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새벽 세 시였다.
나는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새 집은 조용했다.
조용한데, 편하지는 않았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어딘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
벽 너머로 아주 희미하게 들리는 배관 소리.
낯선 집은 가끔 너무 많은 소리를 낸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
자꾸 누가 있는 것처럼.
나는 침대 위에서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꿨다.
베개가 낯설고,
이불 냄새도 낯설고,
창밖으로 들어오는 불빛도 낯설었다.
그런데 제일 낯선 건 집이 아니었다.
내가 아직도 강태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사는 동안.
나 피하려고 애쓰지 마.
미친 소리.
나는 베개 위로 얼굴을 묻었다.
분명 끝난 관계였다.
끝내기로 한 것도 나였고,
떠난 것도 나였다.
3년 동안 나는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 척 살아왔다.
아니.
정말 후회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준을 다시 본 순간부터 그 믿음이 자꾸 헐거워졌다.
내가 고른 새 집.
내가 다시 시작하려던 공간.
내가 아무도 모르게 숨으려고 했던 자리.
그 안에 그 남자가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목이 말랐다.
물이라도 마시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주방으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은 거의 비어 있었다.
생수 몇 병.
편의점에서 급하게 사온 샐러드.
뜯지도 않은 우유.
나는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차가운 병 표면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 순간.
띠릭.
현관 쪽에서 도어락 소리가 났다.
몸이 먼저 멈췄다.
나는 물병을 쥔 채 현관을 바라봤다.
이 시간에?
잠깐, 내가 문을 제대로 잠갔나.
아니.
잠갔다.
분명 잠갔다.
띠리릭.
이번엔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목소리가 먼저 나와야 했는데,
생각보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현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강태준이었다.
검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한 손에는 카드키를 들고 있었다.
그도 나를 보자 잠깐 멈췄다.
“…아.”
그 짧은 반응이 더 기가 막혔다.
아?
지금 이 시간에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와놓고.
나는 물병을 더 세게 쥐었다.
“너 왜 들어와.”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갔다.
태준은 손에 든 카드키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관리용 마스터키.”
“그걸 왜 네가 갖고 있는데.”
“내가 관리하는 집이니까.”
“미쳤어?”
“환풍기 체크 때문에 왔어.”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새벽 세 시에?”
태준은 현관 안쪽에 멈춰 선 채 낮게 말했다.
“낮부터 공사 들어가.”
“그럼 낮에 오면 되잖아.”
“낮에는 사람이 들락거릴 거고.”
“그게 지금 네가 새벽에 들어올 이유가 돼?”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앞으로는 들어오기 전에 연락해.”
“알았어.”
너무 순순했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예전의 태준은 이런 식이었다.
먼저 선을 넘고,
내가 화내면 조용히 인정한다.
그런데 인정한다고 해서 넘었던 선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생수병 뚜껑을 열었다.
물이 입안으로 들어왔지만, 목이 풀리지는 않았다.
태준은 현관 근처에서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벽면을 살폈다.
“욕실 환풍기 소리 들려?”
“몰라.”
“냄새 올라오는 건 없고?”
“없어.”
“욕실 써봤어?”
“썼어.”
“물 빠짐은.”
나는 물병을 내려놓고 그를 노려봤다.
“강태준.”
그가 나를 봤다.
“너 지금 진짜 관리인처럼 굴 거야?”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게 싫다고.”
“알아.”
“아는 사람이 왜 와.”
“확인해야 해서.”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하냐고.”
태준은 잠깐 나를 바라봤다.
어두운 주방 조명 아래에서 그의 얼굴은 더 선명해 보였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손목 아래로 이어지는 긴 손가락.
너무 익숙한 부분들이 낯선 집 안에 서 있었다.
그게 제일 싫었다.
새 집인데.
다 새로워야 하는데.
이 사람만은 오래된 것처럼 들어와 있었다.
태준이 말했다.
“다른 사람 보내도 되는데.”
“그럼 보내.”
“새벽에?”
“그러니까 새벽에 오지 말라고.”
“그건 미안.”
그 말이 너무 늦게 와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들어오면 신고할 거야.”
태준의 눈이 잠깐 멈췄다.
“해도 돼.”
“장난해?”
“장난 아니야.”
그는 낮게 말했다.
“네가 불편하면, 그렇게 해도 돼.”
나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나오지.
예전 같으면 더 무심하게 굴었을 것이다.
괜찮은 척,
내가 예민한 척,
자기는 필요한 일을 한 것뿐이라는 얼굴로.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나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다 끝났으면 가.”
“아직 안 끝났어.”
“그럼 빨리 끝내.”
태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주방에 선 채 그 뒷모습을 봤다.
키가 큰 사람은 낯선 집에서도 공간을 너무 쉽게 차지한다.
태준은 예전에도 그랬다.
어디에 있든,
자기 자리를 너무 빨리 만들었다.
내 방에서도.
내 하루에서도.
내 안에서도.
나는 고개를 돌렸다.
욕실에서 환풍기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낮은 기계음.
태준은 잠깐 그 소리를 듣는 듯했다.
나는 물병 뚜껑을 닫았다.
손이 조금 젖어 있었다.
“너 아직도 밤에 찬물 마셔?”
욕실 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왔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그걸 왜 기억해.”
태준이 욕실 문가에 서서 나를 봤다.
“기억나니까.”
간단하게 말하지 마.
그런 말은 그렇게 쉽게 하지 마.
너는 늘 그랬다.
내가 밤마다 찬물을 찾는 거.
커피 마시면 잠을 못 자는 거.
비 오는 날 두통이 심해지는 거.
잠이 안 오면 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거.
그런 쓸데없이 작은 것들은 너무 잘 기억하면서,
가장 중요한 밤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떠나던 그 밤에도.
나는 물병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런 거 기억하는 척하지 마.”
“척 아니야.”
“그럼 더 나빠.”
태준이 잠깐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 침묵이 싫어서 먼저 등을 돌렸다.
“나 방에 들어갈 거야. 다 끝나면 그냥 나가.”
그 순간이었다.
발목이 캐리어 바퀴에 걸렸다.
아직 풀지도 못한 짐들이 거실 바닥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아—”
넘어지기 직전,
강한 손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태준과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가슴께에 닿은 어깨.
셔츠 섬유 냄새.
목 아래로 내려앉는 낮은 숨.
나는 한 박자 늦게 내 손을 봤다.
내 손끝이 그의 셔츠를 움켜쥐고 있었다.
내가 잡았다.
그게 더 싫었다.
태준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밀어내지도,
바로 놓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내가 중심을 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더 위험했다.
너무 가까워서.
너무 조용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준의 눈과 마주쳤다.
예전에도 저 눈을 알았다.
키스하기 직전.
붙잡고 싶을 때.
말하지 않고 참을 때.
그런 순간마다 그는 이렇게 나를 봤다.
검고,
조용하고,
끝까지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 눈으로.
나는 숨을 고르지 못한 채 말했다.
“놔.”
태준은 바로 놓지 않았다.
손끝에 아주 조금 힘이 남아 있었다.
그가 낮게 물었다.
“다쳤어?”
그 말투가 너무 예전 같았다.
화가 나야 하는데,
잠깐 다른 것이 먼저 올라왔다.
그리움은 아니었다.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몸이 너무 빨리 기억했다.
나는 그의 셔츠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안 다쳤으니까 놔.”
이번엔 태준이 손을 풀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떨어져 나와도 체온은 남았다.
팔에.
어깨에.
내가 잡았던 손끝에.
나는 그 감각이 싫어서 팔을 문질렀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야?”
태준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람 흔드는 거.”
“내가?”
“그래. 너.”
태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웃었다.
입꼬리만 조금 움직였다.
그건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의 웃음.
“한서윤.”
“…왜.”
“흔들리는 건 너지.”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아니고.”
순간 말이 끊겼다.
반박이 바로 안 나왔다.
그게 더 화가 났다.
내가 흔들렸다는 걸,
그가 너무 빨리 알아챘다는 게.
그리고 내가 정말 흔들렸다는 게.
태준은 한 걸음 가까워졌다.
나는 물러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몸이 먼저 긴장했다.
그걸 그가 또 봤을 것이다.
“너 아직도 그래.”
“뭐가.”
“거짓말 못 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쳤다.
왜 아직도 이 남자 앞에서는 감정이 이렇게 쉽게 들킬까.
“착각하지 마.”
나는 애써 목소리를 낮췄다.
“난 그냥 불쾌한 거야.”
“그래.”
“네가 자꾸 선 넘으니까.”
태준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되물었다.
“내가?”
그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내려갔다.
내 손목.
어깨.
입술.
닿지도 않았는데 닿은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
“선 넘은 건 아직 아닌데.”
그 말이 너무 가까웠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태준이 지금 일부러 이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밀어내는 말이 한 박자 늦었다.
그게 제일 싫었다.
나는 결국 시선을 피했다.
“…나가.”
이번엔 태준도 더 다가오지 않았다.
잠시 나를 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그는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봤다.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
카드키를 쥔 손가락.
문고리를 잡기 직전에 아주 잠깐 멈추는 습관.
다 그대로였다.
그가 문을 열기 전,
나를 부르지 않고 말했다.
“비밀번호 바꿔.”
“말 안 해도 해.”
“마스터키도 회수해둘게.”
나는 그를 봤다.
그가 나를 돌아봤다.
“네가 불편해하니까.”
그 말은 너무 늦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준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엔 아주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서윤아.”
나는 그 호칭에 바로 반응하고 말았다.
헤어진 뒤 처음이었다.
그가 나를 그렇게 부른 건.
싫어야 하는데,
몸이 먼저 멈췄다.
태준은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너 잠 못 자는 거.”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때문인 건 맞네.”
철컥.
문이 닫혔다.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조용한 새벽이었다.
조금 전까지 낯설게 들리던 냉장고 소리도,
벽 너머 물소리도,
이제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대신 팔에 남은 손의 감각만 또렷했다.
그가 잡았던 자리.
내가 잡았던 셔츠.
그리고 그 말.
선 넘은 건 아직 아닌데.
나는 물병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목이 마른 줄 알았는데,
물을 마셔도 아무 소용 없을 것 같았다.
새 집의 밤은 길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밤 안에
강태준이 너무 쉽게 들어와 있었다.
⸻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집, 같은 밤.
멀어졌다고 믿었던 거리가
다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열차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안으로 들어갔다.손잡이를 잡고 서자, 손끝에 아직 우산대의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내 손 위에 닿은 건 아니었다.그런데도 그가 잡아준 방향이 남아 있었다.몸은 참 이상하다.직접 닿지 않은 것도 기억한다.집에 도착해서 문을 잠갔다.젖은 우산을 펼쳐놓고, 코트를 벗었다.오늘은 휴대폰을 바로 들지 않았다.일부러 조금 늦췄다.손을 씻고, 물을 마시고, 머리를 묶었다.그리고 나서야 메시지를 보냈다.[들어왔어.]읽음.답은 바로 왔다.[강태준]문은?나는 웃었다.[잠갔어.][강태준]우산은?나는 잠깐 멈췄다.우산은?이 사람 진짜.[펴놨어.]읽음.답이 왔다.[강태준]잘했어.나는 화면을 보다가 답했다.[그 말은 네가 할 말 아닌 것 같은데.][강태준]그래도 하고 싶었어.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한참 입력창을 열어두고 있다가 썼다.[오늘 우산 잡은 거.]읽음.답은 없었다.기다리는 것 같았다.나는 이어서 보냈다.[기억하지 마.]보내자마자 후회했다.너무 차갑나.곧바로 태준의 답이 왔다.[강태준]그건 어려운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또.또 이런다.[그래도 너무 크게는 말고.]읽음.한참 뒤 답이 왔다.[강태준]응.잠깐.[강태준]작게 기억할게.나는 결국 웃었다.작게 기억할게.그게 말이 되나.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휴대폰을 내려놓았다.방 안은 조용했다.창밖에는 비가 여전히 내렸다.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몸보다 마음이 더.현장.유리벽.흔들린 발.멈춘 태준.잡힌 우산.싫지 않았다는 말.그중 뭐가 제일 크게 남았는지 모르겠다.아마 전부 조금씩.나는 눈을 감았다.어제보다 조금 가까워졌고,오늘도 아주 멀리 가지는 않았다.그 정도면 됐다.아직은.⸻【태준의 속마음 33】비가 오면 아직도 네가 먼저 생각난다.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신호는 빨간불이었다.차들이 지나갔다.젖은 도로 위로 헤드라이트가 길게 퍼졌다.옆에서 태준이 말했다.“아까.”“응.”“유리 안쪽에서 흔들렸을 때.”“별거 아니었어.”“알아.”“근데?”“가고 싶었어.”나는 신호등을 봤다.빨간 사람 모양이 너무 선명했다.“근데 멈췄잖아.”“네가 오지 말라고 한 것 같아서.”“손 들려다가 말았어.”“봤어.”“그런 것도 봐?”“응.”“너 진짜 피곤하겠다.”“조금.”태준은 낮게 웃었다.“근데 안 보면 더 피곤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신호가 바뀌었다.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우리는 같이 움직였다.중간쯤 갔을 때, 옆에서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며 내 우산을 스쳤다.우산이 크게 흔들렸다.몸이 살짝 밀렸다.그 순간 태준의 손이 내 우산대를 잡았다.이번엔 멈추지 않았다.손이 정확하게 우산대를 잡았고, 내 어깨에 비가 떨어지지 않게 각도를 세웠다.나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태준도 바로 손을 떼지 않았다.딱 신호를 다 건널 때까지.길을 건너고 나서야 그는 손을 놓았다.“미안.”그가 말했다.“잡아도 된다고 해서.”나는 우산 손잡이를 다시 쥐었다.심장이 좀 빠르게 뛰었다.우산인데.그냥 우산인데.“응.”내가 말했다.“그건 괜찮았어.”태준은 아주 짧게 나를 봤다.“다행이다.”“근데.”“응.”“그렇게 조심스럽게 사과하면 더 이상해.”태준은 잠깐 멈칫했다.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그럼 다음엔 안 미안하다고 할게.”“그것도 이상해.”“어렵네.”“응.”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려워.”둘 다 웃지는 않았다.그런데 공기가 아주 조금 풀렸다.지하철역 입구가 가까워졌다.이제 여기서 헤어지는 게 익숙해질 때도 됐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입구가 너무 빨리 왔다.나는 계단 앞에서 멈췄다.태준도 멈췄다.비가 우산 위에 계속 떨어졌다.“오늘.”내가 먼저 말했다.태준이 나를 봤다.“응.”“우산 잡아준 거.”말하고 나서
나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려다가 멈췄다.또 괜찮아.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도, 그 말이 먼저 떠올랐다.나는 대신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괜찮다는 뜻이기도 했고,오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태준은 멈췄다.정확히 유리문 앞에서.그가 멈추는 걸 보자, 이상하게 가슴이 내려앉았다.다행이었다.그리고 조금 미안했다.촬영은 금방 끝났다.내가 자리에서 나오자 우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아까 살짝 흔들리던데.”“괜찮아요.”말하고 나서 이번엔 그냥 웃었다.이제 이 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나 보다.태준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나를 보지 않는 척했다.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이 꺼져 있었다.그가 아무것도 안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나는 그것까지 알아차리는 내가 싫었다.촬영팀은 마지막 컷을 준비했다.전시장 안쪽의 가장 어두운 벽면.그곳은 조명이 낮게 깔려 있어서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생겼다.촬영 감독은 태준에게 말했다.“강 디렉터님, 이 컷은 직접 한 번 서주시면 안 될까요? 뒷모습만 필요해서요.”태준은 잠깐 나를 봤다.왜 나를 보지.내 허락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나는 일부러 체크리스트를 봤다.태준은 말없이 벽면 앞으로 갔다.그는 조명 아래에 섰다.검은 코트가 어둠에 거의 묻혔다.어깨선만 남고, 옆얼굴은 아주 조금 빛을 받았다.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가까이 가고 싶다는 말보다,저 사람이 왜 저렇게 외로워 보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혼자 서 있는 태준은 늘 조금 멀어 보였다.예전에도 그랬다.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이상하게 혼자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나는 그게 멋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지금은 조금 아팠다.촬영 감독이 말했다.“좋습니다. 조금만 고개 오른쪽으로.”태준이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아주 잠깐.촬영용으로 고개를 돌린 것뿐인데, 나는 괜히 들킨 사람처럼 굳었다.태준도 바로 시선을
우진이 뒤에서 말했다.“강 디렉터님, 조명 라인 먼저 확인하면 될까요?”태준은 시선을 내게서 거뒀다.“네. 오른쪽 벽면부터 보면 됩니다.”일이 시작됐다.촬영팀은 장비를 세웠고, 우리는 조명과 동선을 확인했다.나는 체크리스트를 들고 다니며 촬영 컷 순서를 맞췄다.입구 전경.중앙 벽면.패널 디테일.야간 조명 반사.외부 유리 너머 장면.태준은 촬영 감독 옆에서 조명 각도를 조정했다.그는 일할 때 말이 줄어든다.필요한 말만 하고, 쓸데없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손짓은 정확했고, 눈은 어두운 공간 안에서 이상하게 더 선명했다.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얼른 시선을 내렸다.일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반칙이다.그 사람이 나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얼굴을 할 때, 오히려 더 신경이 간다.나는 체크리스트 맨 위 항목에 표시했다.입구 전경 완료.촬영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비가 오는 덕분에 유리 너머로 번지는 빛이 좋았다.촬영 감독은 계속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비 오는 게 오히려 살렸네요.”우진이 웃었다.“저희는 힘든데 사진은 예쁘죠.”나는 유리벽 옆에 서서 화면을 확인했다.카메라 모니터 안의 공간은 실제보다 더 어둡고, 더 깊어 보였다.빛이 천천히 번지고, 벽면의 그림자가 길었다.그때 태준이 내 옆으로 왔다.가까이 오지는 않았다.딱 모니터가 같이 보일 정도.“어때.”그가 물었다.“좋아.”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나는 바로 덧붙였다.“사진.”태준이 아주 작게 웃었다.“알아.”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그 말 이제 너무 빨리 알아듣네.”“틀릴까 봐 빨리 확인하는 거야.”“그것도 웃겨.”“응.”그는 화면을 봤다.촬영 감독이 다음 컷을 준비하러 가자, 잠깐 주변이 조용해졌다.우진은 장비 쪽에 있었고, 우리는 유리벽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태준은 내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오늘 비 올 줄 알았으면.”나는 그를 봤다.“응?”“우산.”그는 잠깐 멈췄다.“잡아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금요일이 왔다.별일 없이 온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이상하게 며칠 전부터 금요일을 의식하고 있었다.야간 조명 컷 재촬영.일정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그냥 업무였다.현장에 다시 가서 조명을 켜고, 사진 몇 장 찍고, 필요한 컷 확인하고, 정리하면 끝나는 일.그런데 내 머릿속에서는 그 일정이 자꾸 다른 말로 바뀌었다.밤.비.현장.태준.나는 아침부터 괜히 바빴다.메일을 보내고, 일정표를 다시 정리하고, 촬영 체크리스트를 출력했다.이미 확인한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오타도 없고, 빠진 것도 없었다.그런데 손이 자꾸 움직였다.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났다.지금도 아는 사이.내가 한 말인데도, 그 말이 자꾸 내 쪽으로 돌아왔다.아는 사이.그건 안전한 말이었다.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말.그런데 문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었다.우리는 서로의 잠버릇까지 알았던 사람이고,말투가 바뀌는 순간도 알아차리는 사람이고,좋아하는 커피 온도와 싫어하는 침묵까지 기억하는 사람이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는 사이라고 한다.틀린 말은 아니었다.그래서 더 이상했다.점심쯤 팀장님이 내 자리로 와서 물었다.“서윤 씨, 오늘 야간 촬영 몇 시에 나가죠?”“여섯 시 반쯤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촬영은 일곱 시 반부터고요.”“강 디렉터님도 같이 가시죠?”나는 모니터를 보며 대답했다.“네. 조명 확인 때문에 현장으로 바로 오신다고 했어요.”“우진 씨도?”“네. 장비 체크 때문에 같이 갑니다.”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늦겠네요. 끝나고 바로 집에 가요. 정리는 월요일에 해도 됩니다.”“네.”“또 네 하고 밤새 정리하지 말고요.”나는 웃었다.“안 할게요.”“믿어도 되나.”“오늘은 믿으셔도 돼요.”오늘은.요즘 이 말을 너무 자주 쓴다.팀장님은 웃으며 돌아갔고, 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오늘은.오늘까지만.오늘은 괜찮은 날.오늘은 물어봐도 되는 날.오늘은 싫지 않은 날.하루 단위로 겨우 버티고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젖은 코트를 걸고 손을 씻었다.문도 잠갔다.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이번엔 조금 덜 망설였다.[들어왔어.]전송.읽음.답이 왔다.[강태준]문은?나는 웃었다.[잠갔어.][강태준]오늘은 물어봐도 괜찮은 날 맞네.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응.]잠깐 생각하다가 하나 더 썼다.[오늘은.]읽음.태준의 답은 조금 늦었다.[강태준]오늘 고마웠어.나는 화면을 보았다.고마웠어.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같이 걸어준 것.예전에는 빼라고 한 것.지금도 아는 사이라고 해준 것.전부.나는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괜찮아.그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은 그 말만 보내고 싶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입력했다.[나도.]손이 멈췄다.너무 큰가.지웠다.다시 썼다.[나도 오늘은 괜찮았어.]전송.읽음.이번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몇 초 뒤 답이 왔다.[강태준]그 말 오래 들고 있으면 안 돼?나는 한숨처럼 웃었다.진짜 이 사람.[너무 오래는 말고.][강태준]그럼 오늘까지만.나는 잠깐 화면을 보다가 답했다.[응. 오늘까지만.]읽음.태준의 답이 왔다.[강태준]잘 자.나는 조금 놀랐다.더 보내지 않았다.정말 잘 자 하나만 보냈다.나는 한참 그 문장을 보고 있었다.이제 그는 가끔 나보다 먼저 멈춘다.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나는 답했다.[잘 자.]그리고 화면을 껐다.방 안은 조용했다.창밖에는 비가 계속 내렸다.사진은 노트북 폴더 안에 있었다.이름 없는 복사본으로.그걸 아직 지우지 않았다.아마 오늘도 지우지 않을 것이다.나는 침대에 누웠다.오늘 들은 말들이 차례로 떠올랐다.예전에 아는 사이였습니다.정확한데 좀 별로였어.나도 몰라.보고 싶어서.오늘은 싫지 않아.예전에는 빼고.지금도 아는 사이.나는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아는 사이.너무 가볍고,너무 부족하고,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이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