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허아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현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주현우는 이내 차를 출발시켜 회사로 돌아갔다.오후에 주현우는 출장을 떠났고 허아연은 다시 일에 완전히 몰두했다.주현우가 출장 중인 동안 유건희는 허아연을 데리고 임원 두 명을 만나게 해주었다. 두 사람 모두 허아연에게 앞날이 창창하니 열심히 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로봇은 몇 차례 조율과 테스트를 반복한 끝에 12월 18일 출시가 확정되었다.10월부터 사전 예약을 받을 예정이었다.모든 게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고 허아연의 업무도 점점 자리를 잡아가며 아이디어도 늘어났다.다만 주현우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전화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주현우가 먼저 전화를 몇 번 걸어왔고 상황을 알리는 보고용 메시지를 보내왔다.가끔은 너무 바빠서 주현우의 전화와 메시지를 미처 못 보고 나중에 보기도 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넘어갔다.답장도 하지 않았다. 주현우가 먼저 찾아오지 않으니 허아연의 일상은 한결 고즈넉해졌다.어느 날 바쁜 일과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며 단톡방 메시지를 훑어보던 허아연은 전서진과 심유환이 주현우가 이번 출장에서 문제가 생겨 며칠째 처리 중이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발견했다.전서진: [걱정 말고 현우 믿어봐. 분명히 잘 해결할 거야.]주민경: [오빠한테 같이 가겠다고 했는데 내 말 안 듣더라니까.]마지막으로 심유환이 말했다. [며칠 지나도 해결되지 않으면 내가 직접 가서 상황 보고 올게.]심유환의 말에 주민경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어 몇 마디 더 나누던 사람들은 화제를 바꾸었다. 전서진이 허아연을 태그하며 말했다.[아연아, 너 대통령보다 더 바쁜 거 아니야? 민경이도 한동안 얼굴도 못 봤다던데 주말에 다들 한번 모이자. 과학자님, 우리 체면도 좀 봐줘.]전서진의 말에 허아연이 답했다.[좋아요. 저번에 밥 한번 쏘기로 했으니 이번에 제가 살게요. 꽃다발 보내줘서 다들 고마웠어요.]하준서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꽃을 선물하니
거짓말이 아니었다. 연말에 출시할 제품에 세미나와 강연 자료까지 할 일이 진짜 너무 많았다.주현우가 찾아온 두 번을 빼면 거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일에 쏟아붓고 있었다. 주현우와 이혼 얘기를 꺼내거나 사인하라고 실랑이를 벌일 여유도 없었다.한 번 얘기를 꺼낼 때마다 크게 한 판 싸워야 했으니까.너무 진이 빠졌다.기분에도 일에도 다 영향 주곤 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주현우는 허아연을 번쩍 안고 침실로 들어가며 말했다."우리 일단 다른 얘기는 잠깐 접어두고 지금 이 순간만 즐기자. 한 번 더 해주고 나서 푹 쉬게 해줄게, 방해 안 해."주현우가 침대에 살며시 내려놓자 허아연이 돌아가라며 거절했다. 하지만 주현우는 사람 마음을 너무 잘 흔들었다. 허아연은 어떻게 받아쳐야 할 지 몰랐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허아연이 주현우를 밀어내며 말했다."주현우 씨, 이러지 않아도 돼요."주현우가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말했다."아연아, 내가 이러는 여자는 너밖에 없어. 나 다른 여자는 쳐다도 안 봐."말을 마치고 다시 입술을 덮쳤다."주현……"하지만 주현우가 너무 능숙한 탓에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결국 너무 지쳐버린 허아연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침대 머리맡 스탠드 불빛 아래, 곤히 잠든 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스스로 해결한 뒤 다시 샤워하고 나서 허아연 옆에 누웠다.강요하지 않고 허아연을 배려하며 서비스해준 건 진심으로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조용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서였다.……다음 날 아침, 허아연이 깨어났을 땐 주현우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허아연이 막막한 듯 이마를 짚었다. 모든 가능성을 다 생각해 봤지만 주현우가 이렇게 자세를 낮춰가며 화해를 청할 줄은 몰랐다. 눈을 반쯤 뜬 주현우가 옆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는 허아연을 보며 느긋하게 인사를 건넸다."좋은 아침."허아연이 정신을 차리고 짧게 인사했다."좋은 아침."잠시 후 허아연이 씻으러 가자 주현우도 일어났다. 또 일방적으로 허아연에게 한바탕 치
이미 다 큰 성인이니 변명 따위 할 생각 없었다.조금 전, 주현우가 안아주고 입 맞추고 다정하게 굴었을 때 허아연이 버티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태연하게 옷을 가다듬고 있었지만 귓불이 발그스름해진 허아연을 본 주현우는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능글맞게 말했다."아연아, 아까 소리 진짜 듣기 좋았어. 너무 마음에 들어."허아연이 고개를 들어 흘기며 담담하게 말했다."시간 늦었어요, 돌아가요."주현우가 더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실컷 즐겨놓고 이제 내쫓아?"허아연은 말하지 않았다.옷을 다 입고 나서야 말했다."강연 자료 작성해야 해요. 얼른 돌아가요."말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갔다.컴퓨터를 켰지만 머릿속에 온통 조금 전 주현우와 했던 행동들뿐이었다. 진짜로 한 건 아니지만 주현우가 계속 허아연을 위해 서비스하고 맞춰주었다. 허아연도 주현우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씩 이렇게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때 밖에서 주현우 목소리가 들렸다."아연아, 샤워 좀 해도 돼?"허아연은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보느라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잠시 후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하는데 주현우가 들어왔다.이 집에 갈아입을 옷이 없을 터이니 상의 탈의한 채 하체엔 흰 샤워 타월을 두르고 있었다.주현우가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허아연이 말했다."주현우 씨, 지금 마침 머릿속에 생각이 떠올랐으니 방해하지 말아요."주현우가 가까이 와서는 먼저 허리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추고 허아연을 안아 자기 무릎 위에 앉히며 말했다."할 거 해, 방해 안 할게."마침 생각이 떠오른 허아연도 주현우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안겨 있는 채로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진지하게 보고서를 썼다.안경을 쓰고 있는 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수많은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예전에 주현우 방에서 숙제하던 모습, 하루 종일 곁에서 말 한마디 없이 있던 것들이 떠올랐다. 한번은 허아연
업무 일정을 보고하는 허아연을 보며 주현우가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편하게 얘기를 나눈 게 얼마 만이던가.주현우가 오른손으로 하얗고 말랑한 허아연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대단하네. 전엔 내가 얕잡아봤네.""고마워요." 허아연이 또 말을 돌렸다. "로봇은 쓰고 있어요? 어때요?""아직 뜯지도 않았어."한민규와 담당 고객을 바꿔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세 명 중에 두 명이 피드백이 오지 않는 고객일 뻔했다. 주현우를 잠깐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차를 바라보던 허아연 눈에 선물 상자가 보였다. 허아연이 다시 주현우를 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선물 가져다줘서 고마워요." 허아연이 계속 말할 화제를 찾는 걸 본 주현우가 답했다. "열어봐, 마음에 드는지."주현우가 손님인 만큼 성의를 보여야 했기에 허아연도 바로 예쁜 선물 박스를 뜯었다. 아주 예쁜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묻지 않아도 수십억짜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결혼 전에도 주현우는 명절이나 기념일마다 선물을 준비했는데 항상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결혼하고 나서는 더 이상 선물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허아연이 목걸이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예쁘네요, 고마워요."주현우가 여기까지 들고 왔는데 굳이 싫다며 실랑이를 하는 게 더 이상했다. 주현우가 손을 뻗어 목걸이를 들고 허아연의 목을 보며 말했다."내가 해줄게.""괜찮아요, 지금 어디 갈 것도 아닌데요." 거절하는 사이에 주현우가 이미 허아연을 돌려세워 등지게 한 뒤 목걸이를 채워줬다.허아연이 오늘 입은 흰 원피스는 주현우가 선물한 목걸이와 아주 잘 어울렸다.차가운 목걸이가 목에 닿자 허아연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만지다 주현우를 돌아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고마워요."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주현우는 뒤에서 느긋하게 허아연을 감싸안고 어깨에 턱을 올렸다. 허아연이 흠칫 놀라며 현우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지만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 종일 네 생각했어. 문 앞에서 두 시간도 넘게 기다렸단
복도의 흰색 조명이 나란히 마주 선 두 사람을 더욱 조용하게 만들었다.어색한 침묵이 잠깐 이어지다 두 사람이 갑자기 동시에 입을 열었다."바쁠 텐데 먼저 들어가요.""잠깐 들어오라는 말도 안 해?" 동시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 보러 가라는 허아연의 말에 주현우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다정하게 말했다."안 바빠."주현우가 말을 마치자 허아연이 다시 조용히 말했다. "집이 좀 어지러워서 들어가는 건……"허아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현우가 웃으며 말을 끊었다."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겁나?""그런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허아연은 문 손잡이에 걸린 선물 상자를 바라보다 다시 쓰레기통 위 재떨이에 시선을 돌렸다. 다 피운 담배꽁초가 몇 개 보였다. 전부 다 주현우가 피는 브랜드였다. 허아연이 가볍게 발을 절뚝이며 주현우 옆을 지나 문을 열었다.허아연이 지나갈 때 주현우는 자연스럽게 과일 봉투를 들어주었다.청사과 몇 알과 샤인머스캣 한 송이였다. 여전히 어릴 때처럼 즐겨 먹는 과일도 변함없고 먹는 것도 소박했다.잠시 후, 문이 열리자 주현우는 과일과 선물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집 안은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지럽다는 말이 무색했다.허아연이 에어컨을 켜며 깍듯하게 말했다."앉아 있어요. 차 한 잔 내올게요."주현우가 말하기도 전에 허아연은 주방으로 들어가 차를 우리고 과일을 씻었다.차와 과일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주현우는 이미 집 안을 한 바퀴 살펴본 뒤였다.방 세 개에 거실 두 칸, 방 하나는 서재로 꾸며놨고 책장엔 예전 책들과 새로 산 책들이 반반씩 꽂혀 있었다.작지 않은 집이지만 정갈하게 정돈돼 있었다.가구는 딱 봐도 주민경 솜씨였다.허아연이 찻잔과 과일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한 번도 입주한 적 없는 준신축 중고 아파트고 가구랑 가전은 민경이가 선물해줬어요. 지내기도 편하고 회사랑도 가까워요."주현우도 담담한 표정으로 허아연이 무덤덤하게 하는 말을 듣고
그래서 유건희는 의외로 차분했다.허아연이 걸어온 길을 유건희가 먼저 걸어왔으니까.허아연이 발을 살짝 절뚝이며 맞은편에 앉자 유건희가 말했다."논문 반응 좋아서 위에서 벌써 전화가 몇 통 왔어요. 강 부장님이 기회 되면 만나고 싶다고 했고 학교에서도 연락 왔는데 세미나가 열린다고 하니 그때 한번 다녀와요.""아, 그리고 9월에 개강하면 학생들에게 강연 한번 해요. 보름 정도 남았으니 강연 자료 준비해요."윗분들의 칭찬은 허아연도 놀랍지 않았기에 꽤나 침착했다. 그런데 교진대 강연이라니, 허아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직 자격이 좀 부족한 거 아닐까?막 입을 떼려는데 유건희가 먼저 말했다."한민규 씨와 지일우 씨 다 강연한 적 있어요. 회사에서 매년 전공 강의 나가는데 항상 남자들만 갔으니 이번엔 아연 씨가 가봐요. 부담 갖지 말고 전공 얘기하고 공부 방법 같은 거 공유하면 돼요."허아연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된 유건희가 덧붙였다."아연 씨가 충분한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보내는 거예요."유건희가 이렇게까지 믿어주니 허아연도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알겠어요, 대표님. 잘 준비해 볼게요."유건희는 교진대 교수이기도 했다. 교진대 학생이라면 거의 다 유건희 수업을 들어봤을 정도였다.유건희의 얼굴과 이미지 덕분에 여학생들이 수업을 신청하려 다른 학교에서 몰래 강의 들으러 오는 학생도 있었다.이어서 허아연은 유건희에게 로봇 테스트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하던 일을 마무리한 뒤에는 한민규와 함께 실험실로 향했다.실험실이 꽤 멀어서 기름값도 아낄 겸 매번 차 한 대로 이동했다. 허아연 다리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터라 최근에는 대부분 한민규 팀을 따라다녔다. 차가 시내를 벗어나 해안 도로로 들어서는 순간, 도심의 시끌벅적함을 뒤로 하고 고요함만 남았다.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가 보였다. 뒷좌석에 앉아 뺨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 허아연은 마음이 한없이 차분했다. 지금 이 고요함을 누릴 수 있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