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백은샘을 직접 확인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오전 회의가 끝나기 직전이었다.처음에는 현장 조사를 나갈 계획이 없었다. 옛 남서 온실 아래 막힌 배수 지맥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확인했고, 그 끝에 현재도 남아 있는 백은샘이 있다는 것까지 찾았으니 다음 순서는 기록 조사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전날 단테가 먼저 ‘이건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한 뒤라, 서쪽의 맑은 지맥을 세척용으로 사용할 계획도 일단 보류된 상태였다.그런데 에른이 오래된 대공성 원예 기록 한 장을 가져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백은샘 주변 식생 기록입니다.”단테가 문서를 받아들었다. 봄철 개화 시기, 야생동물 관찰 기록, 샘물 온도. 얼핏 보면 마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기록을 남긴 사람도 마법사가 아니라 백여 년 전 대공성의 정원 관리인이었다.엘라는 단테 옆에서 복제본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시선을 멈췄다.백은샘의 물은 한겨울에도 완전히 얼지 않으며, 샘 주변의 흰풀은 성내 서쪽 정원보다 보름가량 먼저 꽃을 피운다. 단, 샘물을 옮겨 심은 흰풀에는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물을 가져와도 안 됐네요.”엘라가 말하자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확인할 가치가 있습니다.”단테가 물었다. “무엇을.”“따뜻한 물이 원인인지, 지맥 자체의 흐름이 원인인지요.”아르센이 지도 위 백은샘을 가리켰다. “만약 후자라면 우리가 필요한 건 샘의 마력을 가져오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흐름의 형태만 분석할 수 있다면요.”그 말에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선대 대공의 우회 마력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 선대의 마력을 계속 꺼내 쓰는 대신, 그들이 마기를 오래 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겼던 흐름의 패턴을 일반 마력석에 복사했다. 그렇다면 맑은 지맥도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지맥을 세척수처럼 끌어다 쓰지 않고, 그것이 잔류 마기를 밀어내는 방식만 배울 수 있다면 백은샘을 건드릴 이유가 없어진다.단테도 같은 데까지 생각이 닿은 듯 문서를 다시 봤다.“현장에서
시험은 중단됐다.전달석 잔류 오염이 예상보다 빠르게 줄었다는 결과만 놓고 보면, 원래라면 연구실 분위기가 들떠도 이상하지 않았다. 3.8퍼센트까지 낮춘 뒤 밤새 자연 방출을 거쳤고, 다음 날 아침 0.9퍼센트. 숫자만 보면 효율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나 줄어든 마기가 회수석으로 이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부터 누구도 그 수치를 성과라고 부르지 않았다.에른은 연구실 바닥 전체에 측정침을 박았고, 아르센은 서쪽 정원 지맥과 대공성 지하 지맥을 각각 따로 표시했다. 기존 지도에는 두 흐름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실제 측정값은 달랐다. 아주 가느다란 지맥 하나가 연구실 아래를 지나 남서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약해서 평소에는 감지하기 어려웠고, 서쪽의 맑은 흐름이 세척 시험으로 조금 활성화되면서 그제야 반응이 선명해진 것이다.단테는 지도 위에 새로 그어진 얇은 선을 한동안 내려다봤다.“끝은?”“아직 못 찾았습니다.”에른이 대답했다.“방향은.”“남서쪽입니다. 대공성 밖으로 나갑니다.”“거리.”“현재 확인한 건 약 600미터. 그 뒤로는 흐름이 너무 약해집니다.”단테는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여기까지?”에른이 잠시 멈췄다.예전 같으면 대공이 직접 더 확인하자고 했을 질문이었다.오늘은 의미가 달랐다.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우선 성 안 구간만 더 확인하고, 외부 추적은 기사단 지형 담당과 마렌 님 기록을 같이 보겠습니다.”“좋아.”단테는 더 말하지 않았다.엘라는 연구실 바닥에 표시된 가느다란 선을 보며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검은 점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과 같은 방향감이 남아 있었다. 남서쪽. 희미하지만 분명한 감각.단테가 알아챘다.“아직 느껴져?”“조금요.”“아파?”“아닙니다.”“그럼.”그가 아주 짧게 말했다.“느낌 따라가지는 마.”엘라는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안 갑니다.”“바로 대답하네.”“저도 이제 압니다.”단테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뭘.”“궁금한
북부 지맥에서 ‘맑은 가지’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오염된 지맥은 오히려 찾기 쉬웠다. 마기가 오래 머문 곳은 토양의 마력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고, 방어선과 연결된 지점에는 검은 침식 흔적이 남았다. 반면 깨끗한 지맥은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다. 물이 새는 곳은 수리 기록이 남지만, 잘 흐르는 수로는 굳이 장부 한쪽을 차지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에른과 아르센은 아침부터 북부 전역의 지맥 지도를 겹쳐놓고 오염도가 낮은 구간을 추렸지만, 낮다는 것과 실제로 세척에 사용할 만큼 안정적인 흐름이라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후보는 일곱 곳입니다.”에른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북부 대공성 회의실에는 단테와 엘라, 아르센, 마렌, 휴고, 세리아가 모여 있었다. 최근에는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사람 수부터 늘리지 않았다. 누가 필요한지를 먼저 정했고, 오늘은 지맥과 민간 수원, 단테와 엘라의 상태를 함께 봐야 했기 때문에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했다.아르센이 일곱 개의 점 가운데 세 곳에 표시를 그었다. “이 셋은 곧바로 제외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르덴 지하수와 너무 가깝고, 다른 하나는 여름 목초지 아래를 지나며, 마지막 하나는 현재 북부 기사단 보급로와 겹칩니다.”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넷.”“두 곳은 흐름이 너무 약합니다. 전달석 세척에는 쓸 수 있겠지만 실제 분산로 전체를 관리하기에는 부족합니다.”엘라가 물었다. “그럼 두 곳 남네요.”에른이 지도 서쪽과 북동쪽을 각각 짚었다. “하나는 대공성 서쪽 지맥. 다른 하나는 북동쪽 산림 아래를 흐르는 자연 지맥입니다.”단테의 시선이 서쪽에 멈췄다.엘라도 금방 알아봤다.“설화초.”“네.”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서쪽 정원 아래에서 발견했던 흐름과 같은 계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며칠 전, 눈 아래에서 가장 먼저 설화초가 올라오게 만들었던 따뜻한 지맥. 북문 계통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오염 반응은 거의 없었고, 대공성에서
실제 오염 마기를 사용하는 첫 현장 시험은 설화초가 완전히 핀 날 오전 열 시에 시작됐다.대공성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단테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리아에게 상태를 확인했고, 전날보다 잠을 조금 덜 잤다는 사실까지 먼저 알렸다. 두통과 감각 이상은 없었고 마기 유입량 역시 최근 평균 범위 안이었다. 엘라는 그 옆에서 듣기만 했다. 이제 단테가 자기 상태를 말할 때마다 의미를 붙이거나 변화라고 짚어줄 필요는 없었다. 말을 하는 것도, 필요하면 멈추는 것도 어느새 현장 준비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사용하는 오염 마기는 제9방어선에서 회수된 마력석에서 추출한 극소량이었다. 이전에 오염도 78퍼센트였던 돌을 제3감시탑의 기존 순환에 잠깐 연결해 31퍼센트까지 낮췄던 것과는 방식부터 달랐다. 그때는 이미 살아 있는 고대 흐름에 작은 돌 하나를 맡겨보는 시험이었다면, 오늘은 자신들이 새로 만든 네 개의 전달석과 두 개의 교대선을 거쳐 실제 오염 마기가 움직일 수 있는지를 처음 확인하는 자리였다.그래서 사람들은 어제보다 훨씬 말이 적었다.회백 능선 초입에는 길이 120미터의 시험 구간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눈을 걷어낸 암반 사이로 네 개의 전달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설되어 있었고, 각 전달석 사이에는 두 줄의 얇은 마력선이 번갈아 주선 역할을 맡도록 연결돼 있었다. 그 끝에는 방출 장치 대신 밀폐형 회수석이 놓였다. 오늘은 환경으로 마기를 내보내지 않는다. 전달만 확인한 뒤 마지막에 다시 회수한다. 실제 분산 방출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아르센이 마지막 봉인을 확인하며 말했다.“오늘 목표는 세 개뿐입니다. 실제 오염 마기가 전달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지, 이동 과정에서 전달석에 얼마나 남는지, 한쪽 선을 중간에 끊었을 때 보조선으로 전환되는지. 그 이상은 보지 않습니다.”단테가 물었다.“끝까지 안정적이어도?”“끝냅니다.”이번에는 아르센이 먼저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단테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에른이
현장 실증을 마치고 대공성으로 돌아온 단테는 곧장 서쪽 정원으로 가지 못했다.엘라가 말한 대로 먼저 세리아에게 상태를 확인받았고, 외부 지맥 노출 이후 유입량 변화와 감각 이상 여부까지 전부 검사했다. 다행히 수치는 안정적이었다. 전날보다 피로도가 조금 높았지만 두통도, 손끝 저림도 없었고, 마기 유입량 역시 위험 기준에 한참 못 미쳤다.세리아는 기록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늘 저녁 업무는 줄이십시오.”단테가 바로 물었다.“얼마나.”“문서 결재는 세 건까지.”“다섯 건.”“세 건.”“네 건.”세리아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봤다.단테가 잠시 버티다가 시선을 돌렸다.“……세 건.”엘라는 옆에서 웃음을 참다가 결국 말했다.“많이 발전하셨습니다.”단테가 그녀를 봤다.“어디가.”“협상하셔도 결국 지키시잖아요.”“아직 안 지켰는데.”“지킬 거잖아요.”단테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세리아가 태연하게 정리했다.“이제 정원은 가셔도 됩니다. 다만 오래 서 있지는 마십시오.”그 말이 끝나자 단테가 거의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엘라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꽃이 그렇게 궁금하셨습니까?”“너도 궁금하잖아.”“저는 인정했습니다.”“언제.”“계속요.”“못 들었는데.”“지금 들으셨네요.”단테가 피식 웃었다.둘은 함께 치료실을 나왔다.⸻서쪽 정원으로 가는 길은 이제 둘에게 제법 익숙했다.처음 북부에 왔을 때 엘라는 대공성의 회랑이 지나치게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검은 돌벽, 높은 창문, 눈이 쌓인 안뜰.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같은 회랑도 조금씩 달랐다. 서쪽으로 가는 길에는 오후 빛이 길게 들어왔고, 겨울에는 다른 곳보다 바닥이 조금 따뜻했다. 정원으로 나가는 마지막 유리문은 손잡이 아래쪽에 오래된 흠집이 하나 있었다.단테는 문을 열기 전에 바깥부터 확인했다.“바람 거의 없네.”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오래 보셔도 되겠네요.”“세리아가 오래 서 있지 말랬잖아.”엘라는 잠시 그를 봤다.“정말 잘 들으십니다.
백칠십 년 전 멈춘 시험의 네 번째를 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누구도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아침 회의실에는 전날 찾아낸 자료가 종류별로 나뉘어 놓여 있었다. 회백 능선에서 발견한 제1시험 분기점의 구조 복제본, 황실 공학원에서 보내온 ‘북부 이동식 마력 분기 장치 연구’의 불완전한 기록, 당시 대공가 회계 장부, 하르덴 정착 기록, 그리고 세 번의 실증 시험에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품 규격까지. 백칠십 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자료는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었지만, 정작 모두가 알고 싶은 네 번째 시험 기록만 없었다.단테는 한참 동안 서류를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그러니까 세 번은 됐고.”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첫 번째는 7분간 단거리 전달, 두 번째는 분기 후 재결합, 세 번째는 실제 야외 지형에서 약 430미터 전달 성공으로 보입니다.”“네 번째 목표는?”“그게 완전하지 않습니다.”아르센이 황실에서 받은 복제 문서 한 장을 앞으로 밀었다. 종이 아래쪽은 절반 가까이 손실되어 있었지만, 위쪽에는 다행히 몇 줄이 남아 있었다.제4차 실증 예정―고정 중계점 의존 감소.그 아래.하나의 중계기가 정지해도 흐름을 유지할 것.엘라는 그 문장을 읽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단테 역시 같은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어제 자신들이 연구실에서 만든 보조선과 거의 같은 목표였다.전달석 하나가 망가지면 전체 길이 끊기는 구조를 피한다. 한 곳이 멈춰도 다른 쪽으로 흐르게 만든다. 자신들은 전날 그 원리를 처음 생각해낸 줄 알았는데, 백칠십 년 전의 누군가도 세 번째 시험을 끝내고 정확히 같은 문제를 보았던 것이다.단테가 낮게 말했다.“거기까지 갔네.”아르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세 번 성공했다고 만족한 게 아니라, 세 번째 성공에서 다음 약점을 찾았습니다.”엘라는 무심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게 이상하게 좋았다.백칠십 년 전 사람들도 완벽한 답을 가진 게 아니었다. 한 번 만들고 끝낸 것도 아니었다.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