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나 역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결혼 계약을 맺고 결혼식을 올린 지 어느덧 2개월 가량이 지났는데도 우리의 호칭은 아직 대표님이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진짜 부부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꼭 맞춘 반지처럼 잘 맞았다.
“그럼 저도 하나 말해볼까요.”
그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대표님 눈썰미도 만만치 않습니다.”
“궁금한데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대표님은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커피부터 마시죠.”
“맞습니다.”
“그리고 커피 내리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는 스타일.”
그가 잠깐 웃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셔츠 소매를 힐끗 봤다.
“넥타이는 항상 느슨하게 풀어두네요.”
“아침이라서요.”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은 긴장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 같아요.”
그가 웃음기 가신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렇게 보였습니까.”
“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그래서 계약 결혼도 받아들인 거겠죠.”
그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
“대표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요?”
“네.”
그는 말했다.
“대표님도 통제 가능한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 같거든요.”
나는 웃었다.
“그래서 계약서를 그렇게 꼼꼼히 검토했나 보네요.”
“대표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건 인정해요.”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하나 아쉬운 건 있네요.”
“뭡니까.”
“계약서에 빠진 조항이 하나 있어요.”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조항입니까.”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침 식사는 같이 할 것.”
그가 잠깐 웃었다.
“지금이라도 추가할 수 있습니다.”
“거절합니다.”
“이유는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아침에 말이 너무 많거든요.”
도영이 작게 웃었다.
“대표님이 먼저 질문하셨습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대표님이 먼저 눈썰미를 자랑했잖아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그가 말했다.
“생각보다 편합니다.”
“뭐가요.”
“이 결혼.”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햇빛이 유리창을 타고 거실 바닥 위로 길게 번지고 있었다.
“저도요.”
나는 말했다.
“생각보다 자연스럽네요.”
“뭐가 말입니까?”
“그냥 이런 상황이?”
나는 거실을 가볍게 둘러봤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얼마 전까지 남이었는데 이렇게 아침에 같이 커피 마시고 있는 거.”
도영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사업은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나는 웃었다.
“하긴 이 결혼도 사업의 일환이었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재계는 정략이라 수군거렸다.
SLP가 경영권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그랑 팔레를 삼키기 위한 수라고.
주체가 뒤바뀌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작은 분명히 거래였으니까.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한다는 발표 후, 연일 기사들이 쏟아졌다.
<경영권 분쟁 속 깜짝 웨딩... 그랑 팔레 신채은 대표, SLP 차도영과 전격 결혼>
<세기의 로맨스인가, 완벽한 시나리오인가?>
<단독 포착! 신채은-차도영의 심야 데이트>
하지만 언론보다 더 빠르게 반응한 건 재계였다.
결혼 발표가 나간 바로 다음 날, 그랑 팔레 본사.
회의실 공기가 술렁거렸다.
긴 테이블 양쪽에 앉은 임원들의 시선이 전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다들 기사 보셨겠죠. 하긴 그렇게 떠들썩했는데 못 보셨다는 게 이상한 거겠지만.”
내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임직원들은 딱 두 분류로 나뉘어 있었다.
전무인 숙부를 지지하는 쪽과 대표인 나를 지지하는 쪽.
하지만 나를 지지하는 쪽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그들도 의구심이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줄 잘못 선거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낙하산이나 마찬가지인데 믿어도 되나.’
나는 그런 그들의 속내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지지나마 있으니 고립무원 상태에서도 대표로서 직무를 할 수 있었으니까.
길어지려는 정적을 깬 건 전략기획실장이었다.
“대표님.”
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시장 반응이 조금... 과열된 상태입니다.”
나는 무심하게 태블릿으로 실시간 기사와 댓글을 읽어 내려갔다.
<SLP가 결국 그랑 팔레 먹는구나. SLP 주식 풀매수 해야 할 듯.>
<솔직히 재벌끼리 연애결혼이 말이 되나? 수지타산 다 맞춰보고 따져서 하는 거지.>
<어쨌든 둘 다 윈윈인 거 아니냐.>
나는 재미없다는 얼굴을 하고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래서요.”
날 선 물음에 상무가 퍼뜩 어깨를 움츠리더니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주주들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SLP가 경영에 개입하는 건 아닌지 확인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왜 아니겠는가.
잠시 후 본채가 모습을 드러냈다.3층짜리 저택이었다.외관은 화려하기보다는 묵직한 인상이었다. 밝은 석재로 지어진 건물은 세월이 쌓일수록 더 단단해질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본채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별도의 건물이 각각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사용인들이 머무는 건물과 경호원들이 상주하는 건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정한 별채 같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이 집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되는지 알 수 있었다.차가 현관 앞에 멈췄다.문이 열리자 내부의 공기가 느껴졌다.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내가 살고 있는 그랑 팔레 본가도 규모가 작지 않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완벽히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현관을 들어서자 높은 천장이 시야를 압도했다. 대리석 바닥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넓은 홀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응접실과 접견실이 이어져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들로 채워진 1층이었다.사용인이 조용히 설명했다.“사모님께서는 3층에 계십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사용인의 설명에 따르면, 3층은 SLP그룹 회장 부부가, 2층은 차도영과 그의 형인 차도진이 사용한다고 했다.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나는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벽에는 오래된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가구는 하나같이 묵직했다. 유행을 타는 장식은 거의 없었다. 대신 오래 두고 써도 가치가 변하지 않을 것들만 놓여 있었다.‘이 집… 진짜 재벌은 다르다 이건가.’사용인은 나를 응접실 문 앞까지 안내했다.문이 열리자 소문의 응접실이 모습을 드러냈다.나는 문턱을 넘으며
“주주들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뭐라고 합니까?”“SLP가 경영에 개입하는 건 아닌지 확인받고 싶어했습니다.”나는 피식 웃었다. 고작 결혼 기사에 화들짝 놀라 반응하는 것에 허탈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직 본선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차도영과의 결혼은 경영권 확보를 위한 전초전, 준비운동에 불과했다.그와 결혼 계약을 맺은 직후 나는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해 자본 확보와 주주 로비 작업에 들어갔다.고작 3%에 불과했던 지분은 차명까지 합하면 어느새 7%가 되어 있었다.여기에 차도영과 SLP그룹이 보유한 지분을 더하면 숙부의 협잡질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장에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예를 들면요.”“SLP가 우리 지분을 노린다거나, 대표님이 방어를 위해 결혼을 선택한 걸거라고요.”나는 잠깐 그를 빤히 보았다. 아주 족집게가 따로 없었다. 어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맞힐 수 있는지.하긴 그러니 할아버지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겠지.비록 지금은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랑 팔레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부동산 재벌이었다.그런 곳이 삼촌과 조카의 경영권을 두고 지저분한 싸움을 벌이는 중인데다, 다른 그룹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불안이 겹치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하지만 나는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틀린 말은 아니네요.”안 그래도 조용하던 회의실이 더욱 조용해졌다. 몇몇 임원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죠.”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나에게 집중됐다.“그랑 팔레가 SLP에 흡수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저는 그랑 팔레를 갖다 바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결혼은 결혼이고, 사업은 사업입니다.”“...”“그리고 SLP와의 결합은 득이 되면 득이 됐지, 결코 실이 되지 않을
나 역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결혼 계약을 맺고 결혼식을 올린 지 어느덧 2개월 가량이 지났는데도 우리의 호칭은 아직 대표님이었다.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진짜 부부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꼭 맞춘 반지처럼 잘 맞았다.“그럼 저도 하나 말해볼까요.”그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대표님 눈썰미도 만만치 않습니다.”“궁금한데요.”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대표님은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커피부터 마시죠.”“맞습니다.”“그리고 커피 내리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는 스타일.”그가 잠깐 웃었다.“그것도 맞습니다.”“그리고.”나는 그의 셔츠 소매를 힐끗 봤다.“넥타이는 항상 느슨하게 풀어두네요.”“아침이라서요.”“아니요.”나는 고개를 저었다.“대표님은 긴장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 같아요.”그가 웃음기 가신 얼굴로 나를 보았다.“…그렇게 보였습니까.”“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그래서 계약 결혼도 받아들인 거겠죠.”그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대표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저요?”“네.”그는 말했다.“대표님도 통제 가능한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 같거든요.”나는 웃었다.“그래서 계약서를 그렇게 꼼꼼히 검토했나 보네요.”“대표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그건 인정해요.”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래도 하나 아쉬운 건 있네요.”“뭡니까.”“계약서에 빠진 조항이 하나 있어요.”그가 고개를 기울였다.“어떤 조항입니까.”나는 태연하게 말했다.“아침 식사는 같이 할 것.”그가 잠깐 웃었다.“지금이라도 추가할 수 있습니다.”“거절합니다.”“이유는요.”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은 아침에 말이 너무 많거든요.”도영이 작게 웃었다.“대표님이 먼저 질문하셨습니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대표님이 먼저 눈썰미를 자랑했잖아요.”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그래도.”그가 말했다.“생각보다 편합니다.”“뭐가요.”“이 결혼.”
결혼한 지 일주일 째였다.계약 결혼이라 어색하고 불편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는 생각보다 잘 맞았다.아침 햇살이 커튼 틈 사이로 천천히 스며들었다.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높은 천장이었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낯설다고 느꼈던 풍경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 있었다.나는 잠시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생각보다 깊게 잠들었던 모양인지, 피곤한 기색 없이 개운했다.침실 문을 열자 펜트하우스 특유의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현관에서 이어지는 긴 복도에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 걸려있었다.그리고 그 끝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시야가 탁 트였다.거실은 한 면이 전부 유리였다. 서울의 빌딩 숲과 한강이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아침 햇빛이 유리를 타고 들어와 바닥 위로 길게 번졌다.그 풍경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생각했었다.‘호텔 같네.’호텔 체인을 운영하고 있는 나에게는 꽤 익숙한 인테리어였다.높은 층고, 밝은 벽지, 고급스러운 유화 액자와 은은한 간접 조명.나는 처음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이 집을 사랑하게 되었다.거실 한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었다. 아일랜드 조리대 뒤쪽으로는 넓은 펜트리 공간이 이어져 있었고, 주방에 서 있으면 거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처음 이 구조를 봤을 때 나는 차도영에게 이렇게 말했다.“감시하기 좋네요.”그는 잠깐 주방을 둘러보더니 말했다.“동선이 효율적인 거라고 해두죠.”딱 그 남자다운 설명이었다.나는 거실 중앙에 잠시 멈춰 섰다.이 집은 거실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좌우가 나뉘어 있었다.오른쪽은 내 공간, 왼쪽은 차도영의 공간.마치 자로 정확하게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대칭 구조였다.내 쪽 복도를 지나면 먼저 서재가 나온다. 그 다음이 침실, 그리고 드레스룸과 작은 응접실이 이어진다.도영의 공간도 똑같은 구조였다. 다만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내 방은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왔다. 대신 저녁이 되면 놀랄 만큼 어두워진다. 해가 넘어가면 빛
우리가 마주 앉은 곳은 SLP그룹 소유의 프라이빗 미팅룸이었다.외부에 알려질 일 없는 장소.통유리 너머로 한강이 내려다보였지만, 그날은 비 때문에 풍경이 전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휴대폰 알람이 울렸다.기사 내용은 읽어보지 않아도 뻔했다.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숙부는 결코 느린 사람이 아니었다. 판을 짜기 시작하면 끝까지 밀어붙였다. 문제는, 지금 내게 시간이 없다는 거였다.“신채은 대표님.”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차도영이었다.차도영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차가운 인상이었다. 셔츠부터 넥타이, 재킷 온통 검은색으로 무장한 그는 잘생긴 외모가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들어가시죠.”나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내가 자리에 앉는 동안 차도영은 커피 테이블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내렸다.타들어가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유가 넘쳤다.부드럽고 진한 커피향이 미팅룸을 가득 채웠다.“여기.”그가 커피가 절반 정도 담긴 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처럼 새까만 커피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도 초조한 기색이 차마 가려지지 않았다.“차도영 대표님.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저도 그렇습니다.”그는 커피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며 나를 보았다.옅은 갈색 눈동자에는 상대의 속내를 먼저 읽고 움직이는 사람 특유의 여유가 담겨 있었다.“신 대표님.”달콤하리만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냉정했다.“그래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준다는 겁니까?”“계약을 제안하려고 해요.”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놀랐다기보다는 확실히 흥미를 느낀 쪽에 가까웠다.“계속 말씀하시죠.”나는 준비해 온 서류를 꺼냈다.“요즘 SLP그룹에서 결혼 압박을 받고 계신다고 들었어요.”그는 한 박자 늦게 웃었다.“아… 벌써 그 정도로 소문이 났군요.”“재벌가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지죠.
3년 전, 차도영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던 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아침부터 회색 구름이 서울 위를 짓누르고 있었고,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당시 나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로 인한 백화점 그랑 팔레(Grand Palais)의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상태였다.아버지가 쓰러진 건 예고도 없이 찾아온 심근경색 때문이었다.어제까지 멀쩡히 회사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다음 날 영안실에 누워 있었다.그리고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경영권 싸움이 시작됐다.숙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주주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설득했고, 언론이는 익명으로 제보가 쏟아지며 나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기사 제목을 읽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무능한 대표라는 프레임은 아주 빠르게 퍼졌고 여론은 회복이 안 될 정도로 나빠지고 있었다.나는 회의실에서 그 기사들을 스크린으로 보며 웃고 싶었다.그 기사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짜여 있는지 알아서.누군가 돈을 썼다.그리고 그 누군가는 분명 우리 집안 사람 중 하나였다.“주주 세 명이 이미 전무님 쪽으로 붙었습니다.”비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어두웠다.“은행에서도 담보 재검토 요청이 왔습니다.”나는 웃었다.전부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숙부가 짠 판은 노골적이었다.“채은아.”주주 총회 전날, 그가 말했다.“경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야.”“그래서요?”“지금이라도 전문 경영인을 세우는 게 회사에도 좋고, 너한테도 좋아.”전문 경영인.그 말의 뜻은 간단했다.네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소리였다.나는 웃으며 대답했다.“숙부가 말하는 전문 경영인이 누구죠?”“주주들이 결정하겠지.”이미 정해진 대답이었다.설상가상으로 수백억 원대의 상속세가 발목을 잡았다.그 숫자는 단순한 금액이 아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