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밴스는 단순히 합병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며 그가 정확히 무엇을 제안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해링턴과의 회의는 우리 사이의 무언가를 바꿔 놓았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처럼 그의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지금은 밴스 블랙우드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나를 믿고 맡긴 일 덕분에 수백만 달러 규모의 거래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저한테 원하는 게 뭐죠?”
밴스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함께 일하는 겁니다.”
나는 그가 더 설명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곧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내가 그의 말을 알아듣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단순히 또 다른 프로젝트나 프레젠테이션을 함께하자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팀으로.”
그 말이 우리 사이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는 가볍게 팔짱을 꼈다.
“무슨 일을요?”
“아무도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지 못하도록 하는 일.”
나는 미간을 좁혔다.
밴스가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의자에 앉지는 않았다.
“당신 남편은 자신의 선택을 했습니다. 내 아내도 마찬가지고요.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든 자신들의 관계가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 깔린 씁쓸함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잔은 계속 그녀를 보호하겠죠. 원래부터 그래 왔으니까. 조비엔은 그럴 만한 이유를 계속 만들어 줄 겁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혼란스러웠다고,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서로에 대한 감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고 말하겠죠.”
그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두가 자신들을 이해해 주길 바랄 겁니다.”
나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잔에게서 이미 들었던 말이었다.
그녀는 약해. 무서워하고 있어. 그녀에게는 내가 필요해.
언제나 조비엔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선택이 나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는 한 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죠?”
“그들이 우리를 마음대로 흔들 수 없게 만드는 겁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밴스가 책상을 돌아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책상 모서리에 한 손을 짚었다.
“당신은 내 직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일을 잘하죠. 오늘 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가려는지 알 것 같았지만,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회사 행사에서는 내 옆에 서게 될 겁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게 될 거고요. 아무도 당신을 그저 아스테라에서 일하는 직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럼 당신은요?”
“나는 계속 내 일을 합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무슨 계획이에요?”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충분한 계획이 될 겁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밴스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와, 아직도 자신들의 행동을 변명하느라 바쁜 두 사람을 보게 될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소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요. 그저 그들의 선택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두지 않는 겁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역시 밴스다운 방식이었다.
소리치지도 않는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지도 않는다. 상대에게 후회하라고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저 너무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가서, 언젠가는 그들의 불륜조차 우리가 지나온 삶의 우스운 한 장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그럼 우리가 그렇게 하는 동안, 사적으로는 어떤 사이가 되는 거죠?”
“파트너.”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손을 내려다봤다.
잔과 함께한 5년 동안, 나는 그가 원하는 아내가 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한 번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7년 전까지만 해도 나를 거의 알지 못했던 이 남자는 지금 너무나 간단한 것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설 자리.
“그럼 둘만 있을 때는요?”
밴스의 시선이 내 눈을 떠나지 않았다.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가슴이 묘하게 조여 왔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믿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하려면 당신은 나에게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나도 마찬가지고.”
나는 잔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반쪽짜리 대답을 받아들이고,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알아차리면서도 진실이 너무 아파서 다른 의미를 붙이려 했던 시간들.
그 약속은 나를 두렵게 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밴스가 한 말 중 처음으로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제가 거절하면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는 나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고, 나는 내 일을 합니다. 각자 자신의 문제를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면 됩니다.”
“제가 받아들이면요?”
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됐다.
“그럼 더 이상 그들이 한 행동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우리가 결정하는 겁니다.”
나는 차 안에서 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에게는 언제나 조비엔의 몫이 남아 있을 거라고 인정했던 그의 얼굴.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마주해야 할 아파트와, 그 안에 있는 침실.
5년 동안 나 혼자 붙잡고 있었던 삶.
나는 다시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단계가 뭐죠?”
처음으로 밴스의 표정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오늘 밤입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렉싱턴 클럽. 사적인 장소라 사람들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만큼 누가 누구와 함께 왔는지도 눈여겨보겠죠.”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벌써 계획해 둔 거예요?”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계획했습니다.”
그가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입력했다.
“저녁 식사입니다. 부적절한 행동은 없습니다. 설명할 필요가 있는 일도 없고요. 함께 앉아서 업무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이 알아서 생각하게 두는 겁니다.”
“사람들이 물어보면요?”
“진실을 말합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우리는 함께 일하고 있다고.”
그때 그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곧이어 내 휴대폰도 진동했다.
화면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알 수 없는 번호: 렉싱턴 클럽. 오후 8시. 그에 맞게 입으세요. — V
나는 방 건너편의 그를 바라봤다.
“그냥 말씀하셔도 됐잖아요.”
“당신에게 내 번호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의 번호를 저장했다.
잠시 연락처 이름을 어떻게 적을지 고민하다가, 손가락으로 천천히 입력했다.
내 파트너
그리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
갈게요.
밴스가 시계를 확인했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밤에 보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평소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가게에 들렀다. 몇 분 고민하지도 않고 검은색 드레스를 하나 골라 계산한 뒤, 그대로 아파트로 돌아왔다.
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에는 촛불과 두 개의 접시,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가 직접 저녁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마음이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가슴 한구석이 아플 뿐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리사.”
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얘기 좀 하자.”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어.”
그의 표정이 굳었다.
“오늘?”
“응.”
“누구랑?”
나는 가방을 들고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네리사.”
“내 상사랑.”
나는 식탁 옆에 서 있는 그를 남겨둔 채 침실로 들어갔다.
20분 후, 검은 드레스를 입고 다시 나왔다.
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몸을 훑었다. 그리고 혼란스럽던 표정이 서서히 다른 감정으로 변했다.
“그걸 입고 업무상 저녁 식사를 간다고?”
나는 복도 거울을 보며 귀걸이를 확인했다.
“응.”
“밴스 블랙우드랑?”
나는 거울에 비친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설마 그 사람과 잤다고 하려는 건 아니지?”
내 손이 잠시 멈췄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정말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오늘 아침에 그 사람과 호텔에서 나왔잖아. 그런데 오늘 밤에는 저런 옷을 입고 그 사람과 나가겠다고? 내가 뭘 생각해야 하는데?”
나는 다시 거울을 보며 귀걸이를 고쳐 끼웠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네리사, 대답해.”
나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언제부터야?”
나는 마침내 몸을 돌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왜 이러는 건데?”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뭘?”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잖아.”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이 우리 침대에 조비엔을 데려온 순간부터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게 됐어.”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공평하지 않아.”
“공평해?”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5년 동안 당신에게 좋은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어, 잔. 조비엔이 더 돈 많은 남자를 선택해서 당신을 떠났을 때도 난 당신 곁에 있었어. 몇 달 동안 그녀 이야기를 들어줬고, 결국 당신이 나와 결혼했을 때는 당신이 드디어 나를 선택했다고 믿었어.”
그가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가 말을 끊기 전에 계속했다.
“당신 회사가 거의 망할 뻔했을 때 기억해? 당신이 계약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서명해서 일이 터졌을 때, 누가 밤새 당신 곁에 있었어? 누가 고객이 떠나지 않도록 설득했어? 누가 새 후원사를 구하려고 새벽 세 시까지 당신의 제안서를 다시 썼어?”
“네리사……”
“그리고 당신이 그 승진을 받았을 때, 당신의 발표 자료가 왜 완성돼 있었는지 기억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자는 동안 내가 옆에 앉아 있었어. 사흘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잤어. 배가 너무 아파서 똑바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는데, 당신이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끝까지 해줬어.”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지금 와서 내가 충실한지 묻는 거야?”
“난 당신이 충실하지 않다고 말한 적 없어.”
“말할 필요도 없었어.”
나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5년 동안 다른 여자를 마음속에 품고 살면서 나를 사랑하는 척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그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가 잠든 줄 알고 휴대폰으로 조비엔의 사진을 바라보던 밤들.
한참 그녀의 사진을 들여다본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대로 돌아와 나를 안아주던 밤들.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내가 몰랐을 것 같아?”
그가 침을 삼켰다.
“사진도 알고 있었어. 내가 자는 줄 알고 뭘 하고 있었는지도 알았어. 나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얼마나 자주 그녀에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고.”
“네리사, 나는……”
“그래도 남아 있었어.”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내 실수였어.”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네리사.”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네가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
나는 그를 돌아봤다.
“나도 몰라. 5년 만에 처음으로.”
그리고 문밖으로 나왔다.
밤공기는 차가웠다.
길가에는 밴스가 말했던 시간에 맞춰 검은색 차량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올라탄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잔: 네리사, 제발. 우리 이 이야기는 해야 해.
나는 답장하지 않고 메시지만 바라봤다.
곧바로 또 한 번 진동이 울렸다.
내 파트너: 첫 번째 수는 우리 차례입니다. 곧 봐요.
나는 휴대폰을 잠그고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도시의 불빛이 차창 너머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5년 동안 나는 모든 선택의 기준을 잔에게 맞췄다.
그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 우리 결혼을 지킬 방법, 그가 한 번도 사랑을 멈추지 않은 여자에게 다시 끌려가지 않도록 하는 방법.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달랐다.
처음으로 잔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했다.
차가 렉싱턴 클럽 앞에서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나는 어두운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거울 속 여자는 여전히 지쳐 있었다. 여전히 상처받아 있었다.
밴스가 사무실에서 무슨 말을 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집에 앉아 누군가가 내 가치를 결정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여자는 아니었다.
차가 멈췄다.
나는 차에서 내려 드레스를 가볍게 정돈하고 입구를 향해 걸었다.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지든,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내가 버리고 나온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검은색 고급 세단의 창밖으로 도시의 풍경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로널드 싱클레어는 뒷좌석에 앉아 굳게 다문 입술로 앞길을 응시했다. 운전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걸기 전에는 입을 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배웠기 때문이다.로널드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화면을 확인한 그의 눈에 아스테라라는 이름이 들어왔다.“보고해.”수화기 너머에서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가 이사회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밴스 블랙우드가 이사회에 합류했습니다.”로널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어떻게?”“아내의 자금입니다. 천육백오십만 달러요. 호라이즌 글로벌의 지원과 윌리엄 블랙우드의 영향력까지 더해져 연합을 구성할 만큼의 지분을 확보했습니다. 중립적인 이사들이 밴스 쪽으로 돌아섰고, 원로 이사 중 한 명도 마음을 바꿨습니다.”“누구지?”“제러미입니다. 턱이 두툼한 사람 말입니다.”로널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빌어먹을. 자기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또 다른 소식도 있습니다. 그가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임원 급여를 60퍼센트 삭감하고, 본인도 앞으로 6개월 동안 급여를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위 직급 직원들의 충성심을 얻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로널드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들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데는 몇 초면 충분했다.이내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짧고 날카로운, 상대를 비웃는 웃음이었다.“자기 손으로 회사를 산산조각 내겠다는 거군.”로널드가 비웃듯 말했다.“임원들이 반발할 거야. 유능한 인재들은 전부 떠나겠지. 몇 달만 지나면 아스테라는 피를 흘리다 쓰러질 거다.”“계획을 앞당길까요?”로널음은 웃음을 거두었다. 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아니.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 숨어서 지켜봐. 스스로 무덤을 파게 내버려 둬. 회사가 무릎을 꿇는 순간, 우리가 들어가 남은 것들을 전부 가져가면 된다.”“알겠습니다.”전화가 끊겼다.로널드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의 미
“세 번째는 사업의 전략적 전환입니다.”밴스가 말을 이었다.“아스테라의 핵심 사업을 재생에너지와 지속 가능한 인프라, 환경 복원 분야로 전환할 겁니다. 호라이즌의 사명과 방향을 맞추는 거죠. 이건 자선 사업이 아닙니다. 미래를 위한 선택입니다.”또 다른 원로 이사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회사를 망쳐 놓을 작정인가? 이 상황을 이용해 자기 아버지가 일군 유산을 빼앗으려는 거 아닌가!”네리사가 조용히 대꾸했다.“회사는 이미 망가졌습니다. 우리는 그 회사를 살릴 구명보트를 내놓은 거예요. 더 나은 유산을 남길 기회를 주려는 거죠.”싱클레어 가문의 편에 선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제안은 추가 검토를 위해 보류할 것을 제안합니다.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요.”밴스가 그를 돌아보았다.“싱클레어 가문에서 말입니까?”회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5년 전, 밴스가 불륜 스캔들을 폭로한 이후 블랙우드 가문과 싱클레어 가문의 관계가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싱클레어 가문이 귀국했다는 소문도 이미 퍼져 있었다. 한 이사는 로널드 싱클레어가 상류 사회에서 인맥을 복구하고 해링턴 가문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움직이는 모습까지 목격했다.밴스가 직접 그 이름을 꺼내자 회의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당신이 누구의 편에서 일하는지 알고 있습니다.”밴스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그들이 내부 정보를 이용해 이사회를 조종하려 한다는 것도요.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아스테라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완전히 묻어 버리는 거죠.”나머지 여섯 명의 이사가 일제히 싱클레어 측 인물을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사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들 사이에 배신자가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싱클레어 측 이사의 미소가 흔들렸다.“증거도 없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군.”“며칠만 주십시오. 곧 증거를 가져오겠습니다.”회의 진행을 맡은
아스테라 스파이어의 이사회 회의실은 밝았지만 차가웠다. 짙은 원목 패널로 마감된 벽과 길게 뻗은 마호가니 테이블, 등받이가 높은 가죽 의자들이 공간을 압도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지는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가 내려다보였지만, 아침 햇살조차 이곳의 냉랭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밴스가 가장 먼저 회의실에 들어섰다. 네리사는 그의 곁에서 손을 잡은 채 걸었다. 그 뒤로 다니엘이 가죽 서류 가방을 들고 따라왔고, 마지막으로 프리야가 태블릿을 준비한 채 들어섰다.이사들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 일곱 명이었다.그중 세 명은 구시대적인 경영 방식을 고수해 온 원로 이사들이었다. 짙은색 정장에 희끗희끗한 머리, 굳은 표정까지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지난 이틀 동안 주가가 계속 하락했으니 당연했다.한 명은 싱클레어 가문의 편에 선 인물이었다. 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미소를 지닌 그는 일찌감치 도착해 상석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곧 의장석까지 차지할 생각인 듯했다.나머지 세 명은 아직 어느 쪽에도 확실히 서지 않은 중립적인 이사들이었다. 그들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회의실 상석은 비어 있었다.윌리엄 블랙우드는 여전히 병원에 있었다.밴스는 테이블 끝에 멈춰 섰다.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급히 회의를 소집했는데도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밴스 블랙우드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 네리사입니다. 오늘은 아버지를 대신해 제가 회의를 이끌겠습니다.”원로 이사 한 명이 코웃음을 쳤다.“이건 절차상 매우 부적절하군. 자네는 이사회 구성원도 아니지 않은가.”“저는 이제 아스테라의 주요 주주입니다. 의결권이 있는 지분의 약 12퍼센트를 확보했습니다. 아버지가 보유한 13퍼센트까지 고려하면, 제게는 이 자리에서 발언할 충분한 권리가 있습니다.”중립적인 이사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싱클레어 가문의 편에 선 남자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흥미롭
에어리는 고요했다. 창밖으로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희미한 소음만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밴스는 창가에 서서 깜빡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두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어깨는 꼿꼿했지만, 네리사는 그가 턱을 굳게 다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여전히 태블릿을 손에 쥐고 있었다. 싱클레어 저택에서 찍힌 사진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제인. 조비. 쌍둥이.서류에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시선은 자꾸만 같은 사진으로 돌아갔다. 남자아이를 어깨에 태운 채 웃고 있던 제인의 모습. 정원 가장자리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던 조비,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녀의 결혼반지.밴스가 창가에서 돌아섰다. 그는 네리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미간을 좁히는 모습, 태블릿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 그녀는 실제로 무언가를 읽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밴스는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두 사람이 밤늦도록 함께 일하던 시절에도 보았던 얼굴이었다. 세상의 모든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를 때면 네리사는 늘 그렇게 버텼다.전투를 앞두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정작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밴스는 아무 말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네리사는 그가 움직이는 것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밴스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이어 찬장을 열어 초콜릿 한 판을 꺼냈다. 진하고 풍미가 깊은 고급 다크 초콜릿이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 둔 것이었다. 네리사에게 위로가 필요하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섬을 떠나기 전부터 그는 그녀가 돌아올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초콜릿을 잘게 쪼개 냄비에 담고 우유를 부었다. 밴스는 천천히 저었다. 초콜릿이 녹아들면서 따뜻하고 달콤한 코코아 향이 주방에 퍼졌다.그는 머그잔 두 개에 핫초코를 나누어 담았다. 소파로 가져가 네리사 앞 테이블에 하나를 놓은 뒤, 그녀의 옆에 앉았다.그리고 네리사의 손에서 태블릿을 조심스럽게 가져와 옆에 내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싱클레어 가문이 해외에서 돌아왔습니다. 3주 전에 이 저택을 매입했고, 다시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그 말의 무게가 방 안을 짓눌렀다.지난 3년 동안 싱클레어 가문은 자취를 감췄다. 해외에 숨어 상처를 핥으며 재기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돌아왔다. 제인과 함께.더는 모든 것을 잃고 무너진 남자가 아니었다. 이제 제인은 싱클레어 가문의 일원이었다. 새로운 가족과 이름, 그리고 목적까지 얻었다.블랙우드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프리야가 사진들을 살폈다.“이제 아스테라의 사정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설명이 되네요. 제인은 그곳에서 일했잖아요. 회사의 분위기부터 약점, 내부 인물들까지 전부 알고 있을 거예요.”“조비엔은 그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겠죠.”네리사가 조용히 말했다.“그녀는 7년 동안 블랙우드 가문의 며느리였어요. 이사회 구성원과 투자자들, 그리고 집안에 감춰진 비밀까지 알고 있을 거예요.”네리사는 밴스를 올려다보았다.“로널드 싱클레어는 수십 년 동안 윌리엄의 동맹이었어요. 두 사람이 맺은 모든 거래와 약점, 감춰 둔 추문까지 알고 있겠죠. 그들은 단순히 아스테라를 공격하는 게 아니에요. 블랙우드 가문 전체를 노리고 있어요.”네리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밴스는 자신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이번 배신은 돈이나 권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원한이었다.싱클레어 가문은 친자 논란으로 당한 굴욕을 복수하려 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제인을 이용하고 있었다. 한때 네리사의 남편이었던 남자,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았던 남자 말이다.그가 네리사에게서 들었던 모든 비밀과 그녀의 약점이라 여겼던 모든 것이 이제 적의 손에 무기가 되어 있었다.밴스가 그녀의 손을 단단히 감싸 쥐었다.“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로 맞서면 돼. 하지만 혼자 싸우게 두진 않을 거야. 함께할 거니까.”다니엘이 태블릿을 덮었다.“증거가 필요합니다. 싱클
저녁 햇살이 샘의 가족이 사는 집 창문을 비스듬히 통과했다. 샘은 침대 끝에 앉아 앞에 놓인 포장된 선물 세 개를 바라보고 있었다.안나가 그 선물들을 가져다주었다.“밴스가 보낸 거야. 도시로 떠나기 전에 두고 갔대.”안나가 방을 나간 뒤에도 샘은 한동안 선물에 손을 대지 못했다.이제 혼자 남은 그는 첫 번째 상자를 집어 들었다. 정사각형 모양에 묵직했다. 샘은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벗겼다.나무로 만든 고래였다. 손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작품으로, 매끄러운 표면과 우아한 곡선이 돋보였다.샘은 고래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러자 작은 카드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내 딸에게 바다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에게.마야의 아빠가 되어 줘서 고맙습니다.— 밴스샘은 목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그는 고래를 내려놓고 두 번째 선물을 집어 들었다. 길고 가느다란 상자였다. 안에는 티타늄 칼날과 단단한 칼집이 달린 다이빙 나이프가 들어 있었다. 손잡이에는 산호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마지막 상자에는 두툼한 가죽 표지의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파도 무늬가 장식되어 있었다.그곳에도 같은 문구가 적힌 카드가 들어 있었다.세 개의 선물. 똑같은 문구가 담긴 세 장의 카드.밴스는 샘이 그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세 번이나 같은 말을 전했다.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문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괜찮아?”안나가 물었다.샘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응. 괜찮아.”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나무 고래의 꼬리 부분을 천천히 쓸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그래도 했잖아.”안나가 조용히 대답했다.샘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 정말 그랬네.”그는 고래를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자리였다.두 마일 떨어진 도시에서는 고층 건물들의 불빛이 통유리창 너머로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