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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서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2 06:19:38

호텔을 나온 여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가로지르고, 호텔 정문을 빠져나온 뒤에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화가 났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자고 했을 때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라갔다. 가방이며 구두며 팔찌며 반지를 사오던 것도 방법이 잘못됐을 뿐, 자신에게 잘해주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해보려 했다.

민우가 덕배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고 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웃었다.

그런데 스위트룸에서 들은 말은 달랐다.

먼저 씻을래.

아니면 같이.

네가 좋아하는 걸로.

여름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내가 언제 좋아한대.”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덕배가 다른 여자들과 어떻게 만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자신까지 똑같을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한 건 싫었다.

택시를 부른 여름은 뒷좌석에 올라탔다.

조금 전 헤딩한 이마가 욱신거렸다.

손바닥으로 눌렀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비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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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덕한 여름   67

    다음 날 아침, 덕배는 평소보다 일찍 현장에 나갔다. 잠을 제대로 잔 것도 아니었다. 새벽녘 호텔에서 나와 집에 들어간 시간이 늦었지만 몇 시간 뒤면 다시 눈이 떠졌다. 여름에게서는 끝까지 연락이 없었다. 덕배는 더 보내지 않았다. 대신 일에 처박혔다. 오전부터 현장사무실에 앉아 밀린 보고서를 전부 확인했고, 협력업체 담당자를 직접 불러 수치가 맞지 않는 부분을 하나씩 짚었다. 점심도 거른 채 지하 현장까지 내려가 재시공 구간을 확인했다. “이거 어제 끝내라고 했죠.” 낮게 떨어진 목소리에 현장소장의 얼굴이 굳었다. “오늘 오전까지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오늘까지라고 했습니까?” “죄송합니다.” 덕배는 도면을 접었다. “세 시 전에 끝내요. 사진 말고 내가 직접 볼 겁니다.” “예, 이사님.” 일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서여름도. 어젯밤 여자도. 호텔도. 전부 머릿속에서 밀어낼 수 있었다. 오후가 되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안채아였다. 덕배는 화면을 잠깐 내려다보다 전화를 받았다. “어.” - 오빠, 바빠? “일하는 중.” - 오늘은? 덕배가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에는 끝나.” - 그럼 나 봐. “왜.” - 보고 싶으니까. 채아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덕배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 오빠? “그래.” 전화를 끊은 그는 곧바로 다시 현장으로 들어갔다. 저녁 일곱 시가 넘어서야 일이 끝났다. 덕배가 채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여덟 시를 훌쩍 넘긴 뒤였다. 문이 열리자 채아가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진짜 피곤해 보인다.” 덕배는 대답 대신 허리를 끌어당겼다. 입맞춤은 처음부터 거칠었다. 채아가 순간 숨을 삼켰다. “오빠, 잠깐…….” 덕배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거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현관문이 닫히고 두 사람의 몸이 벽에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채아가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오늘 왜 이렇게 급해…….”

  • 배덕한 여름   66

    호텔을 나온 여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가로지르고, 호텔 정문을 빠져나온 뒤에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화가 났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자고 했을 때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라갔다. 가방이며 구두며 팔찌며 반지를 사오던 것도 방법이 잘못됐을 뿐, 자신에게 잘해주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해보려 했다. 민우가 덕배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고 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웃었다. 그런데 스위트룸에서 들은 말은 달랐다. 먼저 씻을래. 아니면 같이. 네가 좋아하는 걸로. 여름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내가 언제 좋아한대.”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덕배가 다른 여자들과 어떻게 만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자신까지 똑같을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한 건 싫었다. 택시를 부른 여름은 뒷좌석에 올라탔다. 조금 전 헤딩한 이마가 욱신거렸다. 손바닥으로 눌렀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비키라고 했는데 안 비켰으니까. 덕배는 스위트룸에 혼자 남았다. 턱 아래가 얼얼했다. “존나 세게도 박았네.” 소파에 앉아 한동안 닫힌 문만 바라보던 덕배가 휴대전화를 집었다. [배덕배: 집 가는 중이냐.] 답은 없었다. 삼십 분이 지나도 없었다. 덕배의 미간이 조금씩 깊어졌다. [배덕배: 도착하면 연락해.] 또 없었다. 한 시간이 가까워졌다. 덕배는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이번에도 연결음만 이어졌다. “씨발.” 자기가 잘못한 건 안다. 그렇다고 사람 말을 이렇게까지 씹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덕배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 [배덕배: 아까는 미안하다.] 보냈다. 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를 소파에 던진 순간 다시 진동했다. 덕배의 손이 바로 움직였다. 여름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다른 여자였다. [지금 뭐 해?] 덕배는 화면을 한동안 바라봤다. 곧 메시지가 하나 더 들어왔다. [나 혼자인데 올래?]

  • 배덕한 여름   65

    엘리베이터는 주차장이 아니라 위층에서 멈췄다. 여름은 열린 문 너머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덕배가 먼저 내리자 영문도 모른 채 뒤를 따라갔다. “어디 가요?” “잠깐.” “뭔데요?” 덕배는 대답하지 않고 복도 끝으로 걸었다. 카드키가 문에 닿자 짧은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여름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방?” “어.” 덕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름은 문 앞에서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덕배가 자신에게 무슨 의도로 방까지 잡았을 거라고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안으로 한 발 들어서자 넓은 거실과 통유리창 너머의 야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라운지에서 보던 것과 또 달랐다. 여름의 눈이 커졌다. “우와~ 여기 야경도 좋네요.” 창가까지 걸어간 여름은 아래로 펼쳐진 불빛을 한동안 바라봤다. “진짜 높다.” 덕배는 재킷을 벗으며 그런 여름을 봤다. 역시 좋아했다. 비싼 가방도, 구두도, 팔찌도, 반지도 전부 싫다더니 이런 건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름의 얼굴에서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호텔. 스위트룸. 순간 기억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꽃 배달을 왔다가 마주쳤던 덕배. 한 번은 채아와. 또 한 번은 전혀 다른 여자와. 두 번 모두 스위트룸에서 함께 나왔었다. 여름이 천천히 돌아봤다. 덕배는 너무 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맞아떨어졌다. “……저 갈게요.” 덕배의 눈썹이 올라갔다. “갑자기 왜.” 여름은 곧장 문으로 향했다. 덕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야.” 여름이 멈추지 않았다. 덕배가 뒤따라가며 물었다.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아냐?” 여름의 걸음이 뚝 멎었다. 천천히 돌아봤다. “뭐요?” “좋은 데서 밥 먹고, 좋은 방에서 쉬고.” 덕배에게는 이상한 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은 좋아했다. 먼저 호텔을 잡아놓는 경우도 있었고, 식사 뒤 자연스럽게 방으로 올라오는 걸 싫어한 사람도 없었다. 그

  • 배덕한 여름   64

    퇴근 시간을 조금 넘긴 저녁 일곱 시 십 분. 여름은 J&J 앞치마를 벗어 걸어두고 있었다. 오늘은 민우와 약속이 없는 날이었다. 며칠째 퇴근 후 계속 만났던 탓에 오랜만에 곧장 집으로 가서 쉬려고 했다. “사장님, 저 갈게요.” “응. 내일 봐.”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온 순간 익숙한 검은 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차 옆에는 덕배가 서 있었다. 여름의 걸음이 느려졌다. 먼저 확인한 건 그의 양손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덕배가 그 시선을 알아챘다. “뭘 봐.” “오늘은 아무것도 안 사왔네요?” “사오지 말라며.” 여름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 “드디어 말이 통하네.” 덕배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 말투 조심해.” “칭찬인데요.” 덕배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 여름이 멈췄다. “왜요?” “밥 먹게.” “갑자기?” “저녁 안 먹었잖아.” “저 집에 가서 먹으려고 했는데요.” “그럼 나랑 먹어.” 말은 짧고 당연했다. 여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뭐 사주려고 그러는 거 아니죠?” “밥.” “진짜 밥만?” 덕배의 시선이 잠깐 여름에게 머물렀다. “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일단 밥부터 먹을 생각이었다. 그 뒤는 아직 여름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덕배가 턱짓했다. “빨리 타. 배고파.” 여름은 잠깐 망설이다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한 뒤에도 어디로 가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여름이 몇 번 물었지만 덕배는 밥 먹으러 간다는 말만 반복했다. 도심 한가운데로 들어설수록 주변 건물이 화려해졌다. 여름이 창밖을 살피다 물었다. “아저씨 뭐 먹으러 가요?” “가면 알아.” “왜 말을 안 해줘요?” “메뉴 알면 맛이 달라져?” “마음의 준비를 하죠.” 덕배가 피식 웃었다. “밥 먹는데 뭔 준비까지 해.” 차가 특급호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여름은 호텔 간판을 보고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덕배가 분명 밥을 먹자고 했고, 호텔 안에

  • 배덕한 여름   63

    같은 시각, 차강수의 집무실에서는 서쪽 건에 대한 회의가 막 끝난 참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계좌 내역과 사진, 정민이 정리한 인물 관계도가 널려 있었다. 윗선으로 의심되는 인물까지 어느 정도 좁혀졌고, 당장 움직이기보다 며칠 더 지켜보자는 강수의 결정으로 회의가 마무리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강수가 서류를 덮었다. “예, 형님.” 덕배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정민도 태블릿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야.” 덕배가 불렀다. 정민이 돌아봤다. “왜.” 덕배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묻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다고 혼자 생각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가방. 구두. 팔찌. 다이아 반지. 전부 실패했다. “너 여자친구 있지.” 정민의 표정이 묘해졌다. “갑자기?” “있냐고.” “있지.” “뭐 사주냐.” 정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뭘?” “여자들이 뭘 좋아하냐고.” 이번에는 강수도 덕배를 봤다. 덕배가 그 시선을 알아채고 얼굴을 구겼다. “형님은 왜 그렇게 보십니까.” “듣고 있어.” “사라 씨랑 한참 연애 중이시잖습니까.” 강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래서.” “사라 씨한테 뭐 해주십니까.” 집무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정민은 벌써 입꼬리를 누르고 있었다. 강수는 덕배를 한동안 보다가 짧게 물었다. “왜.” 덕배가 결국 몸을 앞으로 숙였다. “가방도 안 받습니다.” 정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구두도.” 강수가 말없이 들었다. “팔찌도 안 받고.” 덕배의 얼굴이 점점 더 억울해졌다. “다이아 반지도 안 받아요.” 정민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이 새끼야.” “잠깐만.” 정민이 고개를 숙였다. “그걸 며칠 동안 하나씩 다 사갔어?” “어.” “다 거절당했고?” “그렇다니까.” 정민의 어깨가 다시 흔들렸다. 덕배가 쿠션을 집어 던졌다. 정민이 옆으로 피했다. “씨발, 물어보잖아. 여자들은 뭘 좋아하냐

  • 배덕한 여름   62

    여름은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민우의 말을 몇 번이나 떠올렸다. 혹시 그분이 여름 씨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니겠지~.” 작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말이 안 됐다. 처음 만난 날부터 싸웠다. 차 좀 빼달라고 했더니 아저씨라는 호칭에 발끈했고, 그 뒤로도 마주칠 때마다 시비인지 장난인지 모를 말을 걸었다. 무엇보다 여름은 호텔에서 덕배를 두 번이나 봤다. 그것도 서로 다른 여자와. 여자친구는 없다면서 여자관계는 복잡한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에이.”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고개를 저었다. 택시가 집 앞에 도착했다. 여름은 원피스 자락을 정리하며 내렸다.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불편했던 구두부터 벗어던지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발이 살 것 같았다. 잠시 뒤 시선이 식탁으로 향했다. 민우에게 받은 꽃다발이 꽃병에 꽂혀 있었다. 시골에서 가져온 작은 들꽃과 함께 있으니 제법 잘 어울렸다. 여름은 소파에서 일어나 꽃병 앞에 섰다. 민우는 좋은 사람이었다. 오늘도 즐거웠다. 뮤지컬도 재미있었고,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눈 대화도 편했다. 며칠 동안 퇴근 시간이 기다려진 것도 사실이었다. 좋아지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다가 다시 덕배가 끼어들었다. 오늘 꽃집에서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얼굴. 잘 어울린다는 말 한마디를 끝까지 못 하다가 민우가 온 뒤에야 퉁명스럽게 내뱉던 목소리. 그리고 다이아 반지. “……왜 반지를 사온 거야.” 가방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구두도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다. 팔찌도. 그런데 반지는 조금 이상했다. 여름은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설마. 민우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여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겠지.” 이번에는 말끝이 조금 짧았다. 다음 날 오전, 여름은 평소처럼 J&J에 출근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꽃을 정리하는 동안에는 전날 생각도 거의 나지 않았다.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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