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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엄이빈
“세형 재무제표 분석, 점심 퇴근 전까지 마무리해요.”

연지아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비서실에서 말단 직원 자리로 옮겨졌지만, 주이빈은 원래 연지아의 일이 아닌 업무까지 꽤 많이 떠넘겼다.

그런데도 연지아는 하나하나 다 받아들였다.

이렇게 묵묵히 회사에 남아 버티는 것도, 결국은 자기 혼자 착각하며 버티는 일일 뿐이었다. 성유원은 그녀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을 테니까.

연지아는 재무제표 분석을 마친 뒤 전자 파일과 출력본을 함께 주이빈에게 제출하고, 배달 음식을 하나 시켰다.

회사에 구내식당이 있긴 했지만, 그녀는 늘 도시락을 챙겨 왔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고 싶지 않았고, 시선이 자기 몸을 훑는 것도 싫었고,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도 피곤했다. 그냥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다.

오늘 아침엔 점심을 준비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배달로 때우기로 했다.

배달을 기다리는 동안, 점심을 먹고 들어온 동료들이 복도로 들어서며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성 대표님 여자친구 진짜 어리더라. 대학생 아니야?”

“그럴걸? 얼굴이 진짜 너무 예쁘던데. 인형 같았어.”

“대표님이 그 애 보는 눈빛이, 진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다정하더라. 맨날 엄격하던 사람이 그렇게까지 달라질 줄은 몰랐어. 현실판 재벌 대표랑 귀여운 아내잖아.”

“...”

두 사람은 이야기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가 자리에 앉아 있는 연지아를 보고 잠깐 멈췄다.

연지아는 비서실로 발령 난 뒤, 업무 말고는 사람들과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틀어박혀 지냈고,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마치 얼굴을 숨기기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대표 비서로 반짝이던 사람이었다는 게,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연지아는 배달 기사에게서 전화가 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을 받으려던 순간, 호텔 직원 두 명이 고급 음식을 들고 프런트에 서서 확인하는 걸 마주쳤다. 프런트 직원은 그들에게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카드키를 찍어줬다.

연지아는 그중 한 직원 손에 들린 와인을 봤다. 한 병에 4억 원쯤 하는 것 같았다. 4억 원이라니, 성유원에게는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연지아는 자기 배달 음식, 족발을 들고 다시 올라갔다.

오후 두 시.

주이빈이 그녀를 찾아와 말했다.

“연지아 씨, 대표님이 찾으세요.”

연지아는 흠칫했다. 마음 한쪽이 이유도 없이 불길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연지아가 대표이사실에 들어서자,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싸늘한 기운이 얼굴을 때렸다. 그녀는 책상 앞까지 가서 불렀다.

“성 대표님.”

성유원이 그녀를 올려다보는 순간 얼굴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내던지듯 연지아 얼굴 쪽으로 던졌다.

“이게 네가 만든 분석 보고서야?”

날카로운 A4 종이가 연지아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따끔한 통증이 확 번졌고, 발치에는 서류가 흩어져 떨어졌다. 오늘 오전에 만든 보고서였다.

연지아는 한 손으로 배를 받치며 힘겹게 허리를 굽혀 바닥의 서류를 주웠다.

성유원은 그녀가 배를 붙잡고 천천히 웅크리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연지아는 손에 든 보고서를 살폈다. 몇 군데 숫자가 바로 눈에 띄게 어긋나 있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거 내가 만든 보고서 아니야.”

“그만해. 변명 듣기 싫어.”

연지아는 서류를 꽉 쥐었다.

성유원이 그녀의 능력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변명을 듣기 싫은 게 아니라, 그냥 그녀가 뒤집어쓴 걸로 넘어가려는 거였다.

사랑했던 사람이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혐오를 보인다는 게, 연지아는 너무 비참하고 우스웠다.

연지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용기를 끌어 올려 말했다.

“나 백업해 둔 거 있어. 지금 바로 보내줄게. 그거 확인하고 나서 혼내도 늦지 않아.”

성유원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불쾌함이 검은 눈동자에 또렷했다.

연지아는 온몸이 팽팽해졌다. 뼛속에 박힌 두려움이 있었다. 권력에 대한 두려움, 특히 성유원이 냉정하게 굳은 얼굴을 할 때면, 그녀는 원래 한마디도 제대로 되받아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억지로라도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곧 이혼할 거였다. 그는 원하던 대로 될 테고, 그녀는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을 테고, 그에게 기대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뭐가 무서운가.

“억울해?”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 목소리는 얼음 조각처럼 차가웠다.

연지아는 그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 손끝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유도 안 묻고 나를 몰아가는데, 내가 내 말로 증명하면 안 돼?”

성유원의 얼굴이 완전히 식었다.

“그것도 네가 감당해야 할 몫이야.”

연지아는 심장이 크게 쑤시는 것 같았다. 얼굴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렸다.

분홍색 끈 민소매 실크 잠옷을 입은 소녀가 걸어 나왔다. 윤기 나는 검은 긴 머리, 빛이 날 만큼 하얀 피부,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이목구비.

“오빠!”

봄비처럼 부드럽게 스미는 목소리였다.

연지아는 그제야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정말로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웠다.

그런데 연지아가 그 얼굴을 잠깐 바라본 것만으로도 남자의 차가운 호통이 터졌다.

“꺼져!”

연지아는 시선을 거두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을 막 나서는 순간, 소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고, 성유원은 금세 진정하는 듯했다.

“...”

연지아는 고개를 들어 눈가에 고인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사람 없는 계단 구석으로 가서 한 손으로 난간을 짚었다. 그제야 감정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조여 오르자 속까지 울렁거렸다.

8년을 사랑한 남자를 마음에서 완전히 도려내는 일은 뼈를 깎고 살을 떼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다 좋아질 것이다. 그녀는 그를 완전히 잊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연지아는 겨우 숨을 고르고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계단을 올라가다 정면에서 그 소녀와 마주쳤다. 소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춤 명품으로 치장해 놓은 모습이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티가 났다.

주민우가 소녀를 곁에서 지켜주고 있었다. 주민우는 성유원의 비서실장이었다.

소녀는 연지아를 보더니 미소를 띠고 다가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오빠가 더는 당신 탓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는 가방에서 진주 한 알을 꺼냈다. 소녀는 연지아 손을 잡아 그녀의 손바닥에 진주를 올려놓았다.

“이거 드릴게요. 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얼굴에 난 상처도 꼭 손질해요. 여자 얼굴에 흉터 남으면 보기 안 좋잖아요.”

얼마나 예쁘고 착한 소녀인가.

햇살을 뿜는 이 소녀 앞에서, 연지아는 어둠 속에서 허둥대는 광대 같았다.

연지아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주민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차갑게 말했다.

“감사 인사도 안 하세요?”

이 사람은 안연청이었다.

안연청은 손을 거두며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 가요.”

두 사람은 그렇게 떠났다.

연지아는 그 자리에 서서 손바닥 위의 은빛에 푸른 기가 도는 진주를 바라봤다. 흠 하나 없이 매끈했고, 그 소녀처럼 깨끗해 보였다.

다만 안연청이 성유원이 이미 혼인신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연지아도 알 수 없었다.

자리로 돌아온 연지아는 자신이 만든 원본 파일을 다시 출력해 한 부 더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이빈의 앞으로 가져갔다.

주이빈은 종이를 받아 보며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은 만족스러웠다.

“똑똑히 봤죠? 대표 옆에 설 수 있는 여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연지아는 자료를 탁 소리 나게 주이빈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요. 나는 자격 없고, 주이빈 씨도 자격 없어요. 이런 저급한 수법만 쓰는 사람은 앞으로도 뭐가 되기는 어려워요. 나이도 이미 서른이 훌쩍 넘었잖아요. 이제는 꿈 그만 꾸고 빨리 결혼할 사람이나 찾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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