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그 남자 앞에서도 지금처럼 흔들릴 수 있어?”
숨이 멎었다.
강태준의 손끝은 내 턱을 가볍게 붙잡고 있었다.
억지로 힘을 준 것도 아닌데,
나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 눈빛 때문이었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데,
그 안쪽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버린 사람의 눈.
“그만해…”
겨우 나온 목소리였다.
태준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낮게 웃었다.
“왜.”
“….”
“대답하기 힘들어?”
심장이 세게 흔들렸다.
나는 손끝을 움켜쥐었다.
정우진의 메시지는 아직도 소파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일 회사 앞에서 기다릴게요.
그 문장 하나가
집 안 공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태준은 천천히 휴대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 남자한테 갈 거야?”
“…회사 사람이야.”
“내가 그 말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근데 왜 이렇게 짜증 나지.”
숨이 턱 막혔다.
태준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나는 본능처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등이 벽에 닿았다.
차가운 벽.
그리고 바로 앞,
뜨거운 숨.
태준의 한쪽 손이 내 어깨 옆 벽을 짚었다.
완전히 갇힌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도망칠 수 없었다.
아니.
도망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한서윤.”
낮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눌러 불렀다.
나는 눈을 들지 못했다.
태준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 예전처럼 안 해.”
“….”
“가만히 서서 너 가는 거 안 본다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3년 전이 떠올랐다.
비 오는 밤.
현관 앞.
끝까지 붙잡지 않던 남자.
나는 그 침묵 하나 때문에 떠났고,
그 침묵 하나 때문에 오래 아팠다.
그런데 지금 강태준은.
그때와 너무 다른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때는…”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태준의 눈빛이 굳었다.
짧은 침묵.
그 침묵이,
이번엔 예전과 달리 도망치는 침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오래 삼켜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네가 울고 있었잖아.”
태준이 낮게 말했다.
“…….”
“붙잡으면 더 망가질 것 같았어.”
가슴 안쪽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래서 안 붙잡았다고?”
“아니.”
태준이 나를 똑바로 봤다.
“붙잡고 싶었어.”
숨이 멎었다.
“근데 그때 나는.”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갈라졌다.
“네가 나 때문에 무너진다고 생각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놔주면 괜찮아질 줄 알았어.”
“….”
“근데 아니더라.”
그가 아주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아픈 소리였다.
“네가 없으니까 내가 안 괜찮았어.”
가슴이 아프게 흔들렸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항상 무심하고,
항상 차갑고,
항상 괜찮아 보였던 남자.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강태준은 지금,
너무 선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이제 말해…”
내 목소리가 떨렸다.
태준은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숨결이 가까워졌다.
“이제라도 말 안 하면.”
“….”
“또 놓칠 것 같아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태준 손끝이 내 뺨 가까이 올라왔다.
닿을 듯 말 듯 머물렀다.
허락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그 손을 밀어내야 했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태준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서윤아.”
“…응.”
“나 아직 너 좋아해.”
그 한마디가 조용히 떨어졌다.
거창하지도,
극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어떤 말보다 깊게 박혔다.
나는 숨을 삼켰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끝난 줄 알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집,
같은 공기,
같은 밤 안에서.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태준은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이번엔 도망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결국,
나도 더는 숨길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어.”
태준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정말 끝난 줄 알았는데.”
“….”
“너 보면 자꾸…”
말끝이 흐려졌다.
태준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자꾸 뭐.”
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흔들려.”
정적.
내 말이 떨어진 순간,
공기가 완전히 멈춘 것 같았다.
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숨이,
조금씩 깊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그 말.”
“….”
“후회하지 마.”
나는 눈을 떴다.
태준은 바로 앞에 있었다.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
“강태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태준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뜨거웠다.
손끝이 닿는 순간,
몸 안쪽에서 무언가 천천히 무너졌다.
“이번엔.”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먼저 안 놓을 거야.”
심장이 멎을 듯 뛰었다.
태준의 시선이 내 입술로 내려왔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피하지 않았다.
그게 답이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
태준의 눈빛이 변했다.
아주 천천히.
마지막으로 참고 있던 선이
눈앞에서 끊어지는 것처럼.
“서윤아.”
낮고 거친 목소리.
나는 숨을 삼켰다.
“응…”
그 짧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태준이 가까워졌다.
처음엔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깨질 것 같은 것을 다루듯,
입술이 살짝 닿았다.
짧고,
뜨겁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한 입맞춤.
나는 숨을 멈췄다.
태준도 잠깐 멈췄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손이 내 허리 쪽으로 내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셔츠를 붙잡았다.
그게 신호가 된 것처럼.
태준의 숨이 무너졌다.
“하…”
낮은 숨이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미안.”
그가 아주 작게 말했다.
“근데 나…”
잠깐 멈춘 목소리.
그의 눈빛이 다시 내게 박혔다.
“이제 진짜 못 참아.”
심장이 그대로 무너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셔츠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조금.
그 작은 움직임을,
태준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이 짙어졌다.
창밖 빗소리가 다시 선명해졌다.
도시의 불빛이 젖은 유리창 너머로 흐릿하게 번졌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밤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걸.
끝난 줄 알았던 감정은,
사실 한 번도 완전히 식은 적 없었다.
다만 서로 모른 척했을 뿐.
태준이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한서윤.”
낮고 깊은 목소리.
나는 눈을 들었다.
그가 말했다.
“지금 밀어내면 멈출게.”
그 말에 오히려 숨이 막혔다.
마지막 기회였다.
도망칠 수 있는.
선을 지킬 수 있는.
예전처럼,
끝난 사람처럼 굴 수 있는.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태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밀어낼게.”
그 순간.
강태준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참아왔던 밤들이,
눌러왔던 숨들이,
삼켜왔던 말들이.
전부 한꺼번에 쏟아지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강태준이 결국 내 입술을 삼켰다.
⸻
[작가후기]
무료 회차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하려 할수록 더 가까워지고,
잊으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사람.
16화부터는 한서윤과 강태준이 서로를 향한 감정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끝난 줄 알았던 감정은,
이제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오늘 태준에게서 새로 알게 된 건 두 가지였다.포도맛 젤리가 하나뿐이었다는 것.그리고 오후 회의가 길었다는 것.하나는 어제의 일이었고,하나는 오늘의 일이었다.이상하게도 지금 더 오래 남는 건두 번째 쪽이었다.태준이 오늘 뭘 했는지내가 궁금했다는 사실.예전에는 너무 가까워서서로의 하루를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헤어진 뒤에는모르는 게 당연해졌다.그리고 오늘은 처음으로그 사이 어딘가에서 그의 하루를 물었다.알아야 해서가 아니라,그냥 궁금해서.나는 화면을 껐다.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끄러 가다가식탁을 한 번 돌아봤다.작게 접힌 젤리 봉지가 있었다.안에는 포도맛 하나가 남아 있었다.오늘 나눈 말들은젤리처럼 달지는 않았다.회의가 길었다는 말.문구 하나를 끝냈다는 말.잘됐다는 말.좋았다는 말.그리고,그냥 궁금했다는 말.그런데 이상하게그 평범한 말들이 더 오래 남았다.나는 마지막 젤리를 먹지 않았다.내일 아침에도 보일 자리에서봉지는 조용히 그대로 있었다.⸻【서윤의 기억 28】[네가 골랐잖아.]태준의 메시지를 보고 있으니예전 일이 하나 떠올랐다.퇴근이 늦었던 어느 평일 밤.태준의 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배가 부르다면서도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뭐 찾아?”소파에 앉아 있던 태준이 물었다.“단 거.”“아까 배부르다며.”“밥 배랑 디저트 배는 다르잖아.”태준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냉장고 안쪽에 작은 디저트 두 개가 있었다.하나는 초콜릿,하나는 커피 맛.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커피 맛을 꺼냈다.“이거 먹어도 돼?”“응.”너무 바로 대답해서나는 별생각 없이 뚜껑을 열었다.작은 숟가락을 들고 소파로 돌아가태준 옆에 앉았다.한입 먹자 생각보다 맛있었다.“이거 맛있다.”“그치.”“너 먹어봤어?”“응.”“이거 자주 먹어?”“가끔.”나는 두어 입을 더 먹다가문득 태준을 봤다.“잠깐.”“왜.”“너 이거 좋아하지?”태준이 나를 봤다.“응.”“초콜릿보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대화는 거기서 끝난 것 같았다.젤리를 하나 더 먹었다.달았다.그런데 이상하게 지금 마음에 남아 있는 건포도맛보다 태준이 보낸 짧은 말들이었다.네가 골랐잖아.또 사면 돼.그래.전부 별것 없는 말이었다.나는 봉지 안에 손을 넣다가 멈췄다.휴대폰을 다시 집었다.보낼 말이 있어서 든 건 아니었다.그런데 화면을 켜자아까부터 하나 궁금했던 게 떠올랐다.젤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나는 입력창에 문장을 썼다.[오늘은 일 어땠어?]쓰고도 바로 보내지 않았다.태준의 일이 어땠는지내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오늘 어디에 있었는지,무슨 일을 했는지,몇 시에 끝났는지.그런 걸 확인할 사이도 아니었다.그런데 궁금했다.이유라고 할 만한 건 그것뿐이었다.나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오늘은 일 어땠어?]젤리 맛을 물었을 때보다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조금 뒤 화면이 켜졌다.[괜찮았어.]곧 한 줄이 더 왔다.[오후 회의가 좀 길었고.]나는 그 문장을 읽었다.태준의 오늘 오후에회의 하나가 있었다.조금 전까지는 몰랐던 일.이제는 알게 된 일.잠시 후 다시 메시지가 왔다.[너는?]나는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고 답장을 썼다.[나도 그냥.]보내려다가 멈추고 한 줄을 더 붙였다.[수정하던 문구 하나 오늘 끝냈어.]답장은 금방 왔다.[잘됐네.]나는 웃었다.[계속 마음에 안 들었거든.][끝났으면 됐지.]짧은 답을 보며오늘 오후 내내 붙들고 있던 문장을 떠올렸다.정말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누군가에게 말하고 나니 하루의 한 부분이 되는 기분이었다.나는 다시 물었다.[너 회의는 잘 끝났어?][응.]그리고,[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 끝나긴 했어.][그럼 다행이네.]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서로 다른 곳에서각자 다른 하루를 보냈다.나는 문구 하나를 붙잡고 있었고,태준은 긴 회의실에 있었을 것이다.아침부터 저녁까지그걸 서로 몰랐다.그리고 지금은 조금 알았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식탁 위의 포도맛 젤리 봉지를 한 번 봤다.어젯밤 태준에게 받아온 것.몇 개 먹고 입구를 대충 접어둔 채그대로 놓여 있었다.가방을 챙기다가 잠깐 손이 갔다.회사에 가져갈까.봉지를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다.저녁에 돌아와 먹으면 됐다.나는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문을 열기 직전,괜히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식탁 위에 작은 보라색 봉지가 보였다.그대로 두고 나왔다.⸻저녁에 돌아왔을 때도젤리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외투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손을 씻었다.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꺼내간단히 저녁을 먹었다.식탁 한쪽에는 계속 젤리 봉지가 있었다.밥을 먹는 동안에는 건드리지 않았다.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돌아와서야봉지를 가까이 끌어왔다.바스락.작은 소리가 났다.어제 로비에서 태준에게 처음 받았을 때도이런 소리가 났다.열린 택배 상자.여러 색으로 섞여 있던 봉지들.뭐가 제일 맛있냐고 물었을 때태준은 포도라고 했다.그래서 나는 별 고민 없이 포도를 골랐다.봉지에서 젤리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어제와 같은 맛이었다.포도 향이 먼저 나고,조금 뒤 단맛이 퍼졌다.씹으면서 휴대폰을 집었다.메신저를 열자 태준의 이름이 위쪽에 있었다.강태준.어젯밤 마지막 대화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포도맛 맛있네.][다행이네.]그게 끝이었다.나는 화면을 보다가 입력창을 눌렀다.[너는 뭐 먹었어?]보내고 나서 젤리 하나를 더 꺼냈다.정말 별것 아닌 질문이었다.어제 산 젤리 중무슨 맛을 먹었냐는 말.그래서인지 보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답장이 왔다.[레몬.]나는 봉지 안을 내려다봤다.[포도는?]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포도맛은 하나뿐이었어.]씹고 있던 젤리가 멈췄다.나는 화면을 다시 봤다.[하나뿐이었어?][응.]그리고 한 줄이 더 왔다.[네가 가져간 게 그거야.]나는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내려다봤다.보라색 작은 봉지.어
나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포도맛 맛있네.]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다행이네.]나는 웃었다.그 뒤에 더 오는 말은 없었다.나도 더 쓰지 않았다.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화면이 꺼지기 직전까지강태준이라는 이름이 보였다.나는 옆에 놓인 젤리 봉지를 한번 건드렸다.바스락.아침의 빈 칸은 그대로였다.그런데 오늘 하루에는새로 남은 것들이 있었다.내가 먼저 눌러본 이름.태준의 손에서 받아온 작은 봉지.그리고 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포도맛 젤리 몇 개.나는 봉지를 치우지 않았다.내일 아침에도아마 식탁 위에서 보게 될 것 같았다.⸻【태준의 속마음 40】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서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혹시 너 출근했어?]화면을 한 번 더 봤다.서윤이 먼저 물었다.내가 어디 있는지.그 사실 하나만으로대답을 쓰는 손이 조금 느려졌다.[아직. 지금 엘리베이터 앞이야.]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한 줄을 더 보냈다.[왜? 무슨 일 있어?]답장은 금방 왔다.[아니. 편의점 들렀는데 저당 라떼가 1+1이더라.]그리고 잠시 뒤.[나 두 개는 많아서. 너 마실래?]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1+1.예전에는 이런 일이 많았다.하나를 사면 하나가 더 생기는 날.두 개 묶음이 더 싼 날.같은 걸 두 개 사야 하는 날.그럴 때마다 굳이 묻지 않았다.하나는 서윤 것.하나는 내 것.누가 먼저 집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두 개가 생기면자연스럽게 하나씩 나눠 들었다.그게 너무 당연했던 때가 있었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응. 마실게.]편의점 앞에 서 있는 서윤을 봤을 때손에는 정말 같은 라떼가 두 병 있었다.그중 하나가 내 손으로 왔다.1+1이라서 생긴 한 병이라고 했다.그래도 좋았다.많은 사람 중에그 한 병을 줄 사람으로 내가 떠올랐다는 게.그래서 바로 마시지 않았다.아까워서라기보다는조금 더 들고 있고 싶었다.서윤이 물었다.“안 마셔?”“좀 있다가.”“왜?”나는 손에
태준이 상자 안을 보며 물었다.“하나 가져갈래?”“그래도 돼?”“많아.”나는 다시 상자 안을 봤다.“그럼 포도.”태준이 작은 포도맛 봉지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나는 손바닥을 펴서 받았다.가벼웠다.안에서 젤리가 움직이며 바스락 소리가 났다.“고마워.”“응.”아침에는 내가 라떼를 건넸고,저녁에는 태준이 젤리를 건넸다.계산해서 맞춘 것도 아닌데하루의 양쪽 끝에 하나씩 놓인 게 조금 웃겼다.나는 봉지를 손에 쥔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문이 열리고 우리는 함께 탔다.태준은 상자를 들고,나는 작은 젤리 봉지를 들고 있었다.거울 같은 문에 그 모습이 비쳤다.나는 입가에 웃음이 나는 걸 느꼈다.태준이 물었다.“왜 웃어?”“그냥.”“뭔데?”나는 손에 든 봉지를 한번 들어 보였다.“아침에는 라떼였는데.”태준이 내 손을 봤다.“그러네.”“저녁에는 젤리네.”“응.”그걸로 됐다.굳이 뜻을 더 붙이지 않아도오늘 하루가 조금 재미있어진 것 같았다.엘리베이터가 태준의 층에서 멈췄다.문이 열렸다.태준이 내리다가 돌아봤다.“포도맛 괜찮을 거야.”“먹어보고.”“그래.”“너도 잘 들어가.”“응. 너도.”태준이 내렸다.문이 닫혔다.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가 비었다.나는 그 자리를 잠깐 보다가손에 든 젤리를 내려다봤다.사람은 내려갔는데그가 건넨 건 내 손에 남아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였다.작은 봉지 안에서 젤리가 한 번 흔들렸다.바스락.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집에 들어가자 센서등이 켜졌다.나는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젤리 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외투를 벗고 손을 씻으러 갔다가주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냉장고를 열었다.아침에 봤던 문쪽 칸이 그대로 비어 있었다.라떼를 두 병 샀지만하나는 내가 마셨고,하나는 태준에게 줬다.결국 그 자리는 그대로였다.나는 물병을 꺼내고 문을 닫았다.아침에는 이상하게 눈에 걸렸던 빈 칸이지금은 별로 허전해 보
나는 손에 든 병을 한번 흔들었다.“나도 해보는 중이야.”말하고 나서야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태준이 나를 봤다.“뭘?”나는 잠시 생각했다.정확히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생각났다고 해서 모른 척하지 않는 것.주고 싶은 게 있으면 괜히 이유부터 찾지 않는 것.그런 것들.“그냥.”나는 앞을 보며 말했다.“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거.”태준은 잠깐 말이 없었다.“그래.”조금 뒤에 그가 덧붙였다.“그랬으면 좋겠어.”나는 옆을 봤다.태준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그 말을 하고도 나를 살피지 않았다.나는 다시 길을 봤다.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내가 무엇을 해보는 중인지전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오늘 아침에는 라떼 하나를 건넸고,태준의 이름을 먼저 눌렀고,지금은 같이 걷고 있었다.그 정도면 충분했다.횡단보도 앞에서 멈췄다.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태준이 들고 있던 라떼 병을 봤다.내가 조금 전에 건넨 것.별것 아닌데그의 손에 들려 있으니 괜히 한 번 더 보게 됐다.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사람들이 움직였다.우리도 함께 길을 건넜다.역 입구가 가까워질수록아침의 짧은 시간이 끝나가는 게 느껴졌다.매번 비슷한 곳에서 헤어지는데도오늘은 조금 달랐다.우연히 만난 아침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았다.내가 먼저 태준에게 연락했고,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고,그렇게 여기까지 같이 걸었다.역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태준도 따라 멈췄다.“여기서 가면 되지?”“응.”나는 태준의 손에 든 라떼를 다시 한번 봤다.“진짜 천천히 마시겠네.”태준이 웃었다.“그러려고.”나도 웃음이 났다.몇 초쯤 그대로 서 있었다.아까 했던 말이 다시 마음에 남았다.나도 해보는 중이야.괜히 너무 많은 걸 말한 건 아닐까 싶다가도,이번에는 지우고 싶지 않았다.태준이 그 말을 크게 만들지 않았으니까.나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다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