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오늘 밤, 이 '남규만'이라는 어린 괴물이 되어서 와요. 내가 본 당신의 재능이 진짜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검은 밴이 현준의 낡은 반지하 자취방 골목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현준의 손에는 계약서와 시나리오 몇 장이 들려 있었다. 하루 사이에 그의 인생은 180도 뒤바뀌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현준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차가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직도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손에 들린 종이의 감촉이 이것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시나리오를 펼쳤다.
'남규만(17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웃으며 사람을 죽인다.'
단 두 줄의 인물 설명. 하지만 그 안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담겨 있었다. 현준은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17세의 어린 괴물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내일, 그는 거장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 괴물을 마주하는 밤
싸구려 향초가 타들어 가며 내는 희미한 연기가 이현준의 낡은 반지하 방을 채웠다. 어둠과 습기, 가난의 냄새를 조금이라도 몰아내기 위한 발버둥이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다른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이현준'이라는 존재를 지우는 신성한 의식과도 같았다.
그는 차가운 방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손에 든 대본은 이미 수십 번을 읽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글자를 읽지 않았다. 그는 '남규만(17세)'이라는 인물의 영혼 속으로 깊이, 더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는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다. 세상 모든 것이 그저 관찰하고 실험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는 웃으며 사람을 죽인다.'
왜 웃는가? 즐거워서? 아니다. 감정이 없으니 즐거움도 없다. 그의 웃음은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는 학습의 결과물일 것이다. 사람들이 특정 상황에서 웃는다는 것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마치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듯, 그의 웃음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다. 그것은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투명한 막이자,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다.
현준의 호흡이 점점 느려지고, 옅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지난 10년간의 서러움, 어제 느꼈던 벅찬 환희, 내일에 대한 불안감 같은 인간적인 감정들이 하나씩 지워져 나갔다. 마치 컴퓨터를 포맷하듯, 그의 내면은 완벽한 공백(空白) 상태가 되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아직도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낡은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어수룩하고 선한 인상의 이현준이 없었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동자.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도, 경계하는 것도 아닌, 그저 모든 것을 '관찰'만 하는 듯한 서늘한 시선. 그리고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그 미소는 보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괴함을 품고 있었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 '남규만'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본에 있는 첫 대사였다.
"살아 있지가 않길래."
목소리는 평소의 현준보다 반 톤 정도 높았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국어책을 읽는 아이처럼 단조롭고 평탄한, 그래서 더욱 소름 끼치는 음성이었다.
밤새 이현준은 없었다. 1평 남짓한 그의 작은 방에는, 17세의 어린 괴물이 조용히 숨 쉬고 있을 뿐이었다.
* 오디션장, 사자들의 우리
다음 날 아침, 김동진이 보낸 차를 타고 도착한 오디션장은 국내 굴지의 영화 제작사 '청룡 필름'의 사옥이었다. 세련된 통유리 건물과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현준은 또 한 번 위압감을 느꼈다.
"너무 긴장하지 마. 그냥 어제 나한테 보여줬던 것만 하고 나온다고 생각해."
김동진은 현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하지만 현준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이미 '남규만'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의 텅 빈 눈은 주변의 풍경을 무심하게 스캔할 뿐이었다. 김동진은 그런 현준의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직감했다. 지금 저 녀석은 평범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대기실은 이미 전쟁터였다. 스무 명 남짓한 젊은 배우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긴장을 풀고 있었다.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아이돌 출신 배우부터,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실력파 신인까지, 모두가 만만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노련한 매니저들이 붙어 마지막까지 컨디션을 조절해주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낡은 면바지에 흰 티셔츠 한 장을 입고 덩그러니 앉아있는 현준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몇몇 배우와 매니저들이 노골적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는 시선을 보냈다.
"뭐야, 저 사람은? 스태프 아니야? 배우들 앉는 자리에 왜 앉아 있어?"
"글쎄다. 보아하니 엑스트라나 전전하던 사람 같은데, 어떻게 오디션은 보러 왔나 보네."
그중에서도 유독 거만한 태도의 한 배우가 현준에게 직접 시비를 걸어왔다. 최근 인기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주가가 오르고 있는 신인 배우 차민우였다.
"저기요. 여기 처음 와봐서 잘 모르나 본데, 여기는 오디션 대기하는 배우들만 앉는 곳이거든요? 길 잃었으면 안내데스크에 가서 물어보시죠."
차민우의 조롱 섞인 말에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동진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현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차민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텅 빈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차민우는 저도 모르게 말을 잃었다.
마치 벌레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아 오히려 섬뜩한 그 눈빛에, 차민우는 마치 자신이 발가벗겨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 현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기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차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늘은 낮부터 꾸물거리더니 결국 참았던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인공 살수차가 만들어내는 가짜 비와 하늘에서 내리는 진짜 비가 섞여 촬영장은 온통 축축한 물기로 가득 찼다.조명기는 빗줄기를 투과하며 몽환적인 빛을 만들어냈고, 스태프들은 우비를 눌러쓴 채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 촬영은 이신이 자객들의 습격으로부터 여주인공인 서윤 공주를 구해내고 빗속에서 처절하게 버티는 장면이었다.서윤 공주 역을 맡은 배우 채유진은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가냘픈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면 그녀는 곧바로 고결한 공주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했다.현준은 검을 고쳐 쥐며 유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무명옷 역시 빗물을 잔뜩 머금어 천근만근 무거웠다."유진 씨, 많이 춥죠? 이번 컷만 버티면 바로 온열기 넣을 거예요."현준의 나지막한 위로에 유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빗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현준의 눈빛은 이미 이신 그 자체였다.유진은 그 서늘하면서도 깊은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하기 힘든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준비됐습니다. 액션!"류승호 감독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자객 역할을 맡은 스턴트 배우들이 사방에서 튀어 나왔다. 현준은 유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휘둘렀다.쇳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날카롭게 고막을 때렸다. 현준의 움직임은 갯벌에서 훈련했던 대로 진흙탕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새로운 약속을 건넸다.“앞으로, 길을 잃을 것 같으면… 이 돌을 쥐어요. 그리고, 허구의 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나를 떠올려요.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이 세상의 유일한 등대를요.”그녀는 그의 심연을 비추는 ‘닻’이자, 그가 돌아올 길을 알려주는 ‘등대’가… 되어주었다.다음 날 아침, 군주와 그림자의 촬영장.촬영이 시작되기 전, 이현준은… 분장을 마친 배우 이원영의 대기실을, 홀로 찾아갔다. 이원영은, 그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어제의 공포가, 아직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현준은, 그 앞에서… 아무 말 없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선배님. 죄송합니다.”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변명도 담겨있지 않았다.“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배우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그의 진심 어린 사과에, 이원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굳었던 얼굴을 풀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아니야. 사과하지 마.”그가 현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자네 덕분에… 내 연기 인생 20년, 처음으로… 진짜 공포를 연기했으니까. 카메라에 담긴 내 얼굴을 봤는데… 내가 봐도, 소름이 돋더군. 평생, 내 대표작으로 남을 걸세.”
사슬에 묶여있던 배우 이원영은, 스태프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현준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는 방금, 자신의 눈앞에서…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가, 다시 힘겹게 인간으로 돌아오는… 끔찍하고도 성스러운 변태(變態)의 과정을, 전부 목격해버린 것이다.“오늘 촬영, 전부 접어!”류승호 감독이, 마침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외침은, 이 지옥 같았던 심문실의 모든 것을 끝내는 무거운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왕의 위로이현준의 개인 트레일러 안.그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 소파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신’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그의 내면은,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와도 같았다.‘돌아오고 싶지 않았어.’그의 마음속에서, 이신의 목소리가… 유혹처럼 속삭였다. 감정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의 세상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통제하는 그림자의 세상이… 훨씬 더 완전했다.그는 자신의 의지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외부의 힘에 의해… 자신의 완벽한 왕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한 것이다.그때, 트레일러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안성현이 들어섰다. 그는 손에,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생강차 두 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현준의 맞은편에 앉아, 그에게 찻잔 하나를 건넸다.“내가… 자네만 한 나이였을 때,”안
그것은, 그의 신념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잔혹한 논리였다. 이원영은 이 얼음 같은 논리 앞에서… 자신의 모든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아… 아…….”그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절망 속에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는 이현준이 만들어낸 이 완벽한 ‘얼음의 지옥’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말… 하겠소…! 말하겠소, 제발…! 제발 내 딸만은…!”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백하려던 바로 그 순간.현준은, 대본에도 없는…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그는 오열하는 이원영을… 경멸과 연민이 뒤섞인 눈으로 내려다보며, 아주 차갑게… 말했다.“늦었소.”“……네?”“나는… 이미, 당신이 말하려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그는 웃었다. 자신의 지성이 한 인간의 영혼을 완벽하게 파괴했다는 사실에 대한… 오만하고도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돌아오지 않는 그림자“……컷! 컷…! 컷!!!!!!”류승호 감독이, 거의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자신의 모니터에 담긴, 악마보다 더 지독한 이성의 광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현장의 모든 스태프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이원영은, 촬영이 끝났음에도… 바
두 사람은, 카메라 밖에서도… 진짜 왕과 그림자처럼,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의지했다.“현준아.”쉬는 시간, 안성현이 현준을 자신의 곁으로 불렀다.“왕은… 늘 외로운 법이지.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다 보일 수 없으니까. 배우라는 직업도… 어쩌면 그것과 닮아있는지도 모르겠다.”그는, 왕으로서의 고독과, 톱배우로서의 고독을… 넌지시 겹쳐 보이고 있었다.현준은, 그의 말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는, 후배가 아닌… 왕의 유일한 동지로서, 대답했다.“전하께서 외로우시지 않도록…”그가 안성현을 향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이 신이…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언제나 전하를… 지켜볼 것이옵니다.”두 사람의 유대는, 단순한 연기 파트너를 넘어… 시대를 초월한 영혼의 동지처럼,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위대한 이야기는, 이제 막… 가장 뜨거운 불꽃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림자의 체온군주와 그림자의 촬영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자, 이현준이라는 사람은 현장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그는 더 이상 동료 배우들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누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되면, 시끄러운 식당 대신… 홀로 그늘진 나무 아래 앉아, 최소한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낡은 서책이나, 그 시대의 지도가 들려
최정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현준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의 손에는, 엄청난 힘이 실려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손길에는, 단 한 번의 저항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절대적인 의지가 담겨 있었다.최정환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 위협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현준은, 그의 귓가에… 악마처럼 속삭였다.“대감의 아드님이… 변방에서 고생이 많으시더군요.”“……!”“왕께 상소를 올려, 하루빨리 한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비 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그의 입가에, ‘남규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갑고 지적인 미소가 걸렸다.“이대로… 오랑캐의 땅에서, 쓸쓸히 뼈를 묻게 두는 것이… 대감의 ‘충심’이신지요?”그것은, 가장 부드러운 말투로 건네는, 가장 잔혹한 협박이었다.최정환은, 자신의 다음 대사를… 잊어버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이제 막 떠오른 신인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지금,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민, 진짜 ‘그림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등줄기에서, 진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커… 컷! 컷! 오케이!”류승호 감독이,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모니터 앞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저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