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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 (2)

Author: 리사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4 15:49:09

"저희는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서 좋은 사람이 나타났다고요. 근데 그게 아니라."

"제 이름을 올리면 회사 값이 떨어져서요."

"예?"

"제 이름이 붙으면 그 회사는 재벌집 도련님 장난감이 됩니다. 기술로 평가받아야 할 회사가 소문으로 평가받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에서 기준 정할 때 점수가 깎이고요."

"그럼 저희를 위해서."

"제 몫을 위해서요."

숟가락을 내려놨다.

"착해서 그런 거 아닙니다. 그 회사가 커야 제가 벌거든요. 지금도 벌고 있고요."

유정호가 나를 한참 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우리 딸이 그러더군요. 이 학생은 누가 뭐라 해도 변명 한마디를 안 한다고."

"아빠."

"왜, 니가 한 말이잖니."

"밥 드세요. 좀."

"아빠 밥 먹고 있어."

"입으로 말고요."

옆에서 유채원이 사레들리자 박미경이 등을 두드려 주면서 동시에 나한테 물컵을 밀어 줬다. 이 집은 뭘 하나 밀어 주는 속도가 다들 빨랐다.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했다가 박미경한테 등을 떠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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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먼저 말하는 쪽 (2)

    차시현이 종이를 내려놓았다."이 회사, 올봄에 우리 학교 감지기 전부 갈아 준 데야.""알아.""그러니까 이 사유는 말이 돼. 낡은 거 치워 가는 김에 같이 실어 낸 걸로 보이거든.""그래서 아무도 안 세어 본 거고."차시현이 나를 봤다."출처가 어디야."아무 이름이나 대면 이 여자는 그 이름부터 확인하러 가는 사람이다."말 못 해.""말 못 한다고?""응.""……왜.""그것도 말 못 해."차시현이 볼펜 뚜껑을 딸깍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두 번 더 그러고 나서야 종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기분 나쁜 건 알지.""알아.""알면서 그러는 거네.""응.""……오늘은 넘어갈게. 오늘만."━━━━━━━━━━━━━━[차시현 — 판정 유보 → 공조( )]━━━━━━━━━━━━━━공조 뒤에 괄호가 하나 붙어 있었는데 안이 비어 있었다. 여태 이 창이 괄호를 열어 놓고 안을 비워 둔 적은 없었다.조건이 붙었다는 소리겠지. 뭐가 붙었는지는 저 여자도 아직 안 정한 모양이고.문제가 나온 건 이십 분 뒤였다."이상해."차시현이 종이를 형광등 쪽으로 들었다. 불빛에 승인란 도장 자국이 뒷면까지 비쳐 보였다."이거 시설과장 도장인데.""그게 왜.""이 사람 그 주에 학교에 없었어.""확실해?""내가 그 주에 이 사람 도장 받으려고 나흘을 쫓아다녔거든."차시현이 종이를 도로 내렸다."동아리방 배정 건이었어. 신입생 들어온 첫 주라 급했는데 결재가 안 나서, 시설과 가면 없고 전화하면 안 받고. 나흘째에 옆자리 사람이 그러더라. 수술받으러 가셨다고.""미리 좀 말해 주지.""내 말이."그러고는 종이를 다시 들어 형광등에 비춰 봤다."결국 그 건은 다음 주로 밀렸어. 동아리방 배정을 통째로 다시 짰어."날짜를 봤다. 그 봄, 개교 기념 무상 점검이 들어왔던 주였다."본인이 안 찍었네.""찍을 수가 없지. 그 주에 병원에 누워 있었으니까."그럼 남는 건 하나다."학교 도장은 어디 둬.""행정실 안쪽 캐비닛. 잠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먼저 말하는 쪽 (1)

    정하람은 화요일 아침 내내 아무것도 안 물었다.문자 한 통 없었고, 복도에서 마주쳐도 목례만 하고 지나갔다. 어제 식당에서 회사 이름을 짚어 놓고 이렇게 조용한 건 답을 포기한 게 아니라 혼자 다 적어 놨다는 뜻이다. 이 애는 확인이 필요할 때만 입을 연다. 입이 열렸을 땐 이미 결론이 나 있다.어깨가 셔츠 안에서 아직 따끔했다. 어젯밤에는 묻기도 전에 먼저 말해 본 사람이 하나 생겼다. 세라 씨는 학교 건까지 듣고도 더 안 물었고, 결재에 그 이름이 붙은 건 따로 빼 두겠다고만 했다. 해 보니 죽지는 않았다.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교실마다 의자 끄는 소리가 한꺼번에 났다. 그 소란 속에서 복도로 나가는 정하람을 따라가 불러 세웠다."어제 네가 짚은 회사 있잖아. 가온다인."정하람이 걸음을 멈췄다.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예상한 답이 예상한 순서로 나왔을 때 짓는 표정에 가까웠다."그 회사, 내가 아는 데야.""어디까지 아는데.""거기까지.""어제 나도 거기까지는 알았어. 그게 무슨 대답이야.""지금 내가 줄 수 있는 만큼이야."그 애가 나를 빤히 봤다. 복도 창으로 든 볕이 얼굴 절반에 걸려 있었고, 밤을 또 새운 티가 눈 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왜 갑자기 말해 줘. 어제는 밥이나 먹으라며.""어제 한 번 묻고 말았잖아.""안 물어보니까 말해 준다고?""네가 안 물으면 혼자 결론 내니까."정하람이 픽 웃었다."솔직해서 좋네.""솔직한 건 아니고 계산이야.""알아. 그래서 좋다고."그 애는 가방끈을 고쳐 메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아침보다 가벼웠다.학생회실 문 앞에서 삼 초쯤 서 있었다.3년 만이었다. 각서에 도장을 찍은 뒤로 저 여자한테 내 발로 걸어간 적이 없다. 늘 저쪽이 서류철을 들고 찾아왔고, 나는 앉은 자리에서 받았다.문 안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노크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자 차시현이 고개를 들더니, 손에 든 볼펜을 종이 위에 멈춘 채 그대로 굳었다. 책상에는 서류철이 두 무더기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내 이름으로 나갔다 (4)

    소파는 책상 맞은편 벽에 붙어 있었고, 문에서는 등받이만 보였다. 책상 등을 껐다. 불이 사라지자 통유리 야경만 남았고, 그 빛이 홍세라 얼굴 한쪽에만 걸렸다.책상에는 결재판 하나뿐이었다. 취한 척할 게 없는 날이다.홍세라가 블라우스를 어깨에서 흘려 내렸다. 속옷은 레이스가 없는 흰색이었다."오늘은 준비 안 했어요. 그 밤엔 입고 온 거였잖아요. 오늘은 퇴근 못 한 옷이에요.""나는 이게 더 좋은데.""……그런 말 하면 제가 뭘 하게 되는지 아세요? 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하는 거예요."'모른다는 말을 이 여자 입에서 처음 듣네.'소파에 앉히고 이마를 맞댔다. 입술은 닿기 전에 한 번 멈췄고, 먼저 움직인 건 이 여자였다.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가 길게 이어졌다. 위스키 맛이 안 났다. 이 여자 입술 맛을 오늘 처음 알았다.소파 가죽이 등 뒤에서 차갑게 울었고, 야경이 이 여자 어깨 위로 미끄러졌다. 숨이 섞이는 소리가 문 쪽으로 새지 않게 서로 입 안으로 삼켰다. 쪽, 하고 떨어졌다가 다시 붙는 소리만 낮게 남았다.속옷 위로 손을 올렸다. 천 너머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손바닥 아래에서 숨이 가슴을 밀어 올렸다."지금 어때.""따뜻해요. 손 닿는 데서 먼저 알고, 생각이 뒤에 와요.""그럼 생각은 오지 마."속옷을 위로 밀어 올렸다. 하얀 가슴이 야경 빛에 드러났고, 젖꼭지는 닿기도 전에 단단하게 서 있었다. 홍세라가 팔로 가리려다 말고 내렸다."……그렇게 보지 마요."가리는 대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귀 끝이 빨갰다.엄지로 한 번 스치자 어깨가 먼저 떨렸다. 고개를 숙여 그 끝을 입술로 물고 혀끝으로 한 바퀴 돌렸다.츕. 쪽."흣……"소리가 나자마자 홍세라가 손등으로 제 입을 막았다. 막은 손 사이로 숨이 샜다. 반대쪽을 손가락으로 굴리자 허리가 소파에서 살짝 떴다."소리 내도 돼요?""당직실 라디오가 덮어.""안 덮여요. 문이 열려 있잖아요."홍세라가 내 어깨에 이를 댔다. 셔츠 위로 깨무는 힘이 느껴졌다.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내 이름으로 나갔다 (3)

    월요일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주작 지부 최상층 엘리베이터가 열렸다.카펫이 발소리를 먹었다. 복도 끝 당직실에서 라디오가 작게 나왔고, 두 사람이 졸린 목소리로 뭔가 얘기하고 있었다. 층 전체에서 불이 켜진 곳은 거기랑 집무실 문틈이 전부였다.기숙사에서 종이 석 장을 한참 보다가 폰을 집었다 놨다. 전화로 할 얘기가 아니었다. 안에 있는 놈이 이 길드 회선을 어디까지 듣는지 모른다. 게다가 이 여자는 내일 아침에도 결재판을 열고, 거기서 가온다인 이름을 나보다 먼저 만날 수 있다. 혼자 찾아낸 이름과 내가 먼저 건넨 이름은 다르다. 평소처럼 굴라고 해 놓고 밤에 직접 올라온 값은 오늘 내가 낸다.집무실 문은 열려 있었다. 책상 등 하나가 켜져 있었고 뒤쪽 통유리에 야경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홍세라가 결재판을 펴 놓고 서명을 하다가 모자를 벗은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지시대로 사무실에 있어요. 창고 근처엔 안 갔고요.""알아.""그럼 왜 오셨어요.""말할 게 있어서."홍세라가 펜을 내려놨다."물어보는 쪽이 아니고요?""오늘은 내가 말하는 쪽이야."책상 모서리 뒤, 문에서 안 보이는 사각으로 가서 섰다."세 군데야. 주작이랑 그룹, 이미 아는 둘에 학교가 하나 더 붙었어. 학교 쪽 서류 제공자 칸에 가온다인이 찍혀 있고, 빠진 건 거기도 세 개일 거야."홍세라가 펜 뚜껑을 돌려 닫았다."주작이랑 본가랑 가온다인이네요. 전부 대표님이 지나간 자리고요. 그걸 저한테 말하는 거예요? 제가 묻기도 전에?""응. 이번엔 내가 져.""그럼 제 일은 하나네요. 내일 결재에 그 이름 붙은 게 올라오면 제가 먼저 받아서 따로 빼 둘게요.""티 안 나게.""네. 그럼 얘기는 끝났고요.""끝났어.""그럼 이제 확인이에요, 아니면."어제 이 여자가 나한테 한 질문이었다. 지시예요, 아니면. 같은 문형을 돌려줄 때는 입꼬리가 먼저 올라간다."아니면."홍세라가 결재판을 덮고 서류를 서랍에 넣었다. 열쇠는 안 잠갔다."장부는 두고 왔어요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내 이름으로 나갔다 (2)

    ━━━━━━━━━━━━━━[윤이서 — 혐오(불안정) → 확인 중]━━━━━━━━━━━━━━혐오 두 글자가 괄호까지 통째로 밀려나 있었다. 3년을 바위처럼 안 움직이던 자리였다.새로 들어온 게 호감 같은 것도 아니고 확인 중 세 글자라는 게 이 애다웠다."그럼 물을게.""어.""그날 능선에서, 왜 위로 올라갔어."수업 종이 울렸다."늦었다.""야.""다음에.""……너 진짜."등 뒤에서 뭔가 더 들린 것 같은데 안 돌아봤다. 돌아보면 대답할 것 같아서.점심때 정하람이 식판을 들고 먼저 와 앉아 있었다.요즘은 자리 잡는 순서가 바뀌었다. 예전엔 내가 먼저 가서 그 애 자리를 뺏었는데, 이제 저쪽이 먼저 와서 내 몫까지 자리를 잡아 놓는다. 오늘은 아예 국그릇 두 개가 놓여 있었다."이거 뭐야.""네 거.""내가 국만 먹는 건 어떻게 알았어.""두 달 봤으면 알지.""국 말고 다른 것도 봤겠네.""봤어. 안 말해 줄 건데.""왜.""내 거니까."종이를 한 장 밀어 왔다. 손으로 그린 표였고, 세로줄이 넷이었다. 마지막 줄만 비어 있었다."신고하고 들어온 건 세 건이라고 했잖아.""어.""하나 더 있었어. 번호는 있는데 이름이 안 나와.""명단에 없어?""없어. 수입 명단엔 그 세 건뿐이야. 이건 신고번호만 있고 이름 칸이 다른 서식으로 넘어가.""다른 서식.""응. 사흘 봤는데 못 찾았어."숟가락으로 국을 두어 번 저었다.회사 이름이 안 붙는 건 수입자가 회사가 아닐 때다. 회사가 아니면서 이런 걸 들여올 수 있는 데가 몇 없다. 관공서, 병원, 그리고.입학하고 얼마 안 돼서 이 학교 감지기를 통째로 갈면서 서식을 하나 본 적이 있다. 교육 기자재. 수입 명단에 안 잡히고 따로 관리된다."학교 아니야?"정하람 숟가락이 멈췄다."……어?""교육 기자재로 들어오면 수입자 칸이 안 붙어. 서식이 달라.""그걸 너는 어떻게 알았어?""먹으면서 들어.""그거 대답 아닌데."정하람이 종이를 도로 당겨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내 이름으로 나갔다 (1)

    일요일 아침, 책상에 종이를 나란히 폈다.왼쪽은 어젯밤에 받아 온 그룹 창고 목록이고, 가운데는 주작이 뽑아 준 반출 대장이었다. 오른쪽은 비어 있었다. 아직 없는 세 번째 자리였다.두 장을 겹쳐 놓고 보니 그림이 더 선명했다. 들어온 날짜는 둘 다 꼼꼼했고, 항구도 창고 번호도 담당자 도장까지 다 찍혀 있었다. 그러다 나간 자리에서만 종이가 뚝 끊겼다. 실수로 빠뜨린 거면 앞뒤가 같이 어수선해야 하는데 앞은 지나칠 만큼 단정했다.커피 물을 올려놓고 기다리는 동안 창가에 섰다가 오랜만에 그걸 열어 봤다.━━━━━━━━━━━━━━[ 한도윤 — 퇴장 예정 ]남은 시간 : D-936━━━━━━━━━━━━━━열여드레 만이었다.방어전 그날 밤에 구백서른이었다. 그 뒤로 스물여덟 밤이 지나갔으니 스물여덟이 깎였을 거고, 그런데 지금 여섯이 더 붙어 있다. 한 달 동안 서른네 날을 벌었다는 얘기다.숫자만 보면 잘한 달이었다. 학생회장이 서류철을 덮었고, 천재가 옆자리에 앉았고, 회귀자가 나를 일으켰고, 어떤 집 식탁에서 반찬 세 통이 나왔다. 사람으로 치면 다섯 명쯤 움직였다.그래서 엿새.'이거 벌이가 영 시원찮은데.'두 달 전에는 하루가 붙는 것도 종이에 적어 뒀다. 지금은 서른네 날을 벌어 놓고 며칠인지 안 세고 있다. 자릿수가 커지면 원래 그렇게 된다. 통장도 그랬고.물이 끓는 소리가 나서 돌아섰다.근데 열여드레를 안 열어 봤다는 게 좀 걸렸다. 시시하다고 안 보다가 새는 자리를 놓친 적이 전에 한 번 있었다.폰이 먼저 울렸다."안 잤어?""자다 깼어요. 세 시간쯤.""그럼 잔 거네.""세 시간이 자는 거예요?""안 자는 것보단 잔 거지.""기준이 참 후하시네."목소리가 잠긴 걸 보니 진짜로 세 시간만 잔 모양이었다. 뒤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어제 그거, 밤새 다시 봤어요.""뭘 봤는데.""작년 것부터 전부요. 반출 신청서만 따로 뽑아서 태웠다는 확인서랑 하나씩 맞춰 봤어요.""몇 장 비어.""세 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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