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그날 밤 성빈은 병상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어요. 밤새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송하나 씨를 지켰죠.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당시 머리를 심하게 부딪쳐 뇌 안쪽도 다쳤어요. 깨어난 뒤 기억을 잃었으니 지금 생각이 안 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남자는 지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하지만 송하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북성? 교통사고라니? 누군가 나를 쫓아왔다고? 왜 난 그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걸까?’송하나가 알고 있는 건 물에 빠진 뒤 기억의 일부를 잃었다는 사실뿐이었다.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지금 처음 들었다.‘그때 난 왜 북성에 갔을까? 누가 몰래 뒤를 쫓고 있었던 걸까? 그 교통사고는 나를 쫓던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걸까?’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머릿속 깊은 곳에서 기억의 파편 같은 것들이 떠오를 듯했지만 너무나 흐릿해서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남자는 송하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자신의 말 때문에 몸이 안 좋아졌을까 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죄송합니다. 제 이야기가 불편하셨나요?”“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인연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이든이라고 해요. 심성빈의 친구예요. 두 분이 잘 만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쁘네요.”“참, 이 나라에는 언제 오셨어요? 성빈도 같이 안 왔나요?”송하나는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낮게 대답했다.“작년에 왔어요. 성빈 씨도 줄곧 저랑 여기 있었는데, 최근에 일 때문에 잠깐 귀국했어요.”이든이 아쉽다는 듯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아, 그거 아쉽네요. 있었다면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나 나눌 수 있었을 텐데요.”“돌아오면 전해 줄게요.”송하나는 간단히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그녀는 흉터 연고를 챙겨 들고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하지만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뒤숭숭했고 머
다음 날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심성빈은 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차갑던 눈빛에는 어느새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만 가득했다.송하나를 못 본 지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다.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져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 앞에 나타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같은 시각, 이국의 작은 도시에는 어느덧 오후가 찾아와 있었다.송하나는 개인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송하나 씨, 흉터 연고가 다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편하실 때 언제든 오셔서 찾아가시면 됩니다.”전화를 끊은 송하나는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혼자 차를 몰아 그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은 지난번과 달리 유난히 조용했다. 공기에는 은은한 약 냄새가 감돌았다.지난번 진료를 봐주었던 젊은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접수대에서 간호사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송하나는 다가가 가볍게 물었다.“오늘은 데이비드 선생님이 안 계시네요?”간호사는 고개를 들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데이비드 선생님은 먼 곳에서 오는 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에 가셨어요. 오늘은 진료가 없습니다.”그는 카운터에서 미리 포장해 둔 연고를 꺼내 송하나에게 건넸다.“송하나 님, 주문하신 흉터 연고입니다. 확인해 주세요.”이어 간호사는 명함 한 장도 내밀었다.“여기에 병원 연락처가 적혀 있습니다. 나중에 연고가 대량으로 필요하시면 미리 전화로 예약해 주세요.”“감사합니다.”송하나는 연고와 명함을 받아 들고 가볍게 인사한 뒤 돌아섰다.바로 그때, 병원의 유리문이 바깥쪽에서 열렸다.키가 큰 남자 두 명이 나란히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한 명은 데이비드였다.그 옆에는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외국인 남자가 서 있었다.단정하고 점잖은 인상의 남자였다. 간호사가 말한, 데이비드가 공항까지 마중 나갔던 친구인 듯했다.송하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 했다.그런데 데이비드 옆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송하나의 얼굴을
고여진은 심성빈이 녹초가 되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관에서 인기척이 나자마자 서둘러 마중을 나갔다.“성빈아, 왔어?”“네.”심성빈은 짧게 대답하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안으로 들어왔다.고여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다.“오늘 오후에 숙모가 회사에 찾아왔지? 널 괴롭히지는 않았어? 일은 잘 해결됐어?”심성빈은 차분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다 해결됐어요. 숙모도 작은아버지가 감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셨어요. 앞으로 본가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거나 그 일로 더는 귀찮게 하지 않으실 거예요.”“뭐라고?.”고여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동서가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너한테 따지지도 않고?”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천경미가 아침부터 그 많은 친척을 끌고 온 건 어떻게든 심성빈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서였다.원하는 걸 얻지 못했는데 이렇게 쉽게 물러났을 리 없었다.혹시 아들이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성빈아, 엄마한테 솔직히 말해 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숙모를 설득했어?”심성빈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다가 사실대로 설명했다.“작은아버지가 지난 몇 년 동안 밖에서 여자를 만나고 있었어요. 곧 태어날 사생아도 있고요.”“숙모는 현명한 분이에요. 무리해서 작은아버지를 구해 밖의 여자만 좋은 일 시킬지, 아니면 본인과 자녀들의 몫을 지킬지 구분하실 줄 알죠.”고여진은 충격에 입을 떡 벌린 채 한동안 다물지도 못했다.“작은 아주버니가 밖에 여자를 숨겨 뒀다고? 사생아까지 있어? 그게 언제부터야? 나는 어떻게 그런 소문조차 못 들었지?”곁에 있던 심용군이 끼어들었다.“됐어. 그렇게 꼬치꼬치 묻지 마.”“이제 아들도 다 컸잖아. 성빈이가 처리한 일이면 알아서 빈틈없이 했겠지. 뭘 더 걱정해?”고여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었다. 천경미조차 눈치채지 못한 일을 자신이 어떻게 알았겠는가.고여진은 놀라움과 호기심을 애써 누르고
천경미는 심명재의 불륜을 입증하는 자료를 손에 꼭 움켜쥐었다. 몇 년 동안 이어진 남편의 배신과 치밀한 속임수를 확인한 순간, 부부로서 남아 있던 마지막 정도 완전히 사라졌다.이제 울고불고 매달려 심명재를 빼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렇게 해 봤자 밖의 여자와 사생아만 좋은 일이었다. 자신과 자식들의 몫이어야 할 재산까지 고스란히 넘겨주게 될 테니까.반대로 심명재를 구하지 않으면 그는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는다.그 여자가 무사히 아이를 낳더라도 심명재는 아무것도 실질적으로 해 줄 수 없을 것이다.손익을 따져 본 천경미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북받치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대답했다.“두 번째를 선택할게.”먼저 배신한 건 심명재였다. 그러니 자신을 매정하다고 원망할 자격도 없었다.이제 남편을 희생시켜야만 천경미는 자기와 자식들의 이익을 최대한 지킬 수 있었다.“성빈아, 명재를 풀어 달라고 더는 요구하지 않으마. 대신 확실한 보장이 필요해.”“네 말대로 명재가 갇혀있는 동안 그 사람 명의의 지분 배당금과 그룹에서 나오는 수익이 모두 나와 아이들에게 돌아오도록 해 줘. 말로만 약속하지 말고 정식 계약서를 쓰자.”천경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반평생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사람 마음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도 똑똑히 지켜봤다.결국 믿을 수 있는 건 문서로 남긴 약속뿐이었다.심성빈은 이미 그런 요구가 나올 줄 알고 있었다.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시죠.”“제 변호사팀에서 정식 서류를 작성하고 계약까지 도와드릴 거예요. 숙모의 법적 권익을 확실하게 보호해 드릴 겁니다.”심명재가 갇혀있는 동안 그의 법정상속인인 천경미와 자녀들에게 재산을 관리할 권한이 있었다.심성빈은 그저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도와주면서 천경미에게 생색을 내는 셈이었다.조건이 정리되자 천경미는 더는 심명재에 관해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잠시 뒤 공수현이 서명해야 할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공수현은 서류를 책상에 올려놓
천경미는 심성빈의 뻔뻔한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이내 그녀는 더욱 격분해하며 차갑게 웃었다.“좋아, 아주 좋아. 지금 나한테 말장난하겠다는 거지?”“그래, 어디 네가 무슨 대답을 내놓으려는지 한번 보자.”심성빈은 손을 뻗어 옆에 놓인 두툼한 갈색 서류 봉투를 책상 위로 밀었다.“숙모, 화부터 내지 마시고 이걸 먼저 보세요.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시죠.”천경미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해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고 있었다.그녀는 서류 봉투를 거칠게 낚아챘다. 동작이 너무 거칠어 봉투를 봉한 끈이 끊어질 뻔했다.심성빈이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서류를 꺼내 펼쳐 들고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천경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녀의 눈앞에 선명한 사진들이 한 장씩 펼쳐졌다.심명재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나란히 쇼핑을 하고, 다정하게 여행을 다니며, 해외에서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었다.두 사람은 누가 봐도 연인 사이처럼 가까워 보였다.뒤이어 나온 사진들은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심명재가 그 여자를 데리고 고급 병원에 산전 검사를 받으러 간 사진이었다. 여자의 배는 불룩하게 나와 있었고, 심명재는 몸을 숙여 그 배에 귀를 대고 있었다.천경미는 그 여자가 낯익었다.예전에 심명재의 비서로 일했던 여자 같았다.나중에 퇴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뒤로는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심명재가 몰래 살림까지 차려 놓고, 이제는 아이까지 가진 것이었다.사진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심명재가 그 여자에게 집과 자동차를 사 준 증거, 거액의 계좌이체 내역과 명품 구매 기록까지 들어 있었다.천경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이게, 이게 대체...”심성빈은 천경미가 충격에 빠진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작은아버지가 오랫동안 비밀을 잘 지키셨나 보네요. 몇 년씩 밖에서 여자를 만나고 곧 사생아까지 태어나는데, 숙모는 전혀 모르셨네요.”천경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사진들이
그날 오후.심하 그룹 본사, 대표이사실.심성빈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은 그의 어깨 라인을 차갑고 날렵하게 돋보이게 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끝으로 수북하게 쌓인 그룹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공수현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심 대표님, 둘째 사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심성빈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응접실에서 기다리시라고 해.”“네.”공수현은 밖으로 나가 천경미를 응접실로 정중히 안내했다.“둘째 사모님,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아직 업무 중이셔서요. 응접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천경미는 애타는 속을 꾹 누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일이 먼저죠. 기다리면 되지요.”그렇게 말했지만 응접실에 앉은 뒤부터 천경미의 속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화가 치밀었다.자신은 엄연히 심성빈의 숙모이자 집안 어른이었다.남편을 구하려고 직접 찾아와 부탁하는 건데, 한참 어린 조카에게 무시당한 채 기다리고 있다니.차를 몇 잔이나 마셔 배는 더부룩하고 신경은 곤두섰지만 심성빈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천경미는 화가 나면서도 서러웠다.‘어린놈이 갈수록 거드름만 늘어서네.’하지만 불만이 아무리 커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심명재의 운명과 앞으로 천경미 모자가 살아갈 길이 모두 심성빈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심성빈이 끝내 뜻을 굽히지 않으면 심명재는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지도 몰랐다.기다림은 꼬박 한 시간이나 이어졌다.천경미의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 마침내 공수현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둘째 사모님, 대표님께서 일을 마치셨어요. 대표이사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천경미는 순식간에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을 지우고 벌떡 일어나 공수현을 따라갔다.노크하고 들어서자 심성빈이 때맞춰 고개를 들었다.“죄송합니다. 숙모, 업무가 밀려서 오래 기다리시게 했네요.”말은 예의 바르게 했지만 차분하고 서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