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람들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랑 팔레 대표 신채은.
SLP그룹 전략본부장 차도영.
정략결혼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우리는 언제나 모범적인 부부였다.
언론은 우리의 결혼에 늘 같은 수식어를 붙였다.
‘이상적인 부부.’
그리고 거기에 한 단어를 덧붙였다.
‘로맨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믿고 싶어 했다.
재벌가에도 사랑이 있다고.
계산도 거래도 아닌 결혼이 있다고.
그래야 이야기가 더 아름다워지니까.
***
“대표님, 남편분 오셨습니다.”
비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행사장 입구 쪽이 조용히 갈라졌다.
차도영이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정장에 실크 행커치프. 어깨선이 정확하게 떨어지는 재킷과 윤이 나는 구두.
그는 언제나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치 혼자 무대 조명을 받고 있는 거 아니냐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오는 동안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모였다. 나역시 홀린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차도영.
SLP그룹 전략본부장이자 내 남편.
그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섰다. 카메라 플래시가 동시에 터졌다.
“차 본부장님!”
“여기 좀 봐주세요!”
기자들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도영은 아주 능숙하게 고개를 돌아 카메라를 바라봤다.
정확한 각도에 계산된 미소를 띤 채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내 손을 잡았다.
늘 그래왔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나는 잠깐 그를 바라봤다.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그는 내게 찰나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표님, 여기 보세요!”
플래시가 번쩍였다.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도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카메라를 봤다.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너무 과하지도 너무 무심하지도 않게.
우리는 언제나 그랬다. 우리 두 사람은 완벽한 무대 체질이었다.
***
“두 분 여전히 신혼 같으세요.”
기자가 웃으며 물었다.
이 질문은 거의 공식 질문 같은 거였다.
도영이 잠깐 나를 바라봤다. 보기 좋게 휘어진 눈꼬리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아내가 워낙 바빠서요.”
그가 말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카메라 플래시가 다시 터졌다.
“두 분 다음 프로젝트도 같이 진행하신다면서요?”
또 다른 기자가 물었다.
도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같이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일도 같이 하시고, 집에서도 같이 계시고. 정말 부럽네요.”
기자가 농담처럼 말했다.
“두 분도 부부싸움을 하시나요?”
도영이 다시 나를 봤다.
“같이 일을 하다보니 부딪히는 일이 없을 수가 없죠. 하지만 싸우지는 않습니다. 대체로 혼나는 편이죠.”
행사장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의 팔에 끼운 손에 살짝 힘을 줬다.
부부 사이의 애정 표현처럼 보이도록 계산된 동작이었다.
도영은 아무렇지 않게 그 힘을 받아줬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바라봤다.
눈웃음까지 잊지 않았다.
우리는 정말 잘 어울리는 부부였다.
적어도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행사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인터뷰와 사진 촬영.
짧은 건배.
가벼운 대화.
모든 일정이 끝났을 때는 밤 열 시가 조금 넘었다.
차에 올라탈 때까지도 우리는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을 하고 손을 꼬옥 맞잡은 채였다.
차 문이 닫히고 이어서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우리 두 사람은 맞잡았던 손을 풀었다.
도영은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노트북을 꺼냈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으로 화려한 도심 불빛이 빠르게 스쳐갔다.
차 안에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만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다.
***
집에 도착한 건 밤 열한 시쯤이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우리는 동시에 손을 놓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조용했다.
도영이 재킷을 벗어 소파 위에 걸쳤다.
조금 전까지 행사장에서 웃고 있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피곤한지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곤 소파에 몸을 묻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겨우 숨을 돌리는 듯이.
“내일 아침 비행기라서 일찍 나갈 겁니다.”
그가 말했다.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였다.
“알겠어요.”
나도 짧게 대답했다.
오늘 하루 어땠는지.
행사는 괜찮았는지.
식사는 했는지.
우리 사이에 그런 질문은 없었다.
‘굳이 필요 없는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그건 결혼 초반부터 자연스럽게 생긴 규칙이었다.
***
나는 거실을 지나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
식탁 위에는 간단한 콜드밀로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샐러드와 샌드위치.
딱 두 사람 분이었다.
아마도 늦을 우리를 위해 사용인이 준비해놓고 간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서 있었다.
도영은 이쪽을 보지도 않았다.
소파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아마 일일 것이다. 최근 TF팀을 맡았다고 했으니까.
나는 조용히 접시 하나를 치웠다. 그리고 다른 하나도 마저 치웠다.
오늘도 같이 저녁을 먹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저는 피곤해서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요.”
도영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잠시 후 그가 덧붙였다.
“아, 오늘 수고했어요.”
짧은 한 마디였지만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던 다정함은 없었다.
“당신도요.”
나도 짧게 답하고 방 문을 열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을 썼다. 결혼한 첫날부터 그랬다.
이 집에서 부부라는 이름은 유지되지만, 생활은 분리되어 있었다.
각자의 일정.
각자의 공간.
각자의 시간.
계약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각자의 방으로 향하기 전, 우리는 늘 같은 위치에서 멈췄다.
더 가까워지지도, 더 멀어지지도 않는 거리.
그건 부부라는 이름 아래 유지되는 가장 안전한 선이었다.
결혼 초반에는 가끔 묘한 침묵이 흐르기도 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계약서를 떠올렸다.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결혼.
기대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야 이 결혼이 오래 갈 것 같았으니까.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불을 끄기 전에 잠깐 거실을 다시 봤다.
도영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잠깐 선채로 그를 물끄러이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도영은 늘 나보다 늦게 잠들었다. 늘 퇴근이 늦었고 출장도 잦았다.
어쩌다 일찍 들어와도 새벽까지 업무를 보기 일쑤였다.
나는 가끔, 일을 하다가 앉은채로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했다.
늘 신경이 곤두서있고 날카롭던 그였지만, 잠들었을 때만큼은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런 그의 얼굴이, 즐거운 꿈을 꾸는지 예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좋아했다.
그 사실을 그는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몇 번이나 맞선을 주선했지만 모두 거절했지.”“...”“그래서 더 궁금하더군요. 무슨 이유로 이런 결정을 했는지.”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그린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사업적 판단이었습니다.”그녀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사업이라.”“네.”나는 찻잔을 들며 조근조근 말했다.“이 결혼에서 도영 씨가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확신이 있나 보네요.”“있습니다.”그녀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도영이에게는 원래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어요.”“...”“아주 오랫동안 지켜본 아이였죠.”그녀의 말투가 나를 대할 때와 달리 조금 부드러워졌다.“집안도 좋고, 교육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도영이를 이해하는 아이예요.”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자존심을 건드리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 원하는 반응을 해줄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하지만 어머님, 결혼은 도영 씨가 하는 겁니다.”그녀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그리곤 탁, 소리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난 신 대표 같은 사람을 아주 잘 알아요. 뭐든 계산기부터 두드리고, 손익 따져 움직이죠.”“도영 씨도 마찬가지일 겁니다.”“신 대표,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칭찬으로 듣겠습니다.”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하나만 기억해 두세요. SLP의 며느리는 아무나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나는 잠깐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봤다.“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아무나 앉을 수 없는 자리라면, 아무나 밀어낼 수도 없는 자리일 테니까요.”나는 보란 듯이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런 나를 보는 한정숙 여사의 이마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실망시키는 일, 없을 거예요”그게 대화의 끝이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 날이 밝았다.***결혼식은 예상했던 대로 성대하게 열렸다.재계 인사들이 대부분 참석했고, 언론도 빠지지 않았다.호텔 로비에는 아침부터 취재진이 가득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
재계 탑으로 꼽히는 SLP그룹답게 본가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이미 그 규모는 짐작됐다.높은 담벼락이 사방을 길게 둘러싸고 있었고, 정문에는 검은 철문으로 된 거대한 대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대문을 지키고 선 경호원들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정제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차 안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대문이 천천히 열렸다.차가 안으로 들어서자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았다.정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단순히 ‘넓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사계절 내내 관리되는 듯한 잔디가 부드러운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조경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았다. 계산된 균형 속에서 조용한 위압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정원 한가운데에는 큰 분수대가 있었다.하얀 석조 분수에서 물줄기가 부드럽게 떨어지고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석조 가제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짙은 초록 덩굴이 기둥을 타고 올라가 있어 마치 오래된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차는 그 정원을 가로질러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잠시 후 본채가 모습을 드러냈다.3층짜리 저택이었다.외관은 화려하기보다는 묵직한 인상이었다. 밝은 석재로 지어진 건물은 세월이 쌓일수록 더 단단해질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본채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별도의 건물이 각각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사용인들이 머무는 건물과 경호원들이 상주하는 건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정한 별채 같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이 집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되는지 알 수 있었다.차가 현관 앞에 멈췄다.문이 열리자 내부의 공기가 느껴졌다.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내가 살고있는 그랑 팔레 본가도 규모가 작지 않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완벽히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현관을 들어서자 높은 천장이 시야를 압도했다. 대리석 바닥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넓은 홀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응접실과 접견실이 이
나는 피식 웃었다. 고작 결혼 기사에 화들짝 놀라 반응하는 것에 허탈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직 본선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장에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예를 들면요.”“SLP가 우리 지분을 노린다거나, 대표님이 방어를 위해 결혼을 선택한 걸거라고요.”나는 잠깐 그를 빤히 보았다. 족집게가 따로 없었다. 어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맞힐 수 있는지.하지만 나는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틀린 말은 아니네요.”안 그래도 조용하던 회의실이 더욱 조용해졌다. 몇몇 임원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죠.”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나에게 집중됐다.“그랑 팔레가 SLP에 흡수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그리고 저는 그랑 팔레를 갖다 바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결혼은 결혼이고, 사업은 사업입니다.”전략기획실장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대표님.”“네.”“차도영 대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나는 잠깐 생각했다.믿을 수 있는 사람. 과연 내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질문을 한 전략기획실장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 절대 아니다.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사람은 흔들리고, 배신하고, 겁을 먹는다.대신 숫자는 남고, 계약서는 증거가 된다.그렇게 따지면 차도영은 믿을 수 있는 사람에 속했다.“여러분들이 믿어야 하는 건 차도영 대표가 아니라, 저 아닐까요?”“...”“믿으세요. 저는 그랑 팔레를 누구보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니까요.”회의실 공기가 조금 풀렸다.나는 임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주주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도영 대표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실적이에요.”태블릿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결혼은 제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대표님은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커피부터 마시죠.”“맞습니다.”“그리고 커피 내리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는 스타일.”그가 잠깐 웃었다.“그것도 맞습니다.”“그리고.”나는 그의 셔츠 소매를 힐끗 봤다.“넥타이는 항상 느슨하게 풀어두네요.”“아침이라서요.”“아니요.”나는 고개를 저었다.“대표님은 긴장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 같아요.”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그렇게 보였습니까.”“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그래서 계약 결혼도 받아들인 거겠죠.”그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대표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저요?”“네.”그는 말했다.“대표님도 통제 가능한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 같거든요.”나는 웃었다.“그래서 계약서를 그렇게 꼼꼼히 검토했나 보네요.”“대표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그건 인정해요.”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래도 하나 아쉬운 건 있네요.”“뭡니까.”“계약서에 빠진 조항이 하나 있어요.”그가 고개를 기울였다.“어떤 조항입니까.”나는 태연하게 말했다.“아침 식사는 같이 할 것.”그가 잠깐 웃었다.“지금이라도 추가할 수 있습니다.”“거절합니다.”“이유는요.”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은 아침에 말이 너무 많거든요.”도영이 작게 웃었다.“대표님이 먼저 질문하셨습니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대표님이 먼저 눈썰미를 자랑했잖아요.”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그래도.”그가 말했다.“생각보다 편합니다.”“뭐가요.”“이 결혼.”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햇빛이 유리창을 타고 거실 바닥 위로 길게 번지고 있었다.“저도요.”나는 말했다.“생각보다 자연스럽네요.”“뭐가 말입니까?”“그냥 이런 상황이?”나는 거실을 가볍게 둘러봤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얼마 전까지 남이었는데 이렇게 아침에 같이 커피 마시고 있는 거.”도영은 잠깐
결혼한 지 일주일 째였다.계약 결혼이라 어색하고 불편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는 생각보다 잘 맞았다.아침 햇살이 커튼 틈 사이로 천천히 스며들었다.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높은 천장이었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낯설다고 느꼈던 풍경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 있었다.나는 잠시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생각보다 깊게 잠들었던 모양인지, 피곤한 기색 없이 개운했다.침실 문을 열자 펜트하우스 특유의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현관에서 이어지는 긴 복도에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 걸려있었다.그리고 그 끝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시야가 탁 트였다.거실은 한 면이 전부 유리였다. 서울의 빌딩 숲과 한강이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아침 햇빛이 유리를 타고 들어와 바닥 위로 길게 번졌다.그 풍경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생각했었다.‘호텔 같네.’호텔 체인을 운영하고 있는 나에게는 꽤 익숙한 인테리어였다.높은 층고, 밝은 벽지, 고급스러운 유화 액자와 은은한 간접조명.내 손을 타지 않았는데도 처음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이 집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거실 한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었다. 아일랜드 조리대 뒤쪽으로는 넓은 펜트리 공간이 이어져 있었고, 주방에 서 있으면 거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처음 이 구조를 봤을 때 나는 차도영에게 이렇게 말했다.“감시하기 좋네요.”그는 잠깐 주방을 둘러보더니 말했다.“동선이 효율적인 거라고 해두죠.”딱 그 남자다운 설명이었다.나는 거실 중앙에 잠시 멈춰 섰다.이 집은 거실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좌우가 나뉘어 있었다.오른쪽은 내 공간, 왼쪽은 차도영의 공간.마치 자로 정확하게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대칭 구조였다.내 쪽 복도를 지나면 먼저 서재가 나온다. 그 다음이 침실, 그리고 드레스룸과 작은 응접실이 이어진다.도영의 공간도 똑같은 구조였다. 다만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내 방은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왔다. 대신 저녁이 되면 놀랄 만큼 어두워
우리가 마주 앉은 곳은 SLP그룹 소유의 프라이빗 미팅룸이었다.외부에 알려질 일 없는 장소.통유리 너머로 한강이 내려다보였지만, 그날은 비 때문에 풍경이 전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휴대폰 알람이 울렸다.기사 내용은 읽어보지 않아도 뻔했다.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숙부는 결코 느린 사람이 아니었다. 판을 짜기 시작하면 끝까지 밀어붙였다. 문제는, 지금 내게 시간이 없다는 거였다.“신채은 대표님.”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차도영이었다.차도영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차가운 인상이었다. 셔츠부터 넥타이, 재킷 온통 검은색으로 무장한 그는 잘생긴 외모가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들어가시죠.”나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내가 자리에 앉는 동안 차도영은 커피 테이블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내렸다.타들어가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유가 넘쳤다.부드럽고 진한 커피향이 미팅룸을 가득 채웠다.“여기.”그가 커피가 절반 정도 담긴 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처럼 새까만 커피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도 초조한 기색이 차마 가려지지 않았다.“차도영 대표님.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저도 그렇습니다.”그는 커피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며 나를 보았다.옅은 갈색 눈동자에는 상대의 속내를 먼저 읽고 움직이는 사람 특유의 여유가 담겨 있었다.“신 대표님.”달콤하리만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냉정했다.“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준다는 겁니까?”“계약을 제안하려고 해요.”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놀랐다기보다는 확실히 흥미를 느낀 쪽에 가까웠다.“계속 말씀하시죠.”나는 준비해 온 서류를 꺼냈다.“요즘 SLP그룹에서 결혼 압박을 받고 계신다고 들었어요.”그는 한 박자 늦게 웃었다.“아… 벌써 그 정도로 소문이 났군요.”“재벌가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지죠.”“그렇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