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지금껏 태자 책봉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그 이유는 첫째로 황제가 아직 젊기에 이렇게 이른 시기에 태자를 책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둘째는 본 조정에는 적장자가 있었는데 이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반 관료 가문에서도 서장자가 있는 경우가 흔한데, 하물며 황제의 삼궁육원에서는 후궁이 황후보다 먼저 임신하면 장자를 낳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훈작세가의 관례로서는 정실 부인이 들어오기 전에 통방이 아이를 낳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 통방이 잠자리를 가진 뒤에는 피임약을 먹어야 했고, 실수로 임신했다 하더라도 낙태약으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그러나 황실은 달랐다. 후궁이 임신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황실의 혈통으로 인정되었다.공비가 황후보다 먼저 임신했을 때, 당시 황후는 공비가 황실의 장자를 낳을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다행히 공비가 낳은 아이는 공주였고 황후는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이 모든 것은 송석석이 당시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송석석은 그 이후로 이런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황제가 적장자를 두고 있는 만큼 반드시 훌륭히 키울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지금과 같은 성격으로 자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또한 송석석은 황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온 진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규수로, 문무를 겸비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황후는 성인과 현인의 가르침을 읽은 사람이었으니 아이를 지나치게 방임하면 결국 해롭게 된다는 도리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게다가 그 아이는 장차 황태자가 될 존재인데 말이다."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오. 생각하면 마음만 복잡해지오. 황태자 문제는 황제께서 매우 신중하게 결정하실 거요." 사여묵이 손을 들어 그녀의 미간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말했다. 그의 수려한 얼굴은 은은한 등불 아래서 더욱 부드럽게 빛났다."황태자 문제는 우리 북명황실이 감히 관여할 수 없는 일이니 그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소. 어머니께서도
안운여는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조용히 물었다."이제 소대장군도 군대를 철수하기로 약속했는데 향병은 어떻게 처분하실 생각이십니까?""그녀를 위해 변호하려는 것인가?"안운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그녀가 공주님을 해치려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하지만 본래 여관의 수는 적지 않습니까. 상병은 승진 가능성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아마 더 이상 위로 올라갈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공주님께서 그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실 수 없으십니까?"냉옥 장공주는 눈빛을 차갑게 가늘게 뜨며 단호히 말했다."아니, 그녀에겐 기회가 없어.""그녀도 태자를 위해 복수하려던 것이지 않습니까……""안운여!"장공주는 그녀의 손을 치우며 냉랭하게 경고했다."정말 그녀의 자리가 여성이 올라가기 어려운 자리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녀를 위해 변호지 말아야지. 너희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지 않느냐? 조금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면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비난할 것이다. 특히 그녀는 누구보다도 신중했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신중히 세 번은 생각했어야 했다. 여관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알면서도 잘못된 길을 걸어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꾸로 행동하며 복수만을 위해 서경을 위험에 빠뜨렸고, 백성들의 생사와 수십만 장병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역이 이를 알게 된다면 얼마나 실망하겠느냐?""조금의 계획도 없이 오직 복수를 모든 것보다 중요시 여기며, 나를 해치려 한 것도 모자라 두 나라의 전쟁을 부추겼다. 전쟁을 일으킨다고 원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으냐? 서경이 전쟁을 치른다면 군량미는 어디서 나오겠느냐? 황제가 화풀이하듯 말했던 것처럼 정말 민간에서 장정을 징집해야겠느냐?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면 큰일을 이룰 수 없는 법이다."안운여는 지금의 서경이 국력을 다해 싸울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장
그러자 이방은 온몸이 떨렸다. 그녀는 그 두 마을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이방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양팔로 땅을 짚고 앞으로 기어가며 말했다."아니, 안 돼! 나는 절대로 가지 않을거야! 너희들이 나를 서경으로 데려간다면서!""물론 데려가긴 하지." 안운여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의 머리만. 그 편이 훨씬 간단하니 말이야."이방의 눈동자가 공포로 흔들렸다. 그녀는 간신히 두 손으로 철창을 붙잡으며 말했다."안 돼, 제발…… 나를 청주촌으로 보내지 말아줘. 서경으로 데려가서 태자릉 앞에서 나를 죽여줘."안운여는 증오에 찬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무슨 자격으로 살아서 태자릉 앞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지? 이방, 네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비겁한 남편이 와서 널 구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런 헛된 희망은 품지 마라. 그는 절대로 오지 않아.""아니, 아니야, 오해다!" 이방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어.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녹분성 백성들을 해쳐서는 안 됐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희들에게 빌게. 용서를 바라진 않아. 다만 나를 서경 태자릉 앞으로 데려가줘. 내가 직접 죄를 고백하고 싶어.""정말 우스운 소리군." 안운여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냉정하게 그녀의 기만을 조롱했다."우리는 계속 보고를 받았고 전북망은 단 한 번도 진성을 떠난 적 없어. 그러니 네가 청주촌으로 가든, 서경으로 가든 널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리야."안운여는 몸을 살짝 숙여 충격에 가득 찬 이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넌 죽을 거야. 아주 비참하게 말이지."이방은 땅에 엎드린 채 철창을 잡을 힘도 없어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몸은 움츠러들며 떨고 있었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온몸을 떨게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전북망은 그렇게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비겁하고 무능할지 몰라도 자신에게 했던 약속은 대부분 지켰었다."겁나지? 겁나는 게 정상이야." 안운여는
안운여는 등불을 들고 밖에서 기다리던 곽아정과 향병 앞으로 다가갔다.향병은 구속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이방이 능지처참 당하여 처참히 죽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었다."이미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몹시 겁에 질려 있더군요." 안운여가 곽아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옆에 있는 향병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곽아정이 대답했다."죽음을 앞둔 공포를 체험하게 하는 것도 괜찮지." 향병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그녀가 죽으면 나도 눈을 감을 수 있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둑이 터진 강물처럼 얼굴을 따라 쏟아졌다.곽아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넌 본래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야. 이방은 우리에게 반드시 잡혀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지."향병은 눈물을 닦으며 단호히 말했다."후회하지 않아.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거야."안운여의 눈빛에 짜증이 번졌다."아직도 그렇게 말하시는군요? 잘못을 모른다면 왜 공주님 앞에서는 후회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까?"밤바람이 향병의 옷자락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녀의 눈과 코는 붉게 물들었지만 눈빛에는 깊은 원망과 억울함이 가득했다."공주님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공주님을 항상 존경해왔으니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 태자는 공주님의 친동생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건지…… 태자가 공주님에게 정말 그렇게도 중요하지 않은 존재인 거야? 태자를 위해서라면 나라 전체가 상국을 공격한다 한들 어떻단 말이야? 나는 공주님이 팔을 들어 호소하기만 하면 장정을 징집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기꺼이 응답할 것이고, 심지어 자신들의 식량을 가지고서라도 나설 것이라고 믿어."곽아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반문했다."백성들이 정말 그렇게 하길 원한다고 치자. 그러면 너는 태자가 치욕을 당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모든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시선들이 불길로 변해 하나로 모였다. 그 불길은 마치 그녀를 태워버릴 듯 강렬하게 타올랐고, 그녀는 마치 불 위에 올려진 듯한 고통을 느꼈다.공포가 그녀의 온 몸을 가득 채워 심장을 으스러뜨릴 것 같았고, 순식간에 간담이 서늘해졌다.사방에서 외침이 울려 퍼졌다."죽여라! 저 악마를 죽여서 학살당한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자!"이방은 그 자리에서 크고 작은 실금을 하며 쇠창살 우리 안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외침과 소란이 귀에 울려 댈 뿐이었다.수란석이 팔을 들고 외쳤다."모든 마을 사람들은 물러나 길을 비켜라! 이 악행의 원흉을 큰 구덩이 묘지로 데려가겠다. 그곳에서 내가 그녀를 풀어주면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단 한 가지는 꼭 지켜야 한다. 그녀의 머리는 서경으로 가져가 황제께 보고드려야 하니 반드시 남겨야 한다. 그러니 그녀의 살을 한 조각씩 베어내는 건 상관없지만 머리를 훼손해 황제가 알아보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사람들은 이 날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억눌렸던 원한이 폭발하려는 순간이었지만, 이방이 이미 잡혀왔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녀를 큰 구덩이 묘지로 데려가 그곳에서 처단하여 비참히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이 원한을 오늘은 반드시 갚아야 했다.황소는 수레를 끌며 앞으로 나아갔고 마을 사람 중 몇몇이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두 마을의 주민을 다시 세어 보니 이제 고작 30여 명만이 남아 있었다.그들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걸으면서 겉옷을 벗어 안에 입은 흰 상복을 드러냈다. 팔에는 가는 삼베를 묶어 놓았다. 그들은 모두 한때 부모와 자식이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삶이 비록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다.누군가가 앞에서 흰 깃발을 높이 들었고, 그들은 작은 갈림길에서 나와 스스로 대열을 이루었다
그곳에는 작은 산처럼 높이 솟은 커다란 무덤이 있었고, 그 위에는 수많은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묘비가 서 있었다.이방은 공포가 극에 달해 입에서 비명과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질러댔다.한 시위가 쇠창살 우리 문을 열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질질 끌어내더니 땅에 내던졌다. 이방은 온몸에 고통이 퍼져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옆으로 기어갔다.시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시 잡아채어 작은 산처럼 높이 솟은 무덤 앞까지 끌고 갔다. 묘비 앞에 그녀를 눌러놓고 새겨진 이름들을 가리키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이 이름들이 보이냐? 알아볼 수 없겠지. 전부 네가 죽인 사람들이다!”이방은 공포에 질려 고개를 마구 흔들며 억울해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건 내가 아니라고……!"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분노로 가득 찬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그러자 이방의 비명 소리가 군중 속에서 터져 나오며 산골짜기에 메아리쳤고, 놀란 새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와 하늘을 가득 덮었다. 곧 천둥소리가 크게 울려 이방의 비명 소리를 덮어버렸다.군중 속에서 피가 흘러나와 작은 개울처럼 땅을 적셨다.멀리 떨어져 있던 향병과 곽아정 등은 그들이 이방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명 소리와 분노에 찬 마을 사람들이 휘둘렀던 칼과 도끼, 괭이에 묻은 피를 보며 그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들은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죽은 가족들을 위해 복수하고 있었다. 굳이 그녀의 살을 한 조각씩 베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악인은 세상에 한순간이라도 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생된 영혼들에게는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비명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이방의 온몸은 갈갈이 찢겨져 있었다. 얼굴과 머리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고 나머지 몸과 팔다리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이방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은 그녀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그는 크게 숨을 헐떡이며 마치 큰 손이 심장을 꽉 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왕청여는 소리에 깨어 그가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짜증을 내며 물었다. “또 악몽을 꾸었습니까?” 요즘 그는 잘못한 일이 많은지 자주 악몽을 꾸었다. 하지만 왕청여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그가 악몽을 꾸면서 몇 번이나 이방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가 가슴을 움켜쥔 채 아무말도 하지 않자 왕청여가 차갑게 말했다. “또 이방 꿈을 꾼 겁니까? 꿈에서 그녀가 죽었습니까?” “죽었소.” 전북망은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죽었소.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머리가 잘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소.” 한 밤중에 그가 하는 말을 들은 왕청여는 화가 치밀어 올라 호통쳤다. “됐습니다. 그녀가 죽든 말든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어서 주무십시오.” 그러자 전북망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당신은 계속 주무시오. 난 서재에 가서 자겠소.” 그 모습을 본 왕청여는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당신이 계속 서재에 가서 주무시면 저택의 사람들이 대체 날 어떻게 보겠습니까?” 전북망은 온몸에 힘이 없어 한참 침대를 짚어서야 일어났다. 그는 왕청여가 한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고 귓가엔 꿈속 이방의 비명뿐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나가보니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슬픈 빗소리가 지붕에 떨어져 물줄기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는 회랑에서 걸었는데 처참한 풍등이 이리저리 흔들리자 그의 그림자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거대한 짐승처럼 보였다가 귀신처럼 휘날리기도 했다. 빗소리가 섞인 바람소리는 마치 귀신과 늑대가 울부짖는 것 같았고 그는 꿈속의 비명소리를 떠올리자 순간 심장을 기름 솥에 던져진 듯 아프고 뜨거웠다. 그는 원래 서재로 가려고 했지만 두 발이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길상거로 갔다.길상거의 문을 열자 그는 이미 온몸이 흠뻑 젖었다.한두 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길상거는 이미 초목이 무성해
전북망은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돌계단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그는 한참을 더듬어서야 불씨를 찾아 불을 켰다. 순간 콩알만 한 빛이 길상거 안의 모든 것을 비추었다. 그곳은 아주 간단해서 탁자와 의자 등 평범한 가구들뿐이었는데 가장 진귀한 것은 이방이 철목으로 보강한 문과 창문이었다. 그는 멍하니 앉아서 왕청여가 밖에서 화를 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왕청여는 욕설을 퍼붓다가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이 계속 떠난 사람만 그리워하고 있으니 우리도 서로 감정을 소모할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이혼합시다.” 이혼이라는 두 글자가 전북망을 추억에서 끌어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눈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물었다. “이혼이오?” “그래요, 이혼합시다.” 왕청여는 우산과 등불을 모두 내팽개치고 물을 밟고 들어와 광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난 한 번 이혼한 몸이니 다시 이혼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우린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난 방시원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러자 전북망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시원?” “그가 당신보다 천 배 만 배는 낫습니다. 그가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그의 부인일 것이고, 이젠 그가 살아 돌아왔으니 난 그를 찾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정신이 돌아온 전북망은 왕청여의 말에 화가 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비아냥거렸다. “방시원은 이제 당신을 원하지 않소.” 그의 말은 왕청여의 아픈 곳을 찔렀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그럼 난 노세진을 찾아가겠습니다.” 전북망은 노세진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왕청여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노세진이 누구요?” 왕청여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은 후에 자기도 놀라서 멍해졌다. 한 번 밖에 없었던 황당했던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때가 그리웠다. 그녀는 노세진을 사랑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오세진과 있었을 때 가장 따뜻했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