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영원히 제일 친한 친구야."허아연이 주민경의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었다."걱정 마. 절대 너는 안 피해. 우리는 영원히 제일 친한 친구야."주민경이 허아연을 꼭 안은 채 말했다."이렇게 오래 지내면서 새언니라고 한 번을 못 불렀네. 됐어, 이제 와서 부르기도 어색하니까 우리 그냥 우리 절친해."허아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응응."허아연과는 화해했지만 주민경은 여전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저녁을 먹고 허아연이 본가를 나선 뒤, 주민경은 주현우에게 전화를 걸어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다. 멍청하고 애교도 모르고 여자 다루는 법도 모른다며 냅다 쏘아붙였다.다만 합의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전화기 너머에서 주현우는 핸드폰을 멀찌감치 들고 있다가 주민경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무심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주민경의 하소연을 들을 시간도 에너지도 없었다.……그 시각, 아레아 베이.허아연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주현우가 침실에서 나왔다.손에 찻잔을 들고 있어 옅은 차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며칠 동안 마주치지 않았던 터라 허아연은 주현우를 흘끗 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허아연이 주현우를 피하며 길을 터주고 방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이 우스웠던 주현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찔리는 거 있어? 왜 쳐다보지도 못해?""아니요. 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쉬어요."허아연이 늘 이 말로 대화를 끝내려 하자 주현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겨우 여덟 시 넘었어, 아직 이른 시간이야."이어서 허아연이 말을 꺼내기 전에 주현우가 먼저 말했다."갑시다, 허 선생님. 서재에서 얘기 좀 해요."오후에 회사에서 야근하는데 주건영이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한바탕 야단을 치더니 당장 본가로 돌아오라고 했다.본가에 돌아가니 주건영이 당장 사인하라며 이혼 합의서를 내던졌다. 이혼 합의서를 들고 뒤뜰을 나서는데 허아연과 주민경은 무슨 큰 서러움이라도 당한 것처럼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방해할 생각이 없었던 주현우는 샛길로 빠져나와 본가
허아연이 건넨 이혼 합의서를 꼭 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주건영은 결국 허아연이 준비한 합의서를 돌려주며 말했다."현우가 준비한 건 이거니까 자기 거에만 사인할 거야. 내가 가서 얘기해볼게.""그동안 네가 고생이 많았다."주건영이 만류하지 않고 직접 주현우에게 얘기하겠다고 하자 허아연은 속으로 안도하고 웃으며 말했다."다 지난 일이에요.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에요.""감사해요, 할아버지. 오히려 그동안 주씨 가문에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허아연의 정중한 말에 주건영이 손을 저었다."우리야 다들 괜찮아. 현우 말고는 별 영향도 없었어. 오히려 네가 영향받지 않아야 할 텐데.""저는 괜찮아요, 할아버지.""할아버지, 그럼 좀 쉬세요. 저는 민경이한테 갈게요.""그래, 가봐."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허아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건영은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쓰렸다. 여전히 놓아주기가 아쉬웠다. 재벌가 수많은 아가씨들 중에 제일 좋아했고 마음에 들었던 허아연이었다.처음 이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 허민수는 손녀를 주씨 가문에 시집 보내지 않으려 하며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었다. 주건영이 한참을 달래고 설득한 끝에 겨우 허아연에게 생각을 물어보겠다고 했다.그런데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이야.정말 미안했다. 너무 미안했다.생각할수록 주건영은 전에 주현우를 채찍으로 때린 게 너무 가벼웠던 것 같았다. ……앞마당으로 돌아온 허아연이 주민경에게 이혼 합의서 얘기를 꺼냈다.주민경은 갑자기 울적해졌다."맨날 둘째 오빠 욕하고 이혼하라고 널 부추겼는데 막상 진짜로 이혼한다고 하니까 오빠가 너무 불쌍하고 안쓰럽네."허아연이 말을 하기도 전에 주민경이 말을 이었다."오빠가 나름대로 널 잡으려는 것 같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잡으려고 하는 거잖아.""23년을 동생으로 같이 지냈으니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아연아, 오빠 진짜로 이혼하기 싫은 거야.""아연아, 네가 이혼만 안 하겠다고 하면 오빠한테 재산을 전부 달라고 해도 줄 거야."허아연이
권승준의 기사로 몇 년을 일했지만 사적으로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먼저 말을 걸며 대화를 이어가는 건 더더욱 없었다.그러니 식사 시간에 같이 밥도 먹지 않고 그냥 내려준 게 이상했다. 기사의 물음에 권승준이 웃으며 말했다."그분이 좀 낯을 가리는 편이라 지금 같이 식사하자고 하면 부담스러워할 거예요."기사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좀 수줍음이 많은 분이시긴 하죠."권승준은 그저 웃기만 했다.……한편.사무실로 돌아온 허아연은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는 바로 일에 몰두했다.그 뒤로 며칠 동안 날이 밝기 무섭게 나가서 별을 이고 돌아오는 일상이 이어졌다.다만 퇴근 시간은 조금 조율해서 며칠 전보다는 일찍 들어왔다.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허아연과 주현우는 며칠 동안 거의 매일 완벽하게 엇갈렸다.같은 집에 살면서도 며칠째 마주치지 않았다.적어도 허아연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주현우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토요일이 되자 주건영은 퇴원했다. 허아연은 주민경과 함께 새집을 한 번 더 살펴보고 나서 주민경의 권유로 함께 본가에 돌아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가방 안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이혼 합의서가 들어 있었다. 허아연도 주민경과 함께 본가에 돌아가기로 했다.식탁에는 온 가족이 모여 왁자지껄했다. 하지만 아무도 허아연과 주현우의 이혼 얘기는 꺼내지 않았고 모두가 피하는 분위기였다.주현우는 오늘 돌아오지 않았다.밥을 다 먹고 주민경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허아연은 주민경의 친구가 전화를 걸어온 틈에 합의서를 들고 주건영을 찾아 뒤뜰로 향했다. 바둑판 앞에 앉아 있던 주건영은 허아연이 건네는 합의서를 받아 들었다.속수무책이라는 표정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동안 말이 없던 주건영이 고개를 들어 허아연을 바라봤다."아연아, 진짜로 현우랑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어?" 맞은편에 앉은 허아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 충분히 생각했어요."이어서 주건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허아연이 먼저
허아연이 뒷좌석에 앉은 권승준을 보며 말했다."감사하지만 이미 차 불렀어요, 비서실장님." "여기는 차 잡기가 쉽지 않아요, 타요."서류로 머리 위를 가린 채 주변을 둘러봤지만 정말 오가는 차가 없었다. 허아연이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감사히 타겠습니다."말을 마치고 조수석 문을 열었더니 시트 위에 서류 뭉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때 권승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뒤에 타요."공적인 서류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하물며 권승준의 서류라면 더더욱 금물이었다. 허아연은 조수석 문을 닫고 몸을 숙여 뒷좌석에 올라탔다.내내 열려 있던 뒷좌석 문은 허아연이 차에 타고 직접 닫았다.마치 처음부터 허아연을 위해 열어둔 것 같았다.차가 부드럽게 출발하자 허아연이 고개를 돌려 권승준을 보며 말했다."시간 빼앗아서 죄송해요."권승준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지금은 딱히 다른 일도 없어서요."곧게 뻗은 도로 양쪽으로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걸러져 쏟아지거나 두 나무 사이로 환하게 비친 덕분에 여름치고는 그리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이었다.허아연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자 권승준이 먼저 말을 걸었다."회의가 있었어요?"허아연이 권승준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첨단기술 간담회가 있었어요.""아!"뒤늦게 대꾸하던 권승준이 말을 이었다."참, 허 선생님. 스타라이트에서 보내준 체험 로봇은 요즘 시간이 없어서 아직 못 써봤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연락할게요.""괜찮아요. 시간 있을 때 천천히 사용해 보세요."수많은 시민들을 거느린 교진시 고위 공직자로서 크고 작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테니 바쁜 게 당연했다.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말을 마친 허아연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허아연은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었다.권승준 앞에서는 더더욱 말수가 줄었다.
오지은은 사람들의 환호에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다들 이렇게 치켜세워 주시니 제가 사양하는 게 더 실례겠네요.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너그럽게 봐주세요.""오 대표님, 너무 겸손하세요.""오 대표님, 마음껏 얘기하세요. 대표님이 잘 못하면 저희는 아예 나설 자격도 없는걸요."사람들의 환호에 허아연 옆에 있던 지일우가 피식 웃으며 비웃듯 중얼거렸다."저 여자가 첨단기술 간담회 발언자 자격이 있어? 웃기고 있네."허아연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없이 회의 자료를 넘겼다.옆에서 한민규가 조용히 말했다."됐어, 됐어. 이건 형식일 뿐이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마."사람들이 모이면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다만 이 업계에서 진짜 돈을 벌고 성과를 내려면 결국 실력이 있어야 했다. 진짜 기술이 있어야 했다.한민규와 지일우가 소곤거리는 사이에도 허아연은 크게 끼어들지 않았다.솔직히 오지은에게 그만한 관심이 없었다.잠시 후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됐다. 기업 관계자들 외에 시청 주요 인사들도 자리했고 몇몇 중요 인사들이 발언을 마친 뒤 오지은이 참석 기업들을 대표해 짧은 오프닝 멘트를 했다.그리고…… 권승준은 오늘 참석하지 않았다.……오전 열한 시가 넘어 세 시간 가까이 이어진 회의가 마침내 끝났다.다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누군가 밥 먹을 시간이 됐다고 하자 다들 어디 가서 먹을지 의논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오지은을 불러대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오 대표님, 먼저 가시면 안 돼요. 점심은 꼭 같이 해요."손에 휴대폰을 든 오지은이 웃으며 말했다."저 현우랑 점심 약속이 있어서요. 현우한테 전화해서 올 수 있는지 먼저 물어볼게요."오지은의 말에 성대 테크 대표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오 대표님이랑 주 대표님은 정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시네요. 집안도 걸맞으시니 무슨 얘기든 잘 통하시겠죠.""그러게요, 두 분 참 선남선녀처럼 잘 어울리시잖아요. 오중근 대표님 복도 많으시지."사실 두 집안이 걸맞은 수준
허아연은 허공에 멈춰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내리며 주먹을 쥔 채 담담하게 말했다."주현우 씨를 때리지 않은 건 나를 구해줬기 때문이에요.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만큼 난……"잠시 멈칫하던 허아연은 바로 말을 돌렸다. "양가 할아버지들 관계도 있으니까 우리 그냥 깔끔하고 좋게 좋게 마무리해요."이어서 바로 덧붙였다."그리고 주현우 씨 제품 팔로업은 한민규 선배한테 넘길게요. 주현우 씨를 상대할 때면 개인적인 감정이 앞설 것 같아서요."이혼 얘기를 꺼낸 이후로도 허아연은 사실 여러 번 주현우의 생각을 따르고 주현우를 맞춰주었다. 허아연의 퇴사 풍파로 회사 주가가 하한가를 쳤을 때, 주현우는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하면서도 단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허아연도 마음이 흔들렸었다. 하지만 그날 주현우의 다정함은 그저 허아연을 이용한 연기에 불과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주현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허아연도 더 이상 주현우가 변하길 기대하지 않았다.더는 할 말이 없었던 허아연은 아무 말 없이 주현우 옆을 지나쳐 침실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갔다.복도에 남은 주현우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몸을 돌려 반대쪽을 바라봤다. 허아연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집스러웠다. 방으로 돌아온 허아연은 한동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속이 후련했다.주현우가 왜 끝까지 절차를 밟으려 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알고 싶지도 않았다.침대에 잠시 누워 마음을 가라앉힌 뒤 허아연은 일어나 씻으러 갔다.다음 날 출근해서 한민규에게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하고 변호사 사무소에 찾아가 변호사에게 합의서를 받아왔다.변호사가 합의서를 가져가려는 허아연을 보며 난처한 듯 말했다."허 대표님, 주 대표님이 사인을 안 하시면 아무리 많이 가져가셔도 소용이 없어요."허아연은 그래도 합의서를 챙겼다. 변호사 사무소에서 회사로 돌아온 허아연은 주현우 담당 팔로업을 한민규에게 넘기고 다른 고객으로 교체했다.팔로업 고객을 바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