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잠을 거의 못 잤다.
정확히는,
잠이 들었다가 계속 깼다.
눈을 감으면 자꾸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강태준의 손.
내 팔을 붙잡던 힘.
너무 가까웠던 거리.
그리고.
선 넘은 건 아직 아닌데.
미친 남자.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낮게 욕을 삼켰다.
욕을 한다고 잊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었다.
그 말은 자꾸 귓가에 남았다.
선 넘은 건 아직 아니라고.
그럼 어디까지가 선인데.
나는 이불을 걷어찼다.
아침 빛이 커튼 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일곱 시 반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슬슬 출근 준비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몸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을 못 자서인지,
그 남자 때문인지,
둘 다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오래 씻었다.
눈가가 조금 부어 있었다.
울어서가 아니었다.
안 잤으니까.
그렇게 정리하면 된다.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누르며 거울 속 나를 봤다.
괜찮아 보이려고 애쓰는 얼굴.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오자 집은 여전히 낯설었다.
짐은 대충 정리되어 있었지만,
생활의 온기는 없었다.
박스 몇 개.
아직 자리 잡지 못한 그릇들.
식탁 위에 올려둔 계약서 봉투.
싱크대 옆에 놓인 생수병.
새로 시작하려고 고른 집인데,
어딘가 남의 집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혼자 있는 집인데도 자꾸 강태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현관 앞.
주방 옆.
욕실 문가.
내 팔을 붙잡았던 자리.
나는 손목을 내려다봤다.
아무 자국도 없었다.
그런데 없는 자국이 더 신경 쓰였다.
“진짜 미쳤나 봐.”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현관 쪽에서 벨 소리가 났다.
띵동.
나는 그대로 멈췄다.
이번엔 도어락 소리가 아니었다.
벨이었다.
그래도 몸이 먼저 굳었다.
아침부터 올 사람이 없었다.
이삿짐 정리도 어제 거의 끝났고,
관리실에서 연락 온 것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인터폰 화면을 켰다.
화면 안에 강태준이 서 있었다.
검은 셔츠 차림.
한 손에는 쇼핑백.
나는 짧게 웃었다.
어이없어서.
어제 새벽에 그렇게 들어오더니,
이번엔 벨을 누른다.
참 잘했다.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나.
나는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뭐야.”
화면 속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아침.”
“뭐?”
“먹으라고.”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너 지금 장난해?”
“아니.”
“아침을 왜 네가 가져와.”
“냉장고에 물밖에 없었으니까.”
“그걸 왜 봐.”
“어제 봤으니까.”
너무 당연하다는 말투라 더 짜증이 났다.
나는 현관문을 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냥 가.”
“문 앞에 두고 갈게.”
“필요 없어.”
“그럼 버려.”
태준은 그렇게 말하고 쇼핑백을 문 옆에 내려놓았다.
나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가지 않았다.
그게 더 문제였다.
가라고 하면 갈 수 있을 텐데,
완전히 떠나지는 않고 있었다.
나는 결국 문을 열었다.
체인락은 걸어둔 채였다.
문이 조금 열리고,
그 틈으로 태준의 얼굴이 보였다.
그도 체인락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조금 나았다.
“이게 뭐 하는 건데.”
내가 말했다.
태준은 문 옆에 놓인 쇼핑백을 내려다봤다.
“아침.”
“그 말 아까 들었어.”
“토스트랑 샌드위치.”
“내가 그걸 왜 먹어.”
“안 먹어도 돼.”
“그럼 왜 가져와.”
태준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는 조용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 소리도 거의 없었다.
그 조용한 복도에서,
우리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체인락이 걸린 문.
그게 우습게도,
어제보다 안전했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
“네가 안 먹을 것 같아서.”
나는 바로 대꾸하려다 멈췄다.
정확해서였다.
나는 아마 안 먹었을 것이다.
커피도 제대로 안 마시고,
출근 준비를 하다가,
점심쯤 돼서야 속이 쓰린 걸 느꼈을 것이다.
이 사람은 그런 걸 아직도 안다.
그게 싫었다.
정확히는,
싫어야 하는데 아주 싫지만은 않은 게 더 싫었다.
“이런 거 하지 마.”
“왜.”
“헷갈리니까.”
말이 너무 빨리 나왔다.
나오고 나서야 내 입을 의심했다.
태준의 눈빛이 아주 조금 바뀌었다.
“헷갈려?”
“그 뜻 아니야.”
“넌 원래 그런 말 하고 나서 꼭 후회하더라.”
“아는 척하지 마.”
“척 아니야.”
“그럼 더 하지 마.”
태준은 조용히 나를 봤다.
그 시선이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는데,
이미 안쪽으로 들어온 것처럼.
나는 손끝으로 문을 잡았다.
“너 지금 우리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알아?”
태준은 바로 대답했다.
“알아.”
“아는데 이래?”
“알아서 이러는 거야.”
“뭐?”
“모르면 못 왔겠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런 식이다.
짧게 말하는데,
그 안에 사람을 붙잡는 데가 있다.
나는 문을 더 열지도,
닫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태준이 쇼핑백을 조금 앞으로 밀었다.
“문 안 열어도 돼.”
“…….”
“이건 그냥 두고 갈게.”
“강태준.”
“응.”
“앞으로 이런 식으로 아침 챙기지 마.”
그는 잠깐 나를 보았다.
“알았어.”
너무 쉽게 대답했다.
쉬운 대답은 믿기 어렵다.
“진짜야.”
“응.”
“응도 하지 마.”
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바로 멈추는 게 더 불편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는 내가 싫다고 해도 한 번쯤은 더 밀고 들어왔을 것이다.
지금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그는 이상하게 물러난다.
물러나는데,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이 더 오래 간다.
나는 쇼핑백을 내려다봤다.
브랜드 로고가 보였다.
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카페였다.
정확히는,
아침 회의 있는 날 자주 사 먹던 샌드위치 가게.
나는 그것까지 알아봤다는 사실이 싫어서 바로 시선을 떼었다.
“…너 아직도 이런 거 기억해?”
“기억나니까.”
“그런 걸 왜 기억하냐고.”
태준은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그 질문이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너랑 관련된 건 잘 안 잊어.”
나는 문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런 말을 아침부터 하면 안 된다.
이 남자는 아직도,
어떤 말이 어디를 건드리는지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모르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게 더 위험하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너 그런 말 쉽게 하지 마.”
“쉽게 한 적 없어.”
“나한텐 쉽게 들려.”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잠깐 복도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 틈을 견디기 싫어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태준이 낮게 말했다.
“회사 몇 시 출근.”
나는 다시 그를 봤다.
“왜.”
“태워다 주게.”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됐어.”
“차 없잖아.”
“버스 타면 돼.”
“잠 못 잤잖아.”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너는 왜 아직도 사람 숨 막히게 해?”
태준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걱정하는 건데.”
“그 걱정이 부담스럽다고.”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그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의식되는 거겠지.”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그게 더 싫었다.
문틈 사이로 그의 시선이 들어왔다.
아침 햇살이 복도 창에서 들어와 그의 어깨를 비췄다.
밤보다 밝은데,
오히려 더 피할 데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 잘 보였다.
잠이 부족한 사람처럼 조금 가라앉은 눈.
어제와 같은 셔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리 끝.
태준은 나를 보더니 낮게 말했다.
“눈 부었어.”
나는 바로 대답했다.
“안 울었어.”
“그럼 잠 못 잤네.”
“너 진짜.”
“왜.”
“사람 좀 그만 봐.”
그가 아주 작게 웃었다.
“너는 아직도 얼굴에 다 보여.”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나는 거짓말을 못 했고,
강태준은 그런 나를 너무 잘 읽었다.
그때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건 숨을 곳을 없애는 일이 됐다.
나는 문을 닫으려 했다.
“출근 준비해야 하니까 가.”
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아.”
그 호칭에 문을 닫던 손이 멈췄다.
헤어진 뒤 다시 들은 그 이름은,
아직도 나를 너무 쉽게 붙잡았다.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왜.”
태준이 나를 똑바로 봤다.
“우리 진짜 끝난 거 맞아?”
순간 복도 소리가 전부 멀어졌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태준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눈은 아니었다.
참고 있는 사람의 눈.
나는 갑자기 겁이 났다.
이 남자가 다시 가까워지는 게.
내가 또 밀려나는 게.
그리고 밀려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쪽에서 문을 완전히 닫지 못하고 있다는 게.
나는 일부러 더 차갑게 말했다.
“그걸 이제 와서 물어?”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끝났어.”
“…….”
“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체인락이 걸린 문틈 사이로,
그의 시선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
“근데 왜.”
그의 눈이 내 입술 근처에서 아주 짧게 멈췄다.
“아직도 넌 내 앞에서 그렇게 떨려.”
나는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반박해야 했다.
떨린 게 아니라고.
네가 불쾌해서 그렇다고.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렇다고.
할 말은 많았다.
그런데 어떤 말도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 침묵을 태준은 전부 봤다.
이 남자는 늘 그런 침묵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결국 문고리를 더 세게 잡았다.
“착각하지 마.”
“그랬으면 좋겠는데.”
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착각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체인락을 풀지 않았다.
문도 더 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이미 너무 가까웠다.
닫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태준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한서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그 말이 더 안쪽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그는 문틈 사이로 나를 보았다.
닫힌 것도 아니고,
열린 것도 아닌 문.
그 애매한 틈 사이에서,
그 남자는 너무 쉽게 나를 흔들고 있었다.
“우리 아직 안 끝났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나는 문을 닫아야 했다.
당장.
그런데 손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체인락이 걸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너무 가까웠다.
태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입술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끝났다고 말해야 했다.
끝났다고,
분명히,
다시 한 번.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문밖에는 태준이 있었고,
문 안에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아직 끊어내지 못한 말 하나가 남아 있었다.
우리 아직 안 끝났네.
⸻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났다고 믿었던 관계가
가장 애매한 거리에서 다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진짜 말 잘 듣네.”“오늘은.”오늘은.또 오늘은.우리는 계속 오늘만 이야기하고 있었다.내일은 모르니까.다음은 모르니까.지금 이 정도만,오늘 이 정도만.그렇게 겨우 이어가고 있었다.나는 지하철역 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태준은 따라오지 않았다.“나 갈게.”“응.”나는 몇 걸음 걷다가괜히 뒤돌아봤다.태준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왜 아직 보냐고,왜 그렇게 서 있냐고,왜 사람을 불편하게 하냐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하지만 싫지는 않았다.나는 아주 작게 손을 들었다.인사인지,그만 보라는 뜻인지,나도 모르겠다.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냥 고개만 끄덕였다.나는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역까지 가는 길에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었다.아직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당연했다.나도 아직 역에 도착하지 않았다.그런데도 확인하고 싶었다.이런 내가 너무 낯설었다.조금만.나는 어젯밤 그 말을 보냈고,오늘 하루 종일 그 말 안에서 살았다.조금만 허락한 줄 알았는데,사실은 내가 조금씩 허락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하루.말해도 무너지지 않는 거리.싫지 않다고 인정해도당장 모든 걸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나는 그걸 오늘 처음 배운 것 같았다.지하철역 입구 앞에서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나는 바로 열지 않았다.몇 초.정말 몇 초만 참았다.그리고 열었다.[강태준]* 천천히 가.나는 그 문장을 보고작게 웃었다.조심히 가도 아니고,빨리 들어가도 아니고,왜 연락 안 하냐도 아니고.천천히 가.딱 그 정도.오늘의 우리에게 맞는 말.나는 답장을 썼다.[응.]보내려다 멈췄다.또 응.나는 지우고 다시 썼다.[너도 천천히 와.]전송.읽음.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
퇴근 전,벽면 카피 최종 확인까지 끝났다.서브 카피는 그대로 확정됐다.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나는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봤다.처음 쓸 때는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힐 줄 몰랐다.그냥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현장 분위기와 맞고,메인 카피를 받쳐주고,너무 직접적이지 않아서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 안다.나는 자꾸 내 마음을 피해 쓰다가결국 내 마음이 들어간 문장을 쓰고 있었다.오래 머문 감각.다시 돌아온다.정말 싫다.정말.그런데 이제는 그 문장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팀장님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우진은 최종 파일명만 다시 확인하자고 했다.태준은 조금 뒤에서 벽을 보고 있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정확히는 모른다.하지만 아마,나와 비슷한 문장 안에 있을 것 같았다.나는 그게 조금 무서웠다.그리고 조금 덜 외로웠다.⸻건물 밖으로 나오자하늘이 흐렸다.비가 올 것 같았지만아직 내리지는 않았다.퇴근 시간이라 길에는 사람이 많았다.우진은 먼저 택시를 잡아야 한다며 인사를 했고,팀장님은 다른 업체 담당자와 통화를 하며 먼저 걸어갔다.순식간에 입구 앞에는나와 태준만 남았다.또.이런 식으로 둘만 남는 순간이요즘 너무 자주 생긴다.정말 우연인지,내가 의식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태준은 차 키를 손에 들고 있었다.나는 지하철역 방향을 한 번 봤다.그가 태워다줄까 물을까 봐먼저 말했다.“나 지하철 타고 가.”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응.”“안 물어보네.”“오늘은 안 물어보려고.”“왜.”태준은 잠깐 나를 보았다.“네가 먼저 말할 수 있게.”나는 말문이 막혔다.아.또.이런 식이다.무리하게 다가오지 않고,그 자리에 서 있다가,내가 먼저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게 싫어야 하는데싫지가 않다.나는 시선을 피했다.“그런 거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라니까.”“해보는 중이야.”“그건 또 괜찮네.”“다행이다.”태준이 낮게 말했다.
오후 확인까지 끝나고,나는 전시장 밖 복도로 나왔다.오래 서 있었더니 다리가 조금 뻐근했다.자판기 앞에서 물을 하나 뽑아뚜껑을 열었다.차가운 물이 목으로 넘어가자그제야 숨이 좀 트였다.현장 안쪽에서는 아직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나는 잠깐 벽에 등을 기댔다.오늘 하루가 길었다.어제의 조금만이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그때 복도 끝에서 태준이 나왔다.나는 바로 몸을 세웠다.태준도 나를 보고 멈췄다.우리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다.그는 다가오지 않았다.“쉬는 중이야?”그가 물었다.“응.”“물 더 필요해?”“아니.”“응.”또 응.이번엔 내가 먼저 웃었다.태준이 그걸 보고 아주 작게 웃었다.잠깐의 침묵.어색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그런데 도망치고 싶을 만큼은 아니었다.태준이 말했다.“오늘 괜찮았어?”나는 물병을 손에 쥔 채 그를 봤다.“뭐가.”“나.”그 한 글자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나.오늘의 태준.조심하는 태준.반 걸음 떨어져 있던 태준.모른다고 말하던 태준.피곤해도 하겠다고 말하던 태준.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태준은 재촉하지 않았다.나는 물병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조금.”태준의 눈이 흔들렸다.나는 괜히 덧붙였다.“괜찮았어.”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내가 더 말했다.“전부 괜찮았다는 건 아니고.”“응.”“아직 이상한 것도 있고.”“응.”“근데 오늘은.”나는 목이 조금 말랐다.“도망치고 싶진 않았어.”말하고 나서심장이 늦게 뛰었다.이건 너무 많이 말한 것 같았다.그런데 이상하게다시 주워 담고 싶지는 않았다.태준은 나를 오래 봤다.그 얼굴을 보니그가 지금 얼마나 많은 말을 참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좋다.고맙다.보고 싶었다.그런 말들이 입술까지 왔다가다시 들어가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태준은 결국 아주 낮게 말했다.“그럼 됐어.”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깜빡였다.정말,그게 다였다.그럼 됐어.묻지도 않고,더 끌어내
태준이 조용히 말했다.“어려운 거 알아.”그 말에 괜히 목이 잠겼다.예전의 태준은내가 어렵다는 걸 싫어했다.아니,싫어했다기보다 견디지 못했다.내가 복잡해질수록그는 더 단순한 답을 찾으려고 했다.잡으면 된다.말하면 된다.기다리면 된다.그런 식으로.그런데 지금의 태준은내가 어렵다는 걸 그냥 인정하고 있었다.그게 마음에 걸렸다.나는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그럼 안 피곤해?”“피곤해.”예상 못 한 대답이었다.나는 고개를 들었다.태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피곤하다고?”“응.”“근데 왜 해.”태준은 잠깐 생각했다.“안 하면 네가 더 피곤할 것 같아서.”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그 말이 너무 조용하게 들어왔다.안 하면 네가 더 피곤할 것 같아서.이 사람은 지금내가 지칠까 봐 자기가 피곤한 쪽을 고르고 있다.그게 다정해서,짜증났다.너무 늦게 다정해서.너무 늦게 배워서.그리고 지금이라도 배워서.나는 시선을 내렸다.“그런 말 하면 내가 뭐라고 해야 돼.”“몰라.”“너도 모른다는 말 자주 하네.”“요즘 진짜 몰라서.”나는 작게 웃었다.웃음이 났다.화가 나야 하는데웃음이 먼저 났다.“예전엔 다 아는 사람처럼 굴더니.”“그러게.”“진짜 짜증 났어.”“알아.”“그때는 몰랐잖아.”“응.”“지금 안다고 하면 더 짜증 나.”태준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그러고는 말했다.“그럼 지금은 안다고 말 안 할게.”나는 그를 봤다.“그건 또 왜 좀 괜찮냐.”말하고 나서 내가 먼저 당황했다.태준도 멈췄다.나는 바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일하자.”태준이 대답했다.“응.”나는 이번엔 뭐라고 하지 않았다.그 응이 조금 웃겼다.그리고 조금 편했다.⸻파일 수정이 끝날 때쯤,우진이 현장에 도착했다.그는 들어오자마자 벽면 카피를 확인했고,수정된 조명과 간격을 봤다.“좋네요.”우진이 말했다.“처음보다 훨씬 낫습니다.”나는 안도했다.“너무 어둡진 않아요?”“
현장 확인은 생각보다 길어졌다.벽면 조명 밝기,패널 높이,동선 안내 사인,관람객이 처음 마주하는 시야.확인해야 할 게 많았다.나는 설치팀과 이야기를 나눴고,태준은 조금 떨어져서 도면을 확인했다.가끔 시선이 마주쳤다.그럴 때마다 태준은 먼저 뭔가 말하려다가 멈췄다.나는 그걸 봤다.너무 잘 보였다.말하고 싶은데 참는 사람.다가오고 싶은데 멈추는 사람.그걸 보니 속이 이상했다.편해야 하는데,편하지만은 않았다.왜냐하면 태준이 참고 있다는 걸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게 나를 안심시키면서도조금 아프게 했다.내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나.아니다.그건 아니다.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다.그와 나,둘 다.나는 괜히 자료를 고쳐 잡았다.그때 태준이 가까이 다가왔다.아까보다 조금 가까웠다.그래도 너무 가깝지는 않았다.“이쪽 조명, 너무 세지 않아?”그가 물었다.나는 벽을 봤다.내가 쓴 서브 카피 위로 빛이 조금 날카롭게 떨어지고 있었다.“세네.”“낮출까?”“응. 이 문장은 너무 밝으면 이상해.”“왜.”“너무 설명하는 것 같아 보여.”태준은 내 말을 듣고 벽을 봤다.“설명하는 것.”“응.”“그럼 어느 쪽이 나아?”나는 잠깐 생각했다.“조금 덜 보이게.”“…”“근데 안 보이면 안 되고.”태준이 아주 작게 웃었다.“어렵네.”“원래 그래.”“문장이?”나는 그를 봤다.“사람이.”말하고 나서또 후회가 왔다.왜 자꾸 이런 식으로 말이 나가는지 모르겠다.업무 얘기를 하다가갑자기 사람 얘기처럼 들리는 말.정확히는,태준과 나 얘기처럼 들리는 말.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냥 나를 보았다.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했지만결국 먼저 벽을 봤다.“조명 낮추자.”“응.”그가 설치팀에 손짓했다.조명이 조금 어두워졌다.문장은 훨씬 나아졌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두 문장이 벽 위에서 조금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낮게 말했다.“이제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안쪽은 아직 반쯤 어두웠다.정식 조명이 다 켜지지 않아공간 전체가 조금 푸르게 가라앉아 있었다.설치팀 사람들이 패널 위치를 맞추고 있었고,한쪽 벽에는 메인 카피가 걸려 있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나는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그 아래에는 내가 쓴 서브 카피가 출력물로 붙어 있었다.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내 문장인데볼 때마다 남의 비밀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오래 머문 감각.다시 돌아온다.나는 정말일을 하고 있는 걸까.아니면 자꾸 내 마음을 벽에 붙이고 있는 걸까.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일찍 왔네.”태준이었다.나는 바로 돌아보지 못했다.먼저 심장이 반응했다.정말 짜증 난다.목소리 하나에 이렇게 되는 게.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태준은 검은 셔츠 위에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손에는 도면이 들려 있었고,머리는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밤에 잠을 잘 못 잤나.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그러고는 바로 지웠다.내가 왜 그걸 신경 쓰는데.“너도 일찍 왔네.”내 목소리는 다행히 멀쩡했다.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나는 그를 봤다.“또 응.”태준이 아주 작게 웃었다.“다른 말 생각 중이었어.”“뭔데.”“안녕.”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봤다.“그걸 생각해야 나와?”“요즘은 그래.”“진짜 이상해졌네.”“알아.”그 대답이 너무 태준 같아서나는 웃을 뻔했다.웃으면 안 될 것 같아서벽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웃으면 너무 티 날 것 같았다.태준은 내 옆으로 다가오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자리에 섰다.딱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거리.그 거리가 보였다.너무 또렷하게.예전의 태준은 이런 거리를 몰랐다.가까워지고 싶으면 가까워졌고,내가 물러나면 따라왔다.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그런데 지금은다가오고 싶은 사람처럼 서 있으면서도멈춰 있었다.나는 그게 고맙기도 하고,이상하게 서운하기도 했다.정말 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