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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관계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식어서 끝난 건 아니었다.
너무 오래 뜨거웠고,
너무 오래 서로를 태웠다.
가까워질수록 더 아팠고,
좋아할수록 더 지쳤다.
그래서 끝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기로.
다시는 흔들리지 않기로.
나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내 새 집 로비에서 다시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몸이 먼저 그 목소리를 알아봤다.
그래서 더 싫었다.
강태준.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던 남자.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오늘이 그냥 평범한 이삿날이라고 생각했다.
“한서윤 씨 맞으시죠?”
부동산 중개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 입주하시는 오피스텔, 집주인 측 대리인이 곧 도착할 겁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 집은 회사와 가까웠고, 조건도 괜찮았다.
급하게 집을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 매물은 흔치 않았다.
다만 이상한 건 하나 있었다.
너무 쉽게 구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베이터 앞 자동문이 열렸다.
낮은 구두 소리.
검은 코트 자락.
익숙한 향.
나는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멈췄다.
강태준이 로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셔츠 위에 어두운 코트.
무심한 표정.
그리고 여전히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눈.
그 눈이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괜히 손에 든 서류를 더 세게 쥐었다.
태준도 나를 알아봤다.
그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저 남자도 놀랐다.
놀랐는데,
금방 숨겼다.
예전에도 그랬다.
놀라도 티 내지 않았고,
상처받아도 조용했고,
붙잡고 싶은 게 있어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사람을 미치게 했다.
“강 실장님, 오셨어요.”
중개인의 말에 나는 태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강 실장님.
그 호칭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내가 알던 강태준은,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사람 같았다.
아니.
그렇게 부르는 게 맞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태준은 중개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봤다.
“한서윤.”
3년 만이었다.
내 이름이 그의 목소리로 다시 불리는 건.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여기서 뭐 해?”
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중개인을 봤다.
“입주자 확인하러 왔습니다.”
“아,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중개인이 우리 사이를 번갈아 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맞지 않았다.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
헤어진 사이.
다시 보면 안 되는 사이.
그중 어디에도 우리를 딱 넣을 수 없었다.
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알던 사이입니다.”
예전에.
알던 사이.
그 말이 가볍게 떨어졌다.
나는 웃고 싶었다.
우리가 그렇게 간단한 말로 정리될 수 있다면,
나는 지난 3년을 조금 덜 피곤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럼 올라가시죠.”
중개인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주하실 호실 확인하시고, 서류만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좁은 공간 안에 중개인과 나,
그리고 강태준이 같이 섰다.
나는 일부러 정면만 봤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바로 옆에 있다는 걸.
검은 셔츠에서 나는 희미한 우디 향.
오래전에 너무 익숙했던 냄새.
익숙해서 더 기분 나쁜 거리.
태준이 낮게 말했다.
“이사, 갑자기 했나 보네.”
나는 앞만 본 채 대답했다.
“네가 알 일 아니야.”
“그런가.”
짧은 대답.
저런 식이다.
한 걸음 들어오고,
아닌 척 물러난다.
상대가 그 한 걸음을 계속 신경 쓰게 만든다.
나는 손끝으로 서류 모서리를 눌렀다.
종이가 조금 구겨졌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나는 먼저 걸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새로 닦은 바닥 냄새와 낯선 벽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내 새 집.
아니, 이제 내 새 집이 되어야 하는 곳.
중개인이 문 앞에서 키패드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집 안이 드러났다.
큰 창.
차갑게 정리된 거실.
아직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공간.
밖으로는 도시 불빛이 낮게 깔려 있었다.
분명 괜찮은 집이었다.
혼자 새로 시작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
그런데 이상하게,
문을 넘는 순간부터 새 집 같지 않았다.
누가 먼저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구조는 보셨죠? 옵션은 그대로고요.”
중개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태준은 말없이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바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에도 저랬다.
낯선 공간에 가면 그는 늘 창부터 봤다.
해가 어디서 들어오는지,
밤에는 어디가 가장 어두워지는지,
바깥 소음은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는지.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살폈다.
나는 그게 좋았던 적이 있다.
이제는 그런 걸 기억하는 내가 싫었다.
“계약서 마지막 확인만 부탁드릴게요.”
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계약 조건.
관리비.
입주일.
옵션 확인.
차례로 넘기던 손이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소유자 대리인.
강태준.
한동안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집 네 거야?”
태준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내가 관리하는 집이야.”
“그게 그거잖아.”
“정확히는 달라.”
“장난해?”
중개인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너 일부러 그런 거야?”
태준은 나를 봤다.
“뭘.”
“내가 여기 들어오는 거 알고 있었냐고.”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대답보다 더 정확했다.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알고 있었네.”
“어제 알았어.”
“그럼 말했어야지.”
“말하면 안 들어왔을 거잖아.”
“당연하지.”
“그래서 안 했어.”
너무 태연했다.
너무 강태준답게.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잃은 게 아니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덜 화가 날지 고르는 중이었다.
결국 아무 말도 덜 화나지 않을 것 같았다.
“너 여전하네.”
“너도.”
“뭐가.”
“도망가는 거.”
목 안쪽에 그 말이 걸렸다.
나는 서류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말 조심해.”
“틀린 말은 아니잖아.”
태준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무심한 척하면서,
사람 속은 끝까지 들여다보는 눈.
저 눈이 싫었다.
나를 너무 잘 아는 것처럼 구는 눈.
아직도 내가 어디서 무너질지 아는 사람처럼.
“계약 파기하고 싶으면 해.”
그가 낮게 말했다.
“위약금은 내가 처리하지.”
그 말이 더 기분 나빴다.
마치 내가 도망칠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그리고 도망쳐도 된다고 말하는 척하면서,
내가 도망치지 못할 것도 아는 사람 같아서.
나는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이 집을 포기할 수 있을까.
예전 집은 오늘 비워야 했다.
짐은 이미 도착하고 있었다.
회사 근처에 이만한 조건의 집을 다시 구하기도 어려웠다.
태준은 그걸 알고 있었다.
아마 처음부터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게 제일 싫었다.
내가 선택한 집이라고 믿었던 곳에,
그가 이미 서 있었다는 게.
나는 천천히 펜을 들었다.
“안 나가.”
태준의 눈매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여기서 살 거야.”
“…….”
“그러니까 네가 신경 꺼.”
나는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한서윤.
글씨가 평소보다 조금 날카로웠다.
중개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중개인이 돌아간 뒤,
집 안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공간이 이상하게 좁아졌다.
아직 가구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집인데,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방 안이 꽉 찬 것 같았다.
예전엔 같은 공간 안의 침묵이 편했다.
각자 다른 일을 해도,
서로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침묵은 자꾸 피부 가까이에 와 닿았다.
“비밀번호 바꿔.”
태준이 먼저 말했다.
나는 바로 그를 봤다.
“말 안 해도 바꿀 거야.”
“창문 잠금장치도 확인하고.”
“그것도 할 거야.”
“욕실 환풍기는—”
“강태준.”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관리인 역할 하지 마.”
그가 나를 바라봤다.
“필요한 말만 하는 건데.”
“그게 싫다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태준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등이 식탁 모서리에 닿았다.
차가운 감각이 허리에 닿고 나서야 내가 물러났다는 걸 알았다.
태준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딱 그 거리에서.
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너 어디 갈 데 없잖아.”
그가 낮게 말했다.
“짐도 다 오고 있고,
예전 집은 오늘 비워야 하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모를 것 같았어?”
내가 뭘 숨기고 있었는지,
그는 너무 쉽게 말했다.
“너 조사했어?”
“부동산 서류 보면 알 수 있어.”
“그래서?”
“그래서 그냥 뒀어.”
“뭘.”
“네가 여기라도 들어오게.”
그 말은 이상했다.
차라리 더 노골적으로 나빴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태준은 늘 그런 식이었다.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처럼 다가와서,
마지막에는 다정한 척 빠져나갈 수 있는 말을 남긴다.
나는 그게 더 싫었다.
“착한 척하지 마.”
태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내 입술 근처에 머물렀다.
짧았다.
하지만 나는 봤다.
“착한 적 없어.”
그가 낮게 말했다.
“너한테는 특히.”
몸 안쪽에서 오래 눌러둔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밀치듯 지나쳐 현관 쪽으로 걸었다.
“나가.”
태준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비밀번호 바꿀 거니까 나가라고.”
“바꾸는 거 보고 갈게.”
“내가 어린애야?”
“그랬으면 더 쉬웠겠지.”
나는 그대로 멈췄다.
“넌 늘 괜찮은 척하다가,
꼭 제일 안 괜찮을 때 혼자 버티니까.”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바로 화가 났다.
정확한 말은 가끔 틀린 말보다 더 잔인하다.
특히 그걸,
강태준이 할 때는.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있어.”
“없어.”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이번엔 정말 뒤돌아봤다.
태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3년 전 마지막 날처럼.
비가 오던 밤.
끝까지 나를 붙잡지 않던 남자.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넌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잖아.
그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마디도.
그래서 나는 떠났다.
내가 틀렸다는 말도,
맞다는 말도 듣지 못한 채로.
“이제 와서 그런 말 하지 마.”
내 목소리가 내가 원한 것보다 낮게 나왔다.
태준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알았어.”
그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직전,
잠깐 멈춘 그가 낮게 말했다.
“한서윤.”
나는 싫은데도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아직도 너무 익숙해서.
“여기서 사는 동안.”
“…….”
“나 피하려고 애쓰지 마.”
내가 웃었다.
웃음이 예쁘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태준이 나를 보았다.
낮고 조용한 눈빛.
“어차피 자주 보게 될 거니까.”
문이 닫혔다.
철컥.
도어락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 집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빈집이어야 하는 공간 안에서,
자꾸만 그 남자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제야 알았다.
이 집은 내가 고른 곳이지만,
내가 완전히 피해서 들어온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났다고 믿었던 감정이
다시 열을 올리는 순간들을 담아보려 합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오늘 태준에게서 새로 알게 된 건 두 가지였다.포도맛 젤리가 하나뿐이었다는 것.그리고 오후 회의가 길었다는 것.하나는 어제의 일이었고,하나는 오늘의 일이었다.이상하게도 지금 더 오래 남는 건두 번째 쪽이었다.태준이 오늘 뭘 했는지내가 궁금했다는 사실.예전에는 너무 가까워서서로의 하루를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헤어진 뒤에는모르는 게 당연해졌다.그리고 오늘은 처음으로그 사이 어딘가에서 그의 하루를 물었다.알아야 해서가 아니라,그냥 궁금해서.나는 화면을 껐다.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끄러 가다가식탁을 한 번 돌아봤다.작게 접힌 젤리 봉지가 있었다.안에는 포도맛 하나가 남아 있었다.오늘 나눈 말들은젤리처럼 달지는 않았다.회의가 길었다는 말.문구 하나를 끝냈다는 말.잘됐다는 말.좋았다는 말.그리고,그냥 궁금했다는 말.그런데 이상하게그 평범한 말들이 더 오래 남았다.나는 마지막 젤리를 먹지 않았다.내일 아침에도 보일 자리에서봉지는 조용히 그대로 있었다.⸻【서윤의 기억 28】[네가 골랐잖아.]태준의 메시지를 보고 있으니예전 일이 하나 떠올랐다.퇴근이 늦었던 어느 평일 밤.태준의 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배가 부르다면서도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뭐 찾아?”소파에 앉아 있던 태준이 물었다.“단 거.”“아까 배부르다며.”“밥 배랑 디저트 배는 다르잖아.”태준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냉장고 안쪽에 작은 디저트 두 개가 있었다.하나는 초콜릿,하나는 커피 맛.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커피 맛을 꺼냈다.“이거 먹어도 돼?”“응.”너무 바로 대답해서나는 별생각 없이 뚜껑을 열었다.작은 숟가락을 들고 소파로 돌아가태준 옆에 앉았다.한입 먹자 생각보다 맛있었다.“이거 맛있다.”“그치.”“너 먹어봤어?”“응.”“이거 자주 먹어?”“가끔.”나는 두어 입을 더 먹다가문득 태준을 봤다.“잠깐.”“왜.”“너 이거 좋아하지?”태준이 나를 봤다.“응.”“초콜릿보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대화는 거기서 끝난 것 같았다.젤리를 하나 더 먹었다.달았다.그런데 이상하게 지금 마음에 남아 있는 건포도맛보다 태준이 보낸 짧은 말들이었다.네가 골랐잖아.또 사면 돼.그래.전부 별것 없는 말이었다.나는 봉지 안에 손을 넣다가 멈췄다.휴대폰을 다시 집었다.보낼 말이 있어서 든 건 아니었다.그런데 화면을 켜자아까부터 하나 궁금했던 게 떠올랐다.젤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나는 입력창에 문장을 썼다.[오늘은 일 어땠어?]쓰고도 바로 보내지 않았다.태준의 일이 어땠는지내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오늘 어디에 있었는지,무슨 일을 했는지,몇 시에 끝났는지.그런 걸 확인할 사이도 아니었다.그런데 궁금했다.이유라고 할 만한 건 그것뿐이었다.나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오늘은 일 어땠어?]젤리 맛을 물었을 때보다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조금 뒤 화면이 켜졌다.[괜찮았어.]곧 한 줄이 더 왔다.[오후 회의가 좀 길었고.]나는 그 문장을 읽었다.태준의 오늘 오후에회의 하나가 있었다.조금 전까지는 몰랐던 일.이제는 알게 된 일.잠시 후 다시 메시지가 왔다.[너는?]나는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고 답장을 썼다.[나도 그냥.]보내려다가 멈추고 한 줄을 더 붙였다.[수정하던 문구 하나 오늘 끝냈어.]답장은 금방 왔다.[잘됐네.]나는 웃었다.[계속 마음에 안 들었거든.][끝났으면 됐지.]짧은 답을 보며오늘 오후 내내 붙들고 있던 문장을 떠올렸다.정말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누군가에게 말하고 나니 하루의 한 부분이 되는 기분이었다.나는 다시 물었다.[너 회의는 잘 끝났어?][응.]그리고,[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 끝나긴 했어.][그럼 다행이네.]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서로 다른 곳에서각자 다른 하루를 보냈다.나는 문구 하나를 붙잡고 있었고,태준은 긴 회의실에 있었을 것이다.아침부터 저녁까지그걸 서로 몰랐다.그리고 지금은 조금 알았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식탁 위의 포도맛 젤리 봉지를 한 번 봤다.어젯밤 태준에게 받아온 것.몇 개 먹고 입구를 대충 접어둔 채그대로 놓여 있었다.가방을 챙기다가 잠깐 손이 갔다.회사에 가져갈까.봉지를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다.저녁에 돌아와 먹으면 됐다.나는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문을 열기 직전,괜히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식탁 위에 작은 보라색 봉지가 보였다.그대로 두고 나왔다.⸻저녁에 돌아왔을 때도젤리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외투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손을 씻었다.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꺼내간단히 저녁을 먹었다.식탁 한쪽에는 계속 젤리 봉지가 있었다.밥을 먹는 동안에는 건드리지 않았다.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돌아와서야봉지를 가까이 끌어왔다.바스락.작은 소리가 났다.어제 로비에서 태준에게 처음 받았을 때도이런 소리가 났다.열린 택배 상자.여러 색으로 섞여 있던 봉지들.뭐가 제일 맛있냐고 물었을 때태준은 포도라고 했다.그래서 나는 별 고민 없이 포도를 골랐다.봉지에서 젤리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어제와 같은 맛이었다.포도 향이 먼저 나고,조금 뒤 단맛이 퍼졌다.씹으면서 휴대폰을 집었다.메신저를 열자 태준의 이름이 위쪽에 있었다.강태준.어젯밤 마지막 대화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포도맛 맛있네.][다행이네.]그게 끝이었다.나는 화면을 보다가 입력창을 눌렀다.[너는 뭐 먹었어?]보내고 나서 젤리 하나를 더 꺼냈다.정말 별것 아닌 질문이었다.어제 산 젤리 중무슨 맛을 먹었냐는 말.그래서인지 보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답장이 왔다.[레몬.]나는 봉지 안을 내려다봤다.[포도는?]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포도맛은 하나뿐이었어.]씹고 있던 젤리가 멈췄다.나는 화면을 다시 봤다.[하나뿐이었어?][응.]그리고 한 줄이 더 왔다.[네가 가져간 게 그거야.]나는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내려다봤다.보라색 작은 봉지.어
나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포도맛 맛있네.]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다행이네.]나는 웃었다.그 뒤에 더 오는 말은 없었다.나도 더 쓰지 않았다.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화면이 꺼지기 직전까지강태준이라는 이름이 보였다.나는 옆에 놓인 젤리 봉지를 한번 건드렸다.바스락.아침의 빈 칸은 그대로였다.그런데 오늘 하루에는새로 남은 것들이 있었다.내가 먼저 눌러본 이름.태준의 손에서 받아온 작은 봉지.그리고 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포도맛 젤리 몇 개.나는 봉지를 치우지 않았다.내일 아침에도아마 식탁 위에서 보게 될 것 같았다.⸻【태준의 속마음 40】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서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혹시 너 출근했어?]화면을 한 번 더 봤다.서윤이 먼저 물었다.내가 어디 있는지.그 사실 하나만으로대답을 쓰는 손이 조금 느려졌다.[아직. 지금 엘리베이터 앞이야.]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한 줄을 더 보냈다.[왜? 무슨 일 있어?]답장은 금방 왔다.[아니. 편의점 들렀는데 저당 라떼가 1+1이더라.]그리고 잠시 뒤.[나 두 개는 많아서. 너 마실래?]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1+1.예전에는 이런 일이 많았다.하나를 사면 하나가 더 생기는 날.두 개 묶음이 더 싼 날.같은 걸 두 개 사야 하는 날.그럴 때마다 굳이 묻지 않았다.하나는 서윤 것.하나는 내 것.누가 먼저 집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두 개가 생기면자연스럽게 하나씩 나눠 들었다.그게 너무 당연했던 때가 있었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응. 마실게.]편의점 앞에 서 있는 서윤을 봤을 때손에는 정말 같은 라떼가 두 병 있었다.그중 하나가 내 손으로 왔다.1+1이라서 생긴 한 병이라고 했다.그래도 좋았다.많은 사람 중에그 한 병을 줄 사람으로 내가 떠올랐다는 게.그래서 바로 마시지 않았다.아까워서라기보다는조금 더 들고 있고 싶었다.서윤이 물었다.“안 마셔?”“좀 있다가.”“왜?”나는 손에
태준이 상자 안을 보며 물었다.“하나 가져갈래?”“그래도 돼?”“많아.”나는 다시 상자 안을 봤다.“그럼 포도.”태준이 작은 포도맛 봉지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나는 손바닥을 펴서 받았다.가벼웠다.안에서 젤리가 움직이며 바스락 소리가 났다.“고마워.”“응.”아침에는 내가 라떼를 건넸고,저녁에는 태준이 젤리를 건넸다.계산해서 맞춘 것도 아닌데하루의 양쪽 끝에 하나씩 놓인 게 조금 웃겼다.나는 봉지를 손에 쥔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문이 열리고 우리는 함께 탔다.태준은 상자를 들고,나는 작은 젤리 봉지를 들고 있었다.거울 같은 문에 그 모습이 비쳤다.나는 입가에 웃음이 나는 걸 느꼈다.태준이 물었다.“왜 웃어?”“그냥.”“뭔데?”나는 손에 든 봉지를 한번 들어 보였다.“아침에는 라떼였는데.”태준이 내 손을 봤다.“그러네.”“저녁에는 젤리네.”“응.”그걸로 됐다.굳이 뜻을 더 붙이지 않아도오늘 하루가 조금 재미있어진 것 같았다.엘리베이터가 태준의 층에서 멈췄다.문이 열렸다.태준이 내리다가 돌아봤다.“포도맛 괜찮을 거야.”“먹어보고.”“그래.”“너도 잘 들어가.”“응. 너도.”태준이 내렸다.문이 닫혔다.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가 비었다.나는 그 자리를 잠깐 보다가손에 든 젤리를 내려다봤다.사람은 내려갔는데그가 건넨 건 내 손에 남아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였다.작은 봉지 안에서 젤리가 한 번 흔들렸다.바스락.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집에 들어가자 센서등이 켜졌다.나는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젤리 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외투를 벗고 손을 씻으러 갔다가주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냉장고를 열었다.아침에 봤던 문쪽 칸이 그대로 비어 있었다.라떼를 두 병 샀지만하나는 내가 마셨고,하나는 태준에게 줬다.결국 그 자리는 그대로였다.나는 물병을 꺼내고 문을 닫았다.아침에는 이상하게 눈에 걸렸던 빈 칸이지금은 별로 허전해 보
나는 손에 든 병을 한번 흔들었다.“나도 해보는 중이야.”말하고 나서야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태준이 나를 봤다.“뭘?”나는 잠시 생각했다.정확히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생각났다고 해서 모른 척하지 않는 것.주고 싶은 게 있으면 괜히 이유부터 찾지 않는 것.그런 것들.“그냥.”나는 앞을 보며 말했다.“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거.”태준은 잠깐 말이 없었다.“그래.”조금 뒤에 그가 덧붙였다.“그랬으면 좋겠어.”나는 옆을 봤다.태준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그 말을 하고도 나를 살피지 않았다.나는 다시 길을 봤다.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내가 무엇을 해보는 중인지전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오늘 아침에는 라떼 하나를 건넸고,태준의 이름을 먼저 눌렀고,지금은 같이 걷고 있었다.그 정도면 충분했다.횡단보도 앞에서 멈췄다.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태준이 들고 있던 라떼 병을 봤다.내가 조금 전에 건넨 것.별것 아닌데그의 손에 들려 있으니 괜히 한 번 더 보게 됐다.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사람들이 움직였다.우리도 함께 길을 건넜다.역 입구가 가까워질수록아침의 짧은 시간이 끝나가는 게 느껴졌다.매번 비슷한 곳에서 헤어지는데도오늘은 조금 달랐다.우연히 만난 아침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았다.내가 먼저 태준에게 연락했고,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고,그렇게 여기까지 같이 걸었다.역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태준도 따라 멈췄다.“여기서 가면 되지?”“응.”나는 태준의 손에 든 라떼를 다시 한번 봤다.“진짜 천천히 마시겠네.”태준이 웃었다.“그러려고.”나도 웃음이 났다.몇 초쯤 그대로 서 있었다.아까 했던 말이 다시 마음에 남았다.나도 해보는 중이야.괜히 너무 많은 걸 말한 건 아닐까 싶다가도,이번에는 지우고 싶지 않았다.태준이 그 말을 크게 만들지 않았으니까.나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다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