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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 털썩 무릎을 꿇었다.“장공주 전하, 부디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저희 마마께서는……”“소진!”유시연이 황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장공주 전하께서 그저 나와 농을 하시는 것뿐인데, 무엇을 그리 겁내느냐?”“본궁이 농을 하는 것처럼 보이느냐?”봉은희가 차갑게 웃었다.유시연은 봉현욱과 닮은 서늘한 웃음이 봉은희의 눈가에 스치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전하께서는 이 목 때문에 벌써 오래 고생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궁의 태의들도 아직 고치지 못했고요. 소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른 명의를 찾아가셔도 좋습니다.”유시연은 바닥에 주저앉은 소진을 일으켜 세운 뒤,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거기 서라.”봉은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유씨 가문 아씨는 몸집은 작아도 제법 강단이 있구나.”“소녀는 좋은 뜻으로 말씀드린 것인데, 전하께서 나쁘게 받아들이시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유시연은 기죽지 않고 담담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무엄하다! 감히 장공주 전하께 불경을 저지르느냐!”곁에 서 있던 자색 옷의 소년이 매섭게 호통쳤다.“물러서라.”봉은희가 손을 들어 소년을 제지했다.“아씨께 지필묵을 가져다드려라.”소년은 순간 멈칫했다. 장공주가 정말 유시연의 말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유시연도 더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막힘없이 처방을 써 내려갔다. 다 쓴 종이를 장공주에게 건네며 말했다.“궁의 태의에게 먼저 보여 보신 뒤 약을 지으시길 바랍니다.”봉은희는 처방을 받아 곁의 소년에게 건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람을 시켜 처방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뒤 약을 지을 생각이었다. 이 정도 경계심조차 없었다면 진작 몇 번이고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본궁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드문데, 너는 제법 특이하구나.”봉은희가 문득 흥미롭다는 듯 유시연을 바라보았다.유시연은 순간 봉현욱을 떠올리고 옅게 웃었다.“아마 전하보다 더 무서운 분을 뵌 적이 있어서겠지요.”변덕스럽고 종잡
봉은희가 몸을 돌려 별실로 들어가려던 순간, 유시연이 문득 그녀를 불러 세웠다.“장공주 전하!”“무슨 일이냐?”봉은희가 돌아보았다.“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말씀 여쭙고 싶습니다. 목이 다소 불편해 보이십니다. 소녀가 몇 해 동안 의술을 배운 적이 있어,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분들을 여러 번 뵈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번 살펴봐 드리고 싶습니다.”“네가 의술까지 할 줄 아느냐?”봉은희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국공부의 큰아씨가 도성 제일의 규수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거문고와 바둑, 서화와 시문에 두루 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의술까지 익혔을 줄은 몰랐다.“그저 조금 배운 것뿐입니다.”유시연이 겸손하게 답했다.봉은희의 날카로운 눈빛에 순간 서늘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말했다.“좋다. 그럼 한번 해보아라.”목이 이렇게 된 지도 벌써 보름 가까이 되었다. 궁의 태의들을 모조리 불러 진찰하게 했지만, 누구 하나 정확한 원인을 짚어내지 못했다.과연 이 어린 아씨에게 무슨 재주가 있는지 한번 지켜볼 생각이었다.소진은 자기네 왕비마마가 장공주 전하를 따라 추월각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마음이 급해 이마에 식은땀까지 배어났다.왕비마마가 의술까지 할 줄 아신다니, 자신은 어째서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걸까.도성에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꼽으라면, 봉현욱 다음이 바로 장공주 전하였다. 두 사람이 한배에서 난 것도 아닌데 성정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데서는 서로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왕비마마가 이 까다로운 분의 병을 고쳐 준다고 해서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물며 고치지 못한다면 무슨 트집을 잡힐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이를 어쩌면 좋을까.소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시연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왕비마마…….”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괜히 이 일에 나서지 말라는 뜻을 눈짓으로 전했다.유시연은 그런 소진에게 안심하라는 듯 미소
봉현욱은 온몸에 흰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소맷자락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튀어 있었다. 손에 쥔 삼밧줄 역시 피에 흠뻑 젖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차갑고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유시연의 곁을 스쳐 지나가던 순간, 봉현욱은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음산하면서도 어딘가 광기 어린 웃음이 걸려 있었다.말들이 휘몰아치듯 지나가며 찬바람과 먼지를 일으키자, 소진이 얼른 유시연의 앞을 막아섰다.“마마, 많이 놀라셨어요?”유시연은 멍하니 봉현욱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번지는 듯했다.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소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달랬다.“마마,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저 사람들은 모두 큰 죄를 지은 자들이라고 들었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자식까지 해치는 부모는 없잖아요. 마마 뱃속의 아이는 전하의 핏줄이니, 전하께서도 분명 귀하게 여기실 거예요. 마마께도 함부로 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알아.”유시연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봉현욱이 잔혹하고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앞에서 보고 나니 역시 적잖은 충격이 남았다.큰 죄를 지은 자들이라니.방금 끌려가던 사람은 분명 호부상서 방진명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 그를 두고 보기 드문 충신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그런 사람을 봉현욱이 저토록 가혹하게 다뤘다면……유시연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조여드는 듯했다.하지만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은 자신의 앞날조차 알 수 없는 처지였다. 남의 집안일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유시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쉰 뒤 소진의 손을 잡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안에 들어서자 청색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곧장 다가와 반갑게 맞았다.“두 분, 미리 잡아 두신 방이 있으십니까?”“있어요. 춘화각이에요.”소진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이걸 이렇게 많이 만들었으니, 꽤 힘들었겠구나.”봉현욱은 왕부의 오랜 사람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쓴 일을 은근히 비꼰 것이었다.유시연은 그 말에 담긴 놀림을 알아채고 얼른 해명했다.“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기뻐하신다면 이 정도 수고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게다가 재료는 모두 주방에서 손질했고, 완자만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봉현욱은 그저 웃었다.이 여인이 정말 제 뜻을 알아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말만 들으면 어찌나 그럴듯한지. 자신이 갑자기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제 몫 따위는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다 먹은 것 같은데, 언제까지 거기 앉아 있을 셈이냐?”봉현욱이 그녀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틈만 나면 어떻게든 자신에게 들러붙으려는 게 분명했다.유시연은 그제야 아직도 그의 품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배나 조심해라.”봉현욱은 아직 티도 나지 않는 그녀의 배를 힐끗 내려다본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어둠 속에 숨어 있던 소칠이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저 작은 것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잔꾀를 부리는군.”봉현욱이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소칠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신이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왕비마마께서 요즘은 꽤 얌전히 지내시는 듯한데요.”아예 대문 밖으로 나가지도 않으실 정도인데, 대체 뭘 더 바라시는 건지 소칠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얌전하긴 뭐가 얌전해. 기루도 겁 없이 드나들고, 틈만 나면 본왕 품에 앉으려 드는데 그게 얌전한 사람이냐?”봉현욱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칠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시선이었다.소칠은 할 말을 잃었다.소칠이 보기에는 분명 전하께서 먼저 억지로 왕비마마를 제 무릎에 앉힌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도리어 상대를 탓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그렇게
유시연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봉현욱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본왕이 못마땅한 게냐?”“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유시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짐짓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탓에 양념 한 방울이 봉현욱의 옷자락 위로 떨어졌다. 유시연은 슬쩍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닦아 주려 손을 뻗으려 했지만, 차마 손을 대지는 못했다.“뭘 그리 보고 있느냐?”봉현욱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더니, 눈빛이 묘하게 깊어졌다.“여기 앉고 싶은 게냐?”그는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역시 이 여인이 얌전히만 있을 리 없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인지 지켜볼 생각이었다.유시연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맹세코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전하, 정말 왜 이러십니까. 보는 눈도 이렇게 많은데…….”유시연이 짐짓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사람들이 있어서 부끄러웠던 것이냐?”봉현욱이 왕 집사에게 손짓하자, 그는 곧바로 뜻을 알아듣고 조 어멈과 소진을 데리고 자리를 비웠다.“이리 오너라.”봉현욱이 제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유시연은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유시연은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채, 정말 제 무릎에 앉으라는 말인지 의아해했다.봉현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제 아무도 없는데 뭘 그리 부끄러워하느냐? 여기 앉고 싶어 한 게 뻔히 보이는데.”유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대체 무엇을 보고 자신이 그의 무릎에 앉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래도 결국 마지못해 그의 무릎 위로 옮겨 앉았다. 봉현욱의 무릎에 앉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기만 했다.워낙 성정이 변덕스러운 사람이라, 언제 갑자기 심기가 틀어져 자신을 밀쳐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유시연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자, 가벼운 몸이 봉현욱의 무릎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봉현욱이 웃으며 일부러 다리를 살짝 움직이자, 유시연은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전하, 앉으십시오!”유시연이 얼른 의자를 끌어와 그의 곁에 놓았다.“전하, 오해하신 겁니다.”“내가 오해를 했다고?”봉현욱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그녀를 바라보다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를 댈지 들어볼 참이었다.유시연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하, 신첩이 오늘 이렇게 한 것은 사실 모두 전하를 위해서였습니다.”“나를 위해서?”봉현욱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는 다른 상 위에 남은 국물과 음식 찌꺼기를 훑어본 뒤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설마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인 게, 전부 나한테 네 솜씨를 보여 주려고 한 짓이라는 말이냐?”“역시 전하는 총명하십니다. 신첩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단번에 알아보셨네요.”유시연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하!”봉현욱이 차갑게 웃었다.“본왕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느냐? 결국 남은 국물이나 맛보게 하려던 것 아니냐?”“아닙니다!”유시연이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이건 제가 새로 배운 요리입니다. 전골이라고 하는데, 아직 제대로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맛이 어떨지 저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전하께 바로 올릴 수가 없었어요. 전하께서 안 계신 틈에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맛을 보게 하고, 어떤지 의견도 들어보려 했습니다. 저녁에는 다시 제대로 준비해서 전하께 올리려고 했고요.”사실 전골은 유시연이 직접 만들어 낸 음식이 아니었다. 사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사부는 늘 별난 음식을 이것저것 만들어 내곤 했는데, 하나같이 그녀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었다.봉현욱은 속으로 기가 막혔다. 말만 들으면 그럴듯하기 짝이 없었다. 저렇게 능청스럽게 둘러대는 솜씨만큼은 정말 타고난 모양이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곁에 있던 조 어멈과 소진, 왕 집사까지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유시연을 바라보았다. 자기네 왕비마마가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