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그럼에도 허아연은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받은 뒤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전화를 건 사람은 서인경이었다. 허아연이 조금 전 난처한 기색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전화기 너머의 서인경은 허아연의 인사를 듣더니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아연아, 승준이한테 들었는데 이번 토요일에 밥 먹으러 못 온다던데 무슨 일이야?"서인경의 목소리는 무척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서인경의 물음에 허아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정하게 답했다."어머님, 며칠 전에 어르신이 저를 찾아오셨어요."방금 생각에 잠겼던 건 권유성이 찾아온 일을 서인경에게 말할지 말지 고민했기 때문이었다.잠시 생각한 끝에 허아연은 결국 말하기로 했다.아무렇게나 다른 핑계를 대봐도 서인경이 나중에 다시 연락해 이유를 물을 게 뻔했다.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확실히 얘기하는 편이 나았다.허아연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서인경이 진지하게 타일렀다."아연아, 할아버지 나이가 드셔서 판단이 흐려지신 거야. 할아버지 말씀은 신경 쓰지 말고 승준이 말 들어. 그리고 승준이 일은 할아버지가 이래라저래라 하실 일이 아니야."허아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서인경이 다시 말했다."너희 둘 일은 너희가 직접 정하면 돼, 다른 사람 말 들을 필요 없어."서인경의 말에 허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네, 알겠어요, 어머님."대답을 들은 서인경이 곧바로 다시 물었다."그럼 토요일엔 원래대로 밥 먹으러 오는 거지?"서인경이 여전히 토요일 약속을 마음에 두고 있자 허아연은 핑계를 댔다."어머님, 정말 죄송해요. 승준 씨한테 얘기하고 나서 방금 오빠와 토요일에 근처 도시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거든요.""밥 먹으러 가는 건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으면 안 될까요?"권유성이 방금 자신을 찾아왔는데 또 권씨 가문에 밥 먹으러 가는 건 스스로를 너무 낮추는 것이고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았다.게다가 권유성은 애초에 허아연과 권승준이 함께하는 걸 원치 않았다.그래서 아예 핑계를 대고 이 일을 미뤄버린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출발했고 권승준이 업무 얘기를 묻자 허아연은 하나하나 차분히 답했다.두 사람은 이번에 다른 레스토랑을 찾았다. 직원이 요리를 다 서빙하고 문을 닫자 권승준은 여전히 예전처럼 다정하게 허아연에게 국을 떠주고 음식을 챙겨주었다.허아연이 다정하게 말했다."고마워요."두 사람이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반쯤 했을 때 허아연이 문득 고개를 들어 권승준을 보며 말했다."승준 씨, 토요일에 본가에서 식사하기로 한 거 조금 미뤄도 될까요?"허아연이 갑자기 약속을 미루자 권승준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서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허아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권승준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할아버지가 찾아갔고 그래서 허아연이 한발 물러서기 시작한 듯했다.허아연을 보는 권승준의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물론 그 화는 허아연이 아니라 권유성을 향한 것이었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이나 할아버지가 그의 일에 나서거나 간섭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번만큼은 권유성이 직접 허아연을 찾아간 것이다.권승준은 차분하게 허아연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미루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아직 내가 준비가 덜 된 거니까 잘 정리할게요."허아연이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권승준은 먼저 태도를 밝히며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고, 잘 정리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권승준이 입장을 밝히자 허아연도 더는 그 얘기를 이어가지 않고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승준 씨도 많이 드세요."지금 허아연은 다정하게 대하면서도 분명 어딘가 거리를 두고 있었다.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식사를 마치고 함께 강가를 산책한 뒤 허아연을 호텔에 데려다준 권승준은 곧장 차를 몰고 권유성의 집으로 향했다.차를 대문 앞에 세우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서재에서 나오던 권유성과 마주쳤다. "할아버지, 아연 씨 찾아가셨죠."권승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권유성도 부인하지 않았다. "만나서 내 걱정을 얘기했지."권유성의 말을 들은 권승준
흘러가는 대로 두자는 주현우의 말에 허아연은 힐끗 보고는 웃기만 할 뿐 더는 말이 없었다.그 뒤로 두 사람은 난간에 기대어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고 주현우도 더는 감정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11시가 넘자 허아연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주현우를 보며 말했다."이제 그만 얘기하고 들어가야겠어요."그 말에 주현우도 급히 몸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데려다줄게.""괜찮아요, 운전해서 왔어요." 말을 마친 두 사람은 함께 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모두 차를 길가 주차 구역에 세워둔 상태였다.오늘 밤 권유성이 찾아와 바람과는 약간 어긋난 말을 했지만 허아연은 대체로 차분하게 대응했고 오히려 내려놓은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현우를 마주해도 예전만큼 날이 서지 않았다.검은색 마이바흐 안에서 주현우는 두 손을 핸들에 올린 채 허아연의 흰색 차가 먼저 떠나는 걸 지켜본 뒤에야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핸들을 잡은 주현우는 조금 전 허아연의 쓸쓸한 표정을 떠올리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허아연과 권승준의 관계가 계속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딱히 기쁘지는 않았다.허아연의 불행을 도저히 고소해할 수가 없었다.……같은 시각, 허아연의 차 안.핸들을 잡은 허아연의 손은 무척 희고 가늘었다.창문을 내리자 시원한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 들어왔다. 차 안에 음악을 틀고 잠시 권유성도, 권승준도, 주현우도 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에 도착한 허아연은 차를 세우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런데 스위트룸 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옆방에서 안서준이 나왔다.허아연이 돌아온 걸 본 안서준이 인사를 건넸다."왔어?"허아연이 웃으며 답했다."네."그때, 안서준이 대뜸 물었다."오늘 밤 권 어르신이 너 찾아갔었어?"안서준의 물음에 허아연이 웃으며 말했다."이제 난 사생활도 없나 보네요. 내가 돌아오기도 전에 벌써 다들 알고 있잖아요."허아연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안서준이 말했다."들어와서 얘기해.""네." 허아연
"당신이 나 때문에 억지로 결혼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매번 다 맞춰주고 내 마음을 억누르면서 시간이 지나면 당신도 내 진심을 알아주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줄 거라고 믿었어요.""그런데 돌아온 건 점점 더 깊어지는 오해뿐이었죠.""경주 그룹에 들어간 것도 부부니까 힘을 보태려던 거였는데 당신 눈엔 다른 속셈이 있는 것처럼 보일 줄은 몰랐어요."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는 허아연은 마치 전생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도 표정도 담담했다. 다 내려놓은 것이다.주현우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마음을 정리했다는 증거였다.옆에 기대어 이야기를 듣다가 허아연을 돌아보는 주현우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허아연을 오해한 것도, 잘못한 것도 주현우였다.마른침을 삼킨 주현우가 입을 열었다."아연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주현우의 사과에 허아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살짝 웃고는 말했다."다 지난 일이에요. 이제 다 지나갔어요. 나도 다 견뎌냈고요."혼자 아프고 혼자 병원에 가고 혼자 빈집을 지키고 혼자 힘들어하고 혼자 주현우의 스캔들 뒷수습까지 하고 교진시를 떠날 때도 혼자였다……다 지나갔다고, 다 견뎌냈다는 허아연의 말에 주현우는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떠올랐지만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허아연에게 너무 미안했다. 주현우는 허아연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정작 허아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원래 갖고 있던 것마저 다 내려놓고 주현우에게 돌려주었다.오래 알고 지냈으니 당연히 허아연에 대해서 잘 알았어야 했는데 주현우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주현우를 보던 허아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후련한 듯 웃으며 말했다."됐어요, 당신도 내 목숨 한 번 구해줬으니까 그걸로 빚은 갚은 셈 쳐요."허아연이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하지만 주현우 씨, 서로 알고 지낸 세월도 있으니 업무상의 협력은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어
허아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주현우가 허리를 굽힌 채 허아연을 따라 팔을 난간에 걸치고 물을 건네고 있었다.허아연은 꼼짝 않고 주현우를 바라보았다. 다시 염색한 뒤로 주현우는 여전히 예전처럼 잘생겼고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만 왠지 쓸쓸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한참 동안 주현우를 바라보던 허아연이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물었다."날 비웃으러 왔어요?"딱 맞춰 나타나서는 대뜸 기분이 좋지 않냐고 묻는 걸 보니 방금 권유성이 찾아왔던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권유성이 찾아온 걸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해보니 아마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로 사람을 붙여 몰래 지켜본 모양이었다. 때문에 허아연도 굳이 말을 돌리지 않고 주현우의 뜻을 알고 대꾸한 것이었다. 허아연의 물음에 주현우도 웃음이 났다.주현우가 웃자 허아연은 사양하지 않고 물을 받아 들었다.허아연이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는데 주현우가 돌아보며 말했다."나를 그렇게 속 좁게 생각하지 마."주현우의 말에 허아연은 더 대꾸하지 않고 물병을 든 채 강 건너편을 빤히 쳐다보았다. 허아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현우는 물병을 든 왼손을 난간에 걸치고는 오른손으로 허아연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큰일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주현우의 위로에 두 사람은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허아연을 챙겨주던 기분이 들었다.그 순간 허아연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목덜미에 있던 주현우의 손을 밀어내며 느긋하게 말했다."됐어요. 고소해할 거 없어요. 살다 보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지금의 허아연은 주현우와 함께 있을 때 전처럼 선을 긋거나 거리감을 두지 않았다. 많은 걸 내려놓은 것 같았다.허아연과 주현우는 어쩌면 반드시 만났어야 할 악연이었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 사이는 이미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허아연이 오늘따라 편안해 보이자 주현우도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허아연이 여전히 은근 비꼬는 티가 나게 말했지만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몸을 돌린 주현우는 나른하게 난간
"그렇게 되면 자네 신분이 드러났을 때 자네한테나 안씨 가문이나 승준이한테도 좋을 게 없어.""오늘 온 건 자네한테 매사에 신중해야 한다고 일러주고 싶어서야. 정말 승준이와 함께 하려거든 먼저 주현우와 얘기를 잘 나눠봐. 나중에 일이 더 커지지 않게."허아연을 진심으로 아끼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주현우와의 과거가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공무원의 길을 가야 하는 권승준은 앞으로 갈 길이 멀고도 멀었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 사람이었다.때문에 권유성은 권승준이 감정이나 결혼 문제에서 실수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런 문제는 가장 흔하지만 피할 수 있는 실수이기도 했다.그래서 권유성은 권승준 몰래 직접 허아연을 찾아온 것이었다.권유성의 진심 어린 걱정을 이해하는 허아연은 다시 찻잔을 들고 차분히 말했다."어르신,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잘 해결할게요."어제까지만 해도 권승준과의 관계가 조금 더 순조롭기를, 감정으로 인한 아픔은 더는 겪지 않기를 바랐었다.그런데 오늘 권유성이 직접 입장을 밝힌 것이다.권유성이 아무리 부드럽게 말했어도 권씨 가문이 허아연과 권승준의 관계를 동의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했다.인생이라는 게 원래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법이었다.허아연의 지혜로움을 알고 있는 권유성이 말했다."아연 씨, 자네처럼 똑똑한 사람은 앞으로 분명 앞가림 잘하고 살 거야."인사치레가 다분한 말이었다. 허아연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답을 하지 않았다.그 뒤로 함께 식사를 하고 업무 얘기를 나누다가 권유성의 차를 타고 시내 중심가로 돌아갔다.기사가 허아연을 호텔에 데려다준 뒤 바로 방에 돌아가기 싫었던 허아연은 직접 차를 몰고 바람을 쐬러 강변으로 나갔다.……같은 시각, 주현우의 사무실.야근을 하던 중 오원빈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주현우가 들어오라고 하자 오원빈이 문을 열고 들어와 본론부터 얘기했다. "대표님, 권유성 어르신이 방금 허 대표님을 만나셨습니다."허아연의 정체를 안 뒤로 오원빈도 다시 허 대표님이라고 부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