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권승준의 기사로 몇 년을 일했지만 사적으로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먼저 말을 걸며 대화를 이어가는 건 더더욱 없었다.그러니 식사 시간에 같이 밥도 먹지 않고 그냥 내려준 게 이상했다. 기사의 물음에 권승준이 웃으며 말했다."그분이 좀 낯을 가리는 편이라 지금 같이 식사하자고 하면 부담스러워할 거예요."기사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좀 수줍음이 많은 분이시긴 하죠."권승준은 그저 웃기만 했다.……한편.사무실로 돌아온 허아연은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는 바로 일에 몰두했다.그 뒤로 며칠 동안 날이 밝기 무섭게 나가서 별을 이고 돌아오는 일상이 이어졌다.다만 퇴근 시간은 조금 조율해서 며칠 전보다는 일찍 들어왔다.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허아연과 주현우는 며칠 동안 거의 매일 완벽하게 엇갈렸다.같은 집에 살면서도 며칠째 마주치지 않았다.적어도 허아연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주현우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토요일이 되자 주건영은 퇴원했다. 허아연은 주민경과 함께 새집을 한 번 더 살펴보고 나서 주민경의 권유로 함께 본가에 돌아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가방 안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이혼 합의서가 들어 있었다. 허아연도 주민경과 함께 본가에 돌아가기로 했다.식탁에는 온 가족이 모여 왁자지껄했다. 하지만 아무도 허아연과 주현우의 이혼 얘기는 꺼내지 않았고 모두가 피하는 분위기였다.주현우는 오늘 돌아오지 않았다.밥을 다 먹고 주민경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허아연은 주민경의 친구가 전화를 걸어온 틈에 합의서를 들고 주건영을 찾아 뒤뜰로 향했다. 바둑판 앞에 앉아 있던 주건영은 허아연이 건네는 합의서를 받아 들었다.속수무책이라는 표정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동안 말이 없던 주건영이 고개를 들어 허아연을 바라봤다."아연아, 진짜로 현우랑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어?" 맞은편에 앉은 허아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 충분히 생각했어요."이어서 주건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허아연이 먼저
허아연이 뒷좌석에 앉은 권승준을 보며 말했다."감사하지만 이미 차 불렀어요, 비서실장님." "여기는 차 잡기가 쉽지 않아요, 타요."서류로 머리 위를 가린 채 주변을 둘러봤지만 정말 오가는 차가 없었다. 허아연이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감사히 타겠습니다."말을 마치고 조수석 문을 열었더니 시트 위에 서류 뭉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때 권승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뒤에 타요."공적인 서류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하물며 권승준의 서류라면 더더욱 금물이었다. 허아연은 조수석 문을 닫고 몸을 숙여 뒷좌석에 올라탔다.내내 열려 있던 뒷좌석 문은 허아연이 차에 타고 직접 닫았다.마치 처음부터 허아연을 위해 열어둔 것 같았다.차가 부드럽게 출발하자 허아연이 고개를 돌려 권승준을 보며 말했다."시간 빼앗아서 죄송해요."권승준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지금은 딱히 다른 일도 없어서요."곧게 뻗은 도로 양쪽으로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걸러져 쏟아지거나 두 나무 사이로 환하게 비친 덕분에 여름치고는 그리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이었다.허아연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자 권승준이 먼저 말을 걸었다."회의가 있었어요?"허아연이 권승준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첨단기술 간담회가 있었어요.""아!"뒤늦게 대꾸하던 권승준이 말을 이었다."참, 허 선생님. 스타라이트에서 보내준 체험 로봇은 요즘 시간이 없어서 아직 못 써봤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연락할게요.""괜찮아요. 시간 있을 때 천천히 사용해 보세요."수많은 시민들을 거느린 교진시 고위 공직자로서 크고 작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테니 바쁜 게 당연했다.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말을 마친 허아연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허아연은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었다.권승준 앞에서는 더더욱 말수가 줄었다.
오지은은 사람들의 환호에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다들 이렇게 치켜세워 주시니 제가 사양하는 게 더 실례겠네요.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너그럽게 봐주세요.""오 대표님, 너무 겸손하세요.""오 대표님, 마음껏 얘기하세요. 대표님이 잘 못하면 저희는 아예 나설 자격도 없는걸요."사람들의 환호에 허아연 옆에 있던 지일우가 피식 웃으며 비웃듯 중얼거렸다."저 여자가 첨단기술 간담회 발언자 자격이 있어? 웃기고 있네."허아연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없이 회의 자료를 넘겼다.옆에서 한민규가 조용히 말했다."됐어, 됐어. 이건 형식일 뿐이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마."사람들이 모이면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다만 이 업계에서 진짜 돈을 벌고 성과를 내려면 결국 실력이 있어야 했다. 진짜 기술이 있어야 했다.한민규와 지일우가 소곤거리는 사이에도 허아연은 크게 끼어들지 않았다.솔직히 오지은에게 그만한 관심이 없었다.잠시 후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됐다. 기업 관계자들 외에 시청 주요 인사들도 자리했고 몇몇 중요 인사들이 발언을 마친 뒤 오지은이 참석 기업들을 대표해 짧은 오프닝 멘트를 했다.그리고…… 권승준은 오늘 참석하지 않았다.……오전 열한 시가 넘어 세 시간 가까이 이어진 회의가 마침내 끝났다.다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누군가 밥 먹을 시간이 됐다고 하자 다들 어디 가서 먹을지 의논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오지은을 불러대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오 대표님, 먼저 가시면 안 돼요. 점심은 꼭 같이 해요."손에 휴대폰을 든 오지은이 웃으며 말했다."저 현우랑 점심 약속이 있어서요. 현우한테 전화해서 올 수 있는지 먼저 물어볼게요."오지은의 말에 성대 테크 대표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오 대표님이랑 주 대표님은 정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시네요. 집안도 걸맞으시니 무슨 얘기든 잘 통하시겠죠.""그러게요, 두 분 참 선남선녀처럼 잘 어울리시잖아요. 오중근 대표님 복도 많으시지."사실 두 집안이 걸맞은 수준
허아연은 허공에 멈춰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내리며 주먹을 쥔 채 담담하게 말했다."주현우 씨를 때리지 않은 건 나를 구해줬기 때문이에요.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만큼 난……"잠시 멈칫하던 허아연은 바로 말을 돌렸다. "양가 할아버지들 관계도 있으니까 우리 그냥 깔끔하고 좋게 좋게 마무리해요."이어서 바로 덧붙였다."그리고 주현우 씨 제품 팔로업은 한민규 선배한테 넘길게요. 주현우 씨를 상대할 때면 개인적인 감정이 앞설 것 같아서요."이혼 얘기를 꺼낸 이후로도 허아연은 사실 여러 번 주현우의 생각을 따르고 주현우를 맞춰주었다. 허아연의 퇴사 풍파로 회사 주가가 하한가를 쳤을 때, 주현우는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하면서도 단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허아연도 마음이 흔들렸었다. 하지만 그날 주현우의 다정함은 그저 허아연을 이용한 연기에 불과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주현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허아연도 더 이상 주현우가 변하길 기대하지 않았다.더는 할 말이 없었던 허아연은 아무 말 없이 주현우 옆을 지나쳐 침실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갔다.복도에 남은 주현우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몸을 돌려 반대쪽을 바라봤다. 허아연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집스러웠다. 방으로 돌아온 허아연은 한동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속이 후련했다.주현우가 왜 끝까지 절차를 밟으려 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알고 싶지도 않았다.침대에 잠시 누워 마음을 가라앉힌 뒤 허아연은 일어나 씻으러 갔다.다음 날 출근해서 한민규에게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하고 변호사 사무소에 찾아가 변호사에게 합의서를 받아왔다.변호사가 합의서를 가져가려는 허아연을 보며 난처한 듯 말했다."허 대표님, 주 대표님이 사인을 안 하시면 아무리 많이 가져가셔도 소용이 없어요."허아연은 그래도 합의서를 챙겼다. 변호사 사무소에서 회사로 돌아온 허아연은 주현우 담당 팔로업을 한민규에게 넘기고 다른 고객으로 교체했다.팔로업 고객을 바꾸겠다
"몇 년 동안, 텅 빈 방을 혼자 지키고 현우 씨 대신 뒷수습을 할 때마다 합의서를 줘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어요. 그때마다 꾹 눌러 참았어요.""그런데 주현우 씨, 사람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어요. 이해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 기다려주는 건 더더욱 그래요. 세상에 누구도 언제까지나 당신을 감싸주고 맞춰줄 순 없어요.""내가 원래부터 잘 참는 사람인 줄 알아요? 내가 진짜 감정도 없고 괴롭지도 않고 현우 씨 일들 하나도 신경 안 쓰는 줄 알아요? 현우 씨와 오지은이 같이 다니는 거 정말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아요? 그래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주현우 씨를 향한 감정은 3년 동안 주현우 씨의 거듭된 배신으로 이미 다 닳아 사라졌으니까요.""현우 씨는 우리 결혼을 배신한 거예요.""주현우 씨, 우리 오랜 시간 알고 지냈으니 잘 알 거잖아요. 내가 이혼 합의서를 건넨 순간부터 우리 혼인은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도 없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더 이상 주현우 씨 일에 나서서 대신 수습하지 않을 거예요.""물론 주현우 씨가 누구를 만나든 이제 상관없어요. 내 마음속에서 주현우 씨는 이미 오래전부터 남편이 아니었으니까요.""지금 이렇게 합의서에 사인도 안 하고 신청도 안 하고 질질 끄는 게 내가 만만하게 보여서인지, 아니면 이혼만 안 하면 예전처럼 내가 다 받아주고 감싸주고 온갖 거지 같은 뒷수습까지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네요."허아연이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니에요, 주현우 씨. 난 이제 예전 허아연이 아니에요. 더 이상 주현우 씨만 바라보며 살지 않을 거예요."잠깐 말을 끊었던 허아연이 다시 말을 이었다."절차는 주현우 씨 마음대로 해요. 안 밟아도 그만이고요. 현우 씨가 유부남인 상태로 바람을 피워서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다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그러니까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 줘요. 한 달 후, 두 달 후, 연말까지 이런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3년을 참고 억눌러왔는데 주현우가 계속 질질 끌더니
전화기 너머에서 전해지는 말에 감동이 밀려온 허아연은 주민경이 남자였으면 애초에 결혼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주민경은 그 말에 깔깔 웃으며 지금이라도 하고 싶으면 자기는 상관없다고 했다.그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오니 마침 유미 이모가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이 시간에야 들어오는 허아연을 보며 유미 이모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사모님, 이렇게 야근하시면 몸이 버티질 못해요. 저녁도 아직 못 드셨죠? 밥 남겨뒀는데 가져다드릴게요."허아연이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유미 이모."밥을 먹는 동안 유미 이모는 주현우가 출장에서 돌아왔는데 요즘 부쩍 야위어 보인다고 했다.허아연은 그냥 웃기만 했다.밥을 다 먹고 위층으로 올라간 허아연은 주현우가 이미 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올라가자마자 주현우가 손에 물컵을 들고 안방에서 나왔다. 두 사람이 복도에서 마침 마주치자 허아연이 가볍게 인사했다."돌아왔어요?""응."주현우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그때 체험 로봇이 떠오른 허아연이 말했다."참, 회사에서 보낸 체험 제품 있잖아요. 궁금한 점이나 건의 사항 있으면 나한테 보내줘요."주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알았어요."주현우가 허아연을 보며 말했다."허아연, 업무 시간 좀 조율해. 계속 이렇게 일하면 몸이 못 버텨.""알아요, 조절할게요."두 사람은 그렇게 복도에 서 있었다. 노란 불빛이 은근히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주현우가 허아연의 앞을 막고 선 모양이 됐다.갑자기 찾아든 침묵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사이 같았다.고개를 들어 주현우를 보던 허아연이 왼쪽으로 비키려는 순간, 주현우도 왼쪽으로 비켜섰다.두 사람은 또 다시 마주쳤다.허아연이 얼른 오른쪽으로 자리를 내주자 주현우도 오른쪽으로 비켜섰다.또 마주쳤다.두 번 연속 마주치자 허아연은 조금 난감해졌다. 그러다 허아연이 문득 고개를 들어 주현우를 보며 말했다."참, 진 변호사님한테 전화했더니 이미 합의서를 작성해서 현우 씨한테 전달했다고 하더라고요. 나 지금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