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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관계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식어서 끝난 건 아니었다.
너무 오래 뜨거웠고,
너무 오래 서로를 태웠다.
가까워질수록 더 아팠고,
좋아할수록 더 지쳤다.
그래서 끝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기로.
다시는 흔들리지 않기로.
나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내 새 집 로비에서 다시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몸이 먼저 그 목소리를 알아봤다.
그래서 더 싫었다.
강태준.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던 남자.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오늘이 그냥 평범한 이삿날이라고 생각했다.
“한서윤 씨 맞으시죠?”
부동산 중개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 입주하시는 오피스텔, 집주인 측 대리인이 곧 도착할 겁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 집은 회사와 가까웠고, 조건도 괜찮았다.
급하게 집을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 매물은 흔치 않았다.
다만 이상한 건 하나 있었다.
너무 쉽게 구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베이터 앞 자동문이 열렸다.
낮은 구두 소리.
검은 코트 자락.
익숙한 향.
나는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멈췄다.
강태준이 로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셔츠 위에 어두운 코트.
무심한 표정.
그리고 여전히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눈.
그 눈이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괜히 손에 든 서류를 더 세게 쥐었다.
태준도 나를 알아봤다.
그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저 남자도 놀랐다.
놀랐는데,
금방 숨겼다.
예전에도 그랬다.
놀라도 티 내지 않았고,
상처받아도 조용했고,
붙잡고 싶은 게 있어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사람을 미치게 했다.
“강 실장님, 오셨어요.”
중개인의 말에 나는 태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강 실장님.
그 호칭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내가 알던 강태준은,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사람 같았다.
아니.
그렇게 부르는 게 맞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태준은 중개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봤다.
“한서윤.”
3년 만이었다.
내 이름이 그의 목소리로 다시 불리는 건.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여기서 뭐 해?”
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중개인을 봤다.
“입주자 확인하러 왔습니다.”
“아,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중개인이 우리 사이를 번갈아 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맞지 않았다.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
헤어진 사이.
다시 보면 안 되는 사이.
그중 어디에도 우리를 딱 넣을 수 없었다.
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알던 사이입니다.”
예전에.
알던 사이.
그 말이 가볍게 떨어졌다.
나는 웃고 싶었다.
우리가 그렇게 간단한 말로 정리될 수 있다면,
나는 지난 3년을 조금 덜 피곤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럼 올라가시죠.”
중개인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주하실 호실 확인하시고, 서류만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좁은 공간 안에 중개인과 나,
그리고 강태준이 같이 섰다.
나는 일부러 정면만 봤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바로 옆에 있다는 걸.
검은 셔츠에서 나는 희미한 우디 향.
오래전에 너무 익숙했던 냄새.
익숙해서 더 기분 나쁜 거리.
태준이 낮게 말했다.
“이사, 갑자기 했나 보네.”
나는 앞만 본 채 대답했다.
“네가 알 일 아니야.”
“그런가.”
짧은 대답.
저런 식이다.
한 걸음 들어오고,
아닌 척 물러난다.
상대가 그 한 걸음을 계속 신경 쓰게 만든다.
나는 손끝으로 서류 모서리를 눌렀다.
종이가 조금 구겨졌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나는 먼저 걸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새로 닦은 바닥 냄새와 낯선 벽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내 새 집.
아니, 이제 내 새 집이 되어야 하는 곳.
중개인이 문 앞에서 키패드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집 안이 드러났다.
큰 창.
차갑게 정리된 거실.
아직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공간.
밖으로는 도시 불빛이 낮게 깔려 있었다.
분명 괜찮은 집이었다.
혼자 새로 시작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
그런데 이상하게,
문을 넘는 순간부터 새 집 같지 않았다.
누가 먼저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구조는 보셨죠? 옵션은 그대로고요.”
중개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태준은 말없이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바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에도 저랬다.
낯선 공간에 가면 그는 늘 창부터 봤다.
해가 어디서 들어오는지,
밤에는 어디가 가장 어두워지는지,
바깥 소음은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는지.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살폈다.
나는 그게 좋았던 적이 있다.
이제는 그런 걸 기억하는 내가 싫었다.
“계약서 마지막 확인만 부탁드릴게요.”
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계약 조건.
관리비.
입주일.
옵션 확인.
차례로 넘기던 손이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소유자 대리인.
강태준.
한동안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집 네 거야?”
태준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내가 관리하는 집이야.”
“그게 그거잖아.”
“정확히는 달라.”
“장난해?”
중개인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너 일부러 그런 거야?”
태준은 나를 봤다.
“뭘.”
“내가 여기 들어오는 거 알고 있었냐고.”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대답보다 더 정확했다.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알고 있었네.”
“어제 알았어.”
“그럼 말했어야지.”
“말하면 안 들어왔을 거잖아.”
“당연하지.”
“그래서 안 했어.”
너무 태연했다.
너무 강태준답게.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잃은 게 아니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덜 화가 날지 고르는 중이었다.
결국 아무 말도 덜 화나지 않을 것 같았다.
“너 여전하네.”
“너도.”
“뭐가.”
“도망가는 거.”
목 안쪽에 그 말이 걸렸다.
나는 서류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말 조심해.”
“틀린 말은 아니잖아.”
태준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무심한 척하면서,
사람 속은 끝까지 들여다보는 눈.
저 눈이 싫었다.
나를 너무 잘 아는 것처럼 구는 눈.
아직도 내가 어디서 무너질지 아는 사람처럼.
“계약 파기하고 싶으면 해.”
그가 낮게 말했다.
“위약금은 내가 처리하지.”
그 말이 더 기분 나빴다.
마치 내가 도망칠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그리고 도망쳐도 된다고 말하는 척하면서,
내가 도망치지 못할 것도 아는 사람 같아서.
나는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이 집을 포기할 수 있을까.
예전 집은 오늘 비워야 했다.
짐은 이미 도착하고 있었다.
회사 근처에 이만한 조건의 집을 다시 구하기도 어려웠다.
태준은 그걸 알고 있었다.
아마 처음부터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게 제일 싫었다.
내가 선택한 집이라고 믿었던 곳에,
그가 이미 서 있었다는 게.
나는 천천히 펜을 들었다.
“안 나가.”
태준의 눈매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여기서 살 거야.”
“…….”
“그러니까 네가 신경 꺼.”
나는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한서윤.
글씨가 평소보다 조금 날카로웠다.
중개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중개인이 돌아간 뒤,
집 안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공간이 이상하게 좁아졌다.
아직 가구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집인데,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방 안이 꽉 찬 것 같았다.
예전엔 같은 공간 안의 침묵이 편했다.
각자 다른 일을 해도,
서로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침묵은 자꾸 피부 가까이에 와 닿았다.
“비밀번호 바꿔.”
태준이 먼저 말했다.
나는 바로 그를 봤다.
“말 안 해도 바꿀 거야.”
“창문 잠금장치도 확인하고.”
“그것도 할 거야.”
“욕실 환풍기는—”
“강태준.”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관리인 역할 하지 마.”
그가 나를 바라봤다.
“필요한 말만 하는 건데.”
“그게 싫다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태준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등이 식탁 모서리에 닿았다.
차가운 감각이 허리에 닿고 나서야 내가 물러났다는 걸 알았다.
태준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딱 그 거리에서.
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너 어디 갈 데 없잖아.”
그가 낮게 말했다.
“짐도 다 오고 있고,
예전 집은 오늘 비워야 하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모를 것 같았어?”
내가 뭘 숨기고 있었는지,
그는 너무 쉽게 말했다.
“너 조사했어?”
“부동산 서류 보면 알 수 있어.”
“그래서?”
“그래서 그냥 뒀어.”
“뭘.”
“네가 여기라도 들어오게.”
그 말은 이상했다.
차라리 더 노골적으로 나빴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태준은 늘 그런 식이었다.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처럼 다가와서,
마지막에는 다정한 척 빠져나갈 수 있는 말을 남긴다.
나는 그게 더 싫었다.
“착한 척하지 마.”
태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내 입술 근처에 머물렀다.
짧았다.
하지만 나는 봤다.
“착한 적 없어.”
그가 낮게 말했다.
“너한테는 특히.”
몸 안쪽에서 오래 눌러둔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밀치듯 지나쳐 현관 쪽으로 걸었다.
“나가.”
태준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비밀번호 바꿀 거니까 나가라고.”
“바꾸는 거 보고 갈게.”
“내가 어린애야?”
“그랬으면 더 쉬웠겠지.”
나는 그대로 멈췄다.
“넌 늘 괜찮은 척하다가,
꼭 제일 안 괜찮을 때 혼자 버티니까.”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바로 화가 났다.
정확한 말은 가끔 틀린 말보다 더 잔인하다.
특히 그걸,
강태준이 할 때는.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있어.”
“없어.”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이번엔 정말 뒤돌아봤다.
태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3년 전 마지막 날처럼.
비가 오던 밤.
끝까지 나를 붙잡지 않던 남자.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넌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잖아.
그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마디도.
그래서 나는 떠났다.
내가 틀렸다는 말도,
맞다는 말도 듣지 못한 채로.
“이제 와서 그런 말 하지 마.”
내 목소리가 내가 원한 것보다 낮게 나왔다.
태준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알았어.”
그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직전,
잠깐 멈춘 그가 낮게 말했다.
“한서윤.”
나는 싫은데도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아직도 너무 익숙해서.
“여기서 사는 동안.”
“…….”
“나 피하려고 애쓰지 마.”
내가 웃었다.
웃음이 예쁘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태준이 나를 보았다.
낮고 조용한 눈빛.
“어차피 자주 보게 될 거니까.”
문이 닫혔다.
철컥.
도어락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 집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빈집이어야 하는 공간 안에서,
자꾸만 그 남자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제야 알았다.
이 집은 내가 고른 곳이지만,
내가 완전히 피해서 들어온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났다고 믿었던 감정이
다시 열을 올리는 순간들을 담아보려 합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집에 들어와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옷을 갈아입고 냉장고를 열어봤다.계란이 있었고,며칠 전에 사둔 반찬도 조금 남아 있었다.간단하게 밥을 데우고계란 하나를 부쳤다.식탁에 앉아 몇 숟갈 먹다가문득 태준이 생각났다.뭐라도 챙겨 먹으라고는 했는데.태준도 지금쯤뭔가 먹고 있으려나.잠깐 그런 생각을 하다가나는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밥을 다 먹고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았다.물을 틀고 접시를 씻고 있는데거실 쪽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손에 묻은 물을 털고수건에 대충 닦은 뒤 화면을 봤다.태준이었다.[저녁 먹었어.]나는 메시지를 보고 웃었다.[편의점?]답장은 금방 왔다.[아니.][그럼 뭐 먹었어?]조금 있다가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뚝배기에 담긴 순두부찌개였다.밥그릇은 이미 반쯤 비어 있었다.사진을 한동안 보다가 답장을 썼다.[제대로 먹었네.][그러는 너는?]나는 싱크대 쪽을 한번 봤다.아직 씻지 않은 프라이팬이 남아 있었다.[나도 먹었어.][뭐 먹었는데?][계란.]잠시 뒤 답장이 왔다.[그게 다야?]나는 웃었다.[밥이랑 반찬도 먹었거든.][그럼 됐네.]아까 내가 했던 말이랑 비슷해서조금 웃음이 났다.[너 지금 내 말 따라 하지.][아닌데.][맞는데.]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들켰네.]나는 화면을 보다가작게 웃었다.별것 아닌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고휴대폰을 내려놓았다.남은 설거지를 마저 하고샤워를 했다.머리를 말린 뒤 침대에 누우니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그제야 느껴졌다.알람을 맞추려고 휴대폰을 들었다.태준과 나눈 대화창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마지막 메시지는내가 보낸 웃는 이모티콘이었다.화면을 끄려다가아까 엘리베이터 앞이 다시 떠올랐다.“뭐라도 챙겨 먹어.”그 말을 듣고 돌아봤던 태준.오늘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그런데도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돌아봤다.나는 잠깐 화면을 바라보다가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불을 끄고 눈을 감았는데도조
아침에 눈을 떴을 때어젯밤 일이 먼저 떠올랐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태준을 불러 세웠던 순간.태준아.그리고 그 뒤에 어렵게 꺼낸 말.나는 베개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었다.새 메시지는 없었다.화면을 끄려다가한 번 더 봤다.없네.화면을 보다가어젯밤 태준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나도 좋았어.그 말을 듣고조금 늦게 웃던 얼굴.문이 닫히기 직전까지그 자리에 서 있던 태준의 모습도.어젯밤에는 내가 먼저 올라와 놓고도한동안 그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그 생각까지 하고 나니괜히 웃음이 났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이불을 걷었다.그리고 다시 한 번휴대폰을 바라보다가침대에서 일어났다.세수를 하고 나와건조대 위에 펼쳐 둔 검은 니트를 만져봤다.다 말라 있었다.나는 니트를 걷어옷걸이에 걸었다.어제부터 거실 한쪽에 있던 옷이다시 옷장으로 들어갔다.나는 잠깐 옷장 안을 바라보다가문을 닫았다.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정리하고가방을 챙겼다.⸻오전에는 휴대폰을 볼 틈이 거의 없었다.회의가 하나 길어졌고,자리로 돌아오자 바로 수정 요청이 들어왔다.한동안 모니터만 보고 있다가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휴대폰을 챙기려고 화면을 켰다.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회사 단체방 하나,광고 두 개.알림을 지우다가태준과의 대화창이 눈에 들어왔다.마지막 메시지는 어제 그대로였다.그런데 이상하게화면보다 먼저 떠오른 건어젯밤 내가 직접 했던 말이었다.나도 좋았어.그리고 그 말을 듣던 태준의 얼굴.나는 잠깐 화면을 보다가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밥 먹으러 안 가요?”옆자리에서 부르는 소리에고개를 들었다.“가요.”휴대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점심을 먹고 돌아온 뒤에는다시 일이 몰렸다.오후가 지나면서는아침부터 자꾸 눈에 들어오던 휴대폰도한동안 잊고 있었다.그러다 퇴근 직전,파일을 전송하고 의자에 등을 기대는 순간문득 생각났다.오늘은 연락이 없네.아침부터 몇 번이나
그 뒤로는잠깐 말이 없었다.어색하지는 않았다.조금 전까지 했던 얘기가그냥 우리 사이에 남아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멈췄다.태준이 먼저 내릴 층이었다.문이 열리자태준이 한 걸음 나갔다.“들어가.”“응.”태준이 돌아서려 했다.그 순간어젯밤부터 계속 남아 있던 말이 떠올랐다.생각할 틈도 없이입이 먼저 열렸다.“태준아.”태준이 멈췄다.뒤를 돌아봤다.“응?”막상 불러놓고 나니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문이 닫히기 전까지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나는 열림 버튼을 눌렀다.태준이 그걸 보고가만히 기다렸다.“그날.”“응.”“분리수거하고.”태준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 같았다.나는 버튼을 누른 손에조금 힘을 줬다.“나도 좋았어.”말하고 나니생각보다 별것 아닌 문장처럼 들렸다.어젯밤에는몇 번이나 쓰고 지웠는데.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입술이 조금 벌어졌다가다시 닫혔다.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그리고 조금 늦게 말했다.“응.”나는 태준을 봤다.태준도 나를 보고 있었다.“그 말 하려고 불렀어?”“응.”이번에는 내가 먼저 대답했다.태준의 입가가아주 조금 올라갔다.“알았어.”나는 열림 버튼에서 손을 뗐다.“가.”“응.”문이 천천히 닫혔다.마지막까지태준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집에 들어오자마자거실에 있는 건조대부터 봤다.검은 니트는거의 다 말라 있었다.소매 끝을 만져봤다.아침의 축축한 느낌은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니트를 조금 더 펴놓고손을 뗐다.씻고 나와 침대에 앉았다.휴대폰은 조용했다.나는 화면을 켜지 않았다.어젯밤에는입력창에 썼다가 지웠던 말이었다.[어제 나도 좋았어.]오늘은 문자로 보내지 않았다.그냥 말해버렸다.태준이 잠깐 숨을 삼키던 얼굴이뒤늦게 떠올랐다.나도 좋았어.입 밖으로 나온 말이생각보다 오래 남았다.⸻【태준의 속마음 43】문이 닫힌 뒤에도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엘리
오후 3시 17분.휴대폰 화면이 켜졌다.[강태준]하던 일을 멈추고메시지를 열었다.[니트는 다 말랐어?]검은 니트.어젯밤 손빨래를 하고건조대 위에 펼쳐둔 채 나왔다.아침에 만져봤을 때도소매 끝은 아직 조금 축축했다.[아침엔 아직 좀 축축했어.]잠시 뒤 답장이 왔다.[저녁이면 마르겠다.][아마.]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짧은 대화였다.다시 모니터를 보려다가어젯밤 쓰다 지운 문장이 잠깐 떠올랐다.[어제 나도 좋았어.]나는 화면을 끄고다시 하던 일을 했다.⸻퇴근하고 역을 나왔을 때는이미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비는 오지 않았지만공기가 조금 눅눅했다.나는 가방끈을 고쳐 잡고오피스텔 쪽으로 걸었다.하루 종일 앉아 있었더니어깨가 뻐근했다.횡단보도를 건너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멀리서는 몰랐는데가까워지자 태준이었다.태준도 나를 봤다.“이제 와?”“응. 조금 늦었어.”우리는 자연스럽게같은 방향으로 걸었다.“어디 갔다 와?”“저녁 먹고. 집에 먹을 게 없어서.”“장 봐.”“귀찮아.”“그러다 또 편의점 가지.”태준이 웃었다.“오늘은 안 갔어.”“잘했네.”말하고 나서둘 다 잠깐 웃었다.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그 말 이제 네 거 됐네.”“원래 내 말 아니었어?”“아닌데. 내 건데.”“언제부터?”“몰라.”그런 얘기를 하면서골목을 천천히 걸었다.별것 아닌 말들이었다.그래서 편했다.오피스텔 건물이 보일 때쯤태준이 나를 한번 봤다.“피곤해?”나는 그를 돌아봤다.“티 나?”“조금. 많이 피곤해 보이는 건 아니고.”나는 앞을 보며 걸었다.“너는 그런 거 진짜 잘 본다.”태준이 나를 한번 봤다.“사람 피곤한 거.”“얼굴 보면 보이잖아.”“나는 잘 모르겠던데.”“너는 네 얼굴을 못 보니까.”“그런가.”몇 걸음 더 갔다.그러다 문득예전 생각이 났다.“예전에도 그랬잖아. 내가 피곤한 거 먼저 알고, 기분 안 좋은 것도 알아보고
옷을 갈아입고검은 니트를 들고 욕실로 갔다.세면대에 미지근한 물을 받고세제를 조금 풀었다.니트를 물에 담갔다가손바닥으로 천천히 눌렀다.세탁기에 넣지 않은 건괜히 늘어날까 봐서였다.몇 번 헹군 뒤마른 수건 사이에 넣고 눌러 물기를 뺐다.젖은 니트는 생각보다 무거웠다.나는 거실에 작은 건조대를 펴고그 위에 니트를 평평하게 올려두었다.소매를 펴고,목 부분도 한번 만졌다.아까까지 세탁실에 놓여 있던 옷이이제 내 집 안에 있었다.별일 아닌데하루가 조금 길게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씻고 나오다욕실에 걸린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태준이 접었던 수건.이미 한번 펼쳐 썼으니모양은 더 흐트러져 있었다.나는 그걸 보다가조금 웃었다.수건 하나가 뭐라고.그런데도 태준이 접던 손이 떠올랐다.모서리가 조금 안 맞던 것까지.나는 수건을 욕실에 걸어두고식탁으로 돌아왔다.휴대폰이 놓여 있었다.태준과의 대화창을 열었다.[찾았어.][다행이네.]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입력창을 눌렀다.한참 빈칸만 보고 있다가문장을 썼다.[어제 나도 좋았어.]손가락이 보내기 버튼 가까이 갔다가 멈췄다.문장을 다시 읽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맞는 말이었다.그래서 쉽게 보내지 못했다.나는 화면을 그대로 둔 채잠깐 식탁에 앉아 있었다.어제 태준이 했던 말은이미 내 쪽으로 왔다.나도 좋았어.나는 그걸 들었고,오늘까지 몇 번이나 떠올렸다.내 대답은 아직내 안에만 있었다.그렇다고 없는 말은 아니었다.나는 결국 문장을 지웠다.휴대폰을 내려놓고거실 쪽을 봤다.건조대 위의 검은 니트가조용히 펼쳐져 있었다.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내일 아침에도덜 말라 있을 것 같았다.나는 소매 끝을 한번 만져보고손을 뗐다.조금 더 두면 된다.다 마를 때까지.말도 그랬다.나도 좋았어.오늘은 보내지 않았다.그렇다고모른 척하지도 않았다.그 말은 여전히내 안에 남아 있었다.⸻【서윤의 기억 30】예전에
다음 날 아침,세수를 하고 욕실 선반에 손을 뻗었다.수건 몇 장이 쌓여 있었다.그중 하나가 덜 반듯했다.조금.손이 먼저 그쪽으로 갔다.어젯밤 태준이 접었던 수건이었다.집에 와서 다시 펴지 않고그대로 올려둔 것.나는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눌러 닦았다.평소 쓰던 것과 다를 것도 없었다.그런데 어젯밤의 세탁실이잠깐 같이 떠올랐다.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따뜻한 세제 냄새.나란히 서서 수건을 접던 손.그리고,나도 좋았어.나는 수건을 얼굴에서 내렸다.태준이 그렇게 말했을 때나는 겨우 한마디 했다.응.그때는 그게 전부였다.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나도 좋다고 말할 수 있었다.분리수거가 끝난 뒤에도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던 것도 나였고,그 몇 분이 다음 날까지 남아 있었던 것도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건응, 하나였다.지금 와서 생각하니조금 아쉬웠다.나는 수건을 다시 걸어두고가방을 챙겼다.옷장을 열었다가손이 잠깐 멈췄다.검은 니트.나는 옷장 안을 한번 더 봤다.없었다.의자 위에도,세탁 바구니 안에도 없었다.그제야 어젯밤 세탁실이 떠올랐다.셔츠와 수건을 세탁기에 넣으면서따로 빼두었던 검은 니트.접이식 테이블 한쪽.그리고 그대로 나왔다.“아.”시간을 확인했다.다시 내려가기에는 조금 애매했다.퇴근하고 찾으면 되겠지.태준이 접어준 수건은 챙겨왔으면서정작 내 옷을 두고 왔다.나는 옷장 문을 닫았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화면을 열었다.[나 어제 세탁실에 세탁망 두고 온 것 같아서 내려왔는데.]잠시 뒤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검은 니트 하나 있더라.][네 거 맞지?]나는 화면을 보다가아침부터 찾던 니트를 떠올렸다.[맞아.][나도 방금 생각났어.]태준의 답장이 왔다.[챙겨둘까?]잠깐 고민하다 답했다.[아니. 그냥 둬.][퇴근하고 찾아서 집에서 빨게.][응.]거기서 대화는 끝났다.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려다가다시 한번 화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