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블랙우드 저택은 벽난로에 불이 타오르고 있는데도 차가웠다.윌리엄은 책상 뒤에 앉아 두 손가락을 맞댄 채 굳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높은 창문 사이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방 안을 데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눈을 감을 때마다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자신의 가슴을 치고 떨어진 봉투.발밑으로 흩어졌던 돈.그리고 창백하면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던 그녀의 얼굴.그 누구도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등을 돌린 적은 없었다.그 누구도.윌리엄은 노트북을 열었다.은행 계좌에 접속한 뒤,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서 움직였다.그가 봉투에 넣어 건넸던 금액의 세 배.그녀가 자신에게 되돌려준 돈의 세 배를 먼저 송금했다.그리고 원래 금액까지 다시 더했다.한 번.또 한 번.화면에 찍힌 숫자가 상식적인 범위를 벗어날 때까지.그녀가 그 돈을 받고도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윌리엄은 송금 버튼을 눌렀다.거래가 완료되었다.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한 시간 뒤,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인사팀 담당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휘트모어 씨가 오늘 오전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즉시 퇴사로 처리되었습니다.]윌리엄은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그리고 세 번째로 읽었다.짧고 메마른 웃음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결국 그녀도 별다를 것 없군.윌리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기다렸다.늦은 오후.밴스가 저택에 도착했다.공항에서 곧장 온 탓에 정장은 구겨져 있었고, 눈가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출장 자체는 성공적이었다.하지만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내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것은 따로 있었다.그녀였다.대답하지 않은 메시지.받지 않은 전화.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침묵.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밴스는 하녀가 옆으로 비켜서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복도를 걸었다.아버지의 서재는 복도 끝에 있었다.문은 열려 있었다.밴스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바다 건너, 다른 나라.밴스는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우아한 공간이었다.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테이블과 크리스털 잔들. 커다란 창문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그의 맞은편에는 사업 파트너인 애런이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밴스의 휴대폰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화면은 꺼져 있었다.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메시지를 확인했다.없었다.그는 다시 내려놓았다.애런이 고개를 들었다.“아침에 도착한 뒤부터 계속 그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군요.”그가 가볍게 웃었다.“뭔가 기다리는 겁니까?”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아내요?”애런이 웃으며 물었다.“혼자 두고 와서 걱정되는 겁니까? 임신 중이면 아무래도 힘들겠죠.”밴스의 턱이 굳었다.아내.임신.그는 정정하지 않았다.정정할 수 없었다.그 거짓말은 너무 복잡했다.그리고 진실은 말할 수 없었다.밴스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프레젠테이션에 집중합시다.”애런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다시 서류를 들여다봤다.하지만 밴스의 마음은 그곳에 없었다.에어리.네리사는 욕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등은 차가운 타일에 기대어 있었고, 무릎은 가슴까지 끌어당겨져 있었다.임신 테스트기는 세면대 위에 뒤집힌 채 놓여 있었다.아직 결과를 확인하지 않았다.무서웠다.네리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리고 한 번 더.손을 뻗어 테스트기를 집어 드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그녀는 천천히 뒤집었다.두 줄.양성이었다.테스트기가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다.타일 바닥에 부딪히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네리사의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가슴이 크게 들썩였다.아니야.그녀는 두 줄을 바라보았다.선은 사라지지 않았다.변하지도 않았다.말도 안 돼.피임약을 먹었잖아. 매일. 분명 조심했는데.네리사는 급히 상자를 집어 들었다.설명서를 다시 읽었다.글자가 흐릿하게 번졌다.그녀는 상자 안에서 또 다른 테스트기를 꺼냈다.다시 했다.손이 너무 심하게 떨려 테스트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침 햇살이 잿빛으로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네리사가 눈을 떴다.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차가운 침대 시트가 피부에 닿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차갑게 식어 있었다.그녀는 몸을 일으켰다.순간 방이 빙글 돌았다.네리사는 침대 매트리스에 손을 짚고 어지러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쉽게 가시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메스꺼움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힘겹게 침을 삼키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어젯밤에 약을 먹었잖아. 이제 괜찮아져야 해.하지만 괜찮아지지 않았다.네리사는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체온계를 집었다.혀 밑에 넣고 기다렸다.삑.소리가 나자 체온계를 꺼냈다.정상이었다.열은 없었다.그녀는 표시된 숫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체온계를 다시 내려놓았다.그 옆에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화면이 켜져 있었다.알림 하나.밴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어젯밤 늦게 도착한 메시지였다.그녀는 보지 못했다.그때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떨면서 그의 전화를 외면하고 있었으니까.네리사는 메시지를 열었다.“갑자기 해외 출장이 잡혀서 3일 정도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 나 없이 혼자 Horizon 프로젝트를 무리해서 진행하지 마. 그냥 이 며칠 동안은 쉬어. 보고 싶어.”네리사의 시선이 마지막 문장에 멈췄다.보고 싶어.엄지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답장할 수 있었다.몸이 좋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그의 아버지가 찾아왔던 일도 말할 수 있었다.어제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답장하지 않았다.침대 가장자리로 다리를 내렸다.바닥이 차가웠다.그녀가 일어섰다.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급히 침대 옆 탁자를 붙잡았다.네리사는 천천히 욕실로 걸어갔다.샤워를 했다.양치를 했다.그리고 거울 속 여자를 바라보았다.창백한 얼굴.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어제 했던 화장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전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그녀는 다시 화장을
네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끝이 차가웠다. 속이 뒤집혔다.“나는 이 회사를 잿더미 속에서 일으켜 세웠다.”윌리엄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밴스를 완벽한 후계자로 만들었지. 그런데 자네는—”그의 시선이 그녀를 차갑게 훑었다.“내 아들에게 위험 요소일 뿐이야. 스캔들. 방해물. 자네가 가져오는 건 위험뿐이지.”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자네는 내 아들의 인생에 들어온 나쁜 영향이야, 휘트모어 씨.”차가운 목소리가 거실을 가로질렀다.“물러나. 내 아들을 내버려 둬.”그는 몸을 돌렸다.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싫습니다.”네리사의 목소리는 작았다.하지만 윌리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했다.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눈매가 가늘어졌다.“감히.”목소리에는 노골적인 분노가 배어 있었다.“자네가 지금 밴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그의 명예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 회사에는?”그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그 영상이 공개된 뒤 우리 주가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고 있나?”알고 있었다.그 일 때문에 자신이 부서에서 밀려났으니까.“밴스의 위치는 지금 위태롭다.”윌리엄이 말을 이었다.“이사회가 지켜보고 있어. 투자자들도 불안해하고 있지.”그의 시선이 네리사에게 꽂혔다.“그리고 자네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위험 요소야.”네리사는 천천히 턱을 들어 올렸다.“저는 밴스의 위험 요소가 되지 않을 겁니다, 블랙우드 회장님.”목소리는 차분했다.“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될 겁니다.”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그의 파트너로서, 밴스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세울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윌리엄의 웃음이 날카롭게 터졌다.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그래서 이게 자네의 속셈이군.”그는 고개를 저었다.“나는 자네와 이성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네는 영리한 여자니까.”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더 나은 판단을 할 줄 알았지.”그가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이게 마지막
에어리는 고요했다.윌리엄 블랙우드는 두 손을 등 뒤로 깍지 낀 채 거실을 천천히 걸었다. 구두 소리조차 매끄러운 바닥 위에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공간을 둘러보았다.마치 외과의가 상처를 살피듯 차갑고 냉정한 눈이었다.천장까지 이어진 통유리창.비어 있는 벽.창가에 놓인 작은 난초 하나.그는 창가에 멈춰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네리사에게 등을 보인 채였다.네리사는 소파 근처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두 손은 옆구리에 붙어 있었다. 어지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속이 계속 뒤틀렸다. 그녀는 힘겹게 침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했다.“앉으시죠, 블랙우드 회장님.”윌리엄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얼마나 됐지?”네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윌리엄이 몸을 돌렸다.그의 눈빛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밴스와 닮은 눈이었다.하지만 밴스의 눈에 온기가 있었다면, 그의 눈에는 오직 판단만이 담겨 있었다.“얼마나 오래 여기 있었나? 내 아들의 개인 아파트에서.”네리사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몇 달 됐습니다.”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몇 달.”그는 그 말을 되뇌듯 낮게 말했다.“그동안 위험을 생각해 본 적은 없나? 스캔들이 터진 뒤에도? 그 영상이 공개된 뒤에도? 온 세상이 자네와 내 아들이 호텔에서 함께 나오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도?”네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네의 지성이 잠시 제 기능을 잃은 건가, 휘트모어 씨? 아니면 애초에 신경 쓰지 않았던 건가?”윌리엄이 한 걸음 다가왔다.“자네는 내 아들의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살고 있어. 그의 부모조차 존재를 모르는 곳이지.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발을 들인 적 없는 곳이고.”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런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네리사의 목이 바짝 조여 왔다.“밴스가 제가 제 거처를 구할 때까지 잠시 지낼 곳을 마련해 준 것뿐입니다. 영원히 여기서 살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스캔들
밴스는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다.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그럼 여기 있어.”그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뒤통수를 감쌌다.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가슴에 단단히 안았다.네리사는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머리카락 위로 닿는 그의 따뜻한 숨결도 느껴졌다.“지금 이 순간에만 머물자.”밴스가 낮게 속삭였다.목소리에는 감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마.”그가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입술이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네리사는 그의 숨결과 온기, 그리고 손끝에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는 떨림을 느꼈다.“나와 함께 있어.”그가 말했다.“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잠시 침묵했다.“영원일 필요도 없어. 그냥 지금만.”네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품에서 물러나지도 않았다.그녀의 손이 올라갔다.손가락이 그의 등에 닿았다.그리고 그녀가 먼저 그를 끌어안았다.더 가까이.더 단단하게.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강하고.불안정하게 뛰고 있었다.네리사는 눈을 감았다.주말이 끝났다.월요일 아침은 흐리고 차가웠다.이른 아침 햇빛이 방 안을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네리사가 눈을 떴다.익숙한 천장이 보였다.차가운 침대 시트.어젯밤 늦게 현장 방문에서 돌아온 참이었다.밴스는 그녀를 데려다준 뒤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조비와 그의 가족이 무언가를 눈치채지 않도록 또다시 그녀와 밤을 보내지는 않았다.네리사는 몸을 일으켰다.순간 방 안이 빙글 돌았다.그녀는 손바닥을 매트리스에 짚고 어지러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하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속이 울렁거렸다.메스꺼움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힘겹게 침을 삼키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피곤해서 그래.스스로에게 말했다.장거리 운전 때문이고,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