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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hor: 유젠
“바람을 피웠다고?”

온서연은 유산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안 그러면 문나영의 성격에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쫓아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람을 피웠다는 말만으로도 문나영은 이미 휴대폰을 꺼내 들어 육경찬을 손봐줄 사람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짐승만도 못한 자식! 하도 너한테 잘하길래 마음에 들어 했더니 감히 바람을 피워?”

“이제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식 때 내 앞에서 가슴을 팍팍 치면서 네가 눈물 흘리는 일 절대 없게 하겠다고 맹세했었는데 그게 다 개소리였어?”

“나 문나영이 만만해 보여? 감히 내 절친을 건드려? 아주 황천길도 줄 못 서게 만들어버릴 거야!”

“나영아, 나영아! 제발 진정해.”

온서연이 다급하게 문나영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사람을 시켜서 패준다고 해도 소용없어. 오히려 경계심만 키워줄 뿐이야. 만약 그 틈을 타서 재산을 빼돌리고 증거라도 없애버리면 그땐 정말 나만 억울하게 당하는 거라고.”

문나영이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다가 한참 만에야 겨우 진정했다.

“넌 어릴 때부터 주관이 뚜렷했으니까 네 말 들을게. 이 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잖아.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그 여자가 누군지 반드시 알아야겠어.”

“알았어. 나한테 맡겨.”

문나영은 병실을 나설 때까지도 육경찬을 저주하면서 거친 욕을 퍼부었다.

...

깊은 밤.

온서연이 비몽사몽 잠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쳤다.

악몽에서 화들짝 깨어난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보... 여보...”

육경찬이 그녀를 부르며 목덜미에 마구잡이로 입술을 들이밀었다. 지독한 술 냄새가 두 사람을 덮쳤다.

온서연은 단숨에 육경찬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채 앉기도 전에 다시 육경찬의 품으로 끌려 들어갔다.

“온서연, 내가 해냈어. 너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난 뭐든 다 할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너만 있으면 돼... 서연아, 온서연...”

육경찬이 혀 꼬인 소리로 온서연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상태였지만 본능적인 힘을 쓰며 그녀를 억지로 짓눌렀다.

온서연은 두 갈래의 힘에 영혼이 찢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 육경찬과 ‘예린’이라는 여자가 나누던 대화들, 죽어버린 아이, 그리고 남편과 다른 여자가 뒤엉켰을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뒤섞여 구역질이 밀려왔다.

귓가로 파고드는 육경찬의 다정하고도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둔 애착을 기어코 자극하고 말았다.

온서연은 18살 때 도보로 무인 지대를 횡단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귓가에 들려왔던 부름도 바로 이 목소리였다.

“온서연, 온서연. 네 이름 기억했어. 조금만 더 버텨.”

“온서연, 입 벌려봐. 물 한 모금만 더 마시고 살아남아.”

육경찬이 손으로 그녀의 잠옷을 들추는 게 느껴졌다. 그 끔찍한 감각에 그녀는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온서연이 미친 듯이 육경찬의 몸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이거 놔! 육경찬 이 빌어먹을 자식아, 당장 놓으라고!”

육경찬의 커다란 손이 제멋대로 온서연의 몸을 더듬었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온서연, 넌 내 거야. 신혼... 신혼 첫날밤도 당연히 내 거여야 해...”

그 순간 온서연의 몸을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육경찬이 누군가에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당황한 온서연이 고개를 들자마자 살기가 뚝뚝 묻어나는 배도현의 서늘한 눈빛과 마주쳤다.

“배도현 씨가 어떻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도현이 그녀를 안아 들고 병실을 나갔다.

...

초봄의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복도의 찬 바람을 맞은 온서연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배도현이 팔에 살짝 힘을 주어 그녀를 더 꽉 안은 채 말 한마디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기태윤이 뒷좌석 차 문을 열고 배도현이 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검은색 마이바흐가 병원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온서연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배도현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 안의 공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마침내 차가 멈춰 선 곳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단독 저택 앞이었다.

문에 적힌 로즈 하우스라는 글자가 온서연의 눈에 들어왔다.

배도현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기태윤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온서연 씨, 전 여기까지만 모시도록 할게요.”

온서연이 추위에 살짝 붉어진 자신의 발가락을 내려다보며 2초 정도 망설이다가 맨발로 돌이 깔린 길을 밟으며 별장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외관과 달리 별장 내부는 럭셔리하고 웅장한 현대식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아이보리색을 메인 색으로 옅은 금빛이 어우러졌고 꼭대기 층에서부터 굽이쳐 내려오는 감각적인 샹들리에와 나선형 계단은 동화 속 성의 미로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보폭이 작아 걸음이 느렸던 온서연은 배도현을 놓친 바람에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꼬박 2분이 지나고 나서야 뒤에서 배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서러 왔어?”

온서연이 뒤돌아보니 배도현이 방문을 닫고 와인을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조명 아래서 유난히 하얗게 질린 온서연의 맨발을 본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파에 앉아.”

온서연이 소파에 앉아 와인을 따르는 그를 보며 물었다.

“왜 화가 난 거예요?”

배도현이 차갑게 웃었다.

“똑똑한 여자 아니었나? 왜 화가 났는지 몰라?”

그녀가 해명했다.

“잠들어 있어서 그 사람이 들어온 줄 몰랐어요. 밀어내려고 했는데 술에 취한 사람을 밀어내기 힘들더라고요...”

온서연이 말하는 사이 배도현이 그녀의 맞은편 티테이블 위에 앉았다.

그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검은 눈동자 속의 음침함이 조금도 가시지 않았고 사냥감을 노리듯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변명을 더 늘어놓을지 들어보겠다는 듯이 말이다.

온서연은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목에 입술이 닿은 게 다예요. 다른 일은 없었어요. 일부러 계약을 어긴 게 아니라고요.”

배도현이 몸을 살짝 기울이며 다가오자 물러설 곳이 없었던 온서연은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위험한 빛이 어렸다.

“온서연, 어떤 스킨십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어? 목에 입술만 닿았을 뿐이라고?”

“어젯밤 이후로 합의가 끝난 줄 알았는데. 육경찬은 널 건드려선 안 돼. 손가락 하나도 안 된다고. 알겠어?”

배도현의 칼날 같은 시선이 온서연의 목덜미에 꽂히자 온서연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당장이라도 목이 날아갈 것 같은 서늘함이 밀려왔다.

생전 처음으로 이런 두려움을 느꼈다.

배도현을 건드리고서야 이 남자의 소유욕이 얼마나 이상할 정도로 강한지를 깨달았다.

“씻고 올게요.”

온서연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욕실은 어디죠?”

“3층.”

온서연이 3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은 딱 봐도 주인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거실 외에 널찍한 침실이 드레스룸과 이어져 있었고 욕조가 딸린 욕실도 있었다.

그녀가 욕실 문을 밀고 들어간 그때 문 정면의 선반에 걸린 연분홍색 여성용 샤워 가운이 한눈에 들어왔다.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게 꼭 배도현이라는 남자와 같았다.

온서연이 옷자락을 꽉 쥐었다가 이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을 감은 온서연의 귓가에 물소리만 맴돌았고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머릿속에 가득했던 애정행각의 기억들을 덮어 점차 지워버렸다.

과거는 이미 너덜너덜하게 망가졌는데 굳이 조신하고 도덕적인 아내라는 허울 좋은 이름만 붙들고 버틸 필요가 있을까?

그때 등 뒤로 더운 기운이 훅 끼치더니 허리에 남자의 손이 얹혔다. 온서연의 허리둘레를 재기라도 하듯 느릿하게 감싸 안았다.

“온서연.”

배도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짙게 깔린 끈적하고 묘한 분위기 속에서 유난히 익숙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네?”

“아까 했던 말은 네게 아직 후회할 기회가 남아있다는 뜻이야. 내 여자가 되고 나면 다신 되돌아갈 수 없어. 넌 온전히 내 것이어야만 하니까.”

온서연이 몸을 돌려 피어오르는 수증기 너머로 배도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남자의 길고 차가운 눈매에 짙은 감정이 서려 있었고 억눌린 뜨거운 열기와 소유욕이 금방이라도 그녀를 불태워버릴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온서연의 마음속에 순간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누구를 끌어당겨 함께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배도현이 그녀를 차가운 유리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없던 일로 하든지, 아니면 내 이름을 부르든지. 다시 한번 선택할 기회를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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