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둠에서 목소리가 내려오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디 갔다 왔어.” 벽에 등을 기댄 그림자가 천천히 윤곽을 드러냈다. 민준이었다. 막 샤워한 모양이었다. 젖은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쇄골로 흘렀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젖은 비누 냄새와 그의 향이 났다. 빛을 등져 표정은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피부를 찌르는 듯한 기운이 짜증을 말해 주었다.“……민준 씨.”“방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더라. ……이 시간까지 어디 돌아다닌 거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또 멋대로 행동한 게 아닌지. 아니면 저택의 누군가, 이를테면 지훈과 몰래 만난 게 아닌지. 예전이라면 일방적인 속박에 물어뜯듯 맞섰을 것이다.어둠에서 목소리가 내려오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어디 갔다 왔어.” 벽에 등을 기댄 그림자가 천천히 윤곽을 드러냈다. 민준이었다. 막 샤워한 모양이었다. 젖은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쇄골로 흘렀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젖은 비누 냄새와 그의 향이 났다. 빛을 등져 표정은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피부를 찌르는 듯한 기운이 짜증을 말해 주었다.“……민준 씨.”“방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더라. ……이 시간까지 어디 돌아다닌 거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또 멋대로 행동한 게 아닌지. 아니면 저택의 누군가, 이를테면 지훈과 몰래 만난 게 아닌지. 예전이라면 일방적인 속박에 물어뜯듯 맞섰을 것이다.‘나 못 믿어?’ 하며 마주 노려봤겠지. 그런데 지금은 내게 향한 질투의 가시마저 몹시 애틋했다. 나를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서투른 증거였으니까. 차가운 복도 바닥을 딛고 젖은 머리를 바라봤다. 돌아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며 물방울은 얼마나 식었을까. 방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짧은 공백조차 지금은 견디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혜진 어머님 방에서 들은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 이름을 꺼내면 그는 내 마음을 듣기도 전에 경계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기에 더더욱 눈앞의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미안. 좀처럼 잠이 안 와서.” 숨을 내쉬듯 거짓말했다. 하지만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다정한 거짓말이었다.“목말라서 물 마시러 갔어. ……그리고 생각도 좀 하고.&
“그때 깨달았어요. ……이 집안에서 어설픈 다정함은 독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독……”“내가 감싸면 더 엄하게 벌했어요. 다정하게 할수록 민준이는 ‘약함’을 보였고, 그게 약점이 되어 적이 파고들었어요.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으며 ‘힘’만 추구하는 악귀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혜진이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그래서…… 마음을 정했어요.” 그녀의 결단. 너무도 비장한 각오였다.“민준이 앞에서 다정한 새어머니이기를 그만뒀어요. ……선대의 뜻을 따르는 척하며 언니의 흔적을 냉정하게 치우는 ‘악역’이 되었죠.”‘엄마 일은 잊어.’‘언제까지 징징거릴 거야.’‘약한 사람은 이 집에 필요 없어.’“내가 밀어내고 차갑게 대할 때마다…… 눈에 색이 돌아왔어요. ……‘증오’라는 아주 강한 색이.” 혜진이 우는 듯 웃었다.“아이는 나를 미워하면서 살 힘을 얻었어요. ‘언젠가 이 여자를 쫓아낼 거야’, ‘엄마를 괴롭힌 집안을 내가 차지할 거야’…… 그 복수심만이 아이를 받치는 기둥이 되었지요.”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민준의 집념. 적을 가차 없이 짓밟는 냉철함. 전부 새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어머니의 존엄을 되찾으려는 싸움에
“민준이 친어머니, 서영 언니는…… 아주 다정하고도 연약한 사람이었어요.” 빗방울이 떨어지듯 혜진이 한마디씩 이야기를 시작했다.“집안끼리 정한 혼사로 들어왔지만, 선대 수장인 시아버지, 민준이 할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마음고생이 끊이지 않았지요. 며느리로서 ‘완벽’하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받다가 버티지 못한 거예요.” 강씨 집안의 중압감. 며칠밖에 머물지 않은 나도 위가 쥐어짜듯 아플 만큼 폐쇄적이고 위압적인 곳이다. 몇 년 동안 피할 곳 없이 그 공기를 견디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그래도 언니는 민준이만을 위해 살았어요. 온실만이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곳이었죠. ……어린 민준이 손을 잡고 장미를 돌보는 시간만은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어요.” 머릿속에 낡은 일기의 문장이 떠올랐다.‘아이의 숨을 곳이 되면 좋겠다.’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한 작은 정원.“그런데…… 언니가 병으로 쓰러졌어요.” 혜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몸만의 병이 아니었어요. ……마음이 망가진 거예요. 음식도 넘기지 못하고 날마다 야위어 갔죠. ……그러다 겨울 아침, 시들어 떨어지는 꽃처럼 조용히 숨을 거뒀어요.” 여덟 살의 민준. 어머니의 온기가 무엇보다 필요할 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빼앗겼다.“진짜 지옥은 그다음이었어요.” 혜진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깃들었다.“선대께서는 슬퍼하기는커녕 ‘약한 며느리였다’며 잘라 말했어요. 그리고 어린 민준에게 나쁜 영향을 줄
“지금 본 건 전부 잊어요. ……아무에게도, 특히 민준에게는 절대 말하면 안 돼요.”“……왜요?” 나는 한 발 다가갔다.“왜 숨기세요. ……사실은 줄곧 민준 씨를 생각하셨다는 것. 어머님과의 약속을 계속 지키셨다는 것. ……말씀하시면 민준 씨도……”“말해서 뭐가 달라지죠.” 혜진이 목소리를 높였다.“‘사실은 좋은 새어머니였다’? ……그런 값싼 눈물 이야기로 이십 년의 증오가 사라질 것 같아요? 그 아이를 만든 핵심은 나를 향한 반발심이에요. ……이제 와 그걸 빼앗아 무기력하게 만들 셈인가요?”“무기력해지지 않아요! 민준 씨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나도 외치고 있었다.“상처받았어요. 줄곧 외로웠고요. ……하지만 진짜 사랑을 알면 더 강해질 수 있어요. 어머님 사랑은…… 그에게 저주가 아니라 힘이 될 거예요!”“……아무것도 모르면서.” 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표정이 금방 울 듯 일그러졌다.“……지키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 집에서 제정신을 지키려면……!” 비통한 외침이 유리 돔에 울렸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진흙투성이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어머님.&rdq
녹슨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 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훅 끼치는 짙은 습기와 숨 막힐 만큼 강한 장미 향. 그 안쪽에 사람 그림자가 있었다. 작업복을 입은 게 아니었다. 낮과 같은 소박하지만 고급스러운 실내복을 입고 어깨에 숄을 걸친 여자. 한 손에는 손전등을, 다른 손에는…… 오래되어 녹슨 물뿌리개를 들고 있었다.“……어머님?”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불렀다. 틀림없었다. 민준의 새어머니 오혜진이었다. 왜 여기 있지? 혜진은 내가 며칠 전 손질한 올드 로즈 앞에 진흙도 개의치 않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등은 평소의 꼿꼿하고 위엄 있는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작고 떨리는 것 같았다.“……아, 다행이야.” 정적 속에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혼잣말이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어제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봉오리는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녀는 가시투성이 가지를 맨손으로 사랑스럽게 쓸었다. 손끝에 흙이 묻거나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도 괜찮다는 듯.“누군가…… 손질해 줬구나. ……마른 가지가 없어져서 숨 쉬기 편해 보이네.” 알아챘다. 내가 한 일을. 화난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 깊이 안도하는 것 같았다.“미안해. ……내가 더 일찍, 드러내 놓고 돌봐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혜진은 장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니, 장미를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했
현관에서는 늘 보던 가사 관리인이 맞았다. 그리고 그 뒤에서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나타난 사람. 새어머니 오혜진이었다.“……왔구나, 민준아. 아린 씨도 어서 와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가면 같은 표정. 하지만 시선이 나에게 향했을 때 잠깐 눈썹이 움직인 것 같았다. 전처럼 깔보는 차가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환영하는 것도 아닌, 무언가를 살피는 깊은 눈이었다.“할머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서재로 가렴.”“네.” 민준은 혜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내뱉듯 대답한 뒤 나를 데리고 안으로 가려 했다. 그때였다.“……민준아.” 혜진이 뒤에서 불렀다.“어젯밤 파티 말이에요……. 그 기지는 훌륭했어요.” 뜻밖의 말에 민준도 나도 멈췄다. 돌아보니 혜진이 똑바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를 보고 있었다.“음식을 내놓지 못하는 실수를 그런 연출로 뒤집다니. ……우리 집안 며느리로서 부끄럽지 않은 처신이었어요.” 그녀 나름의 최대 찬사였을까. 그 자존심 높은 사람이 내 행동을 인정했다.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민준의 반응은 냉담했다.“……아린이 실력입니다. 어머님 평가를 받을 필요도 없어요.”“……그러니.” 혜진은 문득 시선을 피하고 다시 가면 같은 얼굴로 돌아갔다. 옆얼굴에 그림자가 스친 듯한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어딘가 몹시 지친 기색이 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