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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몇 걸음입니까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3 11:10:00

눈이 녹자 전쟁이 다시 움직였다.

루엔은 눈 녹기 전 이른 봄에 열아홉 살이 되었다. 생일 아침엔 참호 뒤 천막에서 보관소 장부를 맞췄다. 코넬이 와서 「대충 축하한다」고 했고, 루엔은 「정확히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지난해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둘 다 그걸 알았다.

보름 뒤 레오폴트가 참호에서 나왔다.

한 해 반 동안 마르케스군이 틀어박혀 있던 국경 성채. 링겐 고개 발치, 가을 첫머리에 빼앗긴 베스트리아의 성. 이번엔 되찾을 차례였다. 지난여름 내내 짠 투석기 넷이 소달구지에 실려 성채 앞 들판으로 나왔다.

*

첫 공성 회의는 성채에서 오 리 떨어진 언덕 천막에서 열렸다.

탁자 위에 성채 그림이 있었다. 여러 해 전 베스트리아 기사들이 그린 것. 성벽 둘레, 탑 여섯, 성문 하나.

“적 전초는 성문 앞 개울 건너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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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색탑의 수학자   125화. 하늘의 무게

    한 해 장부의 마지막 장에 칸이 다섯 있었다.클라리사가 그은 칸이었다. 은행 장부도 상단 장부도 아닌, 그녀가 따로 매는 작은 장부. 제목은 탑. 칸마다 탑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한 낱말씩만 써.” 클라리사가 펜을 내밀었다. “길게 쓰면 안 읽어.”루엔은 적색탑 칸부터 채웠다.같이 일함.디트마르가 불 마법사들을 데리고 공방 가마 앞에 서는 날이 이제 한 달에 열흘이 넘었다. 원기를 녹인 뒤로는 더 잦았다. 적색탑 이름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적색탑 불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공방 장부에 적혔다.청색탑 칸. 빚진 사이.“빚?” 클라리사가 눈썹을 올렸다.“뱅크런 때 금을 빌렸습니다. 몰수 때는 장부를 빌렸습니다. 서로 빚이 있습니다. 서로 갚습니다.”황색탑 칸. 판별 도구.오틸리에는 한 해 미루자던 후원 계약을 거두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 끝에 한 줄을 더 적어 보냈다. 판별 도구 삯은 후원금과 따로 셈할 것. 황색탑 유리 공방은 이번 겨울 견본판과 확대 유리를 삼백 벌 넘게 만들었다.검은탑 칸. 세는 탑.모르벤의 기록 대행은 영지 스물을 넘었다. 흉년, 불, 돌림병, 말에 차인 사람. 검은탑 저주사가 이제 표를 들고 영주들 앞에 섰다.마지막 칸. 백색탑.루엔은 펜을 든 채 오래 있었다.클라리사가 옆에서 기다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적이라고 써.”“적이라고 쓰면 셈이 끝납니다.”“그럼 뭐라고.”루엔은 적었다. 셈하는 중.클라리사가 그 칸을 보았다. 판결문 둘째 줄. 세 해짜리 대표 자리. 재판정 벽 위에 섰다가 꺼진 푸른빛과 보랏

  • 무색탑의 수학자   124화. 둥근 것이 가장 적다

    왕도 방어 결계는 성벽을 따라 서 있었다.성벽은 반듯하지 않았다. 몇백 년 동안 도시가 커질 때마다 한 토막씩 덧대 쌓았다. 모서리마다 튀어나온 망루, 강 쪽으로 움푹 들어간 자리, 동문 밖으로 삐죽 나간 새 성벽. 결계는 그 성벽 위로 곧게 솟아올라 높은 데서 평평한 지붕으로 덮였다. 위에서 보면 들쭉날쭉한 상자였다.그 상자를 궁정 마법사 여덟이 지켰다. 넷씩 번갈아 밤낮으로. 전쟁 때는 여덟으로 모자라 황색탑과 백색탑에서 사람을 빌렸다.왕 레지날드 2세가 화해 뒤 루엔에게 처음 맡긴 일이 그 결계였다.“여덟이 지키는데 늘 얇소.” 왕이 말했다. “더 두껍게 하려면 스물이 있어야 한다더군. 짐은 스물을 먹일 금이 없다.”“두껍게 하지 않고 작게 하겠습니다.”“작게? 도시를 줄이란 말이냐.”“도시는 그대로 두고, 결계의 겉넓이를 줄이겠습니다.”*루엔은 궁정 마법사들을 공방 마당으로 불렀다.여덟 가운데 넷이 왔다. 그중 하나가 겨울 축일 연회에서 생일 내기를 걸었던 황색탑 출신 마법사였다. 대표 선거 때 카시미르에게 손을 들었던 사람. 그는 마당에 놓인 물건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비눗물 대야. 그리고 가는 쇠줄로 엮은 틀 몇 개. 네모 상자 틀, 들쭉날쭉한 별 모양 틀, 둥근 고리.“비누로 결계를 가르치겠다는 거요?”“비누가 먼저 셈을 합니다.”루엔은 빨대로 비눗방울을 하나 불었다. 방울이 마당 위로 떠올랐다. 둥글었다.“비눗방울은 늘 둥급니다. 네모로 불어도, 별 모양 틀로 불어도, 떠오르면 둥글어집니다.”“원래 그렇소.”&l

  • 무색탑의 수학자   123화. 원기를 훔친 밤

    원기고 자물쇠는 새벽에 부서진 채로 발견되었다.조폐청 뒤뜰 돌집. 쇠문 두 겹 가운데 바깥 문은 멀쩡했다. 안쪽 문 자물쇠가 쇠망치로 떨어져 나가 있었다. 선반 위 표준 근 원통은 제자리에 있었다. 그 옆 표준 척 막대 자리가 비어 있었다.새 조폐청장이 루엔을 부르러 왔다. 셈판을 옆구리에 낀 채로. 얼굴이 하얬다.“근은 두고 척만 가져갔습니다.”루엔은 빈 선반을 오래 보았다. 막대가 놓였던 자리에 먼지가 없었다. 그 둘레에만 얇게 앉아 있었다.“가져간 사람은 척만 필요했던 겁니다.”새 조폐청장이 셈판 알을 하나 튕겼다. “문지기 둘이 어젯밤 술 한 동이를 선물로 받았답니다. 보낸 이 이름은 없고.”“술 한 동이 값이 얼마입니까.”“은화 셋.” 새 조폐청장이 루엔을 보았다. 무엇을 셈하는지 알아챈 얼굴이었다. “원기 값을 은화 셋으로 본 사람이군요.”*사흘 뒤 귀족 회의에서 막대가 나왔다.동쪽의 젊은 백작 하나가 들고 왔다. 란츠 백작의 조카였다. 이번 가을 표준 척 칙령에 끝까지 손을 들지 않았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 그는 흰 쇠 막대를 비단에 싸 들고 회의실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원기를 우리가 거둬 들였소.”회의실이 술렁였다. 왕이 턱을 괴었던 손을 내렸다.“거둬 들였다.” 왕이 되풀이했다.“루엔 하르트가 새긴 척은 틀렸소.” 젊은 백작이 막대를 탁자에 눕혔다. 막대 한쪽 끝의 가는 금 옆에 새 금이 하나 더 그어져 있었다. 원래 금은 반들반들하게 문질러 지워져 있었다. “우리 동쪽 옛 자 셋에 대 보니 손톱 반이 모자랐소. 세상 둘레를

  • 무색탑의 수학자   122화. 사천만분의 일

    공방 이층 긴 탁자 위에 막대 하나가 놓였다.그냥 참나무 막대였다. 눈금은 없었다. 루엔은 그 옆에 공방 쇠 자를 두고, 공방 사람들과 하겐의 여섯을 탁자 둘레에 세웠다. 열두 사람.“이 막대 길이를 재십시오. 한 사람이 한 번씩.”열두 사람이 차례로 쟀다. 쇠 자를 대고, 눈금을 읽고, 밀랍판에 적었다. 값이 다 달랐다. 크게는 아니었다. 손톱 두께 안쪽에서 오르락내리락.“이번엔 한 사람이 네 번씩 재서, 네 값을 더해 넷으로 나누십시오.”열두 사람이 다시 쟀다. 네 번씩. 나눈 값 열둘을 칠판에 적었다. 아까보다 가까이 모였다. 흩어진 폭이 반쯤.“열여섯 번씩.”누군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쟀다. 한낮이 넘었다. 값 열둘이 또 가까워졌다. 아까의 반. 처음의 넷에 하나.“마지막입니다. 백 번씩.”하겐이 떨리는 왼손을 들었다. “백 번이면 해가 지오.”“집니다.”해가 졌다. 공방에 등이 켜졌다. 열두 사람이 백 번씩 잰 값이 칠판에 올라갔다. 거의 한 줄로 섰다. 흩어진 폭이 처음의 열에 하나.루엔이 칠판 앞에 섰다.“네 번 재면 흔들림이 반. 열여섯 번이면 넷에 하나. 백 번이면 열에 하나. 재는 횟수가 네 배가 될 때마다 흔들림이 반으로 줄어듭니다.”공방 막내가 팔을 주무르며 물었다. “그럼 만 번 재면 백에 하나요?”“예.”“그럼 왜 만 번 안 해요?”“팔이 떨어집니다.” 루엔이 말했다. “그리고 흔들림은 줄어도, 지난여름 사슬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건 만 번을

  • 무색탑의 수학자   121화. 숨긴 숫자

    두 조의 공책이 한 탁자에 모인 건 한여름이었다.북쪽 조 공책 열한 권. 테오의 글씨. 하르트령 북쪽 끝 기점에서 왕도 남문 기선까지. 남쪽 조 공책 아홉 권. 시몬 라크루아의 글씨. 왕도 남문에서 남쪽 곶까지.지난해 초여름에 떠나 여름 둘, 겨울 하나가 걸렸다. 루엔이 처음 잡은 두 해보다 조금 짧았다.테오는 북쪽에서 돌아온 날 공방 바닥에 누워 한나절을 잤다. 일어나서 빵 두 개를 먹고, 공책 열한 권을 탁자에 쌓았다. 그리고 한 권씩 루엔 앞으로 밀었다.“쪽 번호 빠진 거 없어. 산성 이후로 깃발도 안 바꿨어.”수염이 턱을 덮고 있었다. 테오는 공책 맨 위 권을 톡톡 쳤다.“북쪽 끝 기점은 하르트령 성벽 밖 바위에 박았어. 쇠 못 하나에 줄 새김. 너희 형이 와서 보더니 대충 거기쯤이면 되지 않냐더라. 그래서 대충이 뭔지 한 시간 설명했지.”“형은 뭐라고 했습니까.”“너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 놈이 하나 더 생겼다고.”시몬은 사흘 뒤에 왔다. 말없이 고개를 한 번 숙이고, 공책 아홉 권을 탁자에 놓았다. 표지가 반듯했다. 모서리 하나 접힌 데가 없었다.*루엔은 셈을 둘로 나눴다.북쪽 토막. 삼각형으로 이은 거리, 그리고 두 끝에서 잰 북극성 높이의 차. 북극성이 한 칸 낮아질 때마다 땅 위로 몇 리를 걸었는지.남쪽 토막. 같은 셈.세상이 완전한 공이라면 두 값은 같아야 했다. 허리가 조금 불룩하다면 허리에 가까운 남쪽이 아주 조금 짧아야 했다. 비르케의 진자가 말해 준 만큼. 아주 조금.두 값이 나왔다.남쪽 값이 북쪽보다 이백오십에 하나쯤 짧았다.루엔은 셈을 다시 했다. 같았다. 테오에게 따로 하게 했다. 같았다.

  • 무색탑의 수학자   120화. 나라 밖 금고

    클라리사는 목록을 세 번 더했다.첫 번째는 루엔 식으로 줄을 그어서. 두 번째는 셈판으로. 세 번째는 끝자리만 따로 모아서. 세 값이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종이는 한 장이었다. 맨 위에 루엔의 글씨. 하르트 은행 금고, 왕국 밖. 그 아래 두 줄.청색탑 항구 금고. 금화 몇 닢.살렌 상관 금고. 금화 몇 닢.그리고 맨 아래 한 줄. 이 두 금고는 폐하의 칙령이 닿지 않습니다. 왕도 금고를 가져가셔도 은행은 문을 닫지 않습니다.“이걸 폐하께 보낸다고.” 클라리사가 말했다. “협박으로 읽으시면.”“협박이 아닙니다. 알려 드리는 겁니다. 은행이 안 닫힌다는 걸. 은행이 닫히면 폐하가 다음에 빌릴 곳이 없습니다.”“폐하는 그렇게 안 읽으실걸.”“그래서 조용히 보냅니다. 광장에 붙이지 않고.”클라리사는 한참 목록을 보았다. 그러다 여백에 작게 적었다.검산: 클라리사 보움.열네 살 때 루엔 장부 여백에 처음 적힌 그 줄이었다. 그때는 루엔이 적었다. 이번엔 그녀가 제 손으로 적었다.“틀리면 나도 같이 틀린 거야.”*아침에 디트마르가 사무소에 들렀다. 재판 소식을 듣고 적색탑에서 건너온 참이었다.“왕의 빚을 까.” 디트마르가 탁자를 짚었다. “너 알잖아. 폐하가 누구한테 얼마 빌렸는지. 은행 장부로 반은 보이지. 그걸 재판정에서 읽으면 사람들이 알 거야. 왕이 왜 이단 칙령을 냈는지. 금이 필요해서라고.”“압니다.”“그럼.”“빚 증서는 빌려준 사람과 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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