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차 안은 조용했다. 기사는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서하는 창밖을 보다가, 문 쪽 수납칸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을 꽂아 두려던 참이었다. 손끝에 바스락, 종이가 닿았다.접힌 약국 봉투였다. 오래 접혀 있어서 모서리가 하얗게 닳아 있었다. 안은 비어 있었다. 겉면에 초록색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한빛약국]서하의 손이 멈췄다.열다섯 살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아파트 상가 1층 약국에 들렀다. 아빠 약 찾으러 왔어요. 흰 가운을 입은 약사 아저씨가 웃으며 갈색 유리병 하나를 봉투에 넣어 주었다. 이거 꼭 가슴에 넣고 다니시라고 해라. 아빠는 그 봉투를 받을 때마다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초록색 글씨. 한빛약국."기사님."서하는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이거, 정 실장님 거예요?"백미러 속에서 기사의 눈이 봉투로 내려왔다. 예순 가까워 보이는 얼굴이었다."아, 네. 실장님 거예요. 버리신다는 걸 깜빡하셨나 보네요.""정 실장님이 어디 편찮으세요?""아뇨, 정정하세요."기사가 웃었다."그 약국은 약 사러 가시는 데가 아니에요. 한 달에 한 번씩 들르시거든요. 들어가셔서 약사님이랑 한 30분 얘기만 하시고 나오세요. 제가 15년을 모셨는데, 그건 한 7년 됐나."기사가 핸들을 꺾으며 덧붙였다."나오실 때마다 그 봉투를 하나씩 들고 나오세요. 약은 안 들어 있고, 납작하게요. 차에서 안에 든 걸 꺼내 가방에 넣으시고, 빈 봉투는 거기 꽂아 두시면 주말에 제가 버리고요. 이번엔 차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그대로 남았네요."7년.서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무릎 위의 봉투가 갑자기 무거웠다."그 약국, 어디 있어요?""동부이촌동이요. 오래된 아파트 상가 1층."103동 1204호. 서하가 여섯 살 때 불꽃놀이를 보던 집이 있던 동네였다."……그렇구나."서하는 봉투를 원래대로 접어 수납칸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기사가 보지 못하게 주먹을 쥐었다.
화요일 아침 7시 반. 본채 식당.서하는 도현보다 10분 먼저 별채를 나섰다. 결혼하고 처음이었다.식탁에는 이미 강 회장과 재현, 유라가 앉아 있었다. 서하가 자리에 앉고 한참 뒤에야 도현이 들어왔다. 머리가 덜 말라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다.도현은 서하 옆자리에 앉았다. 서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국이 나왔다. 수저 소리만 이어졌다.아침마다 식탁 밑으로 먼저 발을 툭 차는 건 서하 쪽이었다. 도현이 한마디라도 얄밉게 굴면 어김없이 구두 끝이 날아왔고, 째려보는 눈이 따라왔다.오늘은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국그릇이 반쯤 비었을 때, 도현이 먼저 구두 끝을 서하의 발목 쪽으로 내밀었다. 차 주면 좋겠다는 듯이, 아주 조심스럽게.구두 끝이 닿기 전에, 서하가 발을 의자 밑으로 거두었다.도현의 구두 끝이 허공에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맞은편에서 유라가 찻잔을 들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동서, 얼굴이 안 좋네. 어젯밤에 못 잤어?""일이 좀 많아서요.""그래? 도련님도 못 잔 얼굴인데."유라가 웃었다. 다정하고 조용한 웃음이었다. 서하가 열여덟 살 때부터 알던 웃음이었다."두 사람, 싸웠구나."수저 소리가 멈췄다. 재현이 유라를 흘끗 보았다. 그리고 도현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부가 싸울 수도 있지."강 회장이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온화한 목소리였다."새아기.""네, 아버님.""요즘 도현이 차로 출퇴근한다지.""……네.""재무 총괄이 남편 차를 얻어 타고 다니는 것도 모양이 안 좋다. 오늘부터는 회사 차를 쓰거라."강 회장이 찻잔을 들었다."정 실장 차를 내주마. 기사가 운전을 잘한다. 정 실장은 당분간 내 차를 같이 타면 되고."서하의 손이 수저 위에서 멈췄다.12가 7841. 그날 밤 0시 40분, 기사 없이 B게이트로 들어온 차.도현이 입을 열었다."아버지, 서하 씨는 제가…….""네가 뭘."강 회장이 도현을 보았다. 웃고 있었다."아내 출근시키는 게 무슨 대단한 일
서하는 뒷좌석 문을 열고 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백미러 속에서 세 사람의 눈이 엇갈렸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출발 안 해요?"서하가 말했다. 도현이 시동을 걸었다. 차가 천천히 강진 본사 앞을 빠져나갔다."선배.""응.""선배가 이 사람 차에 왜 있는지는 안 물을게. 대신 하나만 물을게."서하가 조수석 등받이를 보았다."쌈지공원에서 그랬잖아. 확실해지면 말해 준다고. 확실해진 거야?"민재는 앞만 보았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차가 멈췄다."……아직."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민재의 뒤통수를 보다가, 작게 말했다."선배, 거짓말할 때 왼쪽 귀 만지는 거 알아?"민재의 손이 귓가에서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 있던 손이었다."7년이야. 모를 리가 없잖아."신호가 바뀌었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민재는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그리고 다음 신호에서 차 문을 열었다."여기서 내릴게요."민재가 내리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서하야. 미안. 근데 이번 건, 네가 다치는 게 싫어서야."문이 닫혔다. 민재는 인도로 올라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차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당신도요?"서하가 물었다. 목소리는 조용했다."선배가 당신한테 뭘 보여 줬어요. 선배 얼굴이 하얬어요. 당신도 하얬고."도현은 운전대를 쥔 채 앞만 보았다. 계약서 4조. 갑도 을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대답하지 않을게요."서하가 웃었다. 웃음이 아니었다."이번만이라고 했잖아요.""…….""그날 성수동에서. 당신이 무릎 꿇고 부탁했을 때. 내가 그랬잖아요. 이번만이에요. 대신 확실해지면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하기로."서하가 창밖을 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차창 위로 길게 미끄러졌다."근데 오늘 보니까, 제일 먼저 아는 사람이 내가 아니네요."도현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다."서하 씨. 이건…….""알아요. 나 지키려
월요일 저녁 6시 40분. 강진건설 본사 앞.도현은 건물 맞은편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있었다. 일주일째였다. 퇴근 시간이면 여기서 서하를 기다렸다. 남편이 아내를 데리러 오는 것, 그게 경호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조수석 창문을 누군가 두드렸다.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차민재였다. 코트 깃을 세운 채, 주위를 한 번 살피고 있었다.도현이 잠금을 풀자 민재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문이 닫혔다."서하는 7시에 내려와요. 20분 있어요."민재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냈다. 손이 떨리지 않게 애쓰는 게 보였다."이거 보세요. 서하한테 보여 주기 전에."화면에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누렇게 바랜 라벨. 손바닥만 한 갈색 유리병.[한빛약국 /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 0.6mg / 조제일: 7년 전 3월 / 환자명: 윤정호]도현의 숨이 멈췄다."우리 아버지 서재에 있었어요. 맨 아래 서랍에. 손수건에 싸여서."민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비어 있었어요. 아버지가 밤마다 그걸 꺼내서 들여다봐요. 기도하는 사람처럼."도현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약통 1개. 빈 통. 동행인에게 인계. — 인계자 서명 첫 글자, '차'.7년 동안 찾던 조각이었다. 이름 없는 서명 하나와, 이름이 적힌 병 하나. 그게 지금 한 화면 위에서 맞물리고 있었다."……왜 저한테 가져왔어요.""서하한테 보여 주면, 그 자리에서 우리 집으로 달려갈 거니까요. 아버지 서재 문을 열고, 아버지 앞에서 이걸 내밀 거예요."민재가 창밖을 보았다."그럼 아버지는 그날 밤 회장님한테 전화하겠죠. 서하가 저한테 그랬어요. 쌈지공원에서.""그래도 저는 아니잖아요. 차 변호사님 아드님이 제일 싫어할 사람이 저일 텐데.""맞아요. 싫어요."민재가 도현을 돌아보았다."근데 서하가 그랬거든요. 자기보다 더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믿기로 했다고. 그게 당신이죠?"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니까 저도 한 번만 믿어 볼게요. 서하가 믿는 사람이니까."긴 침묵이 흘
금요일 새벽 5시. 서초동, 차성훈의 집.차성훈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서재 의자에 앉은 채로 창밖이 밝아 오는 걸 보았다.가사도우미는 목요일마다 쉬었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셋뿐이었다. 자신, 가사도우미, 그리고 아들.그는 현관으로 내려가 도어락 덮개를 열었다. 출입 기록 버튼을 눌렀다. 작은 화면에 숫자가 하나씩 떠올랐다.[목 14:07 — 지문 2번]지문 2번. 3년 전, 민재가 사무소를 차려 나가던 날 아들이 직접 등록한 지문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지워 두지 말라고, 그때 웃으며 말했다.차성훈은 도어락 덮개를 닫았다. 손끝이 차가웠다.오전 8시. 차성훈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아버지."어제 오후에 뭐 했니."— ……사무소에 있었어요. 의뢰인 미팅 두 건."집에는 안 들렀고?"수화기 너머가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 안 들렀어요. 왜요?"아니다."차성훈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아들이 거짓말을 했다.법정에서 표정을 들키지 않는 법. 질문을 받으면 반 박자 쉬고 대답하는 법. 전부 자기가 가르친 것이었다. 그 반 박자를, 방금 아들이 썼다.— 차 변호사 아들이 제 아비한테 거짓말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알아봐라.정명수가 전해 준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웃어넘겼다.오전 11시. 휴대폰이 울렸다. 정명수였다.— 회장님께서 아드님 동선을 물으십니다."……무슨 동선 말입니까."— 사무소 앞에 붙여 둔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 오후, 아드님이 뒷문으로 나가 택시를 두 번 갈아탔다고 합니다. 놓쳤답니다.정명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낮이가 없었다.— 어디로 가셨는지 혹시 아십니까.차성훈은 창밖을 보았다. 서초동 법원 청사가 보였다. 30년 동안 그 건물을 드나들며, 그는 늘 이기는 쪽에 섰다. 7년 전에도 그랬다.— 변호사님?"집에 왔었습니다."차성훈이 말했다."제가 불렀어요. 겨울 양복 몇 벌 가져가라고. 그 애가 요즘 감시가 붙은 걸 알아서, 괜히
목요일 아침 8시. 강진건설 28층.오 상무는 직무 정지 전과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 재무본부장실에 들어가기 전, 그는 복도 끝 재무총괄실 문을 먼저 두드렸다."경고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오 상무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출입증 관리 소홀. 20년 동안 받은 첫 경고네요.""축하드려요, 상무님.""축하받을 일은 아니죠."오 상무는 앉지 않았다. 서하의 책상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서하를 내려다보았다."어떻게 하신 겁니까. 정 실장이 그렇게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닌데.""대답하지 않을게요."오 상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가죽 표지가 해져 있었다."제 업무 수첩입니다. 7년 전 거."서하의 손이 멈췄다."20년 동안 저는 한 번도 편을 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았죠. 윗사람이 시키는 건 하고, 대신 전부 적어 뒀어요. 언젠가 제가 버려질 날을 대비해서."그가 수첩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연필 글씨였다.[서하건설 기성금 38억 — 지급 보류. 정 실장 구두 지시. "회장님 재가 사항." 사유 기재하지 말 것.]날짜는 서하건설이 부도나기 열하루 전이었다."그때 저는 차장이었습니다. 결재 버튼을 누른 게 저예요."오 상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지난주에 버려지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 수첩을 누구한테 줘야 하는지."서하는 수첩을 두 손으로 들었다. 연필 자국이 번져 있었다. 누군가 여러 번 들여다본 페이지였다."……상무님.""이제 저도 편을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오 상무가 넥타이를 바로잡았다."늦었지만요."같은 날 오후 2시. 서초동, 차성훈의 집.민재는 사무소 앞에 세워진 흰색 승용차를 보았다. 사흘째였다. 그래서 오늘은 뒷문으로 나와 택시를 두 번 갈아탔다.아버지는 오후 내내 강진 법무팀 회의였다. 가사도우미는 목요일마다 쉬었다.2층 복도 끝. 서재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이 집에서 아버지 서재를 여는 사람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