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내가 이사회실에 들어서자 모든 대화가 멈췄다.
잠시 문 안쪽에 서서, 올라오기 전에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내 모습을 의식했다. 어제 입었던 옷은 그대로였고, 구겨진 흔적도 남아 있었다. 몇 번이나 얼굴을 닦았지만 눈 밑에는 어젯밤 화장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긴 회의 테이블을 둘러싼 임원들의 시선이 하나둘 내게 향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의 의문과 판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단 5분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옷매무새를 정리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밴스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보고서를 검토할 때처럼 차갑고 정확하게 내 모습을 훑었다.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굳이 생각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백만 달러가 걸린 제안서를 발표하러 온 고위 임원들 사이에 서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내 눈으로 돌아왔다가 회의 테이블로 향했다.
“여러분.”
밴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방 안이 곧바로 조용해졌다.
“이쪽은 네리사 설리번입니다. 제 데이터 전략을 담당하고 있죠. 유럽 분석 업무를 총괄하고 있으며, 제니스 데이터를 직접 다뤄왔습니다.”
그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현재 제안에서 빠진 부분을 설명할 겁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데이터 전략 담당?
내 공식 직책은 아니었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내게 그 직함을 붙여 주었다. 실제 권한보다 조금 더 무게가 실린 이름을 내게 건넨 셈이었다.
따질 시간은 없었다.
나는 곧장 화면 앞으로 걸어가 노트북을 연결했다.
테이블 중앙에 앉은 해링턴이 두꺼운 눈썹을 치켜올리며 밴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시간이 많지 않네, 블랙우드. 비용 전망은 이미 검토했는데 너무 높아.”
“그건 맞습니다.”
나는 화면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지금 검토하시는 전망은 거의 전적으로 북미 모델을 기준으로 계산된 겁니다.”
첫 번째 그래프를 띄웠다.
“여기서는 평균 효율 개선을 40%로 보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테이블을 둘러봤다.
“이 수치는 틀렸습니다.”
테이블 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 모델은 업계 표준이야.”
“그랬죠.”
나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의 데이터는 이미 몇 년이나 앞서 있습니다.”
오슬로에서 기록된 실제 결과와 북미 전망치를 비교한 자료가 화면에 나타났다.
“제니스의 핵심 기술은 오슬로에서 2년째 운영되고 있습니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효율이 72% 향상됐습니다.”
안경을 쓴 남자가 몸을 뒤로 기댔다.
“공개 자료는 조작될 수도 있지.”
“맞습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 수치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보고된 생산량을 에너지 소비량, 유지보수 비용, 시설의 실제 가동 시간과 교차 검증했습니다. 그래도 현재 사용 중인 전망치보다 상당히 높은 효율이 나옵니다.”
해링턴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이미 결론이 난 회의에 끼어든 사람을 바라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시선은 화면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비용 곡선을 가리켰다.
“현재 제안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여기입니다. 초기 투자 비용만 보고 그 비용이 계속 비슷한 수준으로 발생한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설치 비용은 한 번 발생합니다. 그 이후에는 운영 비용이 지속적으로 감소합니다.”
최종 그래프가 화면에 나타났다.
“손익분기점은 7년이 아닙니다.”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스칸디나비아 데이터를 기준으로 보면 약 18개월입니다. 그 이후에는 운영 비용 절감 효과가 계속 누적됩니다.”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해링턴의 시선이 화면에 고정됐다.
“공급업체 세부 자료를 보여주게. 오슬로 설치 건 말이야.”
순간 배가 서늘하게 조여 왔다.
그 페이지는 준비하지 않았다.
자료 자체는 노트북의 다른 파일에 있었지만, 오늘 발표 자료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처음으로 목소리의 확신이 흔들릴 것 같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이 빈틈을 드러내지 않을지 생각하려는 순간이었다.
“17페이지입니다.”
창가 쪽에서 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를 돌아봤다.
“공급업체 계획은 해링턴 씨 앞에 놓인 자료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설리번 씨가 초기 분석에서 별도로 표시한 내용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서 이번 회의를 앞당긴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나는 반 박자 동안 그를 바라봤다.
나는 해링턴에게 그 자료를 표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앞에는 자료집이 놓여 있었다.
해링턴이 17페이지를 펼치자 여러 부분이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내가 올라오는 동안 밴스의 비서가 준비한 모양이었다.
해링턴은 몇 초 동안 수치를 살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초기 투자 규모가 크다고 겁먹은 건 아니겠지, 설리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더 걱정하는 건 잘못된 기간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겁니다.”
나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설치 비용만 보면 비싸 보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5년 동안 실제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까지 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해링턴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말이 맞았군, 블랙우드.”
그가 자료집을 닫았다.
“이 사람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
내 손가락이 발표 리모컨을 살짝 움켜쥐었다.
“이사회는 월요일에 열린다.”
해링턴이 나를 가리켰다.
“그때 이 사람도 참석시키게.”
잠시 후 그가 덧붙였다.
“CFO가 아니라 이 사람 말이야. 이걸 진행한다면 숫자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직접 설명해야지.”
나는 감사 인사를 했지만, 내 목소리가 이상할 만큼 멀게 들렸다.
회의는 몇 가지 추가 질문으로 이어졌지만 사실상 결정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임원들이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남아 화면에 띄워진 자료를 바라봤다.
한 시간 전만 해도 나는 택시 뒷좌석에서 남편이 다른 여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임원들이 내 분석을 믿고 수백만 달러 규모의 결정을 바꾸고 있었다.
그 차이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5년 동안 나는 잔의 사랑, 혹은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 자신의 가치처럼 받아들였다.
내가 왜 그에게 충분하지 않은지 고민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썼다.
그러느라 잊고 있었다.
그에게는 애초에 나를 평가할 자격조차 없었다는 것을.
나는 노트북을 닫았다.
“감사합니다.”
해링턴에게 인사를 건넨 뒤 나는 밴스를 따라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동안 우리 둘 다 말이 없었다.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할 정도로 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어젯밤 마지막으로 단둘이 있었을 때, 나는 술에 취해 그에게 키스했고, 다음 날 정신을 차린 뒤 그 일을 후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무실은 조용하고 서늘했다.
유리벽 너머로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밴스는 책상 뒤로 걸어갔고, 나는 문 근처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앉아도 되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
“잘했습니다.”
단순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그런 인정을 듣는 것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그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그리고 추가 자료도 감사합니다.”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준비하신 겁니까?”
“당신이 올라오는 동안 리디아에게 공급업체 자료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링턴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제니스 합병은 다음 주 금요일에 발표될 겁니다.”
그가 이어 말했다.
“이후 기자회견도 있을 겁니다. 당신도 참석하세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프로젝트 책임자로요?”
“프로젝트 책임자로.”
가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공식 석상에요?”
“네.”
그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업무 때문입니다, 설리번 씨.”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은 이 프로젝트를 지켜볼 사람들에게 직접 설명할 사람이 될 겁니다.”
나는 그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이해했다.
업계가 지켜볼 것이다.
언론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잔과 조비의 귀에도 이 소식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 생각이 두려워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쳐 있던 몸 안에서 조금 더 따뜻하고 날카로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예요?”
밴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 아래쪽의 도시를 바라봤다.
“능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사람들은 종종 무시당하는 것과 평범한 것을 혼동합니다.”
유리창에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하지만 둘은 같은 게 아닙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왜인지 그 말이 단순히 업무에 관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나쁜 선택 때문에 좋은 사람을 잃는 일에 지쳤으니까요.”
“뭐라고?”네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밴스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제대로 된 만찬을 주문하겠다는 거야.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 당신을 충분히 먹여 둬야 하거든. 내가 당신의 기력을 전부 빼앗아 갈 생각이니까.”네리사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야.”“난 낭만적인 남자일 뿐인데.”밴스는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장모님께 외동딸을 굶겨 놓고 자기 배만 채웠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거든.”그는 네리사의 귓가에 속삭이며 살짝 깨물었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휴대전화를 꺼내 저녁 식사를 주문했다.빌라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굶주렸는지 깨달았다.“음…… 아까까지만 해도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알고 보니 나 정말 배고팠나 봐.”네리사가 맛있게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뭐, 서로에게 정신이 팔려서 음식 생각을 할 틈이 없었잖아.”밴스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저녁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해변으로 향했다. 모래는 서늘했고, 밤하늘에는 별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도시의 불빛도 구름도 없는 하늘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였다.두 사람은 모래 위에 나란히 앉았다. 밴스가 하늘을 가리켰다.“저기 있는 별 보여? 북극성이야. 뱃사람들은 저 별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대.”네리사는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당신도 길을 잃은 적이 있어?”“매일 그랬어. 당신을 다시 찾기 전까지는.”네리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나도 당신을 다시 찾아서 정말 다행이야, 밴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결국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워.”밴스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 코끝을 스친 뒤 입술에 키스했다.처음에는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키스는 깊고 뜨거워졌다.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품에 깊이 빠져들었다. 파도가 밀려
해가 저물 무렵, 두 사람은 베란다에 나란히 앉아 노을을 바라보았다. 네리사는 밴스의 무릎 위에 앉아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바구니에 담긴 과일을 나눠 먹고 와인을 마시며, 담요 한 장을 함께 덮은 채 서로에게 기대어 숨을 골랐다. 담요 아래 두 사람의 몸에는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그러다 당신이 먼저 지치겠어.”네리사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말했다.“5년이나 기다렸어.”“그 말, 정말 많이도 하네.”“사실이니까.”그녀가 웃자 밴스는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네리사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두려워? 앞으로 일어날 일들 말이야. 특히 당신 아버지와 관련해서.”밴스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아래쪽 해변에서는 파도가 잔잔하게 밀려왔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했다.“당신을 또 잃을까 봐 두려워.”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당신이 다시 떠날까 봐서가 아니야. 당신을 내게서 빼앗아 갈 무언가가 생길까 봐.”네리사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아무도 날 빼앗아 가지 못해. 난 이제 도망치지 않을 거야.”밴스는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버지는 내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어.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지. 늘 차갑고 무심했어. 아버지가 하는 말은 전부 명령이었고, 침묵조차 나에 대한 심판처럼 느껴졌어.”네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어릴 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 아버지란 원래 자식을 안아 주지 않는 사람이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는 사람인 줄 알았지. 학교 공연에 와 주거나 오늘 하루 어땠느냐고 물어보는 일도 없었어. 난 사랑이라는 게…… 일종의 거래라고 생각했어. 성과를 내고, 성공하고, 실망시키지 않으면 그 대가로 버림받지 않는 거라고.”네리사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그 집에서 유일하게 따뜻했던 사람은 어머니였어. 아버지가 보지 않을 때면 밤마다 몰래 내 방에 들어오셨지. 내 손을 잡고
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마침내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바다 한가운데 자리한 작고 울창한 섬은 새하얀 모래사장과 에메랄드빛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야자수 사이로는 바닷가에 자리한 프라이빗 빌라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작은 공항에서 보트로 갈아타고 섬으로 향했다. 운전기사는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밴스가 네리사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네리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정말 아름답다.”“당신이 더 아름다운데.”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앞으로 계속 이렇게 느끼한 말을 할 생각이야?”“노력은 해 보려고.”빌라는 소박하면서도 넓고 우아했다. 커다란 침실의 창문 너머로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에어리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어딘가 닮았지만, 도시의 불빛 대신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돌로 만든 벽난로와 흔들의자가 놓인 베란다도 있었고, 빌라 뒤편으로는 둘만을 위한 해변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음식과 와인이 담긴 바구니, 그리고 작은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밴스가 쪽지를 펼쳐 읽었다.“회의도, 전화도 없이. 오직 두 사람만. 축하드립니다, 보스.”네리사는 그의 손에서 쪽지를 받아 들고 웃었다.“다니엘은 당신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밴스는 쪽지를 다시 가져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힘든 시절을 많이 함께 버텨 준 사람이니까. 그에게도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지.”네리사가 한 걸음 다가섰다.“그럼 이제는?”밴스는 그녀를 품에 끌어당겼다.“이제부터는 이 행복을 마음껏 누릴 생각이야.”그가 입을 맞췄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과 와인은 그대로 잊혔다.입맞춤은 점점 깊어졌다. 밴스는 네리사를 가볍게 안아 올린 뒤,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침실로 향했다.바다가 보이는 창문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밴스는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에는 그동안 미뤄 두었던 갈
네리사가 신혼여행을 가기로 하자 밴스는 뒷베란다로 나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대니얼에게 전화를 걸었다.“대니얼, 신혼여행 준비해 줘. 3일 일정이야. 해외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곳. 벽난로가 있는 빌라에 해변도 있고 폭포도 있었으면 좋겠어. 아침 식사가 끝날 때까지 전부 준비해.”잠시 침묵이 흘렀다.“대표님, 그건…….”“불가능하다고? 자네는 전에도 불가능한 일을 해냈잖아. 이번에도 해내면 돼.”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대니얼이 한숨을 내쉬었다.“어디로 보내 드릴까요?”“우리도 모르게 해 줘. 알아서 놀라게 해 봐. 완벽하기만 하면 돼.”“빌라는 준비해 두겠습니다. 한 시간 안에 항공편 정보도 보내 드리죠.”“좋아. 정말 마음에 드는군.”“축하드립니다, 대표님. 이 순간을 누리실 자격이 충분합니다.”밴스는 미소 지었다.진심 어린 축하와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는 사람들의 말이 이렇게 행복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첫 번째 결혼식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때는 축하의 말 한마디, 축복의 미소 하나에도 거짓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모든 것이 진심이었다. 자신 역시 그 진심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밴스는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마워, 대니얼.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잠시 정적이 흐른 뒤, 전화기 너머에서 대니얼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어라, 이제는 저한테 고맙다는 말도 하시네요? 결혼이 사람을 이렇게 바꿔 놓다니. 밴스 블랙우드가 맞긴 맞습니까?”대니얼이 웃음을 터뜨렸다. 밴스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렸다.“빨리 준비나 해.”그는 전화를 끊고 집 안으로 돌아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합류했다.네리사가 그를 바라보았다.“다 됐어요?”“끝났어.”“대니얼은 엄청난 압박을 받겠네요. 당신은 정말 못 말려요.”“그런 나와 결혼한 건 당신이잖아.”네리사가 미소 지었다.“그러게요. 내가 그랬죠.”밴스는 식탁 건너편에 앉아 아침 식사와 초콜릿 디저트를 즐기고 있는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밴스가 먼저 눈을 떴다. 네리사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베개 위로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고,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밴스의 몸은 온통 뻐근했다. 네리사 역시 다르지 않을 터였다.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르내리는 가슴, 부드러운 입술의 곡선, 그리고 전날 밤 자신이 남긴 목덜미의 흔적까지.밴스는 몸을 숙여 그녀의 귓불에 입을 맞췄다. 네리사가 살짝 뒤척였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그는 어젯밤 남긴 자국 위에 다시 입술을 내렸다.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살짝 빨아들이자 네리사가 잠결에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밴스의 입술이 쇄골과 어깨를 차례로 스쳤다. 그녀의 가슴에 닿았을 때 네리사가 몸을 조금 움직였다.“밴스…….”“좋은 아침.”“너무 일러.”“당신을 원하기에 너무 이른 시간은 없어.”그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네리사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웃었다. 그러나 밴스가 다시 입을 맞추자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네리사,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멈출게.”네리사는 대답 대신 그의 뺨을 감싸 쥐고 입을 맞췄다. 그 짧은 입맞춤에 밴스의 눈빛이 짙어졌다.“나도 당신을 원해.”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며 낮게 말했다.“언제나. 몇 번이고.”밴스가 다시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려던 순간이었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침실의 고요를 깨뜨렸다.“엄마? 밴스 아저씨?”마야의 목소리였다. 작지만 집요했다.밴스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네리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엄마, 보라색 연필이 필요해요. 엄마 방에 있잖아요. 뾰족하게 깎인 거요!”네리사가 베개 속에서 신음하듯 말했다.“거봐.”“그냥 모른 척하자.”“계속 두드릴 거야.”“엄마!”네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가운을 걸치고 문을 조금 열었다.“어떤 보라색 연필인데, 아가?”“뾰족하게 깎인 거요.
피로연은 휘트모어 가족의 집에서 열렸다. 식탁 위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에블린이 자랑하는 구운 생선 요리부터 샘의 어머니가 구워 온 빵, 애나가 만든 과일 타르트까지. 집 안은 웃음소리로 가득했고, 와인잔은 쉴 새 없이 오갔다.밴스는 식탁 상석에 앉아 있었고, 네리사는 그의 곁을 지켰다. 식탁 아래에서 밴스의 손은 네리사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네리사 역시 그의 손 위에 손을 포갠 채였다.아직 구겨진 꽃파는 소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마야는 샘과 레오 사이에 앉아 애나에게 꽃잎을 뿌리는 일을 깜빡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제가 걸어가고 있었는데요. 그만 잊어버렸어요.” 마야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런데 밴스 아저씨가 괜찮다고 했어요. 꽃잎이 그대로 있어도 예쁘다고요.”애나가 미소 지었다.“정말 다정한 분이시구나.”“네. 그런데 그림은 못 그려요. 그래서 제가 가르쳐 주고 있어요.”샘이 마야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선생님이 아주 엄격하시거든요.”“엄격한 거 아니에요. 저는 인내심이 많은 거예요.”레오가 코웃음을 쳤다.“하늘을 세 번이나 다시 그리게 해 놓고?”“하늘이 회색이었잖아요. 파란색이어야 해요.”식탁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에블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었다.“자, 건배하자꾸나. 내 딸과 사위를 위해. 두 사람의 사랑이 바다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해안처럼 한결같기를 바라며.”모두가 잔을 들어 올렸다.밴스는 네리사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네리사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식사가 끝나 갈 무렵, 마야의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잠을 이기려 애쓰다가 결국 샘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에블린이 손녀를 품에 안아 올렸다.“자, 우리 아가. 오늘 밤은 할머니랑 자자.”마야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왜요? 저는 엄마랑 자는데.”“오늘 밤은 아니란다.” 에블린은 손녀를 안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엄마와 밴스 아저씨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하거든. 우리 마야는 할머니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