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동생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회사 지분 30%를 내 명의로 넘기겠다고 했다. [누나, 그동안 나를 정말 많이 도와줬잖아. 이제 회사도 자리를 잡았고 돈도 벌기 시작했으니까, 누나한테 내 지분 30%를 넘기려고 해.] 나는 뜻밖의 말에 얼떨떨한 마음으로 동생의 회사까지 달려갔다. 회사에 도착하자, 서류에는 이미 서명할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펜을 집으려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서명하지 마! 이건 지분 양도가 아니라 채무 연대 보증이야!] [그 회사는 이미 자산보다 부채가 많아. 사인하는 순간 넌 연대 보증 책임을 지게 되고, 62억 원의 빚을 전부 떠안게 돼!] [네 집, 예금, 심지어 네 딸의 집까지 강제집행을 당하게 될 거야!] 나는 펜을 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동생이 웃으면서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누나, 뭐 보고 있어? 사인하고 나면 나한테 맛있는 거 사줘야 해!” 동생의 손이 내 손에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나는 평생 너무 고생만 했어. 이혼하고 혼자 애까지 키우고 있으니까 진작 뭔가 해주고 싶었어.] [다음 분기 배당금만 해도 적어도 2천만 원은 나올 거야. 그러면 누나도 대출금 갚는 데 좀 보탤 수 있겠지.]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고, 이제 우리 둘밖에 없잖아. 내가 누나한테 잘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잘하겠어.] 나는 펜을 쥔 손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걸까?
View More석 달 후, 임연준의 회사는 결국 문을 닫았다.회사 장비를 헐값에 처분해서 3억 3,000만 원을 마련했고, 남은 재고를 정리해서 1억 6,000만 원을 받았다.거기에 타고 다니던 차까지 팔았다.그렇게 해서 마련한 돈이 6억이 조금 넘었다.나머지 빚은 채권자와 분할 상환을 협의해서 매달 200만 원씩 갚기로 했다.임연준은 친구의 건설 현장에서 프로젝트 관리 일을 시작했다.월급은 310만 원이었다.생활은 빠듯했지만, 적어도 도망치지는 않았다.그리고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다.우리 사이의 연락은 거의 없었다.가끔 가족 단톡방에 해연이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올리거나, 명절에 작은 돈을 보내오는 정도였다.나는 돈을 받고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한 번은 해연이가 내게 물었다.“엄마, 외삼촌이 엄마한테 잘못한 일이 있어?”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어른들 사이의 일이야. 네가 좀 더 크면 그때 이야기해 줄게.”“그럼 엄마랑 외삼촌은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 있어?”“모르겠어. 그래도 엄마는 외삼촌을 미워하지 않아.”이건 진심이었다.나는 정말로 임연준을 미워하지 않았다.미워하는 건 너무 지치는 일이었다.이제 와서 미워할 힘까지는 없었다.다만 더 이상 임연준을 믿지 않을 뿐이었다.그리고 그날 이후, 그 ‘능력’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민준은 영안초의 효과는 한 번뿐이라고 했다.몸속에서 성분이 모두 대사되고 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그러니 그 댓글 역시 영안초 때문에 나타난 일종의 신경 반응이었을 가능성이 컸다.다만 임연준은 이 약이 나에게 속마음을 듣게 해줄 거라고만 생각했지, 글자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임연준은 치밀하게 거짓말을 설계했다.내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완벽하게 통제했다.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부분은 통제하지 못했다.그 붉은색 댓글은 어쩌면 내 무의식 깊은 곳에서 작동한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였을지도 모른다.직감이었을 수도 있다.단지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어쩌면 하늘에
일식집에서 나왔을 때, 해연이는 아직도 인형뽑기 앞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엄마! 하나 뽑았어! 이것 좀 봐!”해연이는 못생긴 곰 인형 하나를 들고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나도 웃었다.“가자. 엄마가 아이스크림 사줄게.”“좋아!”해연이의 손을 잡고 쇼핑몰을 걸었다.마음이 홀가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더 이상 짓눌리지는 않았다.해야 할 일은 했고, 해야 할 말도 다 했다.이제 남은 건 임연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그날 밤 집에 돌아온 나는 녹음기에 저장된 내용을 컴퓨터로 옮겼다.그리고 세 곳에 따로 보관했다.하나는 휴대폰에 저장했고, 하나는 USB에 담았다. 마지막 하나는 내 이메일로 보내두었다.강 변호사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녹음이 있으면 증거가 남는다고 했다.혹시 나중에 임연준이 말을 바꾸고 오히려 나를 몰아세운다고 해도, 적어도 나 자신을 지킬 증거는 있어야 했다.그 후 3일 동안, 임연준은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나 역시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밤, 임연준에게 아주 긴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나는 메시지를 열어서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읽었다.[누나, 며칠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 누나 말이 맞아. 내가 잘못했어. 누나를 속여서도 안 됐고, 그걸 누나가 마시는 차에 타서도 안 됐어.][그 영안초라는 것도 인터넷 게시판에서 봤어. 사람의 감각을 열어준다는 글을 봤거든.] [만약 누나가 내 속마음을 들을 수 있게 되면,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어.][그래서 누나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겼어. 그렇게 하면 누나가 더는 망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그런데 누나가 그 댓글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나도 그걸 통제할 수 없었어.][누나한테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다만 한 가지는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것만큼은 거짓말이 아니야.]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누나라는 건 진
토요일 정오에 일식집에 도착했을 때, 임연준은 이미 와 있었다.임연준의 옆에 앉은 해연이는 그가 사준 새 휴대폰 케이스를 신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엄마! 외삼촌이 사준 거야. 예쁘지?”“예쁘네.”내가 자리에 앉자, 맞은편에 앉은 임연준이 웃으면서 차를 따라줬다.나는 그 차를 힐끗 보고, 손을 대지는 않았다.“누나, 안색이 별로 안 좋아. 요즘 잠을 잘 못 자?”“그냥 좀 피곤해서.”나는 가방에서 그 서류를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렸다.“서류 다 봤어.”임연준의 눈빛이 단번에 밝아졌다.“어때?”“물어볼 게 있어서 직접 왔어.”“뭔데?”나는 해연이를 보면서 말했다.“해연아, 저쪽에 인형 뽑기 기계 있지? 가서 좀 놀고 있어. 엄마가 돈 보내줄게.”“알겠어!”해연이는 휴대폰을 챙겨 들고 신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방 안에는 나와 임연준만 남았다.가방 옆 주머니에 넣어둔 녹음기는 이미 작동 중이었다.“딱 하나만 물어볼게. 너희 회사, 지금 정확히 빚이 얼마야?”임연준의 미소가 순간 곧바로 굳어졌다.“내가 말했잖아. 그건...”“법원에 올라온 세 건의 재판 기록, 내가 확인했어. 합치면 9억이나 되더라.”내 목소리는 담담했다.마치 보고서의 숫자를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이거 가짜라고 말할 거야?”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그러다 임연준의 표정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마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전체가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다 알아본 거야?”“그래.”임연준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포개 탁자 위에 올린 채 한참 침묵했다.“나 누나를 해치려는 거 아니었어.”“해치려는 게 아니라고? 나한테 채무 연대 책임까지 떠넘기려고 했잖아. 그런데 해를 끼치려고 한 게 아니라고?”“나도 정말 방법이 없었어.”임연준이 고개를 들었다.눈시울이 붉어졌다.“그 사람들이 매일같이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어. 더 이상 못 갚으면 해연이 학교 앞까지 찾아가서 기다리겠다고 했어.” “혹시라도 누나나 해연이한테 무
다음 날, 나는 임연준을 찾아가지 않았다.마음을 가라앉힐 시간도 필요했고, 준비할 것도 있었다.오전에는 전날 임연준의 집에서 마시다 남은 차의 흔적을 검사해 보기로 했다.내 소매에 묻어 있던 아주 작은 찻물 자국을 채취해서 민준에게 건넸다.“이것밖에 안 돼?”민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검사할 수 있어?”“일단 해보자.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어.”오후에는 법원에 가서 임연준 회사와 관련된 세 건의 사건 기록을 확인했다.가장 먼저 접수된 사건은 넉 달 전이었다.넉 달 전부터 임연준은 이미 소송에 휘말린 상태였다.그런데 임연준이 나에게 사인하라고 한 건 지난주였다.임연준은 소송을 당한 지 넉 달이 지나서야 내게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을 해냈다.이 시간의 흐름 자체가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저녁에 임연준이 메시지를 보냈다.[누나, 서류는 좀 봤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설명해 줄게.]나는 답장을 보냈다.[보고 있어. 몇 가지 조항은 변호사 친구한테 물어보려고. 너무 재촉하지 마.]곧바로 답장이 왔다.[알았어. 안 급해.]그리고 10분 후에 또 한 통 보냈다.[누나, 토요일에 해연이랑 같이 밥 먹자. 누나가 지난번에 가고 싶다고 했던 그 일식집 어때?]나는 한참 동안 그 메시지를 바라봤다.일식집.지난번에 SNS에 지나가듯 한마디 말했던 곳이었다.그 주방 가전 때처럼 내가 무심코 흘린 말까지 임연준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예전에는 그게 세심하고 다정한 줄 알았다.지금은 이게 판을 짜는 거라고 느껴진다.임연준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통해서 내게 말하고 있었다.‘봐, 내가 누나를 얼마나 아끼는지.’내가 사인할 때 망설이지 않게 하려고.나는 짧게 대답했다.[그래.]토요일에는 그 자리에 나갈 생각이었다.하지만 이번엔 판을 짜는 사람이 나였다.금요일 밤, 민준이가 전화를 걸어왔다.[결과가 나왔어.]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네가 준 찻물 자국에서 미량의 성분이 검출됐어. 마약도 아니고, 일반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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