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계 탑으로 꼽히는 SLP그룹답게 본가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이미 그 규모는 짐작됐다.
높은 담벼락이 사방을 길게 둘러싸고 있었고, 정문에는 검은 철문으로 된 거대한 대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대문을 지키고 선 경호원들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정제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차 안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차가 안으로 들어서자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았다.
정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단순히 ‘넓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사계절 내내 관리되는 듯한 잔디가 부드러운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조경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았다. 계산된 균형 속에서 조용한 위압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큰 분수대가 있었다.
하얀 석조 분수에서 물줄기가 부드럽게 떨어지고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석조 가제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짙은 초록 덩굴이 기둥을 타고 올라가 있어 마치 오래된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는 그 정원을 가로질러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본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3층짜리 저택이었다.
외관은 화려하기보다는 묵직한 인상이었다. 밝은 석재로 지어진 건물은 세월이 쌓일수록 더 단단해질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본채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별도의 건물이 각각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머무는 건물과 경호원들이 상주하는 건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정한 별채 같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이 집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되는지 알 수 있었다.
차가 현관 앞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내부의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내가 살고있는 그랑 팔레 본가도 규모가 작지 않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완벽히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
현관을 들어서자 높은 천장이 시야를 압도했다. 대리석 바닥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넓은 홀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응접실과 접견실이 이어져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들로 채워진 1층이었다.
사용인이 조용히 설명했다.
“사모님께서는 3층에 계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인의 설명에 따르면, 3층은 SLP그룹 회장 부부가, 2층은 차도영과 그의 형인 차윤영이 사용한다고 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나는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벽에는 오래된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가구는 하나같이 묵직했다. 유행을 타는 장식은 거의 없었다. 대신 오래 두고 써도 가치가 변하지 않을 것들만 놓여 있었다.
‘이 집… 진짜 재벌은 다르다 이건가.’
사용인은 나를 응접실 문 앞까지 안내했다.
문이 열리자 소문의 응접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문턱을 넘으며 잠시 걸음을 늦췄다.
응접실은 넓었다. 단순히 넓은 수준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람을 작아 보이게 만드는 크기였다.
천장은 유난히 높았고, 창문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킬 만큼 길게 위로 뻗어 있었다. 낮인데도 커튼이 절반쯤 드리워져 있어 실내에는 부드러운 황금빛 조명이 깔려 있었다.
천장 중앙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수백 개의 크리스털 조각이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장식이 과할 정도로 화려했지만, 그렇다고 촌스럽지는 않았다. 돈을 들인 티가 노골적으로 나는 종류의 화려함이었다.
바닥에는 두툼한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물건이었다. 색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문양은 정교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부드럽게 가라앉는 감촉이 느껴졌다.
벽에는 커다란 유화들이 걸려있었다. 작가 이름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값비싼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풍경화와 초상화가 번갈아 걸려있었는데, 전부 크기가 지나치게 컸다. 마치 이 집의 주인들이 수집한 역사와 권력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가구 배치 역시 계산되어 있었다.
응접실 한가운데에는 길게 뻗은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는 단정한 싱글 소파 하나가 따로 놓여 있었다. 마치 자리를 구분해 둔 것처럼 보였다.
주인이 앉는 자리와 손님이 앉는 자리를 명확하게.
소파 뒤편에는 낮은 콘솔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고풍스러운 도자기 화병과 은으로 만든 장식품이 놓여 있었다. 장식 하나하나가 절묘하게 눈에 띄었다.
모든 것이 같은 메시지를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정도로 대단하다. 그러니 콧대 높일 생각말고 처신 잘해라.
나는 조용히 둘러봤다.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앉았을 것이다. 사업가, 정치인, 투자자. 아마 처음 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 대부분이 긴장했을 것이다.
이 집은 손님을 환대하는 공간조차 권력의 무대로 만들어 놓았다.
기를 죽이려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권력은 숨길 때 더 무섭다. 이렇게 과시되는 권력은 읽기 쉬웠다.
하지만 내게는 그다지 큰 타격이 없었다.
우리나라 유일의 6성급 호텔을 보유한 그랑 팔레에서 나고 자랐다. 이보다 더 화려한 곳을 마치 놀이터처럼 휩쓸고 다녔던 나였다.
그때 사용인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사모님께서 내려오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앉았다.
사용인이 내준 차를 마시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의 안주인, 한정숙 여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오래 기다리게 했나요?”
“아닙니다. 집이 아주 인상적이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앉아요.”
그녀는 우아한 손길로 소파를 가리켰다. 그리곤 직접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맞은편에 앉았다.
“신 대표.”
한정숙 여사는 한 번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만의 불만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숨기지 않았으니까.
“네, 어머님.”
그럼에도 나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솔직히 그녀가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이 없었다. 물론 나를 마음에 들어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차피 사랑 없이 오로지 계약으로만 이뤄진 관계였으니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잔이 채워지기만을 기다렸다. 찻물이 찰랑이며 잔을 채우는 소리가 조용한 응접실에 울렸다.
“도영이는 원래 결혼을 서두르는 아이가 아니었어요.”
한정숙 여사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나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맞선을 주선했지만 모두 거절했지.”
나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더 궁금하더군요.”
그녀의 시선이 나를 천천히 훑었다.
값을 매기듯이.
쓸모를 따지듯이.
“무슨 이유로 이런 결정을 했는지.”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자리는 인사가 아니었다.
차도영이 고른 여자가, SLP에 들일 만한 물건인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발끝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차도영은 손님을 집으로 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특히 이런 시간에는 더더욱.가슴이 천천히 내려앉았다.쿵, 하고 떨어지는 대신, 바닥을 더듬듯 가라앉는 기분이었다.나는 괜히 예민해지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비서일 거다.급한 업무가 생겨서 잠깐 들른 거겠지.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다.그게 아니라면 뭐겠는가.차도영은 일 때문에라면 밤중에도 사람을 부르는 남자였다. 감정을 이유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그는 그랬다.나는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집 안은 조용했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서재 쪽에서만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걸음을 옮길수록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카펫 위를 밟는 소리마저 신경이 쓰였다.서재 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빛이 흘러나왔다.그리고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이건 제가 정리해 둘게요.”연지원의 목소리였다.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비서일 거라는 내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아주 잠깐. 정말 잠깐이었다.“굳이 안 해도 돼.”차도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담담하고 건조한 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아니에요.”연지원이 말했다.말끝이 살짝 늘어졌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거리감 없이.나는 그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이 정도는 저에게 맡기셔도 괜찮아요. 본부장님, 요즘 잠도 제대로 못
결혼 후 우리는 이 펜트하우스로 들어왔다.사랑 없는 결혼에도 생활은 생겼다. 각방을 쓰는 하우스메이트에 가까운 관계라는 점을 제외하면.아침에는 함께 식사를 했지만, 저녁에는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갔다나는 이 관계가 꽤 마음에 들었다.도영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출근 잘하세요.”“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요.”우리의 아침 인사를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이 결혼,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그때의 나는 그 평온이 오래갈 거라고 믿었다. 평온도, 때로는 가장 정교한 함정이 된다는 걸 모르고.***그랬던 그가 바뀌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돌이켜보면 그 변화는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됐다.차도영은 늘 바빴다.밤을 새우는 날도 잦았고, 해외 출장은 일정표에 빼곡했다.나는 그런 그를 조용히 서포트했다.시댁인 SLP그룹의 대소사를 챙기고, 필요할 때는 언론 인터뷰를 대신 소화했다. 공식 석상에서는 언제나 이상적인 아내 역할을 수행했다.그 역시 마찬가지였다.내 경영권을 위협하던 숙부가 언론을 이용해 압박해왔을 때, 그는 가진 인맥과 지분을 총동원해 방패가 되어 주었다. 계산 빠른 대응이었고 효과는 확실했다.언론 앞에서 그는 다정한 남편의 얼굴을 잊지 않았다.그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워너비 부부로 회자됐다.서로의 목적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배우자.문제는, 그 완벽함이 너무 오래 지속됐다는 점이었다.나는 어느 순간부터 깨닫기 시작했다.이 결혼에는 ‘대화’가 없다는 것을.우리는 필요한 말만 했고, 중요한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맞선을 주선했지만 모두 거절했지.”“...”“그래서 더 궁금하더군요. 무슨 이유로 이런 결정을 했는지.”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그린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사업적 판단이었습니다.”그녀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사업이라.”“네.”나는 찻잔을 들며 조근조근 말했다.“이 결혼에서 도영 씨가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확신이 있나 보네요.”“있습니다.”그녀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도영이에게는 원래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어요.”“...”“아주 오랫동안 지켜본 아이였죠.”그녀의 말투가 나를 대할 때와 달리 조금 부드러워졌다.“집안도 좋고, 교육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도영이를 이해하는 아이예요.”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자존심을 건드리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 원하는 반응을 해줄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하지만 어머님, 결혼은 도영 씨가 하는 겁니다.”그녀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그리곤 탁, 소리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난 신 대표 같은 사람을 아주 잘 알아요. 뭐든 계산기부터 두드리고, 손익 따져 움직이죠.”“도영 씨도 마찬가지일 겁니다.”“신 대표,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칭찬으로 듣겠습니다.”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하나만 기억해 두세요. SLP의 며느리는 아무나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나는 잠깐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봤다.“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아무나 앉을 수 없는 자리라면, 아무나 밀어낼 수도 없는 자리일 테니까요.”나는 보란 듯이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런 나를 보는 한정숙 여사의 이마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실망시키는 일, 없을 거예요”그게 대화의 끝이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 날이 밝았다.***결혼식은 예상했던 대로 성대하게 열렸다.재계 인사들이 대부분 참석했고, 언론도 빠지지 않았다.호텔 로비에는 아침부터 취재진이 가득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
재계 탑으로 꼽히는 SLP그룹답게 본가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이미 그 규모는 짐작됐다.높은 담벼락이 사방을 길게 둘러싸고 있었고, 정문에는 검은 철문으로 된 거대한 대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대문을 지키고 선 경호원들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정제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차 안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대문이 천천히 열렸다.차가 안으로 들어서자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았다.정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단순히 ‘넓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사계절 내내 관리되는 듯한 잔디가 부드러운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조경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았다. 계산된 균형 속에서 조용한 위압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정원 한가운데에는 큰 분수대가 있었다.하얀 석조 분수에서 물줄기가 부드럽게 떨어지고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석조 가제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짙은 초록 덩굴이 기둥을 타고 올라가 있어 마치 오래된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차는 그 정원을 가로질러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잠시 후 본채가 모습을 드러냈다.3층짜리 저택이었다.외관은 화려하기보다는 묵직한 인상이었다. 밝은 석재로 지어진 건물은 세월이 쌓일수록 더 단단해질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본채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별도의 건물이 각각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사용인들이 머무는 건물과 경호원들이 상주하는 건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정한 별채 같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이 집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되는지 알 수 있었다.차가 현관 앞에 멈췄다.문이 열리자 내부의 공기가 느껴졌다.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내가 살고있는 그랑 팔레 본가도 규모가 작지 않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완벽히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현관을 들어서자 높은 천장이 시야를 압도했다. 대리석 바닥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넓은 홀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응접실과 접견실이 이
“주주들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뭐라고 합니까?”“SLP가 경영에 개입하는 건 아닌지 확인받고 싶어했습니다.”나는 피식 웃었다. 고작 결혼 기사에 화들짝 놀라 반응하는 것에 허탈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직 본선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차도영과의 결혼은 경영권 확보를 위한 전초전, 준비운동에 불과했다.그와 결혼 계약을 맺은 직후 나는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해 자본 확보와 주주 로비 작업에 들어갔다.고작 3%에 불과했던 지분은 차명까지 합하면 어느새 7%가 되어 있었다.여기에 차도영과 SLP그룹이 보유한 지분을 더하면 숙부의 협잡질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장에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예를 들면요.”“SLP가 우리 지분을 노린다거나, 대표님이 방어를 위해 결혼을 선택한 걸거라고요.”나는 잠깐 그를 빤히 보았다. 아주 족집게가 따로 없었다. 어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맞힐 수 있는지.하긴 그러니 할아버지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겠지.비록 지금은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랑 팔레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부동산 재벌이었다.그런 곳이 삼촌과 조카의 경영권을 두고 지저분한 싸움을 벌이는 중인데다, 다른 그룹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불안이 겹치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하지만 나는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틀린 말은 아니네요.”안 그래도 조용하던 회의실이 더욱 조용해졌다. 몇몇 임원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죠.”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나에게 집중됐다.“그랑 팔레가 SLP에 흡수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저는 그랑 팔레를 갖다 바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결혼은 결혼이고, 사업은 사업입니다.”“...”“그리고 SLP와의 결합은 득이 되면 득이 됐지, 결코 실이 되지 않을 겁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대표님은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커피부터 마시죠.”“맞습니다.”“그리고 커피 내리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는 스타일.”그가 잠깐 웃었다.“그것도 맞습니다.”“그리고.”나는 그의 셔츠 소매를 힐끗 봤다.“넥타이는 항상 느슨하게 풀어두네요.”“아침이라서요.”“아니요.”나는 고개를 저었다.“대표님은 긴장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 같아요.”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그렇게 보였습니까.”“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그래서 계약 결혼도 받아들인 거겠죠.”그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대표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저요?”“네.”그는 말했다.“대표님도 통제 가능한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 같거든요.”나는 웃었다.“그래서 계약서를 그렇게 꼼꼼히 검토했나 보네요.”“대표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그건 인정해요.”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래도 하나 아쉬운 건 있네요.”“뭡니까.”“계약서에 빠진 조항이 하나 있어요.”그가 고개를 기울였다.“어떤 조항입니까.”나는 태연하게 말했다.“아침 식사는 같이 할 것.”그가 잠깐 웃었다.“지금이라도 추가할 수 있습니다.”“거절합니다.”“이유는요.”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은 아침에 말이 너무 많거든요.”도영이 작게 웃었다.“대표님이 먼저 질문하셨습니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대표님이 먼저 눈썰미를 자랑했잖아요.”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그래도.”그가 말했다.“생각보다 편합니다.”“뭐가요.”“이 결혼.”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햇빛이 유리창을 타고 거실 바닥 위로 길게 번지고 있었다.“저도요.”나는 말했다.“생각보다 자연스럽네요.”“뭐가 말입니까?”“그냥 이런 상황이?”나는 거실을 가볍게 둘러봤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얼마 전까지 남이었는데 이렇게 아침에 같이 커피 마시고 있는 거.”도영은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