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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해각
여인은 두려움도 없이 풍만한 자태를 그에게 바짝 기대었다. 곱고 요염한 작은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했고, 새끼 고양이처럼 여리고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사람 마음을 간질이듯 파고들자, 봉현욱은 저도 모르게 목이 턱 막혀 잠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회임을 했다고?”

곁에 있던 서태후는 눈을 반짝이더니, 별안간 몸을 홱 돌려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부처님께서 영험을 보이셨구나!”

봉현욱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거칠게 유시연의 옷깃을 잡아 올리며 이를 갈았다.

“요것 봐라, 수작도 여러 가지로구나!”

그녀를 얕본 것이 문제였다. 이제 일이 제법 골치 아프게 되었다.

유시연은 그의 음산하고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하며 속으로 치미는 두려움을 억누른 채, 시선을 피했다.

“내 증손주 다치겠다, 어서 놓지 못해!”

서태후는 시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고는, 봉현욱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때린 뒤 유시연을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 곱고 어여쁜 얼굴을 똑똑히 보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반색하며 소리쳤다.

“유씨 가문 처자로구나!”

“아이고, 이거 잘됐다!”

손자 나이가 벌써 스물이 넘도록 집안에 여인이라곤 그림자도 얼씬 못했으니, 저 못난 놈이 유씨 가문 처자처럼 단정하고 현숙한 여인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지려던 찰나, 곁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할머님, 쓸데없는 생각은 마십시오. 저 여인 배 속의 씨는 제 자식이 아닙니다!”

유시연은 겁먹은 눈으로 봉현욱을 슬쩍 올려다보았다가, 그 매섭고 차가운 눈빛 속에서 살기를 읽고는 화들짝 놀라 서태후의 등 뒤로 숨어들었다.

서태후는 봉현욱을 매섭게 흘겨보며 차갑게 소리쳤다.

“이 못된 놈, 이 일은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서태후는 유시연의 손을 잡아끌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유시연은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서 있는 봉현욱을 슬쩍 훔쳐보았다가, 그가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더는 감히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웃음은 겉으로만 웃고 있을 뿐, 눈빛에는 조금의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꾸며 낸 모든 계략이 저 날카로운 눈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서태후는 격앙된 얼굴로 유시연을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야위고 초췌한 그 얼굴을 바라보니 가슴이 아려 왔다.

국공부의 일이라면 그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대대로 충성을 다해온 유씨 가문이 이런 참혹한 최후를 맞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며, 유시연이 순결을 잃었다는 소문 또한 얼핏 들은 바 있었다.

반평생을 살아오며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 자부해 온 그녀였다. 유씨 가문 처자는 예로부터 온화하고 현숙하며 단정하고 예의 발랐으니, 그런 훌륭한 명문가 규수를 어느 누가 마다했겠는가. 체면도 버려 가며 방탕한 귀족 자제의 침상에 오를 리 만무하니, 필시 억지로 겁박당했을 것이었다.

제 집 저 못난 손자 놈이 못된 짓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태후 마마, 부디 저를 위해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유시연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다시 무릎을 꿇으며, 억울한 얼굴로 제 배를 어루만졌다.

“이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소녀는 감히 현왕 전하께 기대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아이에게 명분 하나만 주고자 할 뿐입니다!”

봉현욱이 코웃음을 쳤다.

“본왕이 언제 너와 동침했다더냐, 증거라도 있느냐?”

유시연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굴욕감에 눈을 치켜떴다. 봉현욱의 이 말은 아예 발뺌을 하겠다는 뜻 아닌가.

유시연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고는, 마음을 다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왕 전하의 아랫배 오른쪽에는 붉은 반점이 있습니다!”

봉현욱은 할 말을 잃었다.

서태후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얼른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본궁은 네 말을 믿는다!”

그토록 은밀한 곳을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야 누가 보았겠는가. 그런데도 저 손자 놈은 끝내 발뺌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제법 자세히도 보았구나!”

봉현욱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시연은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 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피로 친자임을 밝히면 될 것입니다.”

뱃속의 이 아이는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자 유씨 가문의 대를 이을 핏줄이었다. 그녀는 반드시 이 아이를 낳아야만 했다.

게다가 온 가족이 영문도 모른 채 몰살당했으니, 봉현욱의 사람이 된다면 그의 힘을 빌려 진상을 밝혀낼 방도도 생길 터였다.

“기어이 본왕에게 들러붙을 작정이로구나!”

봉현욱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운효위의 그 빈틈없는 추적망조차 피해 간 자가 그리 단순한 인물일 리 없었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놀란 토끼처럼 잔뜩 움츠러든 여인을 찬찬히 훑어보며, 입꼬리를 싸늘하게 말아 올렸다.

겁도 많은 것이 어찌 감히 이런 짓을 벌였을까. 시치미도 제법 그럴듯하게 뗐다.

서태후는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그를 매섭게 흘겨보았다.

“이 못난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네놈이 아랫도리 하나만 제대로 단속했어도, 이 아이가 어찌 너에게 억지를 부리겠느냐! 어째서 네 셋째 아우와 넷째 아우에게는 안 그러고, 하필 너에게만 그러겠느냐!”

봉현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이 저 여인을 품고 싶어서 품은 것도 아니었다. 뜻하지 않게 계략에 휘말린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모른다. 황실의 핏줄은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할 수 없다. 내 증손주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내 이 자리에서 네놈 집 대문 앞에 머리를 찧고 죽어 버릴 것이다!”

서태후가 봉현욱의 코앞에 손가락을 들이대며 크게 호통쳤다.

“이 아이는 부처님께서 네게 내려 주신 색시이니, 네놈은 속으로 실컷 좋아하기나 하거라”

봉현욱은 어이없다는 듯 이를 지그시 악물더니, 별안간 유시연을 와락 품 안으로 끌어당겨 그녀의 뺨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음산하고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머님, 걱정 마십시오. 부처님께서 골라 주신 색시가 얼굴도 이리 곱상하니, 아끼고 예뻐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판입니다!”

싸늘한 향내가 코끝을 스쳤다. 봉현욱의 짙고 방탕한 눈매에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서늘한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품에 안긴 유시연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했고, 놀란 나머지 숨결마저 흐트러졌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그에게 얌전히 몸을 기댔다.

그 조그마한 몸짓이 우스웠는지 봉현욱은 픽 웃음을 흘리더니,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서태후가 다급히 소리쳤다.

“이놈아, 어딜 가려는 게냐!”

“모처럼 색시가 생겼는데 이대로 보내면 아깝지 않습니까. 집에 가서 한 번 더 힘을 써야지요, 혹시 압니까, 쌍둥이라도 생길지!”

저 고얀 놈은 못하는 소리가 없었다.

서태후는 어떻게든 그를 붙잡아 말리고 싶었지만, 손자의 발이 워낙 빨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뒤쫓아 나갔을 때는 이미 그가 말에 올라 유유히 떠난 뒤였다.

서태후는 분에 겨워 눈앞이 다 아찔했다.

말에서 내린 봉현욱은 유시연을 안은 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지나는 길목마다 시위와 하인들이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왕부 뒤뜰에는 온통 사내들뿐이었고, 새 한 마리조차 수컷만 키운다는 이곳에 제 주군이 여인을 데리고 돌아오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했던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봉현욱은 유시연을 침상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유시연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앉았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봉현욱을 보며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봉현욱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은빛 비수를 손에 쥐고, 천천히 그녀의 옷깃에 달린 매듭을 풀어 헤쳤다. 희고 가녀린 목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시연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침상 머리맡까지 밀려났다.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

“전하, 저는……”

“쉿……”

봉현욱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끝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옷고름 하나를 마저 풀어냈다. 원앙 두 마리가 수놓인 붉은 속옷이 드러나자, 유시연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려던 손을 그녀는 애써 참아 냈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쓸모가 있는 것이라고는 이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봉현욱은 애처롭도록 가련한 그 모습과, 눈처럼 희고 봉긋한 살결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목이 타들어 갔다. 칼끝이 다시 아래로 향해 속옷을 마저 걷어 냈다……

“맞혀 보아라. 이 칼끝으로 배를 갈라 보면 알 일 아니냐, 아들일지 딸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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