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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해각
봉현욱의 그 무정한 말 한마디에, 유시연이 그나마 붙들고 있던 마지막 희망마저 마침내 툭 소리를 내며 끊어져 버렸다.

놀란 토끼처럼 사시나무 떨듯 떨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래,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그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고 혈육조차 안중에 두지 않는, 도성의 살아 있는 염라대왕이었거늘.

뱃속의 이 아이 하나로 그가 죄책감을 느낄 것이라 기대했다니, 참으로 헛된 망상이었다.

유시연은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초췌하고 창백한 작은 얼굴에 문득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봉현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잔잔한 우물처럼 고요하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그러고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몸을 돌려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봉현욱은 여리고 가녀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곁에 서 있던 소칠은 이미 넋이 나가 있었다. 현왕께 후사가 생기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구경 한번 재밌게 하는구나. 본왕이 걸상이라도 갖다 줄까, 해바라기씨나 까먹으면서 보게?”

소칠의 엉덩이에 발길질이 세게 날아들었다.

“멍청한 놈, 얼른 쫓아가지 않고 뭘 하느냐!”

“예!”

정신을 차린 소칠이 황급히 뒤쫓아 나갔다. 그러다 몇 걸음 못 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전하, 잡으면 어찌할까요?”

봉현욱은 씩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찌하냐고? 아내로 들일까? 아니면 매질을 해서 방 안에 가둬 놓을까? 매일같이 애지중지하면서 본왕의 대를 잇도록 실컷 괴롭혀 줄까? 참으로 좋은 질문이로구나!”

소칠은 그 야릇하면서도 살기 어린 목소리에서 순간 낌새를 알아채고는, 쏜살같이 자리를 떴다.

봉현욱은 그 일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은 채 훌쩍 말에 올라 거리를 내달렸다.

그는 한 무리의 귀족 자제들과 만화루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무릎 꿇은 소칠이 보였다. 그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사람을 못 찾았느냐?”

“소인이 무능한 탓입니다!”

소칠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그로서도 뜻밖이었다.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여인이 토끼보다도 빨리 달아날 줄이야. 운효위의 병력 절반을 풀어 뒤쫓게 했건만, 끝내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얼큰히 취해 있던 봉현욱의 눈빛이 그제야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운효위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자가 어찌 평범한 인물이겠는가. 그 작은 여인에게 제법 재간이 있으리라고는, 그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한밤중, 인적조차 끊긴 고요한 시각.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구정물 통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온몸에 썩은 채소 잎을 뒤집어쓰고 머리카락에 음식 찌꺼기를 잔뜩 매단 여인이 살며시 통 밖으로 기어 나왔다.

적막한 밤공기 속으로 처량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유시연이 미처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눈동자에 순간 섬뜩한 빛이 스치더니, 발끝으로 살짝 땅을 차고는 순식간에 담장 위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마치 귀신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푸른 기와지붕 위를 스치듯 내달렸다.

서슬 퍼런 칼을 든 무리가 반 시진 가까이 뒤졌으나 끝내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수색을 이어 갔다.

유시연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볏짚 더미 속에 숨어, 목에 걸린 소박한 목걸이를 힘껏 그러쥐었다.

이것은 가족이 그녀에게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가느다란 목소리와 함께 억눌린 울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떨고 있었다.

겨우 한 달 사이에,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아버지의 은혜를 입었던 절친한 벗들조차 지금은 그녀를 피하기 바빴다. 담이 무너지면 너나없이 밀어붙인다더니, 유시연은 이제야 그 말뜻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때 그녀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아부하던 자들이, 이제는 그녀를 마치 역병처럼 여기며 멀리 달아나기 바빴다.

이 순간, 그녀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예전 사부 밑에서 배울 적에, 국공부의 아씨씩이나 되는 자신에게 무공 따위 필요 없다며 오만하게 굴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저 가장 간단한 경공과 의술만을 골라 익혔다. 사부는 늘 그녀를 꾸짖으며, 타고난 재능을 헛되이 썩히고 있다고 나무랐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사부의 말이 옳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백 일 내내 붉게 피어 있을 수는 없다더니, 그토록 대단하던 가문이 이리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줄이야. 아무리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들 작은 허물 하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더욱이 그녀는 아버지처럼 청렴결백한 분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보물 지도를 숨겼느니 뇌물 착복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터무니없는 모함일 뿐이었다.

누가 퍼뜨렸는지 모를 그 헛소문 하나가 국공부를 멸문지화로 몰아넣은 것이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처럼 세상 다툼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 어찌 보물 지도 따위를 숨겨 두었겠는가. 그야말로 새빨간 모함이었다.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떠올리자, 유시연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는 듯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부모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이었고, 세 오라버니에게는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막내 누이였다. 온 가족의 애지중지 속에서 자란 그녀는 어린 공주처럼 근심 걱정 없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아왔다. 이대로만 순탄히 흘러가면 평생 행복할 줄로만 알았다. 다음 달이면 어머니가 좋은 혼처를 정해 시집갈 날만 기다리면 되었건만, 뜻하지 않게 가문에 변고가 닥치며 모든 것이 악몽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제 그녀는 명성을 잃고 가문이 풍비박산 났으며, 밖에서는 여러 무리가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상갓집 개보다도 처량한 신세였다.

이런 몰골로 그자들에게 붙잡힌다면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보물 지도를 내놓지 못하는 자신은 사내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거나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할 것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이미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유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볏짚 틈새로 새어 드는 희미한 별빛을 올려다보았다. 무감각하던 눈빛 위로 문득 서늘한 독기가 스쳤다.

그녀는 결코 이대로 운명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

봉현욱은 도자기 인형처럼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듯하던 그 여인이, 그렇게 감쪽같이 한 달이나 자취를 감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는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오히려 점점 신경이 쓰이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이제는 꿈속에서조차 그 여리고 가녀린 모습이 어른거릴 정도였다.

매달 보름이면 서태후는 백마사를 찾아 향을 피우고, 창용국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했다.

태후는 매번 자신의 못난 손자 봉현욱을 함께 데려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이 녀석이 워낙 제멋대로 굴고 다니니, 부처님 앞에서라도 참회하며 죄업을 조금이나마 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백발이 성성한 인자한 얼굴의 노부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정성스레 두 손을 모아 빌었다.

“부처님, 부디 제 손자에게 마땅한 짝을 내려 주소서.”

옆에서 건들건들한 자세로 무릎 꿇고 있던 봉현욱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태후가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그를 흘겨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되도록 드센 아이로 보내 주십시오. 저 녀석을 좀 다스릴 수 있게 말입니다. 그리해 주신다면 신녀, 수명 십 년을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봉현욱이 바닥에 엎드릴 정도로 웃어 젖혔다.

“할머님, 벌써 여든이신데, 수명을 안 줄이셔도 얼마나 더 사시겠습니까!”

서태후가 이를 바득 갈았다.

“네놈이 날 화나게만 안 한다면, 백 살까지도 끄떡없다!”

“예예, 화 안 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백 살까지 못 사시면 제 탓 하실까 무서워서요!”

봉현욱이 웃으며 서태후를 부축해 일으키고는 굽은 허리를 주물러 드렸다.

그녀를 부축해 걸어 나가는데, 서태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현아, 네가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 할미는 눈을 감아도 감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여인 하나가 불쑥 뛰어나오더니 머리에 쓰고 있던 승모를 확 벗어젖혔다. 칠흑같이 짙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와 봉현욱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둑이 터진 듯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고, 울음소리는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전하, 사랑합니다.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저, 전하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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