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한병원 외과.
그 중심에는 늘 이름이 함께 따라붙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철중. 대한병원 재단 이사장. 그리고 유재원. 현 대한병원 원장. 두 사람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외과 의사들이었다. 수많은 수술을 집도했고,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얻는 사람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유봄.
이사장의 손녀이자, 원장의 딸.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진 길 위에 있는 사람.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병원 사람들 대부분이, 그녀를 볼 때면 한 번쯤은 같은 생각을 했다.“결국 저 자리에 올라가겠지.”
하지만, 유봄은 이름에 기대지 않았다.
아니, 기대지 않으려 했다. 같은 외과. 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들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더 멀리 두려 했다. 그래서였을까. 유봄을 평가하는 말은 항상 비슷했다.“실력은 인정.”
“근데…”,
그 뒤에 붙는 말은 조금씩 달랐다.
“집안 때문인지, 본인 실력인지 모르겠어.”
그 말은 직접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익숙한 시선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유봄은 더 많이 서 있었고, 더 오래 버텼다. 남들보다 먼저 수술실에 들어가고, 더 늦게 나왔다. 피곤하다는 말도, 힘들다는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증명해야 했으니까.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가 그들의 이름 때문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였다. 수술실 안에서만큼은, 누구도 그녀를 다르게 보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이름도 배경도 의미 없었다. 오직, 손과 판단만 남으니까. 수술실 문이 열렸다. 밝은 조명이 꺼진 자리에서 현실의 공기가 다시 밀려들어왔다. 마스크를 내리고, 장갑을 벗어냈다. 손끝이 약간 얼얼했다. 길었던 긴장이 이제야 풀리는 느낌이었다.“수고하셨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인사들.
유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복도로 걸어 나왔다. 잠깐, 걸음을 멈췄다.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짧은 울림. 한 번. 유봄은 자연스럽게 화면을 꺼냈다. 메시지 하나. 발신자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이진성 교수
[밥먹자]
유봄은 화면을 잠시 내려다봤다.
평소처럼 짧고 단정한 메시지였다. 마치 방금 수술을 함께 끝낸 동료에게 건네는 자연스러운 말처럼. 잠깐 고민하던 유봄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맴돌다가, 결국 답장을 보냈다.[ 나… 지금 좀 자고 싶어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유봄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유난히 피로가 깊게 쌓였다. 잠시 후, 다시 진동이 울렸다.[수고했다.]
한 줄.
밥 먹자는 말보다 더 담담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한 문장이 더 오래 남았다. 유봄은 휴대폰을 잠시 쥔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당신도 수고했어요.”
그 말은 전송되지 않은 채, 조용히 복도 안에 남았다.
***
파티가 끝난 그날 밤, 강민재는 이상하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장면 하나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쓰러진 사람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다가가던 한 여자. 주변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던 시선. 그리고 끝까지 책임을 지고 자리를 지키던 그 여자.'우린 꼭 만날거야~ 내가 당신을 봐 버렸으니까.'
강민재는 태어날 때부터 ‘삼진건설’이라는 이름과 함께 자라왔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 건설사, 삼진건설의 회장 의 유일한 후계자, 그리고 그 집안의 하나뿐인 손자. 그의 존재 자체가 곧 회사의 미래로 여겨지는 위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일반적인 환경과는 다른 교육을 받아왔고, 성장 과정 역시 자연스럽게 후계자 코스 위에 놓여 있었다. 해외 유학을 통해 시야를 넓혔고, 돌아온 이후에는 현장과 이론을 모두 이해하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외형 역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모델보다도, 배우보다도 뛰어나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균형 잡힌 체격과 단정한 비율.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인상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존재감까지 더해져, 어디에 서 있든 시선이 모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평소의 강민재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말수는 적고, 불필요한 관계를 만들지 않았으며, 상황을 차분하게 관찰하는 데 익숙했다. 겉으로는 차갑고 거리감 있는 인상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정확한 판단을 중시하는 이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업무에 들어가는 순간은 달랐다. 회의실 안의 강민재는 누구보다 빠르게 핵심을 짚고, 복잡한 문제를 구조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방향이 정해지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추진력과 책임감을 보였다. 그때의 그는 평소의 절제된 모습과는 달리, 한층 더 선명하고 강한 카리스마를 드러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일할 때 가장 압도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곤 했다. 이성적으로는 완벽에 가까운 사람. 감정보다 판단을 우선하고, 맡은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타입. 그런 강민재에게, 파티에서 마주친 단 한 장면은 예외였다.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처음으로 그의 기준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처음으로, 업무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강민재가 그녀를 찾기 위한 계획을 세워가던 바로 그때, 현실은 그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해외 지사 사업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현지 협력사와의 계약 이슈로 인해 프로젝트 전체의 진행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회의실 공기는 금세 무거워졌다. 자료가 테이블 위에 놓이고, 보고가 이어질수록 문제의 심각성은 더 분명해졌다.“현재 상태로는 현지 대응이 늦어질 경우 손실이 커질 수 있습니다.”
“외부 변수까지 겹치면 일정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회장이었다.
국내 최고 대형 건설사, 삼진건설의 수장인 강두수회장은 한참을 자료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강민재를 바라봤다.“민재야.”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미 결정은 내려진 상태였다.
“이건 네가 직접 가서 정리해라.”
단순한 업무 지시가 아니었다.
현장을 직접 보고, 판단하고, 책임지라는 의미였다. 강민재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알겠습니다.”
짧고 단정한 대답.
회의실 안의 누구도 그 선택에 이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회사의 중요한 해외 사업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 다른 하나는 그녀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새로운 동선이었다. 출국이 결정된 순간, 강민재의 머릿속은 더욱 명확해졌다. 일을 해결하는 것.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마주하게 될 그녀를 향한 흐름. 그 두 가지를 모두 안은 채, 공항으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그동안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이진성은 요즘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매일이 초췌했고, 밤이면 술로 시간을 버티듯 지새웠다.그 영향은 수술에서도 드러났다.늘 정확하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판단도 예전 같지 않았다.완벽하던 그의 균형이,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유지원은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유봄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진성을 완전히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스쳤다.모처럼 일찍 퇴근한 날.유지원은 일부러 지하주차장에서 이진성의 차 옆에 서 있었다.한참을 기다린 끝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이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를 확인한 순간, 유지원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교수님.”그의 앞에 선 그녀는 잠시 눈을 마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드릴 말씀이 있어요.”이진성은 이미 지친 기색으로 얼굴을 찌푸렸다.“내일 얘기해요.”신경질적인 말투로 짧게 내뱉은 그는 그대로 차 문을 열려 했다.그 순간, 유지원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책임지세요.”이진성의 손이 멈췄다.“책임지실 행동 하셨으면… 책임지셔야죠.”차갑게 내려앉은 말.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지원을 바라봤다.눈빛이 순간 굳어졌다.이진성의 시선이 굳은 채로 멈췄다.그때 유지원이 한 발 더 다가오며 말했다.“회식 날… 기억 안 나세요?”잠깐의 침묵.“교수님이… 제 선을 넘으셨어요.”차분하게 내뱉는 말이었지만, 그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이진성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그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유지원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을 이었다.“…이 일, 제 동생 유봄도 알고 있어요.”그 한마디에 이진성의 표정이 굳었다.하지만 사실은 유봄이 이 일을 알 리 없었다.이미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그녀였다.확인할 수도, 따질 수도 없는 상황.유지원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미소가 스쳤다.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말을 듣는 순간, 이진성의 손에서 차키가 힘없이 떨
이진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기억이 나지 않는 공백만이 남아 있었다.출근한 이진성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한 하루를 시작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늦더라도 답장을 주던 유봄의 연락이 오지 않았다.“…왜지.”짧게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봤지만 상황은 같았다.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그리고 유봄을 직접 찾아 나섰다.이진성은 유봄이 자주 머물던 병동 스테이션으로 향했다.하지만 그곳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유봄 선생님, 혹시 어디 계신지 아세요?”오더를 정리하던 간호사에게 조용히 물었다.간호사는 잠시 확인하더니 말했다.“유봄 선생님, 오늘 휴가 내셨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이진성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휴가요?”짧게 되묻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스며 있었다.“네, 어제 당직도 대신 서주시고… 오늘은 쉬신다고 전달받았어요."‘어제… 연락도 없었고.’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빠르게 떠올랐다.이진성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그의 표정에는 점점 더 짙은 걱정이 번지고 있었다.유봄이 며칠째 휴가를 내고 있다는 소식에 유철중 이사장은 자연스레 걱정이 들었다.늘 바쁘게 움직이던 손녀였다.웬만한 휴가도 반납하며 병원에 남아 있던 아이.“유봄이 휴가를 냈다고?”짧게 되묻는 목소리에는 놀람과 함께 미묘한 염려가 섞여 있었다.단 한 번도 오래 쉬는 법이 없던 손녀였기에, 이번처럼 연달아 자리를 비우는 건 분명 평소와 달랐다.유철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조용히, 유봄의 상태를 확인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일주일 후.유철중 이사장은 손녀와의 점심 약속을 잡은 장소로 향했다.직접 얼굴을 보고 상태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하던 차 먼저 유봄에게서 연락이 왔다.약속 장소에서 마주한 손녀의 모습은 그의 기억보다 한층 더 야위어 있었다.유철중은 말없이 유봄을 바라보았다.걱정이 섞인 시선이 자연스럽게 머물렀다.유봄은 마주 앉은 할아버
이진성은 곧바로 유봄에게 왜 안 오냐며 문자를 보냈지만,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나이 든 교수들은 1차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자리를 뜨고, 남은 자리는 젊은 이진성에게 맡겨졌다.혼자 남은 그는 전공의들이 건네는 술잔을 거절하지 못한 채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술을 받아 마셨다.술자리가 무르익자, 평소 이진성을 흠모하던 여전공의들이 하나둘 가까이 다가왔다.“교수님, 여자친구 있으세요?”“진짜 궁금했어요.”너도나도 웃으며 던지는 질문들.평소라면 끝까지 절제했을 이진성이었지만, 오랜만에 마신 술에 그는 꽤 취해 있었다.느슨해진 표정, 그리고 보기 드문 부드러운 미소.“있습니다.”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한 여자친구요.”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이진성은 흐릿한 눈으로 웃으며 덧붙였다.“곧… 결혼할 겁니다.”단정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그의 말을 들은 순간, 주변에 있던 전공의들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진짜요…?”“결혼이요…?”놀란 기색이 먼저 번졌고 이내 어딘가 씁쓸한 기류가 따라붙었다.이미 누군가의 남자라는 사실 하나로, 자신들에겐 애초에 기회조차 없었다는 걸 깨달은 듯, 전공의들의 얼굴에 조용한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그 말을 들은 유지원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도 모른 채 주먹을 꽉 쥐었다.그 시각, 응급 상황을 정리한 유봄은 그제서야 이진성의 문자를 확인했다.잠시 망설이다가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얼굴이라도 보고 갈까…’그녀는 그렇게 결심하고, 회식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유봄은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이진성에게 줄 숙취해소제를 고르며 안으로 들어섰다.그 안쪽 테이블에는 이진성의 동기들이 앉아 있었고, 고깃집에서 스쳐 봤던 그를 떠올리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걔, 대학 때는 연애 관심도 없던 놈 아니었냐?”“그러다 갑자기 유봄이랑 사귄다니까 좀 이상하긴 하더라.”“유봄 배경 모르는 사람 없잖아
유지원의 눈빛이 서서히 식어갔다.“또… 유봄이야.”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어릴 때부터 그랬다.비교의 대상은 언제나 유봄이었고, 결과는 늘 같았다.더 인정받는 사람,더 사랑받는 사람.그리고 결국 선택받는 사람.“없었으면…”아주 작게, 스쳐 지나가듯 흘러나온 말.유봄만 아니었다면 이 병원도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였을지도 모른다.그리고이진성.그 남자 역시.차트를 내려놓는 순간, 유지원의 시선이 다시 엽서에 꽂혔다.나의 사랑, 유봄.짧은 한 줄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입술이 미세하게 굳었다가, 이내 풀렸다.“…그래.”아주 작게 흘린 말.전부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유봄이 다 가져가고 있다면 하나쯤은, 자신이 가져와도 되지 않을까.그녀의 눈빛이 천천히 식었다.그리고 또렷해졌다.이진성.그 남자만이라도 유봄에게서 뺏고 싶다는 욕망이,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 잡았다.유지원의 손이 잠깐 멈췄다.방금 전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지시를 쏟아내던 선배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이거 빨리 처리해.”“그건 왜 아직도 안 끝났어?”당연하다는 듯 내리꽂는 말투.설명도, 배려도 없이 쏟아지는 지시들.입술이 천천히 굳어졌다.지금까지는 참고 넘겼다.인턴이니까, 당연한 과정이라고.하지만 그 선을 넘는 순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웃기네.”작게 흘러나온 말.‘내가 누군데.’지금 이곳에서,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인턴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그건 ‘모르고 있어서’일 뿐이었다.유지원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자신이 대한병원장의 큰딸이라는 사실을 밝혀,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다 같이 구내식당으로 향하던 길, 유지원은 그날도 선배 레지던트의 잔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그때 저 앞에서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대한병원 원장 유재원.그리고 내과 과장 김순철 교수.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유지원의 걸음
그날 밤.이진성은 혼자 서 있었다.머릿속에는 계속 같은 장면이 맴돌았다.유봄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남자,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시선들.“…하.”짧게 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들었다.더 이상 애매한 위치에 둘 생각은 없었다.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유봄을 자신의 사람으로.그는 조용히 결심했다.청혼하겠다고.그리고 같은 시기.대한병원 인턴 오리엔테이션 날.유지원은 병원 복도를 따라 걷다가,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이진성.단정한 가운, 흐트러짐 없는 태도, 그리고 한 번 보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분위기.유지원의 걸음이 멈췄다.“…누구지.”짧게 중얼거린 말.하지만 시선은 이미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그 순간 유지원 역시 한눈에 빠져버렸다.인턴 배정 희망서를 받아 든 순간, 유지원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다른 인턴들이 과를 두고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펜은 이미 한 곳에 멈춰 있었다.일반외과.원래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과였다.힘들고, 거칠고, 버티기 어려운 곳.하지만 유지원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이진성.그 한 사람.단상 위에서 내려오던 순간 스쳐 지나간 그 눈빛.차갑게 정리된 말투, 그리고 쉽게 가까이 갈 수 없을 것 같은 거리감까지.오히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유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체크를 마쳤다.며칠 뒤, 일반외과 첫 출근.스테이션은 예상대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짧게 오가는 지시, 빠르게 움직이는 발걸음들.그 혼잡한 흐름 속에서, 유지원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그리고 찾았다.이진성.차트를 넘기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모습.군더더기 없는 동작, 짧고 정확한 말.멀리서 보기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결이 달랐다.유지원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쳤다.하지만 현실은 단순하지 않았다.젊은 나이에 조교수 자리까지 오른 이진성은, 애초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병원 안에서 그의 위치는 분명했다.실력으로 올라온 사람, 그리고 그만큼 철저하게
강민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멈춰 있던 일들이 거짓말처럼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엉켜 있던 인허가는 다시 흐름을 찾았고, 막혀 있던 자금 라인도 그의 지시 한 번으로 방향이 잡혔다.흔들리던 현지 파트너 역시, 직접 나선 그의 한마디에 태도를 바꿨다.처리는 빠르고, 판단은 정확했다.불필요한 과정은 과감히 잘라내고, 핵심만 남기는 방식.짧은 시간 안에 상황은 눈에 띄게 정리되고 있었다.하지만 강민재는 알고 있었다.지금 해결되고 있는 것들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일 뿐이라는 걸.이 사태의 뿌리는 더 깊숙이 박혀 있었고, 한 번의 정리로 완전히 끝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겉을 정리하는 것과, 완전히 잘라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그는 창가에 서서 잠시 도시를 내려다봤다.차갑게 정돈된 유럽의 풍경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들이 얽혀 움직이고 있었다.“……”짧게 숨을 내쉰 그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이번 건은 단기간에 끝낼 일이 아니었다.겉으로는 빠르게 수습하고 있었지만, 남아 있는 문제들까지 완전히 도려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최소 몇 달.그는 머릿속으로 일정을 다시 정리했다.본사와의 조율, 현지 라인 정리, 새로운 구조 재편까지.모든 걸 끝까지 잡으려면,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강민재는 망설이지 않았다.이미 선택한 일이었고, 시작한 이상 끝을 내는 성격이었으니까.“정리한다.”짧게 중얼거린 말처럼,그의 시선은 다시 냉정하게 가라앉았다.이번에는 단순한 해결이 아니라,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였다.늦은 밤, 일정이 겨우 끝난 뒤였다.강민재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창가에 섰다.하루 종일 이어진 회의와 정리, 끝없이 이어지는 보고들로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그는 말없이 위스키를 한 잔 따랐다.잔에 부딪히는 얼음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낮게 울렸다.한 모금.목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감각이, 쌓여 있던 피로를 조금씩 눌러내렸다.창 너머로는 유럽의 밤거리가 펼쳐져 있었다.정돈된 가로등, 잔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