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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5 08:32:15

이창욱 감독의 눈이 다시 한번 날카롭게 빛났다.

"내일 대본 리딩에서, 안성현을 압도해봐. 네가 왜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지, 연기로 증명해내란 말이다. 만약 네가 그 앞에서 주눅이 들거나, 그의 기에 눌려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오늘의 이 제안은 없었던 일이 될 거다."

그것은 마지막 시험이자, 가장 혹독한 관문이었다.

결국 현준과 김동진은 '아수라'의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사를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타는 내내, 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김동진은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폭풍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고, 현준은 여전히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었다.

자신의 좁고 어두운 반지하 방으로 돌아온 현준은, 묵직한 시나리오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표지에 박힌 '아수라'라는 강렬한 두 글자가 그의 심장을 내리쳤다.

주인공, 이현준.

자신의 이름 앞에 '주인공'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을 10년간 꿈꿔왔다. 하지만 지금 그 단어는 기쁨이 아닌,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안성현을... 압도하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까마득한 하늘 위의 태양 같은 존재. 그런 사람 앞에서 내가 과연 제대로 서 있기나 할 수 있을까.

그때,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김동진 실장'이었다.

[내일 리딩, 다른 생각 아무것도 하지 말고 딱 하나만 생각해. 당신은 이제 막 데뷔하는 신인 이현준이 아니야. 당신은 이미 완성된 괴물, '남규-만'이야. 괴물은 전설을 두려워하지 않아. 그저 또 다른 사냥감으로 볼 뿐이지. 내일, 당신의 첫 사냥을 시작해.]

김동진의 메시지는 현준의 흔들리던 마음을 붙잡는 굳건한 닻과 같았다. 그래, 맞다. 내일 그 자리에 서는 것은 이현준이 아니다.

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 중앙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수라'의 시나리오 첫 장을 펼쳤다.

'SC#1. 폐공장. 밤.'

글자들이 그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 공기가 다시 한번 차갑게 변해가고 있었다. 전설을 사냥하기 위해, 괴물이 다시 눈을 뜨고 있었다.

* 전설과의 독대

이틀 연속으로 찾은 청룡 필름의 사옥은, 어제와는 전혀 다른 무게로 이현준을 짓눌렀다. 어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긴장감이었다면, 오늘은 목에 칼이 들어온 듯한 실질적이고도 잔혹한 압박감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시나리오는 더 이상 기회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모든 것을 증명해야만 하는 시험지이자, 그의 목숨 줄이었다.

밤사이 이현준은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는 잠을 자지 않았다. 아니, 잘 수 없었다. 

남규만'이라는 인물은 단순한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규칙과 감정 위에서 군림하려는 오만한 신(神)이었고, 인간을 자신의 유희를 위한 장난감으로 여기는 완벽한 포식자였다.

이현준은 그의 광기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였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는 남규만의 영혼을 자신의 텅 빈 그릇 안으로 온전히 옮겨 담았다.

약속 장소인 작은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이창욱 감독은 이미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심연과 같았다.

김동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현준의 등 뒤에 섰고, 현준은 감독의 맞은편에 기계처럼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현준'이 아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회의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평범한 남색 재킷에 면바지. 꾸미지 않은 머리와 수수한 안경. 하지만 그가 들어서는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압축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안성현.

대한민국 영화의 살아있는 역사. 이름 석 자만으로도 화면을 장악하는 배우 중의 배우. 그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이창욱 감독에게는 짧게 목례를, 김동진에게는 가벼운 눈인사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현준에게 닿았다.

그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현준은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느껴지는 거대한 산과 같은 관록. 그리고 무명의 신인인 자신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의구심과 냉정함. 안성현은 감독의 고집으로 끌려온 이 자리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시간 맞춰 오셨네요, 선배님. 앉으시죠."

이창욱 감독의 말에 안성현은 현준의 맞은편, 감독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거장이 좌우에 앉자, 현준은 마치 취조실에 앉은 범죄자처럼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바로 시작하지. 시나리오 47페이지, 12번 씬. 오기철과 남규만의 첫 번째 취조실 장면."

이창욱 감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성현은 안경을 고쳐 쓰고 시나리오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가 첫 대사를 읽는 순간, 회의실은 더 이상 회의실이 아니었다.

"담배, 하나 피워도 되겠나?"

목소리 톤, 호흡, 시선 처리. 단 한마디였지만, 그곳에는 수십 년간 범죄자들의 밑바닥을 뒹굴며 닳고 닳아버린 베테랑 형사, '오기철'이 앉아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피로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려는 희미한 집념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김동진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시작부터 차원이 달랐다. 이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냥 오기철 그 자체였다. 저런 거대한 존재 앞에서, 과연 현준이 버텨낼 수 있을까?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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