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빗줄기가 차 지붕을 세차게 두드렸다. 창문은 뿌옇게 흐려졌고, 좁고 밀폐된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의 숨결이 뒤섞였다.입맞춤은 점점 깊어졌다. 네리사의 손가락이 밴스의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밴스는 그녀의 등을 단단히 감싸 안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마치 두 손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지난 5년의 공백을 지워 버릴 수 있다는 듯이.“밴스…….”그녀가 그의 입술에 속삭였다.밴스가 그녀를 끌어당기자 네리사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움직였다. 센터 콘솔을 넘어 한쪽 다리를 올리고, 이어 다른 쪽 다리까지 옮겼다. 어느새 그녀는 운전석에 앉은 밴스의 무릎 위에 올라타 있었다. 등 뒤로 운전대가 닿았지만 개의치 않았다.밴스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엉덩이를 지나 척추를 따라 움직였고, 마침내 그녀의 몸 어디든 닿을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맸다. 그는 그녀를 만지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네리사는 더욱 격렬하게 입을 맞췄다. 밴스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 갈망에 응했다.그러다 네리사가 숨을 몰아쉬며 먼저 입술을 떼었다.그녀는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네리사는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힘차고, 살아 있었다.밴스는 그녀를 두 팔로 감싸 안고 품 안에 꼭 가두었다.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네리사.”그가 조용히 불렀다.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나 사랑해?”네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살피던 눈이 의아하게 커졌다.“뭐라고요?”“나 사랑하느냐고.”밴스가 다시 물었다.“왜 지금 그런 걸 물어요?”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회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맑았지만, 그 안에는 숨기지 못한 연약함이 깃들어 있었다.“당신은 한 번도 그 말을 해 준 적이 없으니까. 단 한 번도.”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조금 더 단단히 감쌌다.“5년 전,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했어. 다시는 누구도
“협박이 아닙니다. 약속이죠.”밴스가 몸을 바로 세웠다.“호라이즌 글로벌은 여섯 대륙의 정부들과 협력해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원도, 법률팀도, 대중의 신뢰도 있습니다. 반면 여러분에게는 죽어 가는 산호초와 수많은 부인뿐이군요.”네리사도 말을 보탰다.“우리에게는 데이터가 있어요. 법도 우리 편이고요. 이제는 여러분을 끝까지 상대할 수 있는 뒷받침까지 갖췄어요.”침묵이 흘렀다.법무 책임자가 최고경영자에게 몸을 기울여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최고경영자는 주먹을 움켜쥐었다.“검토할 시간이 필요합니다.”밴스는 고개를 저었다.“시간은 이미 몇 년이나 드렸습니다. 이번 주가 끝나기 전에 소송을 제기할 겁니다. 협상할 생각이 있다면 어디로 연락해야 하는지 알고 계시겠죠.”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회의실을 나갔다. 네리사도 그의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사라지자 회의실 안에서는 당황한 임원들의 속삭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두 사람은 차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밴스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네리사가 차에 올라타자 그는 운전석으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그들은 변하지 않을 거야.” 그가 말했다. “강제로 바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알아요.”“그렇다면 우린 왜 거기까지 간 거지?”네리사가 그를 바라보았다.“이제 그들도 알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법정에서 그들을 무너뜨리면, 적어도 마지막 기회를 줬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하겠죠.”밴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네리사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네리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해안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낮게 기울어진 태양이 하늘을 주황빛과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밴스는 운전대를 잡았고, 네리사는 창밖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차 세워요.”“어디에?”“저기요. 산호초 복원 구역에 가 보고 싶어요.”밴스는 속도를 줄이고 비포장도로로 차를 돌렸다. 길은 바다가
아침 햇살이 컨테이너 사무실 위로 희미하게 내려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해안선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벽에는 피해 평가 자료와 수질 검사 보고서, 죽어 가는 산호의 사진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샘은 테이블 상석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레오는 태블릿을 든 채 그의 옆에 앉아 있었고, 네리사와 밴스는 두 사람을 마주 보고 있었다.“회사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샘이 말했다. “변호사들은 시간을 끌고 있고. 우리가 결국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우린 포기하지 않아.” 네리사가 단호하게 답했다.“그렇다면 소송을 걸어야지.” 레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데이터만으로는 부족해. 내부 사정을 증언해 줄 사람이 필요해.”밴스가 입을 열었다.“내게 인맥이 있어. 이런 사건에서 승소한 환경 전문 변호사들이지. 비용은 많이 들겠지만, 실력만큼은 최고야.”샘이 그를 바라보았다.“그 대가로 뭘 원하시죠?”“아무것도.” 밴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산호초가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야. 그들이 너희가 해 온 일을 망치는 것도 막고 싶고. 그거면 충분해.”잠시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한 가지 더 해야 해요.” 네리사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찾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가진 증거를 모두 보여 주고, 우리를 법정으로 끌고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분명히 알려 주는 거죠.”레오가 미간을 좁혔다.“그 사람들이 우리 말을 들을 리 없어.”“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적어도 우리는 그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줬다고 말할 수 있어요.”네리사는 밴스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당신이 함께 가면, 그들도 우리가 더 이상 작은 지역 단체에 불과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호라이즌 글로벌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조직이에요. 당신의 이름에는 세계 어디서든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가 있죠. 우리와 싸우는 건 결국 당신과 싸우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샘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는 밴스를 바라
밴스가 컨테이너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는 조용했다.레오 혼자 서류 더미 앞에 몸을 숙인 채 양식을 작성하고 있었다. 펜 끝이 종이 위를 바쁘게 오갔다. 회의는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문이 삐걱거리자 레오가 고개를 들었다.“밴스.”“다들 어디 갔지?”레오는 펜을 내려놓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샘이랑 네리사는 새로운 산호 양식장 위치를 조사하러 갔어. 그 만에 말이야. 오늘 아침에 출발했어.”밴스의 가슴이 조여 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질투할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샘은 네리사와 함께 일하는 동료였고, 두 사람은 사업 파트너였다. 무엇보다 샘은 오랫동안 그녀 곁을 지켜 온 사람이었다.하지만 마음은 자격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밴스는 샘의 편안한 미소를 떠올렸다. 네리사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던 모습, 마치 하나의 몸을 이루는 두 조각처럼 익숙하게 움직이던 두 사람.그는 애써 그 장면을 밀어냈다.“사무실 일을 좀 도우려고 했는데.”레오가 어깨를 으쓱했다.“이제 남은 일도 별로 없어.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어.”밴스는 잠시 문간에 서 있었다. 그러다 몸을 돌렸다.“밖에 나가 있겠네.”그는 정원을 향해 걸었다.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감쌌다. 바람에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이블린이 가꾸는 텃밭은 가지런했고, 초록빛 채소들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그리고 낮은 돌담 위에 마야가 앉아 있었다.무릎 위에는 스케치북이 펼쳐져 있었고, 주변에는 색연필이 흩어져 있었다. 마야는 그림을 그리는 데 푹 빠져 있었다. 혀끝을 살짝 내밀고 미간을 찌푸린 채, 작은 손으로 색연필을 움직이고 있었다.밴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숨이 턱 막혔다.아이는 너무 작았다. 그림에 온 정신을 쏟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그런데 자신은 이 아이의 인생에서 5년을 놓쳤다. 다섯 번의 생일, 다섯 해 동안 처음으로 경험했을 수많은 순간들. 처음 연필을 쥐었을 때, 처음으로 ‘파파’라는 말을 했을
게는 바위틈으로 재빨리 숨어들었다.“네가 겁먹게 했잖아요.”네리사가 말했다.“아니야. 부끄러워서 도망간 거야. 아까 네 쳐다보는 거 내가 봤거든.”네리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잠시 뒤 찾아온 침묵은 아까와 달랐다. 더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조여 있던 무언가가 조금 느슨해진 듯, 안도감마저 감돌았다.네리사는 샘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이 눈에 들어왔다.그녀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생각할 틈도 없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 했다.내가 왜 이러지?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네리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샘은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주었고, 아무런 벽도 가면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어도 괜찮다고 느끼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그의 따뜻하고 꾸밈없는 미소를 볼 때면, 네리사는 자꾸만 그에게 손을 뻗고 싶어졌다.하지만 손이 그의 이마에 닿기 직전, 움직임이 멈췄다.네리사는 두 사람 사이 허공에 멈춰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미안해요. 그러려던 게 아니라…….”샘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몸을 움직이지도, 그녀를 재촉하지도 않았다.“미안해하지 마.”그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네리사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손을 거두려 했다.그 순간 샘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부드럽게. 아프지 않게. 억지로 붙들어 두려는 것도 아니었다.그는 잠시 그녀의 손을 허공에 둔 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의도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을 제 피부 위에 가만히 눌렀다.샘의 시선이 네리사의 눈에 머물렀다.“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네가 이렇게 만져 주길 바랐는지 알아?”그가 조용히 물었다.“아무 생각 없이, 망설이지도 않고. 그냥 네가 그러고 싶어서 손을 뻗는 거 말이야.”네리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뺨에 닿은 손바닥이 따뜻했다. 손끝에는 수염이 자라기 시작한 피부
아침 햇살이 컨테이너 사무실 위로 옅은 황금빛을 드리웠다.샘은 이미 선착장에 나와 배에 장비를 싣고 있었다. 손놀림은 익숙하고 조용했다. 밤새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눈 밑에 드리운 그늘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레오가 태블릿을 손에 든 채 경사로를 내려왔다.“오늘은 같이 못 가. 재활용 업체 쪽에서 미팅을 오늘 아침으로 당겼어. 내가 직접 가야 해.”샘이 고개를 끄덕였다.“혼자서도 할 수 있어.”“그건 알아.” 레오는 네리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방금 선착장에 도착해 텀블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새로운 장소를 지도에 표시하려면 샘도 도움이 필요할 거야. 같이 가 줄래?”네리사는 샘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네. 그러죠. 혼자보다는 둘이 낫잖아요. 저도 처음부터 배우고 싶고요.”그제야 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조심스러운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정말 괜찮겠어?”“물론이죠.”샘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가자.”두 사람은 배에 올라탔다. 레오가 밧줄을 풀어 배를 밀어냈다. 엔진이 몇 번 거칠게 소리를 내더니 이내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해안선이 점점 멀어졌다.네리사는 뱃머리에 앉았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얼굴 위로 흩날렸다. 샘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키를 잡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네리사는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키를 움켜쥔 손, 굳게 다문 턱. 밴스가 사고를 당한 뒤로 샘은 줄곧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상처받았구나.네리사는 생각했다.내가 상처를 준 거야.“GPS를 보니까 새로운 산호 양식장은 곶을 조금 지나면 나와.” 샘이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네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수심은요?”“15미터. 바닥은 모래고. 산호 조각을 옮겨 심기에는 딱 좋을 거야.”네리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그의 연갈색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고, 햇볕에 그을린 팔뚝은 단단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