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페테르부르크의 흑한(極寒)은 그저 온도가 낮은 것이 아니라, 피부 밑 혈관을 얼어붙게 만드는 폭력적인 기상 현상이었다. 네바 강의 살얼음을 깎아내며 불어온 칼바람이 황궁의 육중한 대리석 기둥을 때릴 때마다, 빙결된 거대한 석조 건축물은 둔탁하고 기괴한 마찰음을 토해냈다. 황금빛 돔과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조각들로 치장된 지상의 본성과 달리, 빅토르가 향한 황궁 가장 깊은 곳의 ‘황실 움브라 통제국(Umbra Control Bureau)’은 짙은 음습함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빛이 온전히 닿지 않는 화강암 계단에는 벽면에서 스며 나온 습기가 그대로 얼어붙어 시커먼 살얼음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탁한 가스등이 헐떡이며 내뿜는 매캐한 석탄 냄새와 오래된 양피지들의 묵은내, 그리고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비릿한 피 냄새가 환기되지 못한 채 묵직한 공기 속에 진득하게 녹아 있었다. 빅토르의 투박한 구두 굽이 얼어붙은 석재 바닥을 짓누를 때마다 울리는 파열음은, 이 거대한 지하 건축물이 살아 숨 쉬며 침입자의 온기를 착취하는 괴물의 내장처럼 느껴지게 했다. 어둠의 피조물들을 감시하고 사냥꾼들을 통제하는 제국의 은밀한 기관이었다.
통제국의 수장이자 움브라 계 특별 관리관인 ‘바실리 카라조프(Vasily Karazov)’는 탁한 가스등 조명 아래서 거만한 표정으로 빅토르를 맞이했다. 빅토르는 그에게 어떠한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자루의 끈을 풀어 집무실의 매끄러운 탁자 위로 내용물을 쏟아냈다.
툭, 데구르르.
은탄환에 미간이 박살 난 채 흉측하게 일그러진 머리통 하나가 굴러나왔다. 재로 바스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특수 주술이 걸린 은가루를 잔뜩 뿌려둔, 볼코프 백작의 잘린 수급이었다. 바실리는 불쾌한 피비린내에 미간을 찌푸리며 비단 손수건으로 코끝을 가렸지만, 이내 서늘한 눈빛으로 수급의 이목구비와 수배 서류를 꼼꼼히 대조했다. 특유의 기형적인 송곳니와 야성의 골격. 동유럽 변방을 어지럽히던 움브라 계의 깡패, 볼코프 백작이 틀림없었다.
"수고했군, 추적꾼. 제국의 칙령을 완수한 공로를 인정하여, 자네에게 내려졌던 황명 불복종 및 반역 혐의에 대한 불구속 기소를 이 시간부로 전면 철회하도록 하지."
바실리가 붉은 밀랍을 녹여 사면장 위에 제국의 거대한 인장을 꾹 찍어 내렸다. 마침내 족쇄처럼 빅토르를 옭아매고 있던 참혹한 수배령이 완전히 거둬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자유를 증명하는 사면장을 거칠게 낚아채는 빅토르의 표정에는 어떠한 안도감도, 성취감도 없었다.
황궁의 묵직한 철문을 나서며 페테르부르크의 매서운 겨울바람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단 하나의 핏빛 복수만이 들끓고 있었다. 자신을 비열한 함정에 빠뜨리고 제국의 개로 만들어 이 지독한 치욕과 육신의 고통을 겪게 한 진짜 원흉. 악한 드루이드, 말라카르.
다시 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냥꾼으로 돌아온 그는 이제 주저할 것이 없었다. 비록 왼쪽 다리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처참하게 망가져 눈밭에 불규칙하고 깊은 족적을 남기고 있었지만, 그의 안광만은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배신자 말라카르의 흔적을 쫓아 눈 덮인 유라시아 대륙의 툰드라부터 작열하는 아프리카의 사막까지, 세계의 끝이라도 기어코 찾아가 그 사악한 심장에 칼을 박아넣을 요량이었다.
볼코프 같은 하급 흡혈귀야 은탄환이 뿜어내는 정화력으로 거리를 두고 손쉽게 날려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태초의 자연 섭리를 비틀어버린 악한 드루이드, 말라카르에게는 한낱 화약과 은 조각 따위가 통할 리 없었다. 거대한 곰이나 날렵한 표범 등 야수로 둔갑한 드루이드의 두꺼운 가죽과 질긴 생명력은 총탄을 가볍게 튕겨내거나 근육 속에 단숨에 묻어버린다. 그 사악한 숨통을 확실히 끊어내기 위해서는, 오직 서늘하게 벼린 무거운 도검(刀劍)을 양손에 쥐고 놈의 품으로 파고들어 육신을 직접 토막 내는 근접 육탄전뿐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 잔혹한 진실에 있었다. 도검술의 본질은 날카로운 칼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체중을 온전히 싣고 땅을 박차는 견고한 하체와 민첩한 발놀림에 있다. 곰의 집채만 한 앞발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하고, 번개처럼 쇄도하는 표범의 궤적을 쫓아가 목을 치려면 바람 같은 보법(步法)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지하 감옥에서 무참하게 으스러진 빅토르의 왼쪽 다리는 이제 감각조차 희미한 고철 덩어리처럼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 외곽의 헐벗은 겨울 숲에서, 빅토르는 홀로 낡은 대검을 뽑아 들고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려 보았다. 그러나 끔찍한 현실이 곧바로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짐승의 습격을 가정하고 상체를 비틀어 칼을 뻗는 순간이었다. 체중을 버텨주지 못한 왼쪽 무릎이 기괴한 파열음을 내며 속절없이 꺾여버렸다.
"크윽...!"
대검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고, 빅토르는 볼품없이 눈밭에 처박혀 뒹굴었다.
차가운 눈을 움켜쥔 굵은 손가락 사이로 절망적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상체 근육과 전투의 기억은 여전히 일급 사냥꾼의 것이었다. 하지만 반쪽짜리 다리로는 말라카르의 털끝은커녕, 놈이 일으키는 바람조차 쫓아갈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무기력한 고깃덩어리로 찢겨나갈 것이 자명했다. 완벽한 불가능이었다.
아무리 피 토하는 살의를 불태워도,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된 지금의 몸뚱이로는 도검으로 드루이드를 사냥하고 처치한다는 것이 완벽한 '불가능'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복수를 향한 뜨거운 갈망은, 핏기 잃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눈밭에 차갑게 처박힌 검처럼 한없이 무력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빅토르가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얼어붙은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험준하기로 악명 높은 카르파티아 산맥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절뚝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계절 내내 거친 칼바람이 몰아치고 잿빛 안개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곳, 깎아지른 절벽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오래된 석조 수도원이 빅토르의 목적지였다. 수백 년 전 신을 모시던 자들이 추위와 고립을 견디지 못하고 버려둔 그 폐허는, 고스트 계의 악마들을 사냥하는 추적꾼들을 길러내는 혹독한 훈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외벽을 타고 오르는 앙상한 가시덩굴과, 안개 틈으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부엉이의 울음소리만이 수도원의 유일한 생명력을 증명하는 듯한 적막하고 스산한 곳이었다.
빅토르는 얼어붙은 돌계단을 기어오르다시피 하여 그곳에 당도했다. 낡은 참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캐한 장작 타는 냄새와 함께 차가운 석재 바닥 위에서 묵묵히 검을 손질하고 있는 한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바로 빅토르가 핏덩이였을 때부터 거두어들여 스무 살 무렵까지 혹독하게 무술을 가르쳤던 스승, ‘알라릭(Alaric)’이었다. 은빛으로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짐승의 발톱에 깊게 파여 거칠어진 얼굴을 가졌지만, 굽은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기백만큼은 여전히 거대한 바위산처럼 묵직했다. 알라릭은 단순한 스승을 넘어, 고아였던 빅토르에게 아버지이자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절뚝이는 불규칙한 발소리에 알라릭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국의 고문으로 완전히 망가져 고철처럼 질질 끌리는 애제자의 왼쪽 다리를 발견한 노스승의 주름진 눈가에 찰나의 흔들림이 스쳤지만, 그는 어떤 동정의 말도 섣불리 내뱉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다가와 투박한 손으로 빅토르의 차가운 어깨를 강하게 쥐어줄 뿐이었다.
빅토르는 바닥에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모진 고문 앞에서도 결코 흘리지 않았던 뜨거운 눈물이 그의 얼어붙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냥꾼으로서의 자존심도, 오만함도 모두 벗어던진 채 그는 부모와도 같은 스승을 올려다보며 피를 토하듯 물었다.
"알라릭 사부님... 제 몸뚱이가 이렇게 망가졌습니다. 총탄으로는 그 교활한 드루이드의 가죽을 뚫을 수 없는데, 검을 쥐려 해도 이 반쪽짜리 다리로는 한 걸음조차 제대로 내디딜 수 없습니다."
빅토르는 자신의 뒤틀린 다리를 억센 손으로 쥐어뜯으며 절박하게 울부짖었다.
"이 고철 같은 다리 하나만으로도... 그 악한 드루이드, 말라카르의 목을 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남아 있습니까?“
바닥에 엎드려 오열하는 제자의 절규를 묵묵히 듣고 있던 알라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서운 산바람이 낡은 석벽을 때리는 소리와 화로의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한참 동안 무거운 적막을 채웠다. 이윽고 알라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구석의 낡은 서안(書案)으로 다가갔다.
"내가 가르친 방식대로라면, 지금의 네 몸으로는 도검술의 반의반도 펼칠 수 없는 것이 맞다."
알라릭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지만, 그 이면에는 한 줄기 기이한 희망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검을 쥐는 법부터 발을 내딛는 심법(心法)까지 모든 근간을 밑바닥부터 완전히 새롭게 부수고 다시 세운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지."
알라릭은 투박한 양피지를 펼치고 깃펜에 잉크를 듬뿍 찍어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붉은 촛농을 떨어뜨려 자신의 인장으로 굳게 봉인한 편지 한 통을 빅토르의 거친 손에 단단히 쥐여주었다.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 북부로 가라. 짙은 안개와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진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의 깊은 벼랑 끝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오늘내일하며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한 명 숨어 살고 있다."
빅토르가 젖은 눈으로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알라릭의 흉터 진 얼굴에 깊은 경외심이 스쳤다.
"그분은 바로 고아였던 나를 거두어 무술을 가르쳤던 분이자, 네 스승의 스승... 대종사(大宗師) ‘이그나티우스(Ignatius)’ 어르신이시다. 세상의 모든 사냥꾼들이 이미 흙으로 돌아갔다고 믿는 고스트 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지."
알라릭은 편지를 쥔 빅토르의 손등을 억센 손아귀로 덮어주며 묵직하게 말을 이었다.
"내 친필 편지를 그분께 전해드려라. 그러면 그 꼬장꼬장한 노인네도 어쩔 수 없이 평생을 숨겨온 경전(經典), ‘아르간투스 비전서(Argantus Codex)’를 네게 내어줄 것이다. 은(銀)의 기운을 다루며 부서진 육신의 한계마저 뛰어넘게 해주는 무술의 총체지."
스승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차올랐다.
"그 비전서를 받아 들면 세상의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어 철저한 고독 속에서 홀로 뼈를 깎는 연마를 거듭해라. 망가진 너의 반쪽 다리로도 대기를 가르고 악마의 가죽을 뚫을 수 있을 때, 그 경전의 모든 것을 네 핏속에 새겨넣은 뒤에야 다시 사냥을 시작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빅토르가 망가진 반쪽짜리 다리를 원망하며 뼛속 깊이 절망했던 것은, 그의 숙적인 말라카르가 지닌 기괴하고도 압도적인 특성 때문이었다. 그 악한 드루이드는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된 적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생태계를 끔찍하게 뒤틀어버린 그는 짐승과 인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른바 ‘변전(變轉)의 군주’였다. 이 기만적인 악마는 곰과 표범, 그리고 인간이라는 세 가지 형상을 완벽하게 취하며 전장의 판도를 쥐고 흔들었다.
그의 첫 번째 형상은 거대한 산맥이 꿈틀대는 듯한 ‘곰’이었다. 고스트 계의 악귀들, 즉 하급 흡혈귀나 드라큘라 무리 같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추적꾼들과 대규모 집단전이 벌어질 때면 그는 집채만 한 불곰으로 둔갑하여 최전방에 나섰다. 벼락같은 포효를 터뜨리며 적들의 살의와 공격을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빗발치는 총탄과 검기가 두꺼운 가죽에 박혀도 끄떡없는 숨 막히는 맷집으로 정면에서 사냥꾼들을 도발하고 끌어당기며, 그는 스스로 부하들을 지키는 거대한 살점의 방패이자 통곡의 벽이 되었다.
그러나 사냥꾼과 단둘이 마주하는 일대일의 사투가 벌어지면 전투의 양상은 완전히 뒤바뀐다. 이때 그가 취하는 두 번째 형상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표범’이었다. 둔탁한 방어력을 버리는 대신, 바람조차 찢어발기는 극강의 속도와 치명적인 은밀함을 두른 표범은 사냥꾼의 시야 사각을 파고들어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뜯는 완벽한 암살자로 돌변했다. 빅토르가 절뚝이는 다리로는 도검을 쥘 수 없음을 깨닫고 피를 토하듯 좌절했던 이유도, 이 궤적조차 보이지 않는 맹수의 움직임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잔혹한 진실 때문이었다.
가장 소름 끼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평범한 ‘인간’의 형상이었다. 태초의 자연을 다루는 고대 드루이드의 비술을 악한 방향으로 뒤집어버린 그는, 인간으로 둔갑했을 때 고스트 계 악마들을 전담하는 기괴한 ‘의사’로 활동했다. 찢겨나간 괴물들의 살점을 붙이고 썩어가는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하는 이 타락한 재생 능력은, 평화로운 은신처에서뿐만 아니라 핏방울이 난무하는 혼전의 한가운데서도 고스란히 발휘되었다. 사냥꾼들이 목숨을 걸고 입혀놓은 치명상마저 전투 중에 주술로 꿰매버리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신을 마주한 것과 같은 참혹한 무력감을 느껴야만 했다.
상황에 따라 방패가 되는 곰, 비수가 되는 표범, 그리고 죽음을 속이는 치유자로 변모하는 이 ‘변전의 군주’는 결코 단순한 무력만으로는 베어낼 수 없는 절대적인 공포 그 자체였다.
추적꾼으로서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를 홀로 떠돌던 빅토르에게도 돌아갈 뿌리이자 등을 맡길 동료들이 있는 곳, 바로 자신이 적을 두고 있는 문파가 존재했다. 그곳은 대종사 이그나티우스가 창시하고 스승 알라릭이 명맥을 이어온 유서 깊은 사냥꾼들의 결사, ‘잿빛 까마귀(Ashen Raven) 문파’였다. 빅토르는 이 뼈대 있는 문파의 정식 3대 제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표적을 암살하는 것이 사냥꾼의 주된 임무라지만, 고스트 계와의 전쟁이 늘 소규모 국지전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움브라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전투 특화 악마들, 일명 ‘블러드 크레스트(Blood Crest) 전귀(戰鬼)들’이 떼를 지어 지상으로 쏟아져 나오는 날이 있었다. 짐승의 뼈와 흑마법으로 벼려낸 갑주를 두르고 이성을 상실한 채 오직 살육만을 위해 돌진하는 이 악한 전사들과의 대규모 집단전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 그 자체였다.
이런 끔찍한 전면전이 벌어질 때면, 평소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사냥을 하던 잿빛 까마귀 문파의 제자들은 일제히 결사의 본산으로 집결했다. 빅토르 역시 투박한 떠돌이 생활 중에도 이 집단전의 부름만큼은 외면하지 않고 생각보다 자주 문파를 찾아가 무기를 보탰다. 은제 총탄을 비 오듯 쏟아내며 동문수학한 사형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밀려드는 블러드 크레스트 전귀들의 목을 베어 넘기는 거대한 학살의 현장. 악한 드루이드 말라카르가 거대한 곰으로 둔갑하여 적진의 최전방에서 사냥꾼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며 방패막이 역할을 하던 것도 바로 이런 대규모 집단전의 한가운데서였다.
빅토르에게 잿빛 까마귀 문파는 단순한 무술의 발원지가 아니었다. 참혹한 악마들과의 전쟁 속에서 유일하게 전우애를 나누고 인간으로서의 소속감을 확인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그렇기에 고문으로 다리가 망가져 더 이상 도검술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다름 아닌 문파를 지키는 스승 알라릭의 앞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갯벌의 썩은 내와 소금기가 엉겨 붙은 블레시앙 항구의 공기는 폐부를 찌를 듯 매캐했다. 잿빛 구름이 짓누르는 도버 해협의 바다는 납빛으로 일렁이며 뱃전에 부딪힐 때마다 죽은 물고기의 비릿한 포말을 토해냈다.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랜드의 무어(Moor) 지대는 생명을 거부하는 척박한 이탄(泥炭)의 늪이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질척이는 검은 진흙이 말의 발목을 집어삼키려 들었고, 바싹 말라비틀어진 헤더(heather) 군락은 채찍처럼 매섭게 빅토르의 종아리를 긁어댔다. 안개는 단순한 기체가 아니라, 뼛속 골수를 얼어붙게 만드는 축축하고 무거운 거미줄처럼 온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달리는 말의 반동이 척추를 타고 부서진 무릎 관절을 무자비하게 짓이겼으나, 빅토르는 고통에 젖은 입술을 짓이기며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질주는 필사적이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첫 번째 역참에서 거품을 무는 말을 버리고 새 말로 갈아탔고, 스산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황무지 한가운데의 두 번째 역참에서 다시금 지친 짐승을 갈아치웠다. 그리고 깎아지른 절벽의 윤곽이 안개 속에서 기괴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북부의 끝자락, 마지막 세 번째 역참에서 네 번째 말의 고삐를 쥐었을 때 그의 몰골은 이미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땀과 핏물이 엉겨 붙은 가죽 코트, 푹 꺼진 뺨 아래로 번뜩이는 핏발 선 눈동자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세 번이나 말을 갈아타며 쉬지 않고 달린 끝에야, 그는 드디어 노섬벌랜드의 가장 험준하고 인적이 끊긴 해안 절벽 끄트머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센 바닷바람이 모든 생명을 깎아낼 듯 몰아치는 벼랑 끝.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돌무더기 움막 하나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빅토르는 말에서 반쯤 굴러떨어지듯 내렸다.
질질 끌리는 다리를 이끌고 어두운 움막 안으로 들어서자, 매캐한 이탄 타는 냄새 사이로 앙상한 뼈대만 남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오늘내일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쇠락한 몰골. 하지만 퀭한 눈구멍 속에서 번뜩이는 안광만큼은 심해의 바닥처럼 서늘하고 깊었다.
잿빛 까마귀 문파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대종사, 이그나티우스였다.
빅토르는 그 압도적인 기백 앞에 거친 숨을 고르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망가진 왼쪽 무릎이 차가운 돌바닥에 닿으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장 깊고 공손한 예를 올렸다. 이윽고 떨리는 손으로 품속 깊이 간직해 온 스승 알라릭의 편지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이그나티우스가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손을 뻗어 편지를 받았다.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이 붉은 밀랍을 툭, 뜯어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사각거리는 양피지 넘기는 소리, 그리고 타닥거리는 불씨 소리만이 움막 안을 채웠다. 노인의 주름진 이마가 미세하게 꿈틀거렸고, 날카로운 시선이 편지와 빅토르의 일그러진 다리를 번갈아 훑었다.
잠시 후.
짙은 한숨 같은 정적을 깨고, 대종사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빅토르의 눈앞에 툭 던졌다.
짐승의 가죽으로 두껍게 장정되고, 검게 변색된 은 장식이 박혀 있는 한 권의 무거운 책.
알라릭이 말했던 무술의 총체이자 한계를 뛰어넘는 비급, ‘아르간투스 비전서’였다.
긴 설명도, 얄팍한 위로도 없었다.
노인은 그저 묵묵히 경전을 내어줌으로써, 부서진 육신을 이끌고 사선을 넘어온 추적꾼의 독기와 핏빛 복수심을 온전히 거두어들인 것이다. 망가진 왼쪽 무릎이 차가운 돌바닥에 닿으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장 깊고 공손한 예를 갖추어 절을 올렸다. 이윽고 떨리는 손으로 품속 깊이 간직해 온 스승 알라릭의 봉인된 편지를 꺼내어 두 손으로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이그나티우스는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손을 뻗어 편지를 받아 들었다.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이 붉은 밀랍을 툭 뜯어내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사각거리는 양피지를 읽어 내려갔다. 움막 안에는 타닥거리는 불씨 소리뿐이었다. 노인의 주름진 이마가 미세하게 꿈틀거렸고, 날카로운 시선이 편지와 빅토르의 비참하게 일그러진 다리를 번갈아 훑고 지나갔다.
잠시 후, 짙은 한숨 같은 정적을 깨고 대종사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빅토르의 눈앞에 툭 던졌다.
그것은 짐승의 흉측한 가죽으로 두껍게 장정되고, 검게 변색된 은(銀) 장식이 섬뜩하게 박혀 있는 한 권의 무거운 책. 알라릭이 말했던 무술의 총체이자 한계를 뛰어넘는 비급, ‘아르간투스 비전서(Argantus Codex)’였다. 긴 설명도, 위로도 필요 없었다. 노인은 그저 묵묵히 경전을 내어줌으로써, 부서진 육신을 이끌고 사선을 넘어온 이 추적꾼의 독기와 검붉은 복수심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동유럽 변방의 척박한 햇살이 무너진 천장 틈새로 길게 쏟아져 내리던 낮.
야행성 박쥐 떼가 서늘한 어둠 속에 숨죽여 잠든 텅 빈 성의 지하 굴에서는, 짐승의 헐떡임과 바위가 부서지는 파공성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크아아아앗-!"
콰직!
핏발 선 포효와 함께 빅토르의 거구가 거친 암반 위로 또다시 처박혔다. 벌써 수백 번째의 추락이었다.
입가에 터져 나온 붉은 피를 거칠게 닦아낸 빅토르는, 자신의 왼쪽 다리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대종사 이그나티우스가 물려준 무경, '아르간투스 비전서'에 기록된 도검술과 권각술의 이치는 완벽했다. 단전에 은(銀)의 기운을 모으고 폭발적인 완력으로 검을 휘두르는 상체의 움직임은 이미 과거의 기량을 뛰어넘고 있었다.
문제는 대지를 딛고 맹수의 궤적을 쫓아야 할 '보법(步法)'이었다.
제국의 지하 감옥에서 형편없이 으스러진 뒤 제멋대로 굳어버린 왼쪽 무릎은, 비전서가 요구하는 유연한 도약과 체중 이동을 단 하나도 수행해 내지 못했다. 억지로 무릎을 굽히고 땅을 차오르려 할 때마다 뼛조각이 어긋나며 기괴한 비명만을 질러댈 뿐이었다.
빅토르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비전서의 각술(脚術) 페이지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온전한 두 다리를 가진 자들의 무술 따위... 지금의 내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다."
그는 헛된 미련을 품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빅토르는 화려한 보법과 발차기가 그려진 양피지 페이지들을 미련 없이 덮어버렸다.
대신, 그는 대검을 지팡이 삼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기형적인 몸뚱이를 철저하고 냉정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굽혀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굽힐 필요가 없다.
빅토르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는 대지를 차고 오르는 대신, 고철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린 왼쪽 다리를 바닥을 향해 거대한 대못처럼 깊숙이 박아 넣었다. 부서진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단전에 모아둔 은(銀)의 기운을 모조리 하체로 밀어내어 왼쪽 다리를 하나의 '강철 축(軸)'으로 고정시켰다.
"흡!"
다리를 대지에 박아 넣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어깨와 등 근육의 완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상체를 팽이처럼 폭발적으로 회전시켰다.
서어억-!
마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듯, 엄청난 원심력을 머금은 대검이 기괴한 파공성을 뿜어내며 허공을 찢었다.
두 다리가 멀쩡한 검사라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엇박자의 파행(跛行)이 빚어낸 끔찍하고도 변칙적인 궤적이었다.
맹수의 유연한 동체 시력조차 헛갈리게 만들 기형적인 회전.
그것은 도약의 속도를 포기한 대신, 한 자리에 뿌리를 박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리는 압도적인 파괴력의 탄생이었다. 빅토르의 입가에 피투성이의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수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강철 축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원심력은 필연적으로 찰나의 사각지대와 거리가 벌어지는 틈을 만들어냈다. 빅토르는 비전서 맨 뒷장에 낡은 잉크로 쓰여 있던 '총기류 비술'의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대검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며 상체의 밸런스가 한계까지 비틀리는 그 찰나의 순간.
빅토르의 거친 왼손이 춤을 추듯 허리춤을 스쳤다.
"타아앙-!"
대검의 파공성이 채 멎기도 전에, 그의 손에 들린 무거운 리볼버가 불을 뿜었다. 원심력을 역으로 이용해 총을 뽑아 드는 동작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까지 짐승의 털끝이 닿을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근접전에서는 거대한 대검과 묵직한 상체의 회전으로 살점을 짓이기고.
상대방이 회피하여 거리가 벌어지거나 궤적이 엇갈리는 순간에는, 번개처럼 총을 뽑아 은탄환을 미간에 꽂아 넣는다.
마침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기괴하고도 완벽한 전천후의 살인기.
오직 절름발이가 된 빅토르 크로스 한 명만을 위해 재단된 '철축단애검(鐵軸斷崖劍)'의 뼈대가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척박한 동유럽의 겨울이 뼈를 깎는 추위를 몰고 왔다가 다시 메마른 열기가 흑회색 성벽을 달구기를 반복하는 시간. 그렇게 두 번의 해가 바뀌는 2년의 세월 동안, 텅 빈 드라큘라의 성 지하에서는 짐승의 헐떡임과 바위를 부수는 파공성이 단 하루도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피와 땀이 엉겨 붙어 굳어버린 가죽 코트가 무겁게 펄럭이고, 날이 이가 빠지도록 바위를 내리친 대검은 이제 허공의 기류마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2년의 지독한 은거 끝에, 이 변형된 살인 기술은 굳이 머리로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는 것과 같은 완벽한 '본능'으로 그의 뼛속 깊이 각인되었다.
칼집에 대검을 꽂아 넣는 빅토르의 시선이, 천장 틈새로 쏟아지는 붉은 노을을 향해 서늘하게 치켜올라갔다. 마침내 핏빛 사냥을 재개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작열하던 태양이 서서히 고도를 낮추며 사바나의 끝자락을 검붉은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지평선을 따라 붉게 타오르는 노을은 마치 대지가 피를 토해내는 듯한 기괴한 장관을 연출했다. 메마른 바람이 억센 가시풀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사막 특유의 건조한 흙먼지가 일었지만, 그 바람의 끝자락에는 이질적이고도 짙은 비릿함이 묻어 있었다.
우거진 바오밥나무 군락을 병풍처럼 두른 공터 한가운데, 아프리카 대륙의 생태계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거대한 이물질이 도사리고 있었다.
집채만 한 덩치를 가진 유라시아의 불곰.
타락한 고대의 제관, 악한 드루이드가 변전(變轉)한 형상이었다. 놈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앞발에 척추가 꺾인 톰슨가젤의 배를 가르고 붉은 내장을 게걸스럽게 파먹고 있었다. 주둥이 주변으로 짐승의 생피가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도, 놈은 이내 고개를 처박고 가젤의 사체 옆에 돋아난 질긴 초원 풀들을 질겅질겅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육식과 평화로운 초식이 기괴하게 뒤섞인 그 광경은, 놈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섭리를 조롱하는 악마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탁... 즈으윽... 탁..."
바람 소리만이 맴돌던 적막한 초원 위로, 불규칙하고 둔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식사를 방해받은 불곰이 번뜩이는 안광을 빛내며 고개를 획 돌렸다. 붉은 노을을 등지고 걸어오는 낡은 가죽 코트의 사내. 망가진 왼쪽 다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걷는 빅토르 크로스였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서진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지만, 깊게 눌러쓴 챙 모자 아래로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는 짐승보다 더 차갑고 서늘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곰의 형상을 한 드루이드가 피 묻은 주둥이를 일그러뜨렸다. 짐승의 성대에서 인간의 뼈가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척박한 모래 구덩이까지... 피 냄새를 맡고 기어 온 사냥개인가."
드루이드는 앞발로 짓이기고 있던 가젤의 사체를 걷어차 버리고는 묵직하게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산맥 하나가 우뚝 솟아오르는 듯한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하지만 냄새를 잘못 맡았군, 사냥꾼. 꼬라지를 보아하니 제국 놈들에게 다리몽둥이가 박살 난 폐기물 같은데... 스스로 내장과 살점을 바치러 오다니, 갸륵하기도 하지."
빅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곰의 거대한 덩치를 올려다보는 대신, 침착한 손길로 등 뒤에 멘 거대한 대검의 자루를 거머쥐었다. 스르릉- 스산한 마찰음과 함께 잿빛 까마귀 문파의 핏빛 역사가 벼려진 묵직한 강철이 사바나의 붉은 노을빛을 반사했다.
"주둥이가 긴 걸 보니, 말라카르의 밑 닦개 노릇을 하던 삼류 찌꺼기 중 하나로군."
빅토르의 갈라진 음성이 대기를 가르자, 드루이드의 안광이 맹렬한 분노로 붉게 타올랐다.
"크아아아아앙-!"
대지가 쩌렁쩌렁 울리는 벼락같은 포효와 함께, 집채만 한 곰이 흙먼지를 폭풍처럼 일으키며 쇄도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바나의 지반이 요동쳤다. 코끼리의 두개골조차 단숨에 으깨버릴 숨 막히는 질량과 속도.
보통의 사냥꾼이라면 당연히 몸을 날려 회피하거나 거리를 벌려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단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철처럼 굳어버린 자신의 왼쪽 다리를 굽히는 것을 포기하고, 거대한 쇠말뚝처럼 대지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부서진 무릎 관절에서 찢어질 듯한 통증이 뻗쳐 올랐으나, 그것은 오히려 그를 대지와 완벽하게 결속시키는 '강철 축(軸)'이 되었다.
그만의 고유한 외다리 검법, ‘철축단애검(鐵軸斷崖劍)’이 마침내 세상에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곰의 거대한 앞발이 빅토르의 머리통을 박살 내기 위해 허공을 찢으며 떨어져 내렸다.
바스락!
빅토르의 상체가 기형적인 각도로 비틀어졌다. 온전한 두 다리를 가진 자의 매끄러운 회피가 아니었다. 왼쪽 다리가 땅에 박힌 채 상체만 극단적으로 젖혀지는, 엇박자의 파행(跛行)이 만들어낸 찰나의 사각지대였다.
"크르륵?!"
곰의 발톱이 빅토르의 가죽 코트 깃을 스치며 허망하게 흙바닥을 내리찍었다. 짐승의 동체 시력조차 착각하게 만든 그 기만적인 움직임 직후, 빅토르의 진정한 살인기가 폭발했다.
"흡!"
쇠기둥처럼 박힌 왼쪽 다리를 축으로, 빅토르의 등과 어깨 근육이 한계까지 팽창하며 상체가 팽이처럼 무서운 속도로 회전했다. 원심력을 온전히 머금은 육중한 대검이 맹렬한 파공성을 내뿜으며 밑에서 위로 솟구쳤다.
서어억-!
강철을 찢는 듯한 섬뜩한 파열음. 두꺼운 불곰의 가죽과 앞다리 관절이 은빛 섬광에 단숨에 썰려 나갔다.
"크아아아악!"
드루이드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짐승의 근육이 두부 썰리듯 터져나가며 시뻘건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놈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주술로 상처를 재생하려 했으나, 대검에 서려 있던 은(銀)의 기운이 절단면을 불태우며 재생을 악착같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빅토르의 공격은 단발로 끝나지 않았다.
상대의 밸런스가 무너진 찰나, 땅에 박힌 왼쪽 다리를 콤퍼스의 축처럼 사용하며 빅토르는 미친 듯이 연참을 쏟아냈다. 채챙! 서걱! 푹! 대검은 중력을 무시한 채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곰의 궤적을 쫓아 난무했다. 한때 사냥꾼들의 검기를 가볍게 튕겨내던 불곰의 압도적인 맷집은, 오직 엇박자로 치고 들어와 관절과 대동맥만을 도륙하는 정교한 칼바람 앞에서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죽어라, 짐승."
빅토르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마지막 회전력을 끌어올렸다. 대검이 허공에 둥근 보름달의 궤적을 그리며 곰의 두꺼운 목줄기를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드루이드가 최후의 발악으로 온전한 남은 오른발을 크게 휘둘렀다. 빅토르의 칼날이 놈의 경동맥을 절반쯤 썰어버리는 동시에, 곰의 무자비한 앞발이 빅토르의 왼쪽 어깨를 강타했다.
퍼억-!
"크윽...!"
거대한 바위에 얻어맞은 듯한 끔찍한 충격. 가죽 코트가 찢겨나가고 어깨 살점이 깊게 파이며 선혈이 튀었다. 회전력이 아니었다면 두개골이 날아갔을 묵직한 타격이었다.
빅토르의 몸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흙바닥을 뒹굴었지만, 승패는 이미 결정 나 있었다.
"커어억... 컥..."
경동맥이 완전히 끊어진 거대한 곰이 무릎을 꿇었다. 놈의 목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진 피가 메마른 아프리카의 흙바닥을 시뻘건 진흙탕으로 만들고 있었다. 치유 주술을 읊조릴 틈도, 날렵한 표범으로 형상을 바꿀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악한 드루이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목을 부여잡은 채, 그 자리에서 육중한 거품을 물고 엎어졌다.
사바나의 바람이 피비린내를 품고 흩어지는 가운데, 놈의 사체는 서서히 부풀어 오르다 이내 본래의 비루한 인간 형태의 시체로 쪼그라들며 절명했다.
"후으으..."
빅토르는 바닥에 대검을 거꾸로 꽂아 의지한 채, 투박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드루이드의 마지막 발악에 직격당한 왼쪽 어깨는 이미 흉측하게 부어오르며 시뻘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뼈가 으스러지지 않은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그는 이빨로 찢어진 코트 소매를 뜯어내고, 품속에서 잿빛 까마귀 문파 비전의 금창약(金瘡藥)을 꺼내 상처 부위에 짓이기듯 발라넣었다.
"크으으윽..."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빅토르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핏물에 젖은 흙바닥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붕대를 단단히 조여 매며, 여전히 붉게 타오르고 있는 사바나의 끝자락을 서늘하게 응시했다.
한 마리를 처치했지만 끝이 아님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대지를 타고 흐르는 미세하고 음산한 파장. 죽은 드루이드가 숨을 거두기 직전 동족들을 향해 내뿜은 사기의 공명(共鳴)이 초원 너머로 뱀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
"올 테면 와라."
빅토르는 피 묻은 대검을 칼집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어깨의 찢어질 듯한 통증과 고철처럼 무거운 반쪽 다리를 짊어진 위대한 사냥꾼은, 다가올 피비린내 나는 밤을 맞이하기 위해 미련 없이 불규칙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악한 드루이드들은 대자연의 섭리를 비틀어버린 참혹한 마물들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짐승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괴한 본능만큼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은 바로 죽음의 찰나에 발동하는 동족 간의 끔찍한 공명(共鳴)이었다.
마치 메마른 모래톱의 방울뱀이 적의를 품고 꼬리를 흔들어 스산한 진동으로 제 동족을 부르듯, 이 타락한 제관들에게는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 대지를 향해 보이지 않는 주술적 파장을 뿜어내는 재간이 있었다. 방금 전 거대한 곰의 심장이 멎고 묵직한 몸뚱이가 초원 바닥에 처박힐 때,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낮고 음산한 파동이 핏물을 타고 사바나의 흙먼지 아래로 빠르게 퍼져나갔던 것이다.
본래 이 변전(變轉)의 괴물들은 특유의 오만함과 포식자의 독선 때문에 철저히 혼자 활동하는 것을 즐겼다. 나무가 빽빽한 유라시아의 깊은 숲이나 시야가 막힌 산맥 지대에서는 서로의 영역을 철저히 배척하며 고립된 사냥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곤 듬성듬성 자란 바오밥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아프리카의 대초원이었다.
이 거칠고 탁 트인 사바나에서, 고대의 흑마법으로 벼려진 악한 드루이드들의 안력(眼力)은 가히 초능력이라 부를 만할 정도로 기괴하고 압도적이었다. 이들의 뱀처럼 번뜩이는 동공은 단순히 멀리 보는 것을 넘어, 수십 리 밖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피의 냄새와 생명체의 열기마저 꿰뚫어 보았다. 밀집 지대가 아닌 이 넓은 초원이야말로 그들의 비정상적인 감각이 가장 극대화되는 완벽한 사냥터였다.
그렇기에, 빅토르의 검에 난자당한 곰의 동료들이 결코 멀지 않은 곳에 흩어져 있었을 가능성은 끔찍하리만치 높았다. 그들은 수십 리 떨어진 바위 그늘에서 짐승의 내장을 씹고 있었을 수도 있고, 힘없는 유목민들의 야영지를 맴돌며 살육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수도 있다. 무엇을 하고 있었든 간에, 죽어간 동족이 뿜어낸 방울뱀 같은 파장을 감지한 순간 그들의 초자연적인 시선은 일제히 한 곳을 향해 고정되었다.
초원 멀리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드루이드들의 망막에는, 죽은 곰의 사체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피 냄새와 함께 그곳을 막 떠나가는 절뚝이는 사냥꾼의 뒷모습이 아주 선명하고 또렷하게 맺히고 있었다. 무리를 짓지 않던 포식자들이, 동족의 피 냄새 앞에서는 순식간에 가장 교활하고 집요한 추적자로 돌변하여 소리 없이 사냥꾼의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서늘하고 건조했던 사바나의 바람이 점차 끈적한 습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듬성듬성 서 있던 바오밥나무들이 거대한 군락을 이루며 빽빽한 밀림의 장막을 예고하는 아프리카 중부의 초입. 지는 해를 등지고 말을 몰던 빅토르의 짐승 같은 후각에, 초원의 마른풀 냄새를 덮어버리는 기이할 정도의 짙은 살기와 누린내가 훅 끼쳐왔다.
불길한 직감이 척수를 타고 오르기 무섭게, 무성한 수풀 사이에서 세 줄기의 칠흑 같은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쏘아져 나왔다.
동족의 죽음을 공명(共鳴)으로 감지하고 미리 길목을 선점해 매복하고 있던 악한 드루이드들. 놈들은 사냥꾼과의 소수전에 가장 특화된 형태인 치명적인 암살자, '흑표범'의 형상으로 표변해 있었다.
"히이이잉-!"
가장 먼저 쇄도한 첫 번째 흑표범의 발톱이 말의 두꺼운 목줄기를 단숨에 물어뜯었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다 내지 못한 말이 피분수를 뿜으며 고꾸라졌고, 안장 위에서 튕겨 나간 빅토르는 흙바닥을 거칠게 뒹굴었다.
"크윽...!"
제대로 낙법을 칠 새도 없이, 곰에게 당했던 왼쪽 어깨가 땅에 처박히며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그러나 짐승들이 숨통을 끊으려 달려드는 찰나, 빅토르는 고철 같은 왼쪽 다리를 대지에 기형적으로 박아 넣으며 반사적으로 상체를 튕겨 올렸다. 그의 거친 오른손에는 이미 은탄환이 장전된 육중한 리볼버가 들려 있었다.
"타아앙-! 탕-!"
불을 뿜은 총구가 허공을 갈랐지만, 놈들의 반응 속도는 일반적인 맹수의 궤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표범은 허공에서 기괴할 정도로 유연하게 몸을 비틀어 은탄환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내더니, 좌우로 산개하여 빅토르의 시야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세 마리의 흑표범이 뿜어내는 짙은 어둠이 완벽한 삼각형의 포위망을 구축하며 절뚝이는 사냥꾼의 숨통을 옥죄기 시작했다.
"크르르륵... 늙은 사냥개 주제에, 제법 발버둥을 치는군."
짐승의 잇새로 흘러나오는 것은 단순한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인간의 이성을 간직한 채 살육을 즐기는 드루이드 특유의 소름 끼치는 조롱이었다. 첫 번째 표범이 안광을 번뜩이며 이빨을 드러냈다.
"곰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멍청이를 이겼다고 우쭐했나? 우리는 그 미련한 고깃덩어리와는 다르다. 네놈의 부서진 다리로는 우리 그림자조차 쫓지 못할 거다."
"말이 많은 짐승이군."
빅토르는 투박한 숨을 내쉬며 핏발 선 눈동자로 놈들의 궤적을 쫓았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첫 번째 표범이 정면에서 바람을 찢으며 도약했다. 빅토르는 등에 멘 대검을 뽑아 들 틈도 없이, 철축단애검(鐵軸斷崖劍)의 보법을 응용해 왼쪽 다리를 축으로 상체를 급격히 비틀었다.
찌이익-!
표범의 날카로운 발톱이 낡은 가죽 코트를 갈기갈기 찢었지만, 빅토르는 회피와 동시에 묵직한 권술(拳術)이 실린 강철 같은 주먹을 맹수의 턱뼈에 박아 넣었다.
빠각-!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첫 번째 표범의 고개가 흉측한 각도로 꺾이며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등 뒤에서 두 번째 표범이 덮쳐왔다.
빅토르가 황급히 허리춤의 대검 자루를 움켜쥐고 뒤로 휘둘렀으나, 짐승의 발톱이 한 뼘 더 빨랐다.
서어억-!
"크아아악!"
앞선 전투로 붕대를 감아두었던 왼쪽 어깨의 상처가 자비 없이 다시 후벼 파였다.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뼈가 드러날 정도의 참혹한 고통에 빅토르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하지만 빅토르는 물러서는 대신, 자신의 살을 내어주고 적의 뼈를 취하는 처절한 육탄전을 택했다. 그는 자신의 어깨에 발톱을 박아 넣은 두 번째 표범의 목덜미를 피투성이가 된 왼손으로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떨어져라, 이 악귀 놈아!"
짐승이 당황하여 몸부림치는 순간, 빅토르의 오른손에 들린 대검이 자비 없이 짐승의 복부를 꿰뚫었다. 내장이 쏟아지며 두 번째 표범이 즉사했지만, 짐승의 두꺼운 척추뼈에 대검이 깊숙이 박혀 단번에 뽑히지 않는 치명적인 딜레이가 발생했다.
"빌어먹을...!"
그 짧은 틈을 노리고, 턱뼈가 부서진 채 독기가 오른 첫 번째 표범과 틈을 엿보던 세 번째 표범이 동시에 앞뒤로 쇄도했다. 무기를 잃은 빅토르는 남은 리볼버를 들어 올렸으나, 세 번째 표범의 거대한 앞발이 그의 손목을 무자비하게 쳐냈다.
총이 허공으로 핑그르르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완벽한 무방비 상태. 텅 빈 빅토르의 가슴팍을 향해 첫 번째 표범이 끔찍한 송곳니를 들이밀며 덮쳐들었다. 이대로라면 심장이 뜯겨나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빅토르는 피하는 대신 미친 짐승처럼 앞으로 돌진했다. 그는 짐승의 입이 자신의 심장을 물어뜯기 직전, 자신의 굵은 왼팔을 표범의 아가리 속으로 거침없이 쑤셔 넣었다.
우두둑-!
"크아아아아악!"
강철 같은 이빨이 빅토르의 팔뼈를 으스러뜨리며 살점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팔이 통째로 잘려 나가는 듯한 참혹한 고통에 빅토르의 눈 실핏줄이 터져나갔지만, 그의 입가에는 악마 같은 미소가 번졌다.
"잡았다, 쥐새끼."
자신의 팔을 미끼로 짐승의 턱을 봉쇄한 그는,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맹수의 두 눈깔을 손가락으로 푹 찔러 후벼 팠다.
"캬아아악-!"
시력을 잃고 비명을 지르는 표범을 향해, 빅토르는 육중한 무릎과 권각을 내리꽂아 기어코 그 끔찍한 두개골을 짓이겨 숨통을 끊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마리. 그러나 빅토르의 상태는 처참했다. 어깨는 걸레짝처럼 찢어졌고, 왼팔은 뼈가 부러져 덜렁거렸으며, 원래부터 고철이었던 왼쪽 다리는 과다출혈로 인해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 후들거렸다.
세 번째 표범은 사냥감의 숨이 다해감을 직감하고, 가학적인 안광을 번뜩이며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위해 몸을 낮췄다.
"끈질긴 놈... 하지만 여기까지다. 네놈의 내장을 씹어 먹고, 네놈이 지키려던 모든 것을 저주해주마."
표범이 땅을 박차고 쏘아진 화살처럼 빅토르의 목줄기를 향해 날아왔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숨 막히는 속도와 살기.
빅토르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짐승의 궤적을 끝까지 노려보며 마지막 본능을 쥐어짜 냈다. 그는 땅에 쓰러진 두 번째 표범의 시체에 여전히 박혀 있던 대검의 자루를 뻗어 발로 강하게 차올렸다. 공중으로 튀어 오른 대검을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으로 낚아챈 빅토르는, 방어나 회피를 완전히 포기한 채 대검의 칼끝을 허공을 향해 꼿꼿이 치켜세웠다.
푸욱-!
가속도를 이기지 못한 세 번째 표범의 가슴팍이, 빅토르가 세워둔 대검의 날에 스스로 깊숙이 꿰뚫렸다. 짐승의 심장을 관통한 서늘한 칼날이 놈의 등 뒤로 무참히 뚫고 나왔다.
하지만 짐승이 쏘아진 맹렬한 관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칼에 꿰뚫린 채로 덮쳐든 흑표범의 거대한 턱이, 빅토르의 옆구리와 복부를 통째로 물어뜯으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커헉...!"
검붉은 피가 빅토르의 입에서 분수처럼 쏟아졌다. 내장이 끊어질 듯한 치명적인 관통상. 악한 드루이드 세 마리를 반쪽짜리 몸으로 모두 도륙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죽음과 다를 바 없이 끔찍했다.
세 번째 표범의 사체가 바닥에 쓰러지며 내뿜는 마물의 핏물과, 빅토르의 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피가 섞여 사바나의 흙바닥을 시커먼 웅덩이로 만들고 있었다.
대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위대한 사냥꾼의 두 눈이 서서히 초점을 잃어갔다. 치명적인 상처가 뿜어내는 죽음의 한기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빅토르는 찢겨진 가죽 코트 자락을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지만, 이미 육체의 한계는 끝이 나 있었다. 검붉은 노을마저 짙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침몰하던 그 순간, 피투성이가 된 빅토르 크로스의 거구는 차가운 대지 위로 무너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붉은 흙먼지가 날리던 아프리카의 지평선을 등진 빅토르의 여정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작열하던 태양의 열기가 사그라지고 지중해의 비릿하고 짠 바닷바람이 밀항선 밑바닥의 썩은 널빤지를 때릴 무렵부터, 사냥꾼의 핏속에 잠들어 있던 서늘한 감각은 점차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그는 동유럽의 험준하고 축축한 산맥들을 절뚝이는 다리로 묵묵히 넘었다. 남에서 북으로 북상을 거듭할수록 대기의 온도는 급격히 곤두박질쳤고, 하늘을 짓누르는 구름은 검붉은 빛깔에서 무거운 납빛으로 색채를 잃어갔다. 유목민의 푸른 베일(타겔무스트)과 얇은 가죽 코트는 이미 매서운 북풍을 견디지 못하고 찢겨나간 지 오래였다. 대신 그의 어깨 위에는 사냥한 야생곰의 두꺼운 털가죽이 눈보라를 막기 위해 무겁게 얹혀 있었다.마침내 빅토르의 발길이 당도한 곳은, 세상의 모든 온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흑한(極寒)의 땅이자 거대한 발테리아 제국의 심장부가 똬리를 틀고 있는 주도(主都),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였다.이곳의 겨울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생명체를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거대한 백색의 야수와도 같았다. 대기를 찢으며 몰아치는 시베리아의 눈보라는 수만 개의 미세한 유리 조각처럼 빅토르의 거칠어진 뺨을 난도질했다.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허연 입김이 수염 끝에 엉겨 붙어 고드름처럼 얼어붙었고,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이찬 얼음장 같은 공기는 기관지를 날카롭게 긁어댔다.무엇보다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는 빅토르의 망가진 육체에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과거 이곳 제국의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며 박살 났던 왼쪽 무릎 관절은, 영하의 기온 속에서 뼛속의 골수까지 얼어붙는 듯한 끔찍한 통증을 토해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서진 뼛조각들이 살을 찢는 듯한 마찰통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빅토르는 눈보라 속에서 짐승처럼 턱을 꽉 깨문 채 묵묵히 기형적인 발자국을 눈밭 위에 새겨 나갔다.잿빛 안개와 거센 눈보라 너머로, 이윽고 거대한 제국의 수도가 그 오만하고도 웅장한 위용을 드러냈
사바나의 붉은 흙바닥이 점차 하얗게 탈색되며 끝없는 모래의 바다로 이어지는 사막의 초입. 정오의 태양은 모든 수분을 증발시키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다.미세한 유리 조각 같은 모래알들이 사나운 열풍을 타고 날아와, 찢겨나간 빅토르의 복부와 어깨의 열상(裂傷) 위로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끓어오르는 모래밭 위로 아무런 가림막 없이 내던져진 탓에, 사막의 태양은 자비 없이 그의 남은 생명력을 바싹 말려버리고 있었다. 입술은 가뭄 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졌고, 고철 같은 왼쪽 다리는 이제 감각마저 상실해 버렸다.흐려지는 동공 위로 썩은 고기를 탐하는 사막 독수리 떼의 그림자가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모든 고통이 마비되고 지독한 갈증마저 잊혀갈 무렵, 빅토르는 이 핏빛 생애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죽음의 안식이 자신을 데려가려 함을 느꼈다.바로 그때였다. 열기로 기괴하게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뚫고 한 인영(人影)이 다가왔다.푸른 천으로 머리와 입술을 가린 채, 맑고 단단한 눈동자만을 빛내고 있는 젊은 여인. 생명의 흔적을 찾아 척박한 길을 횡단하던 유목 부족 '알 하리브'의 딸, 아미라(Amira)였다.그녀는 피비린내와 짐승의 악취가 진동하는 참혹한 광경을 발견하고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온몸이 찢겨나가 피투성이가 된 거구의 사내. 사막의 미신대로라면 악령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아미라의 맑은 눈동자에는 두려움보다 깊은 연민이 먼저 차올랐다. 그녀는 주저 없이 다가와 가죽 물통의 마개를 열었다."살아야 해요. 죽음에 굴복하지 말아요."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부드러운 이집트어 억양으로 속삭이며, 거칠게 갈라진 빅토르의 입술 위로 미지근한 물방울을 흘려보냈다.물 한 모금에 밴 광물질의 쓴맛. 그것은 메말라가던 빅토르의 세포를 억지로 찢어발기며 깨우는 날카로운 생명수였다. 아미라는 땀범벅이 된 채 가녀린 어깨로 짐승처럼 무거운 빅토르의 거구를 부축하고, 기어코 모래 언덕 너머의 오아시스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빅토
페테르부르크의 흑한(極寒)은 그저 온도가 낮은 것이 아니라, 피부 밑 혈관을 얼어붙게 만드는 폭력적인 기상 현상이었다. 네바 강의 살얼음을 깎아내며 불어온 칼바람이 황궁의 육중한 대리석 기둥을 때릴 때마다, 빙결된 거대한 석조 건축물은 둔탁하고 기괴한 마찰음을 토해냈다. 황금빛 돔과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조각들로 치장된 지상의 본성과 달리, 빅토르가 향한 황궁 가장 깊은 곳의 ‘황실 움브라 통제국(Umbra Control Bureau)’은 짙은 음습함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빛이 온전히 닿지 않는 화강암 계단에는 벽면에서 스며 나온 습기가 그대로 얼어붙어 시커먼 살얼음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탁한 가스등이 헐떡이며 내뿜는 매캐한 석탄 냄새와 오래된 양피지들의 묵은내, 그리고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비릿한 피 냄새가 환기되지 못한 채 묵직한 공기 속에 진득하게 녹아 있었다. 빅토르의 투박한 구두 굽이 얼어붙은 석재 바닥을 짓누를 때마다 울리는 파열음은, 이 거대한 지하 건축물이 살아 숨 쉬며 침입자의 온기를 착취하는 괴물의 내장처럼 느껴지게 했다. 어둠의 피조물들을 감시하고 사냥꾼들을 통제하는 제국의 은밀한 기관이었다.통제국의 수장이자 움브라 계 특별 관리관인 ‘바실리 카라조프(Vasily Karazov)’는 탁한 가스등 조명 아래서 거만한 표정으로 빅토르를 맞이했다. 빅토르는 그에게 어떠한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자루의 끈을 풀어 집무실의 매끄러운 탁자 위로 내용물을 쏟아냈다.툭, 데구르르.은탄환에 미간이 박살 난 채 흉측하게 일그러진 머리통 하나가 굴러나왔다. 재로 바스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특수 주술이 걸린 은가루를 잔뜩 뿌려둔, 볼코프 백작의 잘린 수급이었다. 바실리는 불쾌한 피비린내에 미간을 찌푸리며 비단 손수건으로 코끝을 가렸지만, 이내 서늘한 눈빛으로 수급의 이목구비와 수배 서류를 꼼꼼히 대조했다. 특유의 기형적인 송곳니와 야성의 골격. 동유럽 변방을 어지럽히던 움브라 계의 깡패, 볼코프 백작이 틀림없었다."수고했군, 추적꾼. 제국의 칙
유럽 대륙의 동쪽 끝, 문명의 따스한 불빛이 미처 닿지 못하고 짙은 안개와 톱니바퀴처럼 날카로운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변방의 땅. 그곳에는 한낮의 태양조차 제 빛을 발하지 못한 채 회백색 구름 뒤로 숨어버리는 척박하고 음산한 협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흑회색 절벽의 가장 높은 꼭대기, 마치 병든 대지에 박힌 거대한 야수의 송곳니처럼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거대한 성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풍파에 시달려 외벽 곳곳이 허물어지고, 검푸른 이끼와 가시넝쿨이 죽은 자의 혈관처럼 기괴하게 얽혀 있는 그 성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절벽 아래 웅크린 숲과 계곡 전체에 숨 막히는 공포를 흩뿌리고 있었다.본래 이 성의 주인이었던 오만한 인간 영주의 비명이 알현실의 대리석 바닥을 붉게 적시며 끊어진 지도 벌써 수백 년이 지났다. 굳게 닫힌 거대한 철문을 종잇장처럼 찢고 들어와 단숨에 왕좌를 빼앗은 새로운 주인은, 어둠의 세계 '움브라(Umbra)'에서 건너온 악귀, 볼코프 드라큘라 백작이었다.그는 고상한 귀족 흉내를 내며 와인잔에 피를 담아 마시는 여타 고위 악마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아한 주술 대신 짐승 같은 완력과 원초적인 폭력성으로 먹잇감을 짓밟는 무법자이자, 고스트 계의 깡패. 귀찮은 규율과 사냥꾼들의 눈을 피해 이 척박한 변방의 요새에 둥지를 튼 그는, 찢겨나간 인간 가문의 문장 위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밤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벼랑을 타고 내려오는 붉은 눈의 괴물이 되어 있었다.태양이 핏빛 노을을 거두고 뼛속까지 시린 한기와 함께 짙은 어둠이 계곡을 집어삼키는 시간. 죽은 듯 고요하던 성탑 꼭대기에서 거대한 박쥐 형상의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허공으로 몸을 던진다. 달빛조차 두터운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춘 칠흑 같은 심야, 비로소 볼코프 백작의 진짜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그는 움브라를 주름잡던 무법자라는 악명에 어울리지 않게, 사냥의 방식만큼은 철저히 은밀하고 야만적이었다. 귀족적인 최면으로 사냥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