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화

Author: 잉어 경단
나는 결국 사인하지 않았다.

“나 갑자기 좀 어지러워. 저혈당인가 봐.”

나는 펜을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잠깐 쉬었다가 사인할게.”

임연준이 바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꿀물 타 줄까?”

“괜찮아, 너 먼저 일 봐. 나는 여기서 조금만 쉬고 있을게.”

임연준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쉬고 있어. 나는 옆 사무실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 잠깐 갔다 올게.”

“5분이면 돼.”

임연준은 사무실을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곧바로 책상 위에 놓인 임연준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은 잠겨 있었다.

나는 임연준의 생일을 입력했다.

틀렸다.

부모님의 기일을 입력해 봤다.

역시 틀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생일을 입력했다.

그러자 잠금이 풀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손가락을 재빨리 움직여서 SNS를 열었다.

그리고 아까 봤던 형진 형과의 대화방을 찾았다.

가장 최근 메시지 전체 내용은 이랬다.

[누나 사인했어? 형님이 엄청 재촉해. 늦어도 오늘 안에는 끝내라고 했어.]

그 아래에 임연준의 답장이 있었다.

[거의 다 됐어. 누나가 서류 보고 있어. 곧 사인할 거야.]

나는 위로 스크롤했다.

[집 쪽은 내가 이미 준비해 놓았어. 누나가 사인하면 데리고 가서 한번 보여줘.]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내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집...’

임연준이 마음속으로 말했던 바로 그 집이었다.

[사인하면 데리고 가서 한번 보여줘.]

‘이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끼였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나를 위해 준비한 집인 걸까?’

나는 계속해서 대화 내용을 위로 올렸다.

조금이라도 더 단서를 찾고 싶었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SNS 화면을 닫았다.

휴대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다시 관자놀이를 누르는 자세를 취했다.

임연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컵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 마셔. 프런트에 부탁해서 바로 타달라고 했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컵을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방금 본 대화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

“누나, 좀 괜찮아졌어?”

임연준이 맞은편에 앉으면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졌어.”

“그럼... 계속할까?”

임연준이 서류를 내 앞으로 밀었다.

나는 서류를 바라봤다가 다시 임연준을 바라봤다.

임연준의 표정은 태연했다. 눈빛은 온화했고, 입가에는 기대 섞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 동생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직접 키워온 아이였다.

처음으로 나를 ‘누나’라고 불렀던 때가 아직도 생생했다.

고작 8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그 작은 아이가...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펜을 들었다.

“그래, 사인하자.”

그런데 막 펜이 서류에 닿는 순간, 내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 한 통이었다.

발신자는 은행이었다.

[XX 은행. 고객님께 안내해 드립니다. 고객님 명의로 등록된 XX로 XX 번지 부동산이 사법상 압류 사전조회 대상에 등록되었습니다. 문의 사항은...]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사법상 압류? 사전 조회? 내 집?’

나는 아직 사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집이 왜 압류 대상이 된 거지?’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미 내 개인정보를 이 회사와 연결해 뒀다는 뜻이었다.

아직 내가 계약서에 사인하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 준비를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연준을 바라봤다.

임연준은 고개를 숙이고 자기 휴대폰을 보고 있어서, 내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재빨리 문자 화면을 닫고,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니야, 이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어.’

‘요즘 은행을 사칭하는 문자도 얼마나 많은데. 지난달에도 내가 10억 원에 당첨됐다는 문자를 받은 적이 있었어.’

그러니 문자 하나만 보고 임연준이 나를 해치려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길 수도 없었다.

“연준아.”

나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은행 문자를 받았는데, 내 집이 사법 압류 대상에 등록됐다는 거야. 무슨 일인지 알아?”

나는 임연준의 반응을 살폈다.

임연준이 고개를 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압류? 문자 좀 보여줘.”

나는 휴대폰을 건넸다.

임연준은 문자 내용을 2초쯤 확인하더니 씩 웃었다.

“누나, 이거 사기 문자야.”

“여기 발신 번호 봐. 은행 공식 번호도 아니잖아. 요즘 사기 문자 엄청 많이 오는데, 이런 건 그냥 무시하면 돼.”

나는 휴대폰을 돌려받아 발신 번호를 자세히 봤다.

확실히 은행 공식 번호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휴대폰 번호였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사기 문자였어.’

“깜짝 놀랐네.”

나는 웃으면서 다시 펜을 들었다.

임연준도 웃었다.

“누나는 진짜 걱정이 많아. 자, 이제 사인하자. 사인하고 나면 내가 누나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펜촉을 다시 서명란으로 향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점 하나를 깨달았다.

임연준은 그 문자를 고작 2초 정도밖에 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 수 있었을까?’

‘어떻게 단 2초 만에 그게 은행의 공식 번호가 아니라는 걸 확신한 거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보답인 줄 알았던 주식, 댓글은 빚더미라고 경고한다   제10화

    석 달 후, 임연준의 회사는 결국 문을 닫았다.회사 장비를 헐값에 처분해서 3억 3,000만 원을 마련했고, 남은 재고를 정리해서 1억 6,000만 원을 받았다.거기에 타고 다니던 차까지 팔았다.그렇게 해서 마련한 돈이 6억이 조금 넘었다.나머지 빚은 채권자와 분할 상환을 협의해서 매달 200만 원씩 갚기로 했다.임연준은 친구의 건설 현장에서 프로젝트 관리 일을 시작했다.월급은 310만 원이었다.생활은 빠듯했지만, 적어도 도망치지는 않았다.그리고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다.우리 사이의 연락은 거의 없었다.가끔 가족 단톡방에 해연이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올리거나, 명절에 작은 돈을 보내오는 정도였다.나는 돈을 받고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한 번은 해연이가 내게 물었다.“엄마, 외삼촌이 엄마한테 잘못한 일이 있어?”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어른들 사이의 일이야. 네가 좀 더 크면 그때 이야기해 줄게.”“그럼 엄마랑 외삼촌은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 있어?”“모르겠어. 그래도 엄마는 외삼촌을 미워하지 않아.”이건 진심이었다.나는 정말로 임연준을 미워하지 않았다.미워하는 건 너무 지치는 일이었다.이제 와서 미워할 힘까지는 없었다.다만 더 이상 임연준을 믿지 않을 뿐이었다.그리고 그날 이후, 그 ‘능력’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민준은 영안초의 효과는 한 번뿐이라고 했다.몸속에서 성분이 모두 대사되고 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그러니 그 댓글 역시 영안초 때문에 나타난 일종의 신경 반응이었을 가능성이 컸다.다만 임연준은 이 약이 나에게 속마음을 듣게 해줄 거라고만 생각했지, 글자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임연준은 치밀하게 거짓말을 설계했다.내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완벽하게 통제했다.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부분은 통제하지 못했다.그 붉은색 댓글은 어쩌면 내 무의식 깊은 곳에서 작동한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였을지도 모른다.직감이었을 수도 있다.단지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어쩌면 하늘에

  • 보답인 줄 알았던 주식, 댓글은 빚더미라고 경고한다   제9화

    일식집에서 나왔을 때, 해연이는 아직도 인형뽑기 앞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엄마! 하나 뽑았어! 이것 좀 봐!”해연이는 못생긴 곰 인형 하나를 들고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나도 웃었다.“가자. 엄마가 아이스크림 사줄게.”“좋아!”해연이의 손을 잡고 쇼핑몰을 걸었다.마음이 홀가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더 이상 짓눌리지는 않았다.해야 할 일은 했고, 해야 할 말도 다 했다.이제 남은 건 임연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그날 밤 집에 돌아온 나는 녹음기에 저장된 내용을 컴퓨터로 옮겼다.그리고 세 곳에 따로 보관했다.하나는 휴대폰에 저장했고, 하나는 USB에 담았다. 마지막 하나는 내 이메일로 보내두었다.강 변호사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녹음이 있으면 증거가 남는다고 했다.혹시 나중에 임연준이 말을 바꾸고 오히려 나를 몰아세운다고 해도, 적어도 나 자신을 지킬 증거는 있어야 했다.그 후 3일 동안, 임연준은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나 역시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밤, 임연준에게 아주 긴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나는 메시지를 열어서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읽었다.[누나, 며칠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 누나 말이 맞아. 내가 잘못했어. 누나를 속여서도 안 됐고, 그걸 누나가 마시는 차에 타서도 안 됐어.][그 영안초라는 것도 인터넷 게시판에서 봤어. 사람의 감각을 열어준다는 글을 봤거든.] [만약 누나가 내 속마음을 들을 수 있게 되면,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어.][그래서 누나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겼어. 그렇게 하면 누나가 더는 망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그런데 누나가 그 댓글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나도 그걸 통제할 수 없었어.][누나한테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다만 한 가지는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것만큼은 거짓말이 아니야.]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누나라는 건 진

  • 보답인 줄 알았던 주식, 댓글은 빚더미라고 경고한다   제8화

    토요일 정오에 일식집에 도착했을 때, 임연준은 이미 와 있었다.임연준의 옆에 앉은 해연이는 그가 사준 새 휴대폰 케이스를 신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엄마! 외삼촌이 사준 거야. 예쁘지?”“예쁘네.”내가 자리에 앉자, 맞은편에 앉은 임연준이 웃으면서 차를 따라줬다.나는 그 차를 힐끗 보고, 손을 대지는 않았다.“누나, 안색이 별로 안 좋아. 요즘 잠을 잘 못 자?”“그냥 좀 피곤해서.”나는 가방에서 그 서류를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렸다.“서류 다 봤어.”임연준의 눈빛이 단번에 밝아졌다.“어때?”“물어볼 게 있어서 직접 왔어.”“뭔데?”나는 해연이를 보면서 말했다.“해연아, 저쪽에 인형 뽑기 기계 있지? 가서 좀 놀고 있어. 엄마가 돈 보내줄게.”“알겠어!”해연이는 휴대폰을 챙겨 들고 신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방 안에는 나와 임연준만 남았다.가방 옆 주머니에 넣어둔 녹음기는 이미 작동 중이었다.“딱 하나만 물어볼게. 너희 회사, 지금 정확히 빚이 얼마야?”임연준의 미소가 순간 곧바로 굳어졌다.“내가 말했잖아. 그건...”“법원에 올라온 세 건의 재판 기록, 내가 확인했어. 합치면 9억이나 되더라.”내 목소리는 담담했다.마치 보고서의 숫자를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이거 가짜라고 말할 거야?”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그러다 임연준의 표정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마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전체가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다 알아본 거야?”“그래.”임연준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포개 탁자 위에 올린 채 한참 침묵했다.“나 누나를 해치려는 거 아니었어.”“해치려는 게 아니라고? 나한테 채무 연대 책임까지 떠넘기려고 했잖아. 그런데 해를 끼치려고 한 게 아니라고?”“나도 정말 방법이 없었어.”임연준이 고개를 들었다.눈시울이 붉어졌다.“그 사람들이 매일같이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어. 더 이상 못 갚으면 해연이 학교 앞까지 찾아가서 기다리겠다고 했어.” “혹시라도 누나나 해연이한테 무

  • 보답인 줄 알았던 주식, 댓글은 빚더미라고 경고한다   제7화

    다음 날, 나는 임연준을 찾아가지 않았다.마음을 가라앉힐 시간도 필요했고, 준비할 것도 있었다.오전에는 전날 임연준의 집에서 마시다 남은 차의 흔적을 검사해 보기로 했다.내 소매에 묻어 있던 아주 작은 찻물 자국을 채취해서 민준에게 건넸다.“이것밖에 안 돼?”민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검사할 수 있어?”“일단 해보자.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어.”오후에는 법원에 가서 임연준 회사와 관련된 세 건의 사건 기록을 확인했다.가장 먼저 접수된 사건은 넉 달 전이었다.넉 달 전부터 임연준은 이미 소송에 휘말린 상태였다.그런데 임연준이 나에게 사인하라고 한 건 지난주였다.임연준은 소송을 당한 지 넉 달이 지나서야 내게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을 해냈다.이 시간의 흐름 자체가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저녁에 임연준이 메시지를 보냈다.[누나, 서류는 좀 봤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설명해 줄게.]나는 답장을 보냈다.[보고 있어. 몇 가지 조항은 변호사 친구한테 물어보려고. 너무 재촉하지 마.]곧바로 답장이 왔다.[알았어. 안 급해.]그리고 10분 후에 또 한 통 보냈다.[누나, 토요일에 해연이랑 같이 밥 먹자. 누나가 지난번에 가고 싶다고 했던 그 일식집 어때?]나는 한참 동안 그 메시지를 바라봤다.일식집.지난번에 SNS에 지나가듯 한마디 말했던 곳이었다.그 주방 가전 때처럼 내가 무심코 흘린 말까지 임연준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예전에는 그게 세심하고 다정한 줄 알았다.지금은 이게 판을 짜는 거라고 느껴진다.임연준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통해서 내게 말하고 있었다.‘봐, 내가 누나를 얼마나 아끼는지.’내가 사인할 때 망설이지 않게 하려고.나는 짧게 대답했다.[그래.]토요일에는 그 자리에 나갈 생각이었다.하지만 이번엔 판을 짜는 사람이 나였다.금요일 밤, 민준이가 전화를 걸어왔다.[결과가 나왔어.]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네가 준 찻물 자국에서 미량의 성분이 검출됐어. 마약도 아니고, 일반적인

  • 보답인 줄 알았던 주식, 댓글은 빚더미라고 경고한다   제6화

    임연준의 사무실에서 나온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약국으로 향했다.“저기... 뭔가 검사하고 싶은 게 있는데, 성분 검사 같은 것도 할 수 있나요?”약국 직원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도 보는 듯 쳐다봤다.“손님, 여기는 약국이지 실험실이 아니에요.”잠시 생각한 나는 방향을 바꿨다.대학 동기 중에 병원의 검사실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었다.나는 곧바로 문자를 보냈다.[민준아, 나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혹시 가능할까?][뭔데?][차 한 잔. 정확히는 차에 뭐가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싶어.][혹시 누가 약 같은 걸 탄 것 같아?][확실한 건 아닌데, 일단 확인을 해보고 싶어.][알았어. 내일 가져와. 내가 검사 맡겨볼게.]나는 짧게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리고 길가의 벤치에 앉아서 머릿속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정말 차에 뭔가 들어 있었다면, 그건 결정적인 증거가 될 터였다.하지만 검사 결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내 판단이 틀리는 건 아니었다.임연준이 무슨 수를 써서 내가 속마음을 듣게 만들었든,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있었다.그 계약서에는 ‘연대 청산 책임’ 조항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빚이 전혀 없는 회사라면 굳이 그런 조항을 넣을 이유가 없었다.변호사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조항을 넣었을 리도 없었다.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임연준 회사의 이름을 검색했다.기업 정보 조회 사이트에 나온 내용은 간단했다.등록 자본금 10억, 납입자본금 10억, 주주는 한 명이었다.하지만 ‘사법 리스크’ 항목을 보는 순간, 내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개정 공고: 3건.법원 공고: 2건.피집행인 정보: 1건.나는 하나씩 클릭했다.첫 번째는 한 소액 대출 회사가 임연준의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었다.사건명은 대출 계약 분쟁, 청구 금액은 2억 4,000만 원이었다.두 번째는 한 개인이 임연준의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었다.사건명은 민사 대여금 분쟁, 청구 금액은 4억 7

  • 보답인 줄 알았던 주식, 댓글은 빚더미라고 경고한다   제5화

    거짓말을 하고 있던 건 글자가 아니라 임연준의 속마음이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속마음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그건 임연준이 일부러 내게 들려주고 있던 대사였다.내가 진실을 깨달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첫 번째, 임연준의 속마음은 지나치게 완벽했다.보통 사람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오늘 저녁은 뭘 먹지?’‘휴대폰 배터리가 얼마나 남았더라.’‘내일 회의가 몇 시였지?’그런 사소한 생각들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누군가를 걱정하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그 사람에 대한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채, 다른 잡생각이 단 하나도 없을 수는 없다.그런데 임연준의 속마음은 달랐다.한 문장, 한 문장이 전부 정확하게 내 약점을 찔렀다.이혼, 대출금, 아이, 부모님.내가 아파하는 부분들을 하나씩 정확하게 짚어냈다.마치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순서대로 펼쳐놓은 것처럼.이건 누군가가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누군가가 대사를 ‘읽어주고 있는’ 거였다.두 번째, 내가 회사에 소송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임연준의 반응은 너무 빨랐다.보통 사람이라면,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으면 잠시 당황하고 되묻는 게 자연스럽다.“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하지만 임연준은 그러지 않았다.바로 컴퓨터를 켜고 법원 문서 사이트를 열었고, 자신이 원고인 사건을 보여줬다.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마치 100번쯤 연습해 본 사람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임연준은 내가 자신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처음부터 내게 이런 능력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내게 이 능력이 생긴 것처럼 임연준이 꾸민 거였다.그제야 나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처음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임연준이 내게 차를 건넸다.내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임연준이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임연준의 속마음을 듣기 시작했다.그 차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거다.아니면 그때 그 행동에 뭔가 수작이 있었던 거다.어쨌든 임연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