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미친 폭군 길들이기
미친 폭군 길들이기
Author: 해각

제1화

Author: 해각
“제발…… 살려 주세요!”

어둠 속에서 가냘프고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돌아오는 건 조금의 동정도 없이 더욱 거세지는 광기 어린 겁탈뿐이었다.

나른하면서도 매혹적인 숨소리가 유시연의 귀에는 끝없는 절망과 공포로만 들렸다!

그녀는 몇 번이고 그를 밀쳐 내며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그때마다 무자비하게 다시 끌려 들어왔다……

어둠은 마치 악마가 쳐 놓은 그물처럼 그녀를 뒤덮으며 잠식해 들어왔고, 유시연은 절망 속에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이고 이리저리 짓눌리고 뒤틀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시달린 유시연은,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 무렵에야 비로소 사내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칼로 깎고 다듬은 듯 수려한 얼굴에 서슬 퍼렇도록 차가운 눈빛, 눈가에 붉게 박힌 매혹적인 눈물점, 방탕하면서도 조소를 머금은 듯 살짝 올라간 입꼬리까지......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유시연은 온몸이 오싹해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앞의 사내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보았다.

봉현욱. 황후의 유일한 적자로, 여섯 살에 북명국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고, 다시 창용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배운 것 하나 없는 건달로 변해 있었다.

황제는 미안한 마음에 운효위를 그에게 맡겼지만, 봉현욱은 완전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직권을 남용해 충신들을 해치며 도성 사람 누구나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그녀는 순결을 지키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울 판이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봉현욱의 핏발 선 눈동자는 실낱같이 여린 여인을 매섭게 흘겨보았다. 그 눈에서는 어느새 살기가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었다.

입맞춤 자국으로 뒤덮인 가녀린 목이 갑자기 그의 손아귀에 붙들리자, 숨이 턱 막혀 오는 압박감에 유시연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맑은 살구빛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그 여리디여린 모습은 애처로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봉현욱의 차가운 눈빛에는 조금의 동정도 없었다. 그는 손가락 끝의 굳은살로 그녀의 희고 매끄러운 살결을 짓궂게 스치듯 문질렀다.

그가 입꼬리를 서늘하게 올렸다.

“감히 본왕을 해치려 몰래 약을 쓰다니, 어떻게 죽고 싶으냐?”

매혹적인 얇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무슨 감정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유시연은 괴로운 듯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닙니다. 저는 국공부의 큰아씨입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당한 것뿐입니다…”

분명 벗과 차를 마시고 있었을 뿐인데 어쩌다 갑자기 정신을 잃었는지, 다시 눈을 떴을 땐 어째서 봉현욱의 곁에 누워 있었는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문밖에서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옥세자께서 구경거리 났다고 가 보자십니다. 유국공부가 하룻밤 새 몰살당했다고, 다들 그리로 몰려가는 중입니다……”

봉현욱은 홱 고개를 돌려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방금 들은 소식에 놀라 이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내 처절한 비명이 귓가에 울려 퍼졌고, 이불이 벌컥 걷히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고스란히 봉현욱의 눈에 들어왔다.

봉현욱은 자신의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는 미친 듯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여인을 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문가에 서서 완전히 넋이 나간 소칠은 바닥에 갈가리 찢겨 흩어진 여인의 옷가지를 흘긋 보았다가, 다시 침상 쪽으로 눈을 돌렸다. 침상에 앉아있는 봉현욱은 낯빛이 어두웠고, 온몸은 할퀸 자국투성이였다. 소칠은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전하께서 드디어 여인을 안으셨구나!

*

하룻밤 사이, 피로 물든 유국공부는 위아래 할 것 없이 살아남은 이가 하나도 없었다. 안팎으로 구경꾼들이 빼곡히 몰려들어 저마다 수군거리고 있을 때, 머리를 산발한 채 사내 옷을 입은 여인이 울부짖으며 유국공부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 돼……”

눈에 들어온 붉게 물든 참혹한 광경에 유시연의 마음은 끝없는 절망 속으로 가라앉았다. 발밑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피의 감촉만이 그녀가 아직 두 발로 서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예전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집이 지금은 차갑고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목 없는 시신들이 소름 끼치도록 흉측했다.

쿵!

유시연은 피 웅덩이 속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억누르지 못하고 터져 나온 처절한 비명은 마치 한겨울 밤 골짜기를 스치는 매서운 바람처럼 날카로웠고, 그 소리를 듣는 이들의 가슴마저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집이 사라졌다!

하룻밤 사이에 그녀는 순결을 잃었고, 모든 혈육을 잃었으며, 모든 것을 잃었다.

유시연은 도성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던 귀한 아씨 신분에서, 온 집안이 몰살당하던 밤 외간 남자와 놀아나다 목숨을 부지한 음탕한 여인으로 전락해 있었다.

한때 문전성시를 이루던 유국공부는 이제 사람의 발길마저 끊겨 쓸쓸하고 황량하기만 했다. 처량한 흰 등롱만이 찬바람 속에 처량하게 홀로 흔들렸고, 그 아래 줄지어 놓인 새까만 관 앞에는 야윈 여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유시연은 꼬박 사흘 밤낮을 울고 나서는, 더는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앞에 놓인 화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나운 불길이 노란 지전을 한 장 한 장 집어삼키며, 창백하게 야윈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영문도 없이 몰살당한 온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며, 유시연은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매 문양이 새겨진 쇠 단추가 살을 파고들었고, 뚝뚝 떨어진 핏방울이 흰 옷소매를 붉게 적시며 기이한 핏빛 꽃 한 송이를 피워냈다.

이 쇠 단추는 큰오라버니의 손에서 빼낸 것으로, 그 자객들이 남긴 유일하고 확실한 증거였다.

유시연은 그렇게 꼬박 한 달을 손에서 놓지 않고 움켜쥐고 있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유국공부의 억울함을 풀어 줄 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기다린 건 무정한 성지 한 장이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황제가 조서를 내리노라. 국공 유진당은 재해 구제 중 삼만 냥을 착복하고 뇌물을 받았으나, 폐하께서 지난날 전장에서 세운 공을 헤아려 가솔들의 죄만은 사면하되, 전 재산은 몰수하여 국고에 귀속시킨다……”

유시연은 두 눈을 부릅뜨며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닙니다! 제 아버지는 법도를 지키며 사셨습니다. 절대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기실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제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유시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들어 저택 밖으로 끌어냈다.

유시연은 자신을 국공부에서 쫓아내라 명한 사황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가슴 속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원한이 치솟았다.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무슨 자격으로 절 내쫓는 겁니까, 여긴 제 집입니다……”

유시연은 두꺼운 대문을 힘껏 두드리다가, 갑자기 속이 뒤집히는 듯한 메스꺼움이 치밀어 올랐다. 다급히 허리를 숙인 그녀는 왈칵 신물을 게워 냈다.

순간 그녀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달거리가 이미 닷새나 늦어졌다는 사실이 그제야 퍼뜩 떠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왼손을 자신의 맥 위에 가져다 댔고, 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회임이었다!

유시연은 넋이 나간 채 사흘 밤낮을 거리에서 정처 없이 떠돌다가, 결국 현왕부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높고 화려한 그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꼬박 한 시진을 서 있었다. 마침내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용기를 내어 그 문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 불을 삼키는 기린(麒麟)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인 자색 옷을 입은 사내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유시연은 그 수려하고 차가운 얼굴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전하, 부디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봉현욱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제 목숨이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무릎 꿇은 여인을 내려다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너였나?”

그날 밤의 짙고 문란했던 정경이 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차갑게 코웃음 쳤다.

“죽고 싶은 게로구나.”

그는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걸어갔다.

유시연은 황급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그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봉현욱, 당신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봉현욱이 홱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에 잠시 놀라움이 스쳤다가, 한참 만에 그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게 누구 없느냐, 낙태약 한 사발을 달여 오너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30화

    소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 털썩 무릎을 꿇었다.“장공주 전하, 부디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저희 마마께서는……”“소진!”유시연이 황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장공주 전하께서 그저 나와 농을 하시는 것뿐인데, 무엇을 그리 겁내느냐?”“본궁이 농을 하는 것처럼 보이느냐?”봉은희가 차갑게 웃었다.유시연은 봉현욱과 닮은 서늘한 웃음이 봉은희의 눈가에 스치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전하께서는 이 목 때문에 벌써 오래 고생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궁의 태의들도 아직 고치지 못했고요. 소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른 명의를 찾아가셔도 좋습니다.”유시연은 바닥에 주저앉은 소진을 일으켜 세운 뒤,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거기 서라.”봉은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유씨 가문 아씨는 몸집은 작아도 제법 강단이 있구나.”“소녀는 좋은 뜻으로 말씀드린 것인데, 전하께서 나쁘게 받아들이시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유시연은 기죽지 않고 담담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무엄하다! 감히 장공주 전하께 불경을 저지르느냐!”곁에 서 있던 자색 옷의 소년이 매섭게 호통쳤다.“물러서라.”봉은희가 손을 들어 소년을 제지했다.“아씨께 지필묵을 가져다드려라.”소년은 순간 멈칫했다. 장공주가 정말 유시연의 말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유시연도 더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막힘없이 처방을 써 내려갔다. 다 쓴 종이를 장공주에게 건네며 말했다.“궁의 태의에게 먼저 보여 보신 뒤 약을 지으시길 바랍니다.”봉은희는 처방을 받아 곁의 소년에게 건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람을 시켜 처방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뒤 약을 지을 생각이었다. 이 정도 경계심조차 없었다면 진작 몇 번이고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본궁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드문데, 너는 제법 특이하구나.”봉은희가 문득 흥미롭다는 듯 유시연을 바라보았다.유시연은 순간 봉현욱을 떠올리고 옅게 웃었다.“아마 전하보다 더 무서운 분을 뵌 적이 있어서겠지요.”변덕스럽고 종잡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29화

    봉은희가 몸을 돌려 별실로 들어가려던 순간, 유시연이 문득 그녀를 불러 세웠다.“장공주 전하!”“무슨 일이냐?”봉은희가 돌아보았다.“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말씀 여쭙고 싶습니다. 목이 다소 불편해 보이십니다. 소녀가 몇 해 동안 의술을 배운 적이 있어,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분들을 여러 번 뵈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번 살펴봐 드리고 싶습니다.”“네가 의술까지 할 줄 아느냐?”봉은희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국공부의 큰아씨가 도성 제일의 규수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거문고와 바둑, 서화와 시문에 두루 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의술까지 익혔을 줄은 몰랐다.“그저 조금 배운 것뿐입니다.”유시연이 겸손하게 답했다.봉은희의 날카로운 눈빛에 순간 서늘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말했다.“좋다. 그럼 한번 해보아라.”목이 이렇게 된 지도 벌써 보름 가까이 되었다. 궁의 태의들을 모조리 불러 진찰하게 했지만, 누구 하나 정확한 원인을 짚어내지 못했다.과연 이 어린 아씨에게 무슨 재주가 있는지 한번 지켜볼 생각이었다.소진은 자기네 왕비마마가 장공주 전하를 따라 추월각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마음이 급해 이마에 식은땀까지 배어났다.왕비마마가 의술까지 할 줄 아신다니, 자신은 어째서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걸까.도성에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꼽으라면, 봉현욱 다음이 바로 장공주 전하였다. 두 사람이 한배에서 난 것도 아닌데 성정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데서는 서로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왕비마마가 이 까다로운 분의 병을 고쳐 준다고 해서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물며 고치지 못한다면 무슨 트집을 잡힐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이를 어쩌면 좋을까.소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시연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왕비마마…….”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괜히 이 일에 나서지 말라는 뜻을 눈짓으로 전했다.유시연은 그런 소진에게 안심하라는 듯 미소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28화

    봉현욱은 온몸에 흰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소맷자락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튀어 있었다. 손에 쥔 삼밧줄 역시 피에 흠뻑 젖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차갑고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유시연의 곁을 스쳐 지나가던 순간, 봉현욱은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음산하면서도 어딘가 광기 어린 웃음이 걸려 있었다.말들이 휘몰아치듯 지나가며 찬바람과 먼지를 일으키자, 소진이 얼른 유시연의 앞을 막아섰다.“마마, 많이 놀라셨어요?”유시연은 멍하니 봉현욱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번지는 듯했다.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소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달랬다.“마마,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저 사람들은 모두 큰 죄를 지은 자들이라고 들었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자식까지 해치는 부모는 없잖아요. 마마 뱃속의 아이는 전하의 핏줄이니, 전하께서도 분명 귀하게 여기실 거예요. 마마께도 함부로 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알아.”유시연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봉현욱이 잔혹하고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앞에서 보고 나니 역시 적잖은 충격이 남았다.큰 죄를 지은 자들이라니.방금 끌려가던 사람은 분명 호부상서 방진명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 그를 두고 보기 드문 충신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그런 사람을 봉현욱이 저토록 가혹하게 다뤘다면……유시연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조여드는 듯했다.하지만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은 자신의 앞날조차 알 수 없는 처지였다. 남의 집안일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유시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쉰 뒤 소진의 손을 잡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안에 들어서자 청색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곧장 다가와 반갑게 맞았다.“두 분, 미리 잡아 두신 방이 있으십니까?”“있어요. 춘화각이에요.”소진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27화

    “이걸 이렇게 많이 만들었으니, 꽤 힘들었겠구나.”봉현욱은 왕부의 오랜 사람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쓴 일을 은근히 비꼰 것이었다.유시연은 그 말에 담긴 놀림을 알아채고 얼른 해명했다.“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기뻐하신다면 이 정도 수고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게다가 재료는 모두 주방에서 손질했고, 완자만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봉현욱은 그저 웃었다.이 여인이 정말 제 뜻을 알아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말만 들으면 어찌나 그럴듯한지. 자신이 갑자기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제 몫 따위는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다 먹은 것 같은데, 언제까지 거기 앉아 있을 셈이냐?”봉현욱이 그녀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틈만 나면 어떻게든 자신에게 들러붙으려는 게 분명했다.유시연은 그제야 아직도 그의 품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배나 조심해라.”봉현욱은 아직 티도 나지 않는 그녀의 배를 힐끗 내려다본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어둠 속에 숨어 있던 소칠이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저 작은 것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잔꾀를 부리는군.”봉현욱이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소칠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신이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왕비마마께서 요즘은 꽤 얌전히 지내시는 듯한데요.”아예 대문 밖으로 나가지도 않으실 정도인데, 대체 뭘 더 바라시는 건지 소칠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얌전하긴 뭐가 얌전해. 기루도 겁 없이 드나들고, 틈만 나면 본왕 품에 앉으려 드는데 그게 얌전한 사람이냐?”봉현욱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칠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시선이었다.소칠은 할 말을 잃었다.소칠이 보기에는 분명 전하께서 먼저 억지로 왕비마마를 제 무릎에 앉힌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도리어 상대를 탓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그렇게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26화

    유시연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봉현욱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본왕이 못마땅한 게냐?”“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유시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짐짓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탓에 양념 한 방울이 봉현욱의 옷자락 위로 떨어졌다. 유시연은 슬쩍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닦아 주려 손을 뻗으려 했지만, 차마 손을 대지는 못했다.“뭘 그리 보고 있느냐?”봉현욱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더니, 눈빛이 묘하게 깊어졌다.“여기 앉고 싶은 게냐?”그는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역시 이 여인이 얌전히만 있을 리 없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인지 지켜볼 생각이었다.유시연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맹세코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전하, 정말 왜 이러십니까. 보는 눈도 이렇게 많은데…….”유시연이 짐짓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사람들이 있어서 부끄러웠던 것이냐?”봉현욱이 왕 집사에게 손짓하자, 그는 곧바로 뜻을 알아듣고 조 어멈과 소진을 데리고 자리를 비웠다.“이리 오너라.”봉현욱이 제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유시연은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유시연은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채, 정말 제 무릎에 앉으라는 말인지 의아해했다.봉현욱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제 아무도 없는데 뭘 그리 부끄러워하느냐? 여기 앉고 싶어 한 게 뻔히 보이는데.”유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대체 무엇을 보고 자신이 그의 무릎에 앉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래도 결국 마지못해 그의 무릎 위로 옮겨 앉았다. 봉현욱의 무릎에 앉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기만 했다.워낙 성정이 변덕스러운 사람이라, 언제 갑자기 심기가 틀어져 자신을 밀쳐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유시연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자, 가벼운 몸이 봉현욱의 무릎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봉현욱이 웃으며 일부러 다리를 살짝 움직이자, 유시연은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 미친 폭군 길들이기   제25화

    “전하, 앉으십시오!”유시연이 얼른 의자를 끌어와 그의 곁에 놓았다.“전하, 오해하신 겁니다.”“내가 오해를 했다고?”봉현욱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그녀를 바라보다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를 댈지 들어볼 참이었다.유시연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하, 신첩이 오늘 이렇게 한 것은 사실 모두 전하를 위해서였습니다.”“나를 위해서?”봉현욱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는 다른 상 위에 남은 국물과 음식 찌꺼기를 훑어본 뒤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설마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인 게, 전부 나한테 네 솜씨를 보여 주려고 한 짓이라는 말이냐?”“역시 전하는 총명하십니다. 신첩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단번에 알아보셨네요.”유시연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하!”봉현욱이 차갑게 웃었다.“본왕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느냐? 결국 남은 국물이나 맛보게 하려던 것 아니냐?”“아닙니다!”유시연이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이건 제가 새로 배운 요리입니다. 전골이라고 하는데, 아직 제대로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맛이 어떨지 저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전하께 바로 올릴 수가 없었어요. 전하께서 안 계신 틈에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맛을 보게 하고, 어떤지 의견도 들어보려 했습니다. 저녁에는 다시 제대로 준비해서 전하께 올리려고 했고요.”사실 전골은 유시연이 직접 만들어 낸 음식이 아니었다. 사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사부는 늘 별난 음식을 이것저것 만들어 내곤 했는데, 하나같이 그녀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었다.봉현욱은 속으로 기가 막혔다. 말만 들으면 그럴듯하기 짝이 없었다. 저렇게 능청스럽게 둘러대는 솜씨만큼은 정말 타고난 모양이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곁에 있던 조 어멈과 소진, 왕 집사까지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유시연을 바라보았다. 자기네 왕비마마가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