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기회를 놓치지 않고 꼭 잡을 거라고 했다.병실 안,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허아연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권승준이 온 걸 확인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오셨어요."권승준이 환하게 웃는 허아연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배고프죠."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좀 고프네요.""이젠 불편한 곳도 없는데 의사 선생님이 언제쯤 퇴원시켜 줄지 모르겠어요."권승준 앞에서는 허아연도 마음이 편했다.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그 말에 권승준이 책상 앞으로 다가와 도시락을 펼쳐놓으며 말했다."쉬어가는 셈 치고 서두르지 마요."허아연이 권승준을 거들며 답했다."네."음식을 다 차려놓자 두 사람은 함께 식탁 앞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요즘 권승준은 늘 이렇게 병원에서 허아연과 함께 밥을 먹었다.권승준이 허아연의 그릇에 반찬을 집어주며 대범하게 말했다."주현우 씨 깨어났어요, 시간 되면 한번 찾아가 봐요. 사고 때 대신 막아준 게 정말 결정적이었어요."자신과 허아연의 관계, 그리고 허아연의 이성적인 판단을 권승준은 믿고 있었다.권승준의 당부에 허아연은 밥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방금 가서 보고 왔어요, 고맙다는 인사도 했고요."권승준 앞에서는 허아연도 숨기는 것 없이 솔직했다."네."권승준이 대답하며 다시 허아연의 그릇에 반찬을 집어주었다."많이 먹어요."허아연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고마워요, 비서실장님."권승준이 매일 허아연을 보러 온다는 걸 알기에 이 시간이면 박혜숙은 늘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워 두 사람에게 함께 할 시간을 주었다.안서준을 이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허아연이 좋아하는 사람이 권승준이라는 걸 알고는 그 생각을 접었다.친딸을 떠나보낸 뒤로 이런 일에 유독 신중해진 박혜숙은 허아연에게 절대 부담을 주지 않았고 자기 생각을 내비친 적도 없었다.그 뒤로도 며칠간 계속 검사를 받던 허아연은 병원 생활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두 지역 간의 관계를
주현우의 물음에 허아연이 차분하게 답했다."저는 별문제 없어요, 의사 선생님이 이틀만 입원해서 지켜보자고 하셔서요.""별일 없다니 다행이네요."말을 마치자 병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 모두 마땅한 화제가 없었다.먼저 정신을 차린 주현우가 허아연을 보며 말했다."안 선생님, 앉으세요.""이번 일로 안 선생님을 많이 놀라게 했네요,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할게요."주현우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굳이 할 얘기가 있다고 잡지 않았다면 허아연이 이런 사고를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허아연은 앉지 않고 선 채로 말했다."생각보다 단순한 사고가 아닐 수도 있어요. 혹시 주 대표님도 뭔가 떠오르는 단서가 있으면 경찰에 얘기하세요. 그리고 사고 당시, 대신 막아주셔서 감사했어요."주현우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앞차의 철판이 그대로 허아연의 심장을 찔렀을 것이고 지금 이렇게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허아연의 인사에 주현우가 말했다."안 선생님도 별말씀을요.""제가 얘기하자고 안 선생님을 붙잡지 않았으면 이런 사고를 당할 일도 없으셨을 텐데요."주현우의 말에 허아연이 답했다."그럼 서로 빚진 건 없는 걸로 하죠. 얼른 쾌차하시길 바랄게요."주현우가 말했다."네, 안 선생님도요."말을 마치자 병실은 또다시 조용해졌다.지금 두 사람 사이엔 더 이상 나눌 얘기가 없었다.어색한 분위기가 한참 이어지자 허아연이 말했다."그럼 푹 쉬세요, 주 대표님. 저는 병실로 돌아갈게요."그 말에 주현우가 허둥지둥 일어나 배웅하려 하자 허아연이 말했다."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 주 대표님은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허아연은 주현우가 침대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병실을 나서며 자연스럽게 문도 닫아주었다.병상 위.멀어지는 허아연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허아연이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며 거리를 두고 있었다.문을 얼마나 오래 쳐다봤을까……의사와 간호사가 회진을 와서야 주현우는 시선을 거두고 허아연이 남긴 여운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의식이 없던 동안에도 주현우는 계속 허아연을 걱정하고 있었다.주현우의 말에 주민경이 말했다."걱정 마, 아연이는 뇌진탕 말고는 큰 문제 없어. 오빠나 몸조리 잘해."주현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주민경이 다시 말했다."경찰과 윗선에서도 어제 교통 사고가 단순 사고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이미 조사에 착수했대. 오원빈도 조사하고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몸부터 잘 챙기면 돼."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주민경이 전보다 훨씬 철이 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주현우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주민경이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걱정 마, 오빠가 깨어났는데 내가 거짓말하면 통하겠어? 나중에 거동이 편하면 직접 가서 확인해 봐."주민경의 말에 유서희도 거들었다."나도 오늘 아침에 가서 봤는데 아연이 정말 괜찮았어."아침에 유서희는 문 앞에 서서 허아연을 지켜보기만 했었다.현재 안시연인 허아연과는 친분이 두텁지 않아 들어가기가 좀 조심스러웠다.유서희와 주민경이 입을 모아 말하자 주현우도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자신의 차에 타고 있다가 사고가 난 허아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앞으로 평생 볼 면목도 없을 뿐더러 더 큰 죄를 짓는 것이었다.병상 반대편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 주현우를 바라보던 주석진은 미간만 잔뜩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몇 번이나 타일렀는데도 결국 자업자득이었다.주민경과 유서희가 계속 말을 걸어오는 소리마저 시끄럽게 느껴진 주현우는 다들 돌아가라며 내보냈다.지금은 그저 시끄럽지 않은 병실에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다.주현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유서희는 결국 의사와 간호사에게 잘 좀 살펴봐 달라 부탁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가족들이 떠나고 병실이 조용해지자 주현우의 머릿속도 한결 맑아졌다.사고가 났던 그날의 상황을 되짚어보던 주현우는 차 옆을 스쳐 지나가던 검은 옷을 입고 캡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어렴풋이 떠올랐다.요즘 허아연과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다 직접 가서 보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침대에
놀랍고도 반가운 마음에 허아연이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박혜숙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엄마,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허아연의 말에 박혜숙이 한 손으로 허아연의 손을 마주 잡고 다른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어제저녁에 영상 통화는 했지만 그래도 직접 두 눈으로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아빠한테 전용기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해서 왔어."박혜숙의 진심 어린 걱정에 허아연은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며 마음이 뭉클해졌다.두 팔을 벌려 박혜숙을 꼭 끌어안았다."고마워요, 엄마."고맙다는 인사에 박혜숙이 허아연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바보 같은 것,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는 가족이잖아. 보러 오는 게 당연하지."박혜숙이 다시 말을 이었다."서준이가 공항으로 마중 나와줬어. 아침에 여기서 삼십 분 넘게 있다가 방금 일 보러 갔어."허아연은 박혜숙을 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 고생하셨어요."허아연의 얌전한 모습에 박혜숙이 다시 화가 난 듯 말했다."네 교통사고, 나도 좀 알아봤어. 일부러 차를 들이받은 사람 잡히면 너희 아빠랑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박혜숙과 안씨 가문이 든든한 힘이 되어주자 허아연은 더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절대 가만두면 안 돼요."직접 비행기를 타고 와서 두 눈으로 허아연을 확인하고 품에 안아본 뒤에야 박혜숙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안도할 수 있었다.허아연은 항상 나쁜 소식은 전하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다.잠시 안고 얘기를 나눈 뒤 허아연은 욕실로 가서 씻고 박혜숙과 함께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박혜숙이 친엄마는 아니었지만 친엄마 못지않게 챙겨주었다.오히려 친딸을 둔 여느 어머니들보다 더 사랑을 듬뿍 주었다.허아연과 안씨 가문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필요로 하는 사이였다.박혜숙과 잠시 얘기를 나누던 허아연은 눈에 비친 피곤한 기색을 발견하고 침대에 누워 좀 쉬라고 했다.하지만 박혜숙은 요즘 통 못 봐서 보고 싶었다며 계속 얼굴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싶
자리에서 일어난 권승준은 먼저 다정하게 허아연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안 선생님, 내일 다시 올게요."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래요."옆에서 두 사람이 "안 선생님", "권 비서실장님" 이라고 호칭하는 걸 지켜보던 안서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그래도 나름 색다르긴 했다.권승준을 배웅하고 병실로 돌아온 안서준이 말했다."권승준 사람은 괜찮더라. 이번 안목은 지난번보다 낫네."안서준의 말에 허아연이 웃으며 답했다."사람은 겪어봐야 성장하는 거잖아요."남매는 한참 얘기를 나눴고 안서준은 병실에서 잠시 더 머물다 호텔로 돌아갔다.안서준이 병실을 나가자마자 베개 옆에 놓아둔 허아연의 휴대폰이 울렸다.강성시에서 걸려온 엄마의 전화였다.발신 번호를 확인한 허아연은 곧바로 전화를 받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허아연의 목소리에 엄마 박혜숙이 걱정스레 물었다."시연아, 진 부장한테 네가 오늘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어. 지금 몸은 좀 어때?"2년 전 진짜 안시연이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로 박혜숙은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았다.그래서 안서준은 오늘 오전에 있었던 사고를 집에 전혀 알리지 않고 계속 숨겨왔다.하지만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주현우까지 그토록 심하게 다쳤으니 결국 안씨 가문도 알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소식을 들은 박혜숙이 바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박혜숙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허아연이 웃으며 말했다."엄마, 저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지금 영상 통화 할게요."박혜숙을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까 봐 걱정된 허아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영상 통화를 걸었다.화면 너머 허아연이 정말 다치지 않고 상태도 괜찮은 걸 확인하고서야 박혜숙은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잠시 더 얘기를 나누며 당부의 말까지 전한 뒤에야 아쉬운 듯 전화를 끊었다.영상 통화를 마친 허아연은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정리를 마친
권승준이 불쑥 손을 잡자 허아연은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심장이 저도 모르게 점점 빨리 뛰었다.꼼짝 않고 권승준을 보던 허아연은 조금 긴장됐지만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권승준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다만 순간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뿐이다.주현우와 한 번 결혼한 적은 있지만 부부로서 관계를 맺은 적도 없고 몇 번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것도 다 주현우가 먼저 다가온 것이었다.은근 긴장한 허아연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자신을 쳐다보는 허아연의 눈빛에 권승준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웃던 권승준은 허아연의 손을 잡은 채 몸을 자연스럽게 앞으로 기울여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숨을 죽이고 권승준을 바라보던 허아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그리고…… 부드럽게 바라볼 뿐이었다.그 순간,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거부하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는 허아연 덕분에 권승준은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승진했을 때도 이 정도로 기쁘지는 않았다.허아연의 손을 잡은 채 점점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다가가던 권승준의 입술이 닿으려던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간호사가 성큼성큼 들어와 말했다."안시연 씨, 체온 좀 재볼게요."병상에 있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동시에 멀찍이 떨어져서 거리를 유지하고 바르게 앉았다.병상 위, 허아연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너무도 민망했다.병실 문 앞, 약간 통통한 중년 간호사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두 사람이 병실에서 애틋한 순간을 보내며 데이트를 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그럴 줄 알았다면 무조건 노크를 하든지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분위기를 깬 간호사는 어쩔 수 없이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병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안시연 씨, 체온 좀 재볼게요."허아연은 몸을 바로 세우고 간호사가 건넨 체온계를 받아 체온을 쟀다.이내 병실 안은 조용해졌고 잠시 동안 어색함이 감돌았다.제일 민망한 건 역시 간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