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장공주가 이를 악물었다.“송석석입니다!”그 이름이 흘러나오자 혜태비가 당황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공주부로 향하는 게 아닌지 사람까지 보냈지만 그자가 다시 돌아오도 전에 장공주가 입궁을 하더니 그녀까지 이 자리로 불러냈다.저 기세를 보아하니 굳이 보고를 듣지 않아도 송석석이 공주부로 향했고 장공주에게 불손한 짓을 저질렀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무슨 말을 한 걸까? 저렇게까지 화나 나다니. 지금까지 폐하에게까지 부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송석석? 그 아이가 뭘 어찌 했다고 황제더러 벌하라는 것입니까?”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장공주가 소리쳤다.“그자가 함부로 공주부에 침입해 저를 모욕했습니다!”하지만 송석석을 아끼는 태후는 장공주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공주부에 침입했다면 사람을 불러 내쫓으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모욕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사실 그대로 말할 순 없어 망설이던 장공주가 입을 열었다.“제 생일 연회에서 행패를 부릴 때도 아직 나이가 어려 철이 안 들었다 생각하고 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부로 제 처소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 앞으로 절 가만두지 않겠다 저주까지 퍼부었던 말입니다.”‘저주?’무슨 저주일까 싶어 순간 혜태비의 눈이 반짝였다.한편 태후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정말 이상하군요. 석석 그 아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장공주를 도발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나라의 장공주를요.”왠지 송석석의 편을 드는 듯한 말투에 장공주는 그제야 황태후와 송 부인이 막역한 사이라는 걸 떠올렸다.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니 화가 더 치밀었다.“군공 좀 세웠다고 묵이의 왕비로 간택되더니 정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봅니다. 저 같은 건 아주 안중에도 없더군요. 뭐, 어쨌든 절대 이대론 못 넘어갑니다.”악독함으로 번뜩이는 눈빛에 혜태비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석석 낭자가 사과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럼 바로 국공부
장공주의 말을 듣던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모님 진정하세요. 석석 낭자가 공주부에 침입해 고모님을 모욕한 건 분명 잘못된 일이죠. 하지만 석석 낭자가 이런 일을 벌여 얻는 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증인은 있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그리고 열녀비 사건은 경조부에 조사를 맡기겠습니다. 만약 석석 낭자가 거짓을 고한 것이라면 엄히 벌할 거예요.”“증인이요? 증인이라면 많죠. 공주부 시종들 전부가 증인입니다. 호위가 막을 새도 없이 쳐들어왔고 그자가 절 모욕하는 걸 저택 사람들 모두가 들었습니다.”잠깐 멈칫하던 장공주가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열녀비 사건을 경조부에 맡기는 건 지나친 처사인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뭐 합니까. 백성들은 워낙 우매하여 일단 다시 조사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제가 열녀비를 보냈다 확신할 겁니다. 그럼 제 결백을 씻을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죠.”“도대체 뭐라고 모욕을 했단 말입니까? 말이라도 해보세요.”태후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엇이라 모욕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모욕했다는 그 사실이죠. 전 아 나라의 장공주입니다. 설령 묵이와 혼인을 한다 해도 제가 황실 어른이니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면 안 되는 거겠죠. 그런데 혼인도 올리기 전에 황실을 능멸했으니 대역죄인이 아니면 뭐겠습니까.”“아니.”황태후가 손을 저었다.“말끝마다 대역죄인이라는 말만 하지 말고 자초지종을 말해 보세요. 그럼 석석 그 아이가 장공주가 무섭게 생겼다고 말해도 모욕이란 말입니까? 그건 사실을 말한 것에 불과하니 벌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야 벌을 내려도 내릴 수 있죠.”이에 장공주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 변했다.“태후께선 송석석 그 아이를 지나치게 감싸고 계십니다. 폐하, 폐하께서 말씀해 보세요. 송석석 그자는 조정의 대신이죠. 대신이 황가 일족을 모욕하는 것도 죄가 아닙니까?”아무리 물어도 송석석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말을 하지 않는 걸 본 황제는 장공
혜 태비는 왜 송석석의 죄를 물을 수 없는지 몰랐다. 불경은 엄청 큰 죄였다. 하지만 대장공주께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다. 혜 태비는 언니에게 물어보고 서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아채고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진 대장공주의 얼굴을 보며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대장공주는 화가 나서 결국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이번에 궁에 들어와서 깨달은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송석석이 저렇게 나대는 건 모두 태후와 황제가 뒤에서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도와주는 사람이 사여묵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저렇게 멋대로지.’대장공주가 떠난 뒤 황제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모님이 정절문을 세우라고 요구한 게 사실인가 봅니다. 이번엔 고모님이 너무하셨습니다.” 태후는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방금 공주의 뺨을 갈기고 싶은 걸 겨우 참았습니다. 오만하고 무지한 데다 음험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하다니 황실의 체면을 모두 구기고 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그러니 송 부인이 당시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태후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제 앞에서 한 번도 억울함을 털어놓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분명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어마마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미 떠난 사람이니 안식하길 바랄 수밖에 없죠.” 황제는 음험한 눈빛으로 생각했다. ‘이방이 송 씨 가문을 멸문했는데 진실일 밝혀지지 않는다면 송 부인께서 어떻게 안식할 수 있겠어… 어떻게 해야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그냥 이렇게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건가? 오 대반의 말이 맞아. 송씨 가문이 억울함을 너무 많이 당했어.’황제는 정무가 있어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났다. 그래서 태후와 혜 태비만 남게 되었다. 혜 태비는 생각에 잠겼다. ‘대장공주는 오늘 기세등등해서 송석석에게 처벌을 내리려고 했어. 송석석이 대단해봤자 이번 처벌은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나
태후는 동생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떠보는 심정으로 말했다. “너 조만간 황실로 가서 묵이와 함께 살게 되는데 모르는 게 많으면 굳이 황실을 주관하려고 하지 말고 석석에게 중책을 맡겨.” “언니, 그건 아니죠.” 혜 태비는 황태후의 말을 끊고 모처럼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며느리가 들어오자마자 중책을 맡는 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난 마음 놓고 그녀에게 맡길 수 없어요. 자매끼리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난 송석석이 싫어요. 그 아이가 내 며느리가 되는 것도 싫어요. 그러니 더더욱 그 아이에게 황실의 중책을 맡길 수 없어요.” “그래? 그럼 네가 중책을 맡을 거야?” 태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럼 내일부터 후궁을 다스리는 황후의 권리를 너에게 줄 테니 네가 한번 해봐. 마침 황후도 휴식이 필요하니 네가 며칠 관리해 봐.” “내가 궁중의 일을 맡아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황후가 후궁을 다스리는데도 내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언니가 후궁을 다스릴 때도 내가 많이 도왔잖아요. 안 그래요?” “많이 도와주긴 했지. 오히려 일이 더 복잡해져서 문제였지만.” 태후는 인정사정없이 말했다. “부모님이 널 너무 애지중지하게 키워서 네가 입궁한 후에도 내가 항상 널 지켜보고 널 보호했어. 그러니 너도 편히 아들 딸을 출산할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황실로 가서는 편히 살고 싶으면 며느리 잡을 생각 하지 마. 네가 석석을 싫어하든 그녀 애가 시집오는 게 싫든 이 일은 이미 정해진 일이야. 그러니 네가 반대한다고 변수가 생기진 않아. 네가 황실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태후는 이렇게 엄격한 말투로 혜 태비와 말한 적이 없었다. 송석석 때문에 언니가 더 이상 자신을 예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혜 태비는 송석석이 더 미웠다. 하지만 혜 태비도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아무리 송석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국 그녀는 사여묵에게 시집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 일은 확실히 대장공주의 소행이었다. 송석석의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자신의 방식으로 송석석에게 교훈을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진성 백성들 모두 송석석이 효녀라고 하던데 그녀가 상중에 시집갔다는 걸 알게 되면 백성들이 욕을 퍼붓겠지.’이때 공주부의 육집사가 기쁜 마음으로 들어와서 아뢰었다. “공주님, 군주님, 지금 밖에 소문이 퍼져서 찻집과 술집에서 모두 이 일을 논하고 있어요. 거의 모든 사람이 욕설을 퍼붓고 있어요.” “거의라니? 그럼 모두가 욕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가?” 가의 군주는 냉담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아직도 그녀의 편을 드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 그러자 육집사가 말했다. “군주님, 백성 중 몇 명이 송석석이 시집갈 땐 이미 아버지가 떠난 지 24개월이 자난 후라고 그녀의 편을 들어 말하고 있어요.” 삼년상이란 딸로서 3년 동안 상을 입어야 하는데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24개월을 지키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가의 군주가 말했다. “보통 백성들이 송석석이 시집간 날짜를 기억할 리 없잖아? 아마도 국공부에서 사람을 사주해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거야.” 그녀는 장공주를 보며 물었다. “어머니, 그럼 송석석은 실제로 상을 입는 기간을 지킨 겁니까?” 그러자 장공주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걸 누가 알아? 백성들도 권리 있는 자들을 욕하면 그들의 마음도 후련해질 테니까 그런 것까지 상관하지 않을 거야.” “만약 송석석이 기간을 채운 후 시집간 거라면 그녀가 백성들에게 해명을 하기만 하면 우린 헛수고하는 거 아니에요? 이번에 돈 꽤 많이 썼잖아요?” 장공주는 대답을 하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돈을 많이 썼지만 온 진성 백성들이 모두 송석석을 욕하게 할 수 있다면 돈을 쓴 보람이 있어.”장공주의 마음은 시원했지만 확실히 엄청 많은 돈을 썼다. 몇 년 동안 장공주는 공주부의 돈을 물 쓰듯이 써 겉으로는 번지르르하지만 사실은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부모님께서 애초에 주신 식읍과
장공주는 천천히 웃었다.‘그래, 혜 태비라는 돈주머니를 찾아가야지.’혜 태비는 장춘전에서 심하게 재채기를 했다. 낮잠을 자려고 하는데 장공주와 가의 군주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씨 유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장공주 모녀가 왜 같이 온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몇 년 전에 가의 군주와 덕 귀태비가 함께 연지가게를 차려 돈을 좀 벌었다.모든 일에서 뒤처지기 싫어하는 혜 태비는 그들이 돈을 벌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가게를 차리려고 했지만 가의 군주가 아니라 친정의 조카와 함께 할 생각이었다.그런데 가의 군주께서 찾아와 독특한 비법이 있다고 궁 안의 연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며 혜 태비에게 3천 냥을 가져와 함께 가게를 차리자고 했다.혜 태비가 가의 군주를 믿지 못하자 장공주가 나서서 혜 태비에게 그들 모녀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는 괴변을 늘어놓았다. 혜 태비는 원래 두 사람을 무서워하는데 장공주의 어두운 표정을 볼 때마다 바로 돈을 꺼냈다.하지만 몇 년 동안 연지가게에서 번 돈을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해마다 적자를 봐 그들은 계속 돈을 요구했다. 혜 태비는 속으로 울고 싶었지만 나중에 그녀가 가난하다 거나 인색하다는 소문이 돌까 봐 주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몇 년 사이에 가의 군주가 보지도 못한 연지가게 때문에 혜 태비에게서 뜯어간 은만 해도 만 냥이 넘었다.고씨 유모는 혜 태비가 궁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그녀를 모셔 당연히 그녀를 위해 생각했다.“또 돈 받으러 온 게 확실합니다. 태비마마, 연지가게가 이득도 없는데 문을 닫는 건 어때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또 돈을 달라고 찾아올 겁니다. 이 몇 년만 해도 많은 돈을 들였잖아요.”혜 태비도 연지가게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폐업을 하려고 하니 창피했다. 덕 귀태비는 연지가게로 돈을 잘만 벌고 있는데 자기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분해서 지금까지 해온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장공주와 가의 군주를 들였다. 역시 연지가게의 일로 찾아온 것이었다. 혜 태비는 참
장공주는 혜 태비에게서 받은 돈에서 조금 풀어 술집과 다방의 설화인에게 계속 송석석이 효도를 지키지 않은 것을 들먹이도록 했다. 국공부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 걸 보고 장공주는 그들이 무서워서 나오지 않는 줄 알고 속이 시원했다. ‘나와 맞서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지.’그녀는 이 참에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사여묵과 송석석의 혼인을 동의하는 건 황제의 자리에 화근을 심어주는 것이니 강산을 위해서 송석석이 북명황실로 시집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황제가 듣고 깊이 생각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묵이와 석석은 모두 무장이에요. 남강을 수복하고 국토를 호위하며 나와 조정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묶이는 내 동생이라 어릴 때부터 친밀하게 지냈고요. 묵이는 결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고모도 함부로 추측하지 말아 주세요.” 장공주는 잠깐 멍하더니 고모의 신분을 내세우며 호되게 말했다. “멍청하긴. 그리 쉽게 사람의 마음을 믿어서야. 황실에서 형제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걸 보지 못했느냐? 황제가 되어서 그렇게 쉽게 사람을 믿으면 그가 황제의 믿음을 사서 나쁜 일을 행할까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 이때 황제의 안색이 안 좋아지더니 차갑고 음울한 눈빛으로 옥반지를 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오 대반은 금세 알아차리고 황급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장공주님, 제발 말을 삼가 주십시오. 이런 말이 전해지면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장공주께서 황제폐하와 북명왕의 형제애를 이간질한다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그건 장공주님께도 불리하지만 황제폐하와 북명왕에게도 불리한 말입니다. 지금 황제폐하와 북명왕께서는 사이가 좋으신 데다 북명왕과 송석석 아가씨의 혼인은 이미 정해졌는데 이제 와서 황제폐하께서 사람을 명해 혼인을 망친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황제폐하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장공주는 황제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옥반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 공공의 말은
이때 찻집 손님들은 격분해서 발언한 사람이 바로 오늘날의 흠천감 감정님임을 알아보았다.사람들은 갑자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감정님께서 직접 고른 날인데 상중일 리가 없잖아?”이때 감정은 멍해진 설화인을 가리키며 물었다.“누가 너에게 국공부를 모욕하라고 사주했느냐? 송국공가의 일곱 영웅은 모두 남강 전장에서 전사했어. 그 후 송장군이 여장군으로 봉함을 받고 전쟁터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북명왕을 도와 남강까지 수복했지. 양심이 있는 백성이라면 송국공에게 깍듯이 존경하는데 넌 여기서 근거도 없는 말로 대중을 현혹시켜 송 장군을 불효 막심한 사람으로 몰고 가려고 하다니. 대체 무슨 속셈인 거냐?”이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설마 적국의 첩자가 일부러 송 장군을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겠지?”그러자 다른 한 명이 말했다.“그럴 수도 있지. 다들 잊었어? 송씨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서경의 첩자에게 죽임을 당했잖아. 저 사람이 우리 상국 진성에 숨어 있던 첩자일지도 몰라. 빨리 관청에 보고해.”설화인은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 아니야. 난 서경의 첩자가 아니야. 나는…….”“서경의 첩자도 아닌데 왜 송 장군을 헐뜯는 거냐?”“그러게, 대체 무슨 속셈인 거냐?”“도망가지 못하게 에워싸라.”누군가가 외치자 사람들은 줄줄이 앞으로 막아 설화인은 도망가지도 못하고 삿대질을 당했다.진복은 2층 옥탑방 입구에 서서 설화인이 포위된 채 삿대질을 받는 것을 보고서야 웃으며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감정은 직접 나와서 해명하고 관청에도 보고했는데 장공주를 불어내지 않더라도 그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아마도 이 설화인들을 모두 매수해야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설화인이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며칠 사이에 소문에 진성에 쫙 펴졌는데 관청이 개입해서 하나하나 추적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진복은 국공부로 돌아가 아가씨에게 말해줬다. 송석석은 양 마마와 손수건을 수놓고 있었는데 보고를 듣고 그저 엷은 미소만 지었다.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