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주주들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SLP가 경영에 개입하는 건 아닌지 확인받고 싶어했습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고작 결혼 기사에 화들짝 놀라 반응하는 것에 허탈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직 본선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차도영과의 결혼은 경영권 확보를 위한 전초전, 준비운동에 불과했다.
그와 결혼 계약을 맺은 직후 나는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해 자본 확보와 주주 로비 작업에 들어갔다.
고작 3%에 불과했던 지분은 차명까지 합하면 어느새 7%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차도영과 SLP그룹이 보유한 지분을 더하면 숙부의 협잡질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장에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요.”
“SLP가 우리 지분을 노린다거나, 대표님이 방어를 위해 결혼을 선택한 걸거라고요.”
나는 잠깐 그를 빤히 보았다.
아주 족집게가 따로 없었다. 어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맞힐 수 있는지.
하긴 그러니 할아버지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겠지.
비록 지금은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랑 팔레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부동산 재벌이었다.
그런 곳이 삼촌과 조카의 경영권을 두고 지저분한 싸움을 벌이는 중인데다, 다른 그룹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불안이 겹치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안 그래도 조용하던 회의실이 더욱 조용해졌다. 몇몇 임원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죠.”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나에게 집중됐다.
“그랑 팔레가 SLP에 흡수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저는 그랑 팔레를 갖다 바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결혼은 결혼이고, 사업은 사업입니다.”
“...”
“그리고 SLP와의 결합은 득이 되면 득이 됐지, 결코 실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전략기획실장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대표님.”
“네.”
“차도영 대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나는 잠깐 생각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과연 내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질문을 한 전략기획실장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 절대 아니다.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사람은 흔들리고, 배신하고, 겁을 먹는다.
대신 숫자는 남고, 계약서는 증거가 된다.
그렇게 따지면 차도영은 믿을 수 있는 사람에 속했다.
“여러분들이 믿어야 하는 건 차도영 대표가 아니라, 저 아닐까요?”
“...”
“믿으세요. 저는 그랑 팔레를 누구보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니까요.”
회의실 공기가 조금 풀렸다.
나는 임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주주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도영 대표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실적이에요.”
태블릿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혼은 제가 결정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랑 팔레 일을 하세요.”
그날 이후 재계는 더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예비 시어머니에게 불려갔다.
SLP그룹 본가.
차가 높은 담벼락 앞에 멈췄을 때,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 선 경호원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잠시 후,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마치 들어오라는 허락이 아니라, 심문을 시작하겠다는 신호처럼.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차도영과의 계약은 끝났지만, SLP와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나는 그대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하루 종일 시달린 탓에 피곤했지만 좀처럼 잠에 들 수 없었다.딱히 그를 기다리려는 건 아니었다.그냥 잠이 오지 않았다.눈을 감았다가도 다시 떴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일이라도 할까…”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서재로 향했다.노트북을 켜고 자료를 펼쳤다.처음에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문장을 고치고, 자료를 정리하고, 숫자를 다시 맞췄다.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그러다 문득 시선을 들었을 때는 어느새 새벽 두 시가 지나 있었다.‘생각보다 늦는데.’나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떨궜다.‘조금만 더 하고 자자.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자고 있으면 미안하니까.’그 생각을 하고 나서야 나는 잠깐 손을 멈췄다.‘미안하다니.’그가 늦는다고 했고, 나는 잠이 오지 않았을 뿐인데.그런데 왜 내가 먼저 자는 일을 미안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기다리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기다리지 않는다고 우기면서.그렇게 취침 시간은 예정보다 늦어졌다.이것까지만 하고. 한 김에 저것도 끝낼까.이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져서야 나는 손을 멈췄다.새벽 다섯 시.어두웠던 창밖 풍경에 빛이 들면서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집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새벽 다섯 시가 지나도록, 집 안은 끝내 조용했다.나는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노트북 화면은 이미 꺼졌고, 손은 키보드 위에 멈춰 있었다.오지 않았다.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건,
퇴근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조용했다.나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가방을 내려놓고,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었다.프로젝트 건으로 하루종일 마라톤 회의를 했던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이대로 누워 잠이나 자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소파의 유혹을 떨쳐내고 주방으로 향했다.대단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그래도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습니다.’그가 저녁을 먹겠다고 했고, 나는 집에 먼저 도착했을 뿐이다.함께 사는 사람끼리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해야 했다.나도 도영도 저녁 식사는 가볍게 하는 편이었기에, 대단하게 준비할 건 없었다.스테이크 한 덩이를 굽고, 아보카도를 얹은 샐러드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요리라고 부르기 민망한 음식과 함께 식기까지 차려놓으니 꼬박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하지만 도영은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나는 태블릿을 가져와 공유 캘린더를 열었다.오늘 날짜를 누르니 나와 도영의 일정이 시간대별로 정리된 것이 보였다.<08:00 전략기획실 회의><10:40 S자동차 홍보 회의><15:00 해외 박람회 관련 미팅>오전에 확인한 이후 추가된 것은 없었다.새로고침을 눌렀지만 마찬가지였다.나는 천천히 화면을 넘겼다.어제, 그저께. 다시 오늘, 내일, 모레.수정된 기록들이 더러 보였다.도영은 꼼꼼한 성격이라 변동 사항이 있을 경우 꼭 공유 캘린더를 수정했다. 바쁠 경우에는 비서를 통해서라도 말이다.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오해와 위화감은 기우였다는 듯, 일상은 흘러갔다.…그렇게 믿기로 한 채로.아침은 늘 그랬듯 조용하게 시작됐다.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고, 주방에서는 커피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익숙한 소리를 들으며 침실 문을 열었다.도영은 이미 정장을 입은 채 아일랜드 앞에 서 있었다.커프스에 타이까지 매고 있는 걸 보니, 오늘도 일정이 빠듯한 모양이었다.“일찍 일어났네요.”내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오늘 오전에 회의가 있습니다.”짧은 대답이었다.그는 자연스럽게 컵을 하나 더 꺼내,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 말없이 커피를 내렸다. 그리곤 설탕 두 스푼을 넣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커피 향이 조용히 퍼졌다.그는 컵을 내 쪽으로 밀어줬고,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손에 전해지는 온기가 익숙했다.늘 같은 시간, 늘 같은 자리, 늘 같은 시작.우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전제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아무 일도 묻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는 시작된다.“오늘 일정 많아요?”내가 묻자 도영이 태블릿을 넘겼다.“오전에는 내부 회의가 두 개 있고, 오후에는 외부 미팅이 있습니다.”“늦겠네요.”“아마도요.”대화는 짧았다. 필요한 만큼만 오가고, 더 길어지지 않았다.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그래도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늦어도 저녁은 비워두겠습니다.
나는 괜히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그럼… 우리 이제 나가볼까요?”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까요.”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여전히 가슴 안쪽이 계속 답답했다.…정말로 별일 아닌 게 맞을까.***나는 그날 일을 일부러 잊으려고 했다.생각해 보면 정말 별일 아니었다.행사장에서 비서가 넥타이를 정리해 준 것뿐이었다.외부 일정에서는 그런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게다가 연지원은 도영의 비서였다.대표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업무일지도 몰랐다.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그래야 괜한 상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그래야 쓸데없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자꾸만 소란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리다보니 나는 예상보다 늦게 귀가했다.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주차장은 빈 공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지정 자리에 주차를 한 나는 천천히 공용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그때 익숙한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검은색 세단.차도영의 개인 차였다.천천히 코너를 돌아 들어오고 있었다.지방에 외근을 다녀온다더니 이제야 돌아온 모양이었다.나는 괜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이 시간에 그가 개인 차를 모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그는 출퇴근길에도 업무를 봐야 하는 사람이었고, 때문에 운전기사가 있는 법인 차를 탔던 것이다.게다가 출장이었다. 그런데 굳이 개인 차를?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주차장 안쪽으로 들어왔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그녀가 입구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손에는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한정숙 여사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풀렸다.“어머, 연 비서.”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그렇지 않아도 안보여서 찾고 있었는데.”연지원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브랜드 담당자와 미팅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요.”“차 본부장 보필하느라 고생하네.”“제 할 일인걸요.”연지원이 웃으며 대답했다.한정숙 여사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연 비서가 있으니까 마음이 놓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한정숙 여사의 시선이 다시 도영에게 향했다.“요즘 많이 바쁘다지?”“예.”“건강은 챙기고 있는 거지?”도영이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연지원이 끼어들었다.“최근에 야근이 잦으셔서 조정하고 있어요.”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앙다물었다.연지원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마치 아주 자연스러운 대답이라는 듯.한정숙 여사가 만족스럽다는 넉넉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연 비서가 잘 챙겨야지.”그리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덧붙였다.“차 본부장은 연 비서가 제일 잘 알잖아.”그 말은 자못 칭찬처럼 들렸다.하지만 동시에 내 자리를 지우는 말처럼 남았다.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아랫입술만 잘근 물었다.나를 대할 때와는
비서가 늦게까지 일을 도와주는 건 흔한 일이었다.급히 처리해야 하는 업무라 집으로 찾아올 수도 있는 일이고.차도영은 늘 바빴고, 밤늦게까지 일을 붙잡고 있는 날도 많았다.연지원은 그의 비서였다.능력 있는 사람이고, 일정 관리도 꼼꼼하다고 했다.상사의 컨디션을 챙기는 것도 당연한 업무일 것이다.상사의 귀가 시간을 챙기고 차량을 준비하는 것도.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었다.그래야 괜한 상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쓸데없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었다.마침 그때 도영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컵을 들어 올렸다.커피가 조금 식어 있었다.***며칠 뒤였다.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Y사의 한국 진출을 홍보하는 행사가 있었다.나는 그랑 팔레의 대표이자 SLP그룹 차도영 본부장의 아내로 초대받았다.이른 아침부터 단장을 마친 우리 둘은 행사 시작 시간에 맞춰 행사장으로 향했다.행사장 입구에 도착하자 이미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포토월에 서자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대표님, 이쪽 좀 봐주세요!”“두 분 여기요!”나는 익숙하게 도영의 팔에 손을 올렸다.카메라 앞에 서자 몇몇 기자들이 환하게 웃었다.“두 분 같이 서 주세요.”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마치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것처럼 보이는 자세였다.“늘 두 분의 시밀러 룩이 굉장히 인상적인데요,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