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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같은 집, 같은 밤

Author: 윤미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8 19:09:48

새벽 세 시였다.

나는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새 집은 조용했다.

조용한데, 편하지는 않았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어딘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

벽 너머로 아주 희미하게 들리는 배관 소리.

낯선 집은 가끔 너무 많은 소리를 낸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

자꾸 누가 있는 것처럼.

나는 침대 위에서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꿨다.

베개가 낯설고,

이불 냄새도 낯설고,

창밖으로 들어오는 불빛도 낯설었다.

그런데 제일 낯선 건 집이 아니었다.

내가 아직도 강태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사는 동안.

나 피하려고 애쓰지 마.

미친 소리.

나는 베개 위로 얼굴을 묻었다.

분명 끝난 관계였다.

끝내기로 한 것도 나였고,

떠난 것도 나였다.

3년 동안 나는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 척 살아왔다.

아니.

정말 후회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준을 다시 본 순간부터 그 믿음이 자꾸 헐거워졌다.

내가 고른 새 집.

내가 다시 시작하려던 공간.

내가 아무도 모르게 숨으려고 했던 자리.

그 안에 그 남자가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목이 말랐다.

물이라도 마시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주방으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은 거의 비어 있었다.

생수 몇 병.

편의점에서 급하게 사온 샐러드.

뜯지도 않은 우유.

나는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차가운 병 표면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 순간.

띠릭.

현관 쪽에서 도어락 소리가 났다.

몸이 먼저 멈췄다.

나는 물병을 쥔 채 현관을 바라봤다.

이 시간에?

잠깐, 내가 문을 제대로 잠갔나.

아니.

잠갔다.

분명 잠갔다.

띠리릭.

이번엔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목소리가 먼저 나와야 했는데,

생각보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현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강태준이었다.

검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한 손에는 카드키를 들고 있었다.

그도 나를 보자 잠깐 멈췄다.

“…아.”

그 짧은 반응이 더 기가 막혔다.

아?

지금 이 시간에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와놓고.

나는 물병을 더 세게 쥐었다.

“너 왜 들어와.”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갔다.

태준은 손에 든 카드키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관리용 마스터키.”

“그걸 왜 네가 갖고 있는데.”

“내가 관리하는 집이니까.”

“미쳤어?”

“환풍기 체크 때문에 왔어.”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새벽 세 시에?”

태준은 현관 안쪽에 멈춰 선 채 낮게 말했다.

“낮부터 공사 들어가.”

“그럼 낮에 오면 되잖아.”

“낮에는 사람이 들락거릴 거고.”

“그게 지금 네가 새벽에 들어올 이유가 돼?”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앞으로는 들어오기 전에 연락해.”

“알았어.”

너무 순순했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예전의 태준은 이런 식이었다.

먼저 선을 넘고,

내가 화내면 조용히 인정한다.

그런데 인정한다고 해서 넘었던 선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생수병 뚜껑을 열었다.

물이 입안으로 들어왔지만, 목이 풀리지는 않았다.

태준은 현관 근처에서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벽면을 살폈다.

“욕실 환풍기 소리 들려?”

“몰라.”

“냄새 올라오는 건 없고?”

“없어.”

“욕실 써봤어?”

“썼어.”

“물 빠짐은.”

나는 물병을 내려놓고 그를 노려봤다.

“강태준.”

그가 나를 봤다.

“너 지금 진짜 관리인처럼 굴 거야?”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게 싫다고.”

“알아.”

“아는 사람이 왜 와.”

“확인해야 해서.”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하냐고.”

태준은 잠깐 나를 바라봤다.

어두운 주방 조명 아래에서 그의 얼굴은 더 선명해 보였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손목 아래로 이어지는 긴 손가락.

너무 익숙한 부분들이 낯선 집 안에 서 있었다.

그게 제일 싫었다.

새 집인데.

다 새로워야 하는데.

이 사람만은 오래된 것처럼 들어와 있었다.

태준이 말했다.

“다른 사람 보내도 되는데.”

“그럼 보내.”

“새벽에?”

“그러니까 새벽에 오지 말라고.”

“그건 미안.”

그 말이 너무 늦게 와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들어오면 신고할 거야.”

태준의 눈이 잠깐 멈췄다.

“해도 돼.”

“장난해?”

“장난 아니야.”

그는 낮게 말했다.

“네가 불편하면, 그렇게 해도 돼.”

나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나오지.

예전 같으면 더 무심하게 굴었을 것이다.

괜찮은 척,

내가 예민한 척,

자기는 필요한 일을 한 것뿐이라는 얼굴로.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나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다 끝났으면 가.”

“아직 안 끝났어.”

“그럼 빨리 끝내.”

태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주방에 선 채 그 뒷모습을 봤다.

키가 큰 사람은 낯선 집에서도 공간을 너무 쉽게 차지한다.

태준은 예전에도 그랬다.

어디에 있든,

자기 자리를 너무 빨리 만들었다.

내 방에서도.

내 하루에서도.

내 안에서도.

나는 고개를 돌렸다.

욕실에서 환풍기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낮은 기계음.

태준은 잠깐 그 소리를 듣는 듯했다.

나는 물병 뚜껑을 닫았다.

손이 조금 젖어 있었다.

“너 아직도 밤에 찬물 마셔?”

욕실 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왔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그걸 왜 기억해.”

태준이 욕실 문가에 서서 나를 봤다.

“기억나니까.”

간단하게 말하지 마.

그런 말은 그렇게 쉽게 하지 마.

너는 늘 그랬다.

내가 밤마다 찬물을 찾는 거.

커피 마시면 잠을 못 자는 거.

비 오는 날 두통이 심해지는 거.

잠이 안 오면 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거.

그런 쓸데없이 작은 것들은 너무 잘 기억하면서,

가장 중요한 밤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떠나던 그 밤에도.

나는 물병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런 거 기억하는 척하지 마.”

“척 아니야.”

“그럼 더 나빠.”

태준이 잠깐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 침묵이 싫어서 먼저 등을 돌렸다.

“나 방에 들어갈 거야. 다 끝나면 그냥 나가.”

그 순간이었다.

발목이 캐리어 바퀴에 걸렸다.

아직 풀지도 못한 짐들이 거실 바닥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아—”

넘어지기 직전,

강한 손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태준과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가슴께에 닿은 어깨.

셔츠 섬유 냄새.

목 아래로 내려앉는 낮은 숨.

나는 한 박자 늦게 내 손을 봤다.

내 손끝이 그의 셔츠를 움켜쥐고 있었다.

내가 잡았다.

그게 더 싫었다.

태준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밀어내지도,

바로 놓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내가 중심을 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더 위험했다.

너무 가까워서.

너무 조용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준의 눈과 마주쳤다.

예전에도 저 눈을 알았다.

키스하기 직전.

붙잡고 싶을 때.

말하지 않고 참을 때.

그런 순간마다 그는 이렇게 나를 봤다.

검고,

조용하고,

끝까지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 눈으로.

나는 숨을 고르지 못한 채 말했다.

“놔.”

태준은 바로 놓지 않았다.

손끝에 아주 조금 힘이 남아 있었다.

그가 낮게 물었다.

“다쳤어?”

그 말투가 너무 예전 같았다.

화가 나야 하는데,

잠깐 다른 것이 먼저 올라왔다.

그리움은 아니었다.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몸이 너무 빨리 기억했다.

나는 그의 셔츠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안 다쳤으니까 놔.”

이번엔 태준이 손을 풀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떨어져 나와도 체온은 남았다.

팔에.

어깨에.

내가 잡았던 손끝에.

나는 그 감각이 싫어서 팔을 문질렀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야?”

태준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람 흔드는 거.”

“내가?”

“그래. 너.”

태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웃었다.

입꼬리만 조금 움직였다.

그건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의 웃음.

“한서윤.”

“…왜.”

“흔들리는 건 너지.”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아니고.”

순간 말이 끊겼다.

반박이 바로 안 나왔다.

그게 더 화가 났다.

내가 흔들렸다는 걸,

그가 너무 빨리 알아챘다는 게.

그리고 내가 정말 흔들렸다는 게.

태준은 한 걸음 가까워졌다.

나는 물러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몸이 먼저 긴장했다.

그걸 그가 또 봤을 것이다.

“너 아직도 그래.”

“뭐가.”

“거짓말 못 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쳤다.

왜 아직도 이 남자 앞에서는 감정이 이렇게 쉽게 들킬까.

“착각하지 마.”

나는 애써 목소리를 낮췄다.

“난 그냥 불쾌한 거야.”

“그래.”

“네가 자꾸 선 넘으니까.”

태준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되물었다.

“내가?”

그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내려갔다.

내 손목.

어깨.

입술.

닿지도 않았는데 닿은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

“선 넘은 건 아직 아닌데.”

그 말이 너무 가까웠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태준이 지금 일부러 이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밀어내는 말이 한 박자 늦었다.

그게 제일 싫었다.

나는 결국 시선을 피했다.

“…나가.”

이번엔 태준도 더 다가오지 않았다.

잠시 나를 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그는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봤다.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

카드키를 쥔 손가락.

문고리를 잡기 직전에 아주 잠깐 멈추는 습관.

다 그대로였다.

그가 문을 열기 전,

나를 부르지 않고 말했다.

“비밀번호 바꿔.”

“말 안 해도 해.”

“마스터키도 회수해둘게.”

나는 그를 봤다.

그가 나를 돌아봤다.

“네가 불편해하니까.”

그 말은 너무 늦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준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엔 아주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서윤아.”

나는 그 호칭에 바로 반응하고 말았다.

헤어진 뒤 처음이었다.

그가 나를 그렇게 부른 건.

싫어야 하는데,

몸이 먼저 멈췄다.

태준은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너 잠 못 자는 거.”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때문인 건 맞네.”

철컥.

문이 닫혔다.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조용한 새벽이었다.

조금 전까지 낯설게 들리던 냉장고 소리도,

벽 너머 물소리도,

이제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대신 팔에 남은 손의 감각만 또렷했다.

그가 잡았던 자리.

내가 잡았던 셔츠.

그리고 그 말.

선 넘은 건 아직 아닌데.

나는 물병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목이 마른 줄 알았는데,

물을 마셔도 아무 소용 없을 것 같았다.

새 집의 밤은 길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밤 안에

강태준이 너무 쉽게 들어와 있었다.

⸻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집, 같은 밤.

멀어졌다고 믿었던 거리가

다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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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3시 17분.휴대폰 화면이 켜졌다.[강태준]하던 일을 멈추고메시지를 열었다.[니트는 다 말랐어?]검은 니트.어젯밤 손빨래를 하고건조대 위에 펼쳐둔 채 나왔다.아침에 만져봤을 때도소매 끝은 아직 조금 축축했다.[아침엔 아직 좀 축축했어.]잠시 뒤 답장이 왔다.[저녁이면 마르겠다.][아마.]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짧은 대화였다.다시 모니터를 보려다가어젯밤 쓰다 지운 문장이 잠깐 떠올랐다.[어제 나도 좋았어.]나는 화면을 끄고다시 하던 일을 했다.⸻퇴근하고 역을 나왔을 때는이미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비는 오지 않았지만공기가 조금 눅눅했다.나는 가방끈을 고쳐 잡고오피스텔 쪽으로 걸었다.하루 종일 앉아 있었더니어깨가 뻐근했다.횡단보도를 건너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멀리서는 몰랐는데가까워지자 태준이었다.태준도 나를 봤다.“이제 와?”“응. 조금 늦었어.”우리는 자연스럽게같은 방향으로 걸었다.“어디 갔다 와?”“저녁 먹고. 집에 먹을 게 없어서.”“장 봐.”“귀찮아.”“그러다 또 편의점 가지.”태준이 웃었다.“오늘은 안 갔어.”“잘했네.”말하고 나서둘 다 잠깐 웃었다.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그 말 이제 네 거 됐네.”“원래 내 말 아니었어?”“아닌데. 내 건데.”“언제부터?”“몰라.”그런 얘기를 하면서골목을 천천히 걸었다.별것 아닌 말들이었다.그래서 편했다.오피스텔 건물이 보일 때쯤태준이 나를 한번 봤다.“피곤해?”나는 그를 돌아봤다.“티 나?”“조금. 많이 피곤해 보이는 건 아니고.”나는 앞을 보며 걸었다.“너는 그런 거 진짜 잘 본다.”태준이 나를 한번 봤다.“사람 피곤한 거.”“얼굴 보면 보이잖아.”“나는 잘 모르겠던데.”“너는 네 얼굴을 못 보니까.”“그런가.”몇 걸음 더 갔다.그러다 문득예전 생각이 났다.“예전에도 그랬잖아. 내가 피곤한 거 먼저 알고, 기분 안 좋은 것도 알아보고

  • 미열주의   266화. 접힌 온도, 남겨둔 말 (2)

    옷을 갈아입고검은 니트를 들고 욕실로 갔다.세면대에 미지근한 물을 받고세제를 조금 풀었다.니트를 물에 담갔다가손바닥으로 천천히 눌렀다.세탁기에 넣지 않은 건괜히 늘어날까 봐서였다.몇 번 헹군 뒤마른 수건 사이에 넣고 눌러 물기를 뺐다.젖은 니트는 생각보다 무거웠다.나는 거실에 작은 건조대를 펴고그 위에 니트를 평평하게 올려두었다.소매를 펴고,목 부분도 한번 만졌다.아까까지 세탁실에 놓여 있던 옷이이제 내 집 안에 있었다.별일 아닌데하루가 조금 길게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씻고 나오다욕실에 걸린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태준이 접었던 수건.이미 한번 펼쳐 썼으니모양은 더 흐트러져 있었다.나는 그걸 보다가조금 웃었다.수건 하나가 뭐라고.그런데도 태준이 접던 손이 떠올랐다.모서리가 조금 안 맞던 것까지.나는 수건을 욕실에 걸어두고식탁으로 돌아왔다.휴대폰이 놓여 있었다.태준과의 대화창을 열었다.[찾았어.][다행이네.]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입력창을 눌렀다.한참 빈칸만 보고 있다가문장을 썼다.[어제 나도 좋았어.]손가락이 보내기 버튼 가까이 갔다가 멈췄다.문장을 다시 읽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맞는 말이었다.그래서 쉽게 보내지 못했다.나는 화면을 그대로 둔 채잠깐 식탁에 앉아 있었다.어제 태준이 했던 말은이미 내 쪽으로 왔다.나도 좋았어.나는 그걸 들었고,오늘까지 몇 번이나 떠올렸다.내 대답은 아직내 안에만 있었다.그렇다고 없는 말은 아니었다.나는 결국 문장을 지웠다.휴대폰을 내려놓고거실 쪽을 봤다.건조대 위의 검은 니트가조용히 펼쳐져 있었다.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내일 아침에도덜 말라 있을 것 같았다.나는 소매 끝을 한번 만져보고손을 뗐다.조금 더 두면 된다.다 마를 때까지.말도 그랬다.나도 좋았어.오늘은 보내지 않았다.그렇다고모른 척하지도 않았다.그 말은 여전히내 안에 남아 있었다.⸻【서윤의 기억 30】예전에

  • 미열주의   265화. 접힌 온도, 남겨둔 말 (1)

    다음 날 아침,세수를 하고 욕실 선반에 손을 뻗었다.수건 몇 장이 쌓여 있었다.그중 하나가 덜 반듯했다.조금.손이 먼저 그쪽으로 갔다.어젯밤 태준이 접었던 수건이었다.집에 와서 다시 펴지 않고그대로 올려둔 것.나는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눌러 닦았다.평소 쓰던 것과 다를 것도 없었다.그런데 어젯밤의 세탁실이잠깐 같이 떠올랐다.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따뜻한 세제 냄새.나란히 서서 수건을 접던 손.그리고,나도 좋았어.나는 수건을 얼굴에서 내렸다.태준이 그렇게 말했을 때나는 겨우 한마디 했다.응.그때는 그게 전부였다.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나도 좋다고 말할 수 있었다.분리수거가 끝난 뒤에도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던 것도 나였고,그 몇 분이 다음 날까지 남아 있었던 것도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건응, 하나였다.지금 와서 생각하니조금 아쉬웠다.나는 수건을 다시 걸어두고가방을 챙겼다.옷장을 열었다가손이 잠깐 멈췄다.검은 니트.나는 옷장 안을 한번 더 봤다.없었다.의자 위에도,세탁 바구니 안에도 없었다.그제야 어젯밤 세탁실이 떠올랐다.셔츠와 수건을 세탁기에 넣으면서따로 빼두었던 검은 니트.접이식 테이블 한쪽.그리고 그대로 나왔다.“아.”시간을 확인했다.다시 내려가기에는 조금 애매했다.퇴근하고 찾으면 되겠지.태준이 접어준 수건은 챙겨왔으면서정작 내 옷을 두고 왔다.나는 옷장 문을 닫았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화면을 열었다.[나 어제 세탁실에 세탁망 두고 온 것 같아서 내려왔는데.]잠시 뒤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검은 니트 하나 있더라.][네 거 맞지?]나는 화면을 보다가아침부터 찾던 니트를 떠올렸다.[맞아.][나도 방금 생각났어.]태준의 답장이 왔다.[챙겨둘까?]잠깐 고민하다 답했다.[아니. 그냥 둬.][퇴근하고 찾아서 집에서 빨게.][응.]거기서 대화는 끝났다.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려다가다시 한번 화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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