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음이의 이름이 정해지자 해준이는 매일 밤 내 배에 대고 이야기를 했다.
유치원에서 넘어진 일, 간식으로 먹은 것, 아빠가 회사 통화에서 무서운 목소리로 “숫자가 안 맞아”라고 했던 일까지 전부 일러바쳤다.“강해준.”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리면 해준이는 내 등 뒤로 숨었다. 태윤이 퇴근할 무렵이면 배 속의 아이도 자주 움직였다. 어느 밤, 나는 넥타이를 푸는 그의 손을 잡아 배 위에 얹었다. 손목에는 시계 자국이 남아 있었고 소매에서는 바깥의 찬 공기 냄새가 났다. 이음이가 세게 찼다.“나한테는 봐주는 게 없군.”“아빠를 닮았나 보지.”“그런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먼저 엄마를 부를지 아빠를 부를지 묻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라고 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 처음 듣는 울음소리가 분만실을 채웠다. 작고 붉은 아이가 내 가슴에 놓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따뜻한 냄새가 났다. 갓 태어난 이음이의 손가락과 손톱은 건드리기 겁날 만큼 여렸다. 울음은 가늘면서도 생각보다 힘찼다.“이음아.” 이름을 부르자 울음이 잠깐 멎은 것 같았다. 태윤은 곁에 서서 딸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안아 주라고 하자 조산사에게 팔의 모양을 배운 뒤 스스로 손을 내밀었다.“이렇게 하면 됩니까?”“네. 머리를 받쳐 주세요.” 작은 몸이 그의 품에 들어갔다. 태윤은 숨을 참은 채 서 있다가 어깨에 힘을 빼라는 말을 듣고 팔꿈치를 조금 내렸다. 해준이를 처음 안았을 때에도 이렇게 놀랐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아이의 머리가 편히 놓일 때까지 제 손으로 자세를 고쳤다.“이음아. 처음 만나네. ……내가 아빠야.” 아기는 계속 울었다. 지금 자기소개를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니, 앞으로 오래 볼 사이인데 인사는 해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웃다가 눈물이 났다. 출산 때 움켜쥐어 잔뜩 구겨진 그의 소매가 딸의 뺨에 닿았다. 조산사가 익숙해 보인다고 칭찬하자 태윤의 얼굴에 잠깐 자신감이 떠올랐다.“둘째니까요.”“첫째 때는 침대 앞에서 두 시간이나 굳어 있었으면서.” 아기를 검사받으러 보내고 그는 다시 내 곁에 왔다. 어디 아픈 데 없느냐고 묻기에 피곤하다고만 했다. 눈이 감기려는 순간 손끝을 움직였더니 바로 잡아 주었다.“고마워, 서린.” 낮은 목소리가 한 번 더 나
예정일을 일주일 앞둔 밤,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내려왔다. 시계 초침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태윤은 내가 빈자리를 남겼다는 걸 알아챘는지 곧 따라 내려와 담요를 가져왔다.“깨웠어?”“옆이 비었는데 모를 리가.”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두 번째라 조금 덜 무서울 줄 알았다는 말이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태윤도 그렇다고 했다. 해준이를 낳을 때는 내가 두려움을 하나 말하면 그가 준비할 일 열 가지를 늘어놓곤 했다. 오늘은 등을 감싼 손만 따뜻했다.“이음이가 아빠를 닮으면 큰일이겠어.”“해준이랑 둘이 널 두고 다투겠군.” 진지한 얼굴이 우스워 웃으려는 순간 배 안쪽이 조여 왔다.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태윤은 곧바로 병원에 전화하려 했지만, 나는 소매를 잡아당겼다.“잠깐만. 얼마나 갔는지 봐 줘.” 수십 초 만에 통증이 가라앉았다. 가진통일 수도 있다고 하자 그가 휴대전화에 시각을 적었다. 나는 회사 일보다 꼼꼼하다고 놀렸다.“회사는 날 대신할 사람이 있어.” 태윤은 다음 통증을 기다리며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아프지 않으니 먼저 잠이 밀려왔다. 다시 아프면 깨울 테니 옆에 있어 달라고 하자, 그제야 휴대전화를 넣었다. 내밀기 전에 바지에 한 번 닦은 손은 여전히 조금 젖어 있었다. 침대에 누울 때까지 그는 등을 받쳐 주었다. 거실 창밖으로 차 한 대가 지나가고, 냉장고가 내던 낮은 소리가 멎었다. 그는 그 소리까지 듣고 있는 사람처럼 등을 꼿꼿이 세웠다. 나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ld
이음이의 이름이 정해지자 해준이는 매일 밤 내 배에 대고 이야기를 했다. 유치원에서 넘어진 일, 간식으로 먹은 것, 아빠가 회사 통화에서 무서운 목소리로 “숫자가 안 맞아”라고 했던 일까지 전부 일러바쳤다.“강해준.”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리면 해준이는 내 등 뒤로 숨었다. 태윤이 퇴근할 무렵이면 배 속의 아이도 자주 움직였다. 어느 밤, 나는 넥타이를 푸는 그의 손을 잡아 배 위에 얹었다. 손목에는 시계 자국이 남아 있었고 소매에서는 바깥의 찬 공기 냄새가 났다. 이음이가 세게 찼다.“나한테는 봐주는 게 없군.”“아빠를 닮았나 보지.”“그런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먼저 엄마를 부를지 아빠를 부를지 묻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라고 했다. 매일 가르칠 생각이었다. 해준이가 먼저 가르칠 수도 있다고 하자, 태윤은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린 듯 이마를 찌푸렸다. 배 속에서 또 발길질이 왔다. 어느 날 태윤은 해외 지사 수치를 잘못 읽어 회의 중 부하 직원에게 정정받았다는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해준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빠도 틀려?”“그럼.”“미안하다고 했어?” 잠깐의 침묵 끝에 태윤이 대답했다.“……했어.”“그러니까 너도 틀리면 숨기지 마.”“아빠도.” 아들에게 한 말을 되돌려 받자, 태윤은 내 배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이음아, 너한테는 다른 얘기를 해야겠다.” 해준이가 옆에 와서
검진실의 푸른빛이 강태윤의 얼굴에 닿았다. 의사가 초음파 화면을 가리키며 웃었다.“딸이에요. 지금까지는 아주 건강해 보입니다.” 태윤은 무릎 위에서 깍지 낀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말이 없기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딸이라서 싫어?”“그 반대야.” 그는 봉투 밖으로 비죽 나온 초음파 사진을 만지다가 손을 멈췄다.“해준이처럼 안아도 되는 거지?”“아기인데 당연하지.”“딸이잖아.”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를 벌써부터 어려워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의 걱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남자가 접근할 거라고, 열여덟 해쯤은 금방 지나간다고 했다. 그날 저녁 동생이 생긴다는 말을 들은 해준이는 두 팔을 벌려 아기가 얼마나 작을지를 보여 주더니 씩씩하게 말했다.“내가 지켜 줄 거야!”“네가?”“응. 난 크니까.” 태윤이 아들의 두 팔 사이에 자기 손바닥을 넣자, 해준이는 더 작아야 한다며 손을 모았다.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둘을 지켜봤다. 딸을 제대로 안을 수 있을까 두려워하던 사람이 해준이의 설명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그날 밤 태윤은 여학교가 나을지까지 따졌다. 남녀공학에는 남자애들이 있다고 하기에, 나는 세상 어디에나 남자는 있다고 답했다. 먼저 기저귀와 밤잠부터 생각하자고 했지만, 그는 창밖의 어두운 정원을 보며 중얼거렸다.“언젠가 집을 떠나도, 방은 남겨 둘 거야.” 유리에 비친 얼굴이 잠깐 쓸쓸해 보였다. 해준이가 자기 방
임신 후기가 되자 몸을 굽히는 일도 힘들었다. 어느 아침, 떨어뜨린 숟가락을 주우려는데 해준이가 식탁 밑으로 들어가 먼저 꺼냈다.“엄마, 내가 할게. 나 다 컸잖아.”“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나는 의자에 앉아 아이의 뺨에 붙은 빵 부스러기를 떼어 주었다.“해준이도 엄마한테 해 달라는 거 있으면 말해. 앉아서 안아 주는 건 할 수 있어.”“다 컸는데도?” 양팔을 벌리자 아이는 잠깐 복도를 보더니 내 무릎에 옆으로 올라앉았다. 배를 누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커피를 들고 들어온 태윤이 말했다.“나도 안아 달라고 할 때가 있는데.”“말하면 되잖아.”“그럼 말하면 해 줘?” 해준이가 깔깔 웃었다. 그날 밤에는 아이가 잠들기 전 갑자기 울었다.“나 아기 싫어. 엄마 아빠가 아기만 좋아하잖아.” 태윤이 말하려는 걸 내가 소매를 잡아 막았다. 해준이에게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무릎으로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는 동안 아이는 한참 울었다. 울음이 잦아들자 내 배를 한 번 만졌다.“그래도 조금은 와도 돼.”“응.” 나는 웃거나 더 설득하지 않았다. 다음 날 해준이는 어제 일을 잊은 듯 시리얼을 먹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둘이 쿠키를 만들자고 하니 곧장 좋다고 했다. 반죽을 만지느라 손과 옷이 밀가루투성이가 됐지만, 첫 번째로 구운 건 아빠 접시에 올려놓았다. 귀가한 태윤이 별 모양인지 알아보기 힘든 쿠키를 오래 바라봤다.“안 먹
계절이 한 번 바뀌고 배가 제법 불렀을 무렵, 해준이가 부쩍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혼자 하던 옷 갈아입기도 해 달라고 했고, 밥을 떠먹여 달라며 입을 벌렸다. 밤에는 자기 베개를 안고 우리 침실로 왔다. 욕실에서 태윤과 함께 씻던 어느 날, 작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아기 오면 엄마, 나 필요 없어?” 수건을 접던 손이 멈췄다.“누가 그런 말을 했어?”“아무도. 엄마가 자꾸 아기 얘기만 해.” 진료 일정이나 몸 상태를 말하는 횟수가 늘어난 건 사실이었다. 나에겐 준비할 일이었지만 해준이에겐 빼앗기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몰랐다. 목욕을 마친 아이가 내 무릎에 올라왔다. 예전보다 무거워진 몸을 안고 젖은 머리카락에 뺨을 댔다.“동생이 와도 해준이가 필요 없어진다는 일은 없어.”“진짜?”“진짜.” 태윤도 옆에 앉았다.“난 네가 없으면 곤란한데. 아기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거든. 네가 나보다 선배야.”“아빠 아기 무서워?”“응, 무서워.” 망설임 없는 대답에 해준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태윤은 젖은 앞머리를 넘기는 척하며 잠시 눈가를 가렸다. 그날 밤 아이가 잠든 뒤, 나는 해준이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챘다고 했다. 태윤도 그랬다고 답했다. 가족이 늘면 지킬 사람이 한 명 더 생긴다고만 생각했단다. 하지만 해준이에게는 내 무릎과 잠들기 전의 시간, 아빠의 시선을 나눌 누군가가 오는 일이었다. 다음 날 태윤은 출근 전에 아이 방 바닥에 앉아 블록을 쌓았다. 해준이가 회사에 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