주원이 들이닥쳤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여유로움을 완전히 잃은 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서윤아, 당장 그 강도진이라는 남자랑 연락 끊어. 그 사람, 네가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무역 회사 팀장이 아니야!"서윤은 찌푸린 얼굴로 걸레를 내려놓았다."주원아, 너 또 시작이야? 팀장님이 우리 얼마나 도와주셨는데 자꾸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