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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작가: 레몬티
지설은 영민이 유연의 팔을 끼고 연회장을 누비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금세 흥미를 잃었다.

‘똑같은 그림이지... 늘 저 여자 곁에만 서 있는 사람...’

이어서 시선은 장경은 여사를 찾았다. 여사 곁에는 명문가 사모님들이 여럿 모여 있었기에, 지설은 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장 여사 곁이 한산해졌을 때, 그제야 지설이 걸음을 옮겨 선물을 내밀었다.

장 여사는 지설을 보자 눈빛이 복잡해졌다.

“정식으로 이혼까지는 겨우 5일 남았구나, 아가. 난 정말 네가 아쉽다.”

그리고 기억 속엔 여전히 그날들이 남아 있었다.

영민이 두 다리를 쓰지 못하던 시절, 성질은 날카롭고 손찌검도 서슴지 않았다.

열 명이 넘는 간병인이 그 앞에서 도망쳤다.

어쩔 수 없이 장 여사가 꺼낸 마지막 수가 바로 ‘대리 아내’였고, 운 좋게도 지설 같은 착하고 성실한 아이를 만난 것이었다.

지설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시간이 되면, 사모님 뵈러 오겠습니다.”

이미 이혼을 앞둔 사이, 더는 ‘어머니’라 부를 수 없었다.

장 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가 붉어졌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지설 손에 쥐여주었다.

“여기 2억이 들어 있어. 내 나름의 보상이다. 그리고 전원주택 한 채도 정리해 뒀으니, 내일 비서 보내서 명의 이전 같이 해라.”

지설은 잠시 카드를 내려다보다, 끝내 거절하지 않고 받아서 들었다.

‘합의 결혼일지라도, 3년을 버텼지.’

‘아내로서 할 일은 다 했고, 매일 모욕과 폭력을 참아냈지.’

‘받아도 부끄러울 건 없어.’

그녀의 머릿속엔 지난날이 스쳤다.

영민의 폭언과 폭력, 무심한 외도, 끝없는 무시.

‘부영민과 함께한 지난 3년... 내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시간이었어.’

그때, 옆에서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지설 언니한테 뭐 준 거예요? 아까 명의 이전이라던데, 그게 뭐예요?”

라희였다.

장 여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딸을 째려보았다.

“별거 아냐. 괜히 귀 쫑긋 세우지 마.”

“엄마, 혹시 새언니한테 돈 준 거예요? 매달 오빠가 다 대주는데, 왜 또 엄마 돈까지 받아요? 속지 마요, 엄마. 새언니는 그냥 돈 밝히는 여자예요.”

“오빠가 다리 못 쓸 때 어쩔 수 없이 데려왔을 뿐이지, 이제 오빠 멀쩡해졌잖아요. 더는 필요 없으니까 당연히 내쫓아야죠.”

라희는 노골적으로 지설을 노려보며 날 선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 아내로 들어와서 큰 집에 살고, 가사도우미까지 있는데 뭐가 부족해요? 더 바라면, 내가 오빠한테 제대로 말하게 할 거예요.”

지난 2년 동안, 오빠가 지설에게 고함치고 화풀이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봐왔던 라희였다.

그녀 눈엔 지설이란 존재가 오빠의 소유물일 뿐, 언제든 버리고 혼낼 수 있는 대상이었다.

지설은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는 순간, 라희가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장 여사가 먼저 막아섰다.

“그만해. 지설은 네 생각처럼 그런 애가 아니야. 이미 네 오빠랑 이혼하기로 했어.”

“정말요? 새언니가... 그걸 받아들였다고요?”

라희의 눈이 번쩍 빛났다.

장 여사는 딸을 흘겨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시끄럽게 굴지 마라. 이 아이, 지난 3년 동안 네 오빠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돌봤는지 알아?”

“간병인 열 명보다 낫고, 네 오빠를 진심으로 대했어. 그리고...”

장 여사는 말을 멈추더니, 솔직한 속내를 내비쳤다.

“내가 돈을 주는 건 보상도 맞고, 동시에 입막음도 되는 거다. 밖에서 우리 아들이 3년 동안 공짜로 지설만 안고 살았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겠니.”

부씨 가문에겐 2억과 전원주택이란 큰돈도 아니었다.

지설이 미련 없이 떠나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득이 되는 일이었다.

라희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오빠, 유연 언니랑 결혼할 수 있는 거네요?”

순간, 장 여사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유연이 네 오빠 여자 친구, 애인 노릇은 해도 좋아. 하지만 부영민 아내 자리? 그건 평생 꿈도 꾸지 마라.”

그녀는 잊지 않았다. 아들이 다리를 잃게 만든 원인이 누구였는지.

‘주유연, 네가 또 아내 자리를 넘본다고? 천만에.’

장 여사는 이미 결심했다. 아들이 이혼을 끝내면 가문에 걸맞은 새 배우자를 직접 정해 줄 생각이었다.

...

지설이 막 자리를 뜨려던 순간, 뒤에서 누군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설 언니!”

돌아보니, 유연이 영민의 재킷을 걸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지설은 상대할 마음이 없었지만, 유연은 결코 그냥 보내줄 기세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설이 차갑게 묻자, 유연은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실크 스카프를 내밀었다.

“아까 실수로 얼룩이 묻었는데... 이거, 영민 오빠가 아이슬란드에서 사 준 거예요. 꽤 비싼 거라 손빨래밖에 못 하거든요.”

“오빠가 그러는데, 언니가 빨래는 가사도우미보다 더 잘한다면서요. 혹시 번거롭지 않으면, 언니가 집에 가져가서 좀 세탁해 주실래요?”

지설은 모욕감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뭐, 가사도우미야?’

바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말했다.

“난 그쪽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 아니에요.”

지설이 돌아서려 하자, 유연은 손목을 꽉 잡으며 눈빛을 바꾸었다. 조금 전까지의 순한 미소는 사라지고, 서늘하고 오만한 기색만 남았다.

“감히 날 밀어내? 네가 뭔데? 그냥 부려 먹는 물건일 뿐이잖아. 네 주제를 알아. 네가 감히 부씨 집안의 사모님이라고 생각해?”

그 비열한 말들이 지설의 가슴을 거칠게 긁었고, 쌓였던 화가 결국 폭발했다.

찰싹!

지설의 손이 유연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마침 그때, 영민이 케이크 접시를 들고 다가오던 참이었다. 눈앞에서 유연이 맞는 장면을 목격한 그는 급히 달려와 유연을 부축했다.

“유연아, 괜찮아?”

유연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눈가가 금세 젖어 들었다.

그녀는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영민 품에 안겨 흐느꼈다. 순식간에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괜찮아, 오빠 화내지 마. 방금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냥... 언니가 오빠가 집에 안 들어가고 나만 챙겨 준다고 서운해서 그런 거지. 다 내 잘못이야...”

영민은 싸늘한 눈빛으로 지설을 노려보았다.

“지금 당장 당신의 행동을 설명해.”

지설은 유연이 흑백을 뒤집는 말을 내뱉는 걸 듣자 더 이상 해명할 마음조차 사라졌고, 그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맞을 짓을 했어요. 난 때렸고, 그게 전부예요. 설명할 게 뭐 더 있어요?”

영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숨소리마저 거칠어지고, 눈빛은 금방이라도 사람을 삼킬 듯 무서웠다.

만약 이 자리에 손님들이 없었다면, 그는 분명 지설을 두들겨 패고도 남았을 것이다.

지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영민의 체면이 더 중요하지. 그래서 지금은 날 못 건드리지.’

고개를 치켜들고 고운 목선을 드러낸 채 또박또박 말했다.

“부 대표님, 따로 지시 없으시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단호히 발걸음을 옮겼다.

남은 건, 유연의 흐느낌뿐이었다.

영민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울지 마. 오늘 밤은 내가 곁에 있어 줄게. 그리고... 심지설, 내가 직접 혼내 줄 거야.”

유연은 눈물이 맺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역시 오빠밖에 없어.”

...

지설은 단지를 들어서며 경비실 앞을 지나쳤다.

경비원이 다가와 말했다.

“사모님, 택배가 하나 잘못 배달됐습니다. 원래 다른 세대 건데, 그쪽 가사도우미가 관리사무실 있는 건물 5층에 두고 갔더라고요. 직접 찾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열어 확인했다.

‘어떤 택배가 잘못 온 거지?’

궁금증에 발걸음을 옮겨 관리사무실 건물로 향했다.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순간, 갑자기 불이 꺼졌다.

지설은 놀라 급히 핸드폰 손전등을 켰다.

그리고 비상 호출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어서 관리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으나, 화면엔 신호 없음이 떴다.

‘왜... 왜 갑자기 끊긴 거야?’

핸드폰 배터리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불빛까지 꺼졌다.

지설은 야맹증이 있었다. 눈앞이 완전히 가려지고, 사방이 깜깜한 순간, 마치 누군가 목덜미를 움켜쥔 듯 숨이 막혔다.

‘하아... 숨을... 못 쉬겠어.’

죽음의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와 온몸을 휘감았다.

지설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엘리베이터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떨기 시작했다.

그 순간, 오래 묻어둔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버지가 투신하던 그날 밤.

지설은 심용원의 회사 사옥으로 찾아갔다.

사무실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녀는 손전등을 켜자 창가에 홀로 앉아 술을 들이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드러났다.

심용원은 딸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쓸쓸했고, 기괴했다.

지설은 순간적으로 섬뜩해져,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빛은 곧 꺼졌다.

끝없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지설은, 그날의 공포에 삼켜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사람이 뛰어내렸다!”

지설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빠...’

그녀의 세상은 산산조각 났다.

...

엘리베이터 안, 지설은 공포를 억누르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관리사무소 직원이 문을 열었을 때, 그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사모님, 여기 왜 계세요? 이 엘리베이터는 이미 고장 난 지 오래됐는데요. 분명히 고장 안내문이 붙어 있었을 텐데... 어라? 스티커가 뜯겨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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