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한지혁은 자신이 죽은 건지 살아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새하얀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사방이 온통 끝없는 흰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자신이 살든 죽든 상관없었다. 그저 서민아와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만 걱정됐다.그렇게 오랫동안 고생하다 이제 겨우 살 만해졌는데, 하늘은 어떻게 하필 이 순간에 서민아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단 말인가?한지혁은 앞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걷다 보니 낯익은 곳이 나타났다.바로 식당 앞이었다. 자신은 서민아를 거칠게 밀쳐 놓고 차유정만 다정하게 품에 안고 있었다.장면이 바뀌었다.병원에서 서민아의 목을 움켜쥔 채 차유정에게 머리를 조아리라고 강요했다. 차유정의 눈빛이 오만할수록 서민아의 모습은 더욱 비참해 보였다.그다음은 화장실이었다.악마처럼 뜨거운 물을 쏟아부으면서 서민아를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서민지의 치료비를 빌미로 협박했고, 서민아가 이마에서 피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찧는 모습을 지켜봤다.방에서는 온갖 모욕적인 말을 퍼붓고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고 하기까지 했다.돌이켜 보니 그때 서민아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다가갈 때마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거부했던 것이다....그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잔혹한 영화의 장면처럼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하나씩 눈앞에 펼쳐졌다.한지혁은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오열했다.그토록 냉혹하고 무정했던 자신이 미웠다.눈이 멀어서 서민아의 진심을 짓밟았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리 뉘우쳐도 돌이킬 수는 없었다.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으로라도 이 모든 것을 갚고 싶었다.한지혁은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아 눈을 번쩍 떴다.눈부신 조명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한지혁은 뻣뻣한 목을 돌렸다. 놀랍게도 침대 곁에는 서민아가 앉아 있었다.기쁨에 눈이 커졌지만 아까처럼 환영일까 봐 선뜻 반응하지 못했다.서민아가 먼저 수어를 하
한지혁이 이 작은 마을에 너무 오래 머물자, 부모님이 전화까지 걸어 호통을 쳤다.[벙어리 하나 때문에 죽고 못 살겠다고 난리라니! 우리 집안에 너 같은 못난 놈은 없다!]한지혁은 그저 말없이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 한참 화를 쏟아 낸 부모님이 당장 돌아오라고 하자,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서민아는 이 일을 몰랐다. 한지혁도 굳이 알릴 생각이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민아 부모님의 기일이 돌아왔다. 그러자 한지혁은 함께 가겠다며 나섰다.굳이 따라오겠다는 사람을 막을 수도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묘지를 찾았다.서민아 부모님의 묘는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한지혁이 두 분의 묘를 제대로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유복한 집에서 자란 한지혁은 서민아가 아픈 동생을 데리고 그동안 어떻게 버텨 왔을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그렇게 꿋꿋하게 살아온 사람이 하필 자신을 만나 온갖 괴롭힘까지 당했다.한지혁은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향을 피웠다.속으로 많은 말을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서민아에게 알리지 않았다. 서민아도 묻지 않았다.아마 뒤늦은 참회일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한지혁은 여전히 매일 민지식당을 찾았다. 출근 도장이라도 찍듯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왔다. 서민아도 한두 번은 말려 봤지만 소용없다는 걸 알고는 더 신경 쓰지 않았다.어느덧 임신 3개월 차에 접어들면서 배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한지혁과 박우진은 서민아가 어디 부딪히기라도 할까 봐 사소한 일까지 신경을 썼다.더 기가 막힌 건 한지혁이 어디서 전단지를 구해 왔는지, 임산부 교실에 등록까지 했다는 사실이었다.보통 부부가 함께 가거나 임산부 혼자 듣는 수업인데, 한지혁은 혼자 참석했다. 임산부들 사이에 앉아 있으니 유난히 눈에 띄었다.박우진이 서민아에게 농담을 건넸다.“저 자식도 오래 보다 보니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네. 다시 돌아갈 생각은 있어?”서민아는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채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박우진도 잘 생각했다는 듯 고개
서민아는 먼저 병원 입구로 나갔다. 박우진이 영상 통화를 걸어서 새 메뉴에 대한 의견을 물었기 때문이다.화상 연고가 든 봉투를 들고 나온 한지혁은 서민아가 미소를 지으며 박우진과 수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봤다.한지혁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가가서 그 모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서민아가 저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인지도 몰랐다.한때는 서민아도 잘 웃는 여자였다. 하지만 함께 보낸 평범한 날들 속에서 자신의 냉담한 태도가 그 웃음을 조금씩 지워 버렸다.한지혁은 아쉬운 마음에 한참을 더 바라보다가 다가갔다.서민아는 한지혁을 보고 잠깐 멈칫했다. 한지혁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한지혁이 씁쓸하게 웃었다.“다 됐어. 이제 돌아가자.”서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넣었다.조금 전까지 얼굴에 머물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에 먼저 탄 서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지혁이 타기를 기다렸다.돌아가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차가 민지식당 앞에 도착하자 한지혁이 먼저 내렸다. 서민아는 차를 몰고 근처 주차장으로 향했다.박우진은 가게 문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한지혁이 서민아가 떠난 쪽만 줄곧 바라보자 코웃음을 쳤다.“이봐요, 이제 와서 사랑꾼이라도 된 척하는 거예요?”노골적인 비아냥에 한지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한지혁이 인내심을 발휘하고 다정하게 구는 건 오직 서민아 앞에서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여전히 오만하고 도도한 도련님이었다.“무슨 뜻이죠?”“줄 수 있는 상처는 다 주고 집까지 나가게 만들었잖아요.” “임신한 몸으로 작은 식당에서 일하면서 간신히 먹고 살다가 이제 좀 살 만해졌는데, 이제 와서 다시 잘해 보겠다고 찾아온 거예요?”“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해요? 민아 씨가 당신이랑 엮이기도 싫어하는 거 안 보여요?”박우진은 서민아의 친구로서 그동안 그녀가 겪은 일들을 곁에서 지켜봤다. 누구보다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그리고
한지혁은 그제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른다는 게 어떤 건지 깨달았다.서민아가 자신에게 품었던 사랑을 남김없이 소진시킨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내가 너한테 상처를 많이 준 거 알아. 내가 너무 멍청했어. 이제야 알겠어. 난 차유정보다 네가 더 소중해!”한지혁은 절절한 고백이라도 되는 듯 말했지만, 서민아에게는 그저 우스운 소리일 뿐이었다.[제가 임신해서요?]한지혁은 수어를 주의 깊게 살피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이 때문이 아니야. 널 찾아왔을 때는 임신한 줄도 몰랐어. 너 때문에 온 거야.”서민아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뻐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미소에 담긴 거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서민아가 다시 수어를 했다.[그럼 아무리 부려 먹어도 불평 한마디 안 하는 가정부가 필요한 건가 보네요.]한지혁은 말문이 막혔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민아는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였다.한지혁은 답답한 마음에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식당에 가 보니 서민아와 박우진이 나란히 앉아서, 자연스럽게 수어를 주고받고 있었다. 새 메뉴를 의논하는 중이었다.박우진은 방금 만든 요리를 들고 웃으면서 새로 시도한 부분을 서민아에게 설명했다.마치 몇 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니 한지혁은 질투가 났다.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불쑥 나섰다.“나도 요리 좀 할 줄 알아. 잠깐만 기다려. 내가 자신 있는 거 하나 만들어 줄게.”서민아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저 잘난 대표님이 요리까지 할 줄 안다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지만 저렇게 의욕이 넘치니 굳이 말릴 수도 없어 주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물론 한지혁은 요리를 할 줄 몰랐다. 그저 박우진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을 뿐이었다.어디서 본 적은 있지만 막상 써 본 적은 없는 조리도구들을 마주하니 난감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결국
서민아가 한지혁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집을 사는 건 한지혁 마음이었다. 쫓아낼 수도 없으니 그저 없는 사람처럼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그날부터 한지혁은 매일 아침 일곱 시 반이면 어김없이 문을 두드렸다. 매번 정성스럽게 준비한 아침 식사를 가져왔는데, 보기만 해도 꽤 비싸 보였다.서민아도 짐작은 갔다. 분명히 근처 고급 호텔에서 주문한 음식일 것이다.“담백한 거 좋아하잖아. 그래서 기름은 조금만 넣어 달라고 따로 부탁했어. 이 해물죽도 좋은 해산물만 썼대. 한번 먹어 봐.”한지혁의 눈빛은 간절했다. 긴장한 기색마저 조금 엿보였다.서민아에게 하도 거절당하다 보니 이제는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역시 이번에도 서민아는 받아 주지 않았다.[더는 저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서민아는 핸드폰에 그렇게 적고는 보온 용기에 담긴 아침 식사를 가리켰다. 다시 가져가라는 뜻이었다.한지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어릴 때부터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넣었다. 무슨 일을 하든 쉽게 성공해 왔다. 그런데 유독 서민아에게만은 번번이 거절당했다.무력감과 막막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한지혁이 어색하게 웃었다.“먹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 영양제는 받아 줘. 의사한테 따로 물어봤는데, 다 임산부한테 좋은 거라더라.”문 앞에 쌓인 영양제에는 대부분 외국어로 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서민아는 한지혁이 여기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예전이었다면 고마워서 어쩔 줄 몰랐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도 살 수 있었다.서민아가 거절하기도 전에 한지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른 옆집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전부 버리지 않을 거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 둘 수밖에 없었다. 서민아가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걸 노린 것이었다.한지혁은 문에 바짝 붙은 채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민아가 물건을 집 안으로 들이는
서민아는 심하게 맞았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을 줄 만한 상처는 없었다. 한동안 몸만 잘 추스르면 회복할 수 있었다.그 일을 겪은 뒤로 한지혁은 서민아의 안전에 더욱 신경을 썼다.경호원들을 붙여서 몰래 서민아를 지키게 했을 뿐 아니라, 자신도 날마다 민지식당 근처를 지켰다.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서민아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려 보았다.하지만 한지혁은 서민아의 안전에 집착이라도 생긴 듯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서민아는 더 말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차유정이 잡혀간 뒤로 한지혁은 변호사와 계속 사건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서민아에게도 장담했다.“반드시 차유정이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서민아는 한숨을 쉬었다. 한지혁이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건 분명했다.문제는 서민아에게 그 죄책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서민아는 그동안 벌어진 많은 일이 차유정만의 잘못으로 일어난 건 아니라는 뜻을 전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서민아가 한지혁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는 데 있었다.앞으로 서로 만나지 않는다면 이런 끔찍한 일도 다시는 겪지 않을 터였다.서민아의 뜻을 알아들은 한지혁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가득했다. 더는 담아 두지 못하고 눈으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한지혁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변명도 하진 않았다.한참이 지나서야 한마디를 꺼냈다.“그냥 내가 없다고 생각해. 공기처럼 여겨도 돼.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해.”...선고 당일, 서민아는 직접 법정에 갔다.한때 그토록 화려하게 빛나던 차유정은 불과 며칠 사이에 수십 년은 늙어 버린 듯했다. 흰머리까지 올라와 있었다.차유정은 잠깐 판단을 잘못했을 뿐이라며 재판부에 선처를 애원했다. 하지만 차가운 법 앞에서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결국 차유정은 음식에 독극물을 넣은 혐의와 납치 혐의가 모두 인정돼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법정 경위에게 끌려 방청석 앞을 지나던 차유정은 마침 서민아와 눈이 마주쳤다.그러자 차유정은 미친개처럼 서민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