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녀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록을 불태웠다는 사실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별채로 돌아온 예린은 한동안 침상에 앉아 있었다.복단은 눈물을 닦으며 물을 가져왔다.“마마, 기록이 전부 타 버렸습니다.”예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다.”“석구의 기록도, 연분이라는 산모의 기록도 모두…….”“복단아.”예린은 그녀를 불렀다.“종이는 탔지만 우리가 본 것까지 사라진 건 아니야.”복단이 고개를 들었다.예린은 새 종이를 펼쳤다.“기억나는 것부터 다시 적자.”그녀는 석구의 이름을 먼저 적었다.다친 날짜와 상처 부위, 출혈이 줄어든 시각, 손가락의 움직임.이어 연분의 이름을 적었다.출산 뒤 출혈이 시작된 시각과 처음 확인한 증상, 맹원식이 도착한 시각과 처치 뒤의 변화까지.복단은 그녀가 말하는 내용을 받아 적었다.“마마, 혹시 기억이 틀리면 어찌합니까?”“확실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적으면 돼.”예린은 붓을 내려놓았다.“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면 다음 환자가 위험해질 수 있어.”복단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창밖에서 작은 돌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복단이 창문을 열었다.담장 아래에 어린 계집아이가 서 있었다.아이는 품속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왕비 마마께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복단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누가?”“연분 아씨의 남편이요.”아이는 말을 마치자마자 골목으로 달려갔다.복단은 종이를 펼쳤다.거기에는 서툰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마마, 저희 아내는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설 아씨의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라고 시켰습니다.’예린의 눈빛이 달라졌다.복단이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은자를 받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를 해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두려워 거짓말을 했습니다.’종이 아래에는 붉은 손도장이 찍혀 있었다.예린은 한동안 그 손도장을 바라보았다.설미주가 산모의 가족을 협박했다는 증거였다.그 아래에는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마마께서 제 아내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그러나 예린은 그 손을 보지도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오직 불타는 종이에 머물러 있었다.경헌은 손을 거두었다.“담예린, 네가 지금 내게 명령하는 것이냐?”“부탁드리는 겁니다.”그 말에 경헌의 눈빛이 움직였다.부탁.예린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것은 오랜만이었다.그는 잠시 종이를 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예린이 다시 자신에게 기대기를 바랐다.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무엇을 원하느냐?”경헌이 낮게 물었다.예린은 곧바로 대답했다.“남은 기록을 돌려주십시오.”경헌의 입가가 굳었다.“그것뿐이냐?”예린은 그를 바라보았다.“예.”“네 상처를 치료할 약도, 별채 밖으로 나갈 허락도 필요하지 않느냐?”“지금은 기록이 먼저입니다.”경헌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자가 환자를 위해서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그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그 기록이 그렇게 중요하냐?”“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기록입니다.”“나보다도?”예린은 순간 말을 잃었다.경헌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그러나 이미 뱉은 말을 거둘 생각은 없었다.그는 예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 종이가 나보다 중요하냐고 물었다.”예린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는 놀라움도, 흔들림도 없었다.“전하께서는 저를 시험하고 계십니까?”경헌은 대답하지 않았다.예린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저는 전하와 환자의 목숨을 저울질할 생각이 없습니다.”그녀는 화로를 바라보았다.“다만 지금 저 종이가 사라지면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워집니다.”경헌의 얼굴이 굳었다.그녀는 끝내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경헌은 남은 기록을 집어 들었다.“그렇다면 더더욱 들어줄 수 없겠구나.”그가 종이를 화로에 던졌다.불길이 치솟았다.복단이 숨을 삼켰다.예린은 움직이지 못했다.석구의 손가락 움직임을 기록한 종이도, 연분의 출혈 경과를 적은 종이도 검게 말려 들어갔다.
그는 하인들에게 손짓했다.“왕비 마마께서 작성하신 치료 기록을 모두 가져가라.”복단이 앞으로 나섰다.“그것은 환자의 기록입니다!”의원은 차갑게 대꾸했다.“왕야께서 허락하지 않은 의술을 행한 흔적이니 거두라는 명이십니다.”예린은 붓을 내려놓았다.“환자의 경과를 확인하는 데 필요한 기록입니다.”“소인은 명을 따를 뿐입니다.”하인 하나가 탁자 위 종이를 집어 들었다.예린은 손을 뻗어 막으려다가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복단이 그녀를 부축하는 사이 다른 하인이 기록들을 모았다.석구의 상처 경과, 연분의 출혈 시각, 처치 내용과 맥의 변화까지 모두 한데 묶였다.예린은 이를 악물었다.“그 기록을 없애면 환자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의원은 눈을 피했다.“왕야께 직접 말씀하십시오.”하인들이 종이 뭉치를 들고 나갔다.예린은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복단이 울먹였다.“마마, 어찌합니까?”예린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어디로 가져가는지 확인하자.”***정왕부 뒤뜰에는 작은 화로가 놓여 있었다.주경헌은 그 앞에 서서 예린의 기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그의 곁에는 설미주가 있었다.미주가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왕야, 왕비 마마께서 이런 것까지 적으셨군요.”경헌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출산 시각과 출혈의 변화, 산모의 의식 상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그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나 글씨는 알아볼 수 있었다.담예린의 글씨였다.혼인한 첫해, 예린은 그에게 수없이 편지를 보냈다. 아침에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정원에 어떤 꽃이 피었는지, 그가 좋아한다던 차를 새로 구했다는 시시한 이야기까지 빼곡하게 적었다.경헌은 그 편지들을 끝까지 읽은 적이 거의 없었다.때로는 봉투조차 뜯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예린은 낯선 산모의 맥이 얼마나 빨랐는지,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를 한 줄도 빠짐없이 적고 있었다.경헌은 종이를 뒤집었다.그 뒷면에도 글씨가 있었다.연분이라는 이름이 여러 번 등장했다.그는 손가락으로 그 이
예린은 지팡이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저는 정왕의 아내가 아니어도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그 말이 서재 안에 떨어졌다.경헌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예린은 자신의 아내라는 자리를 버리고 싶어 했다.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네가 왕비가 아니어도 된다는 뜻이냐?”“예.”경헌의 손이 굳었다.“담예린,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알고 있습니다.”“내 아내가 아니어도 좋다는 말이냐?”예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전하께서 제게 남편이셨던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경헌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예린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전하께서는 저를 아내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필요할 때만 왕비의 의무를 말씀하셨고, 제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한 번도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경헌은 입술을 다물었다.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반박하고 싶었다.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예린이 침전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모습뿐이었다.비가 내리던 날에도, 눈이 쌓인 밤에도 그녀는 그를 기다렸다.그때 경헌은 그녀가 귀찮았다.이제는 그 기다림이 사라졌다.그런데 어째서 자신이 더 불편해지는 것일까.“네가 나를 원망하는 것은 이해한다.”그가 낮게 말했다.“하지만 화리는 없다.”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습니다.”그녀는 담담하게 덧붙였다.“그래서 기다리는 겁니다. 언젠가 전하께서 저를 놓아주실 날을.”경헌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그는 예린의 의자 팔걸이를 짚고 몸을 숙였다.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예전 같았으면 예린은 숨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그저 그의 말을 기다렸다.경헌은 그 무심한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네가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내 아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예린은 조용히 대답했다.“미워하는 것도 지
초련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사내는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은자 몇 개가 서로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그는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예린이 서재에 들어섰을 때, 주경헌은 일부러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는 그녀가 자신 앞에 다가와 예를 갖추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예린은 문턱을 넘자마자 잠시 멈춰 섰다. 지팡이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복단이 곁에서 팔을 받쳤다.경헌의 시선이 그녀의 다리로 향했다.그녀는 한쪽에 체중을 덜 싣고 있었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세하게 얼굴이 찌푸려졌다.경헌은 그 모습을 보고도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그러나 예린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의자 앞에 도착해서야 조용히 물었다.“앉아도 되겠습니까?”경헌의 턱이 굳었다.예전의 예린은 자신에게 그런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그가 앉으라고 말하기도 전에 곁으로 다가와 얼굴을 살폈고, 무슨 일이 있는지부터 물었다.지금 그녀는 낯선 사람처럼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경헌은 그 거리가 못마땅했다.“앉아라.”예린이 자리에 앉자 그는 곧바로 물었다.“왜 내 명을 어겼느냐?”“산모가 위독했습니다.”“그것이 내 명을 어길 이유가 되느냐?”“그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경헌은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예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전하께서 무엇을 듣고 싶으신지 모르겠습니다.”경헌의 얼굴이 굳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린 앞으로 다가갔다.“내가 네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었는지 아느냐?”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네가 조금만 내 말을 들었더라면 곤장을 맞을 일도 없었다. 별채에 갇힐 일도 없었고.”예린의 손이 지팡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전하께서는 제가 저지르지 않은 죄로 벌을 내리셨습니다.”“아직도 그 말을 하는 것이냐?”“사실이니까요.”경헌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예린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그의 기억 속 담예린은 언제나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찾아갔을 때도 고개만 돌렸을 뿐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때 경헌은 그것이 자신에게 보이는 반항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오늘은 걸었다.남의 집 산모를 살리기 위해, 고통을 참으며 두 골목이나 걸어갔다.경헌은 턱을 문질렀다.“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경헌은 창밖을 바라보았다.예린은 자신에게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아니, 어쩌면 자신이 보지 않았을 뿐인지도 몰랐다.그녀가 자신을 위해 밤새 기다렸던 날들, 몸이 아픈데도 침전에 찾아왔던 날들이 문득 떠올랐다.경헌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백성들이 왕비를 칭송한다더냐?”“예. 산모의 가족뿐 아니라 이웃들도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합니다.”경헌의 입가가 비틀렸다.“담예린이 언제부터 의술을 알았다고.”그는 문서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백성들이 예린을 칭송한다는 사실보다 더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그녀는 자신에게 인정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주경헌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듯 움직였다.그가 화를 내리라는 사실을 알고도 왕부 밖으로 나갔다.경헌은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자신의 눈길 하나를 얻기 위해 애쓰던 여자가 이제는 낯선 사람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명령을 거역했다.그 사실이 기이할 만큼 불쾌했다.그때 설미주가 서재로 들어왔다.“왕야,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경헌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왕비가 밖으로 나갔다.”미주는 조심스럽게 그의 곁에 앉았다.“저도 들었습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척하다가 말을 이었다.“백성들은 왕비 마마께서 산모를 살리셨다고 칭송한다지요.”경헌의 눈썹이 움직였다.“그래서?”“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다만…….”미주는 말을 흐렸다.경헌이 고개를 돌렸다.“다만 무엇이냐?”“산모의 남편이 왕비 마마께서 허락도 없이 집에 들어와 부인의 몸에 손을 댔다고 하더군요.”경헌의 표정이 굳었다.“그런 말을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