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4

Author: 딸기팝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8 18:53:39

모처럼 잡힌 오프날이었다.

수술도, 당직도 없는 하루. 유봄은 오랜만에 느껴지는 여유에 잠깐 숨을 고르려 했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전화 한 통.

“오늘 집에 좀 와라.”

짧은 말이었지만 거절할 수 없는 어조였다.

유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집으로 향했다.

도착한 본가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공기부터가 미묘하게 달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기운이 먼저 그녀를 맞이했다.

거실에는 이미 누군가 자리하고 있었다.

유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녀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가족의 얼굴들 사이에 낯선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었다.

김지숙.

아버지의 첫사랑이자, 지금 이 집에 존재하는 또 다른 축.

그 이름이 주는 의미를 유봄은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유지원.

김지숙의 딸이자, 유봄보다 한 살 많은 이복언니.

차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자연스러웠지만, 그 존재 자체가 만들어내는 거리감은 분명했다.

유봄은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 미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겉으로는 평온한 분위기였지만, 이 집 안에는 보이지 않는 과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김지숙은 한때 사랑하는 사이였다.

유봄의 엄마, 최진희를 만나기 전까지.

그리고 그 관계는 단순한 이별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외과 의사로 같은 동문이었던 두 가문.

그들의 아버지들 사이의 약속이 개입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할아버지들의 결정.

그 약속으로 인해 아버지는 최진희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봄이 태어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남겨진 감정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김지숙과 유지원은, 그 과거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현재였다.

하지만 그 복잡한 배경 속에서도, 유봄이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게 해주는 존재는 결국 하나였다.

할아버지.

이 집에서 그녀가 진정으로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유봄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았다.

불편함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공간 속에서, 그녀는 늘 그래왔듯 스스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유봄의 부모는 같은 길을 걷는 외과의로 처음 만났다.

같은 병원, 같은 수술실, 같은 목표를 가진 동료였다.

처음 관계는 단순했다.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 협력 관계.

수술 중에는 말 한마디, 시선 하나로 호흡을 맞춰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

위급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판단, 그리고 서로의 선택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확신.

그것이 두 사람 관계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생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만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외과의 동문이었던 두 가문의  할아버지들 사이의 약속이 있었다.

그 약속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일종의 연결고리였고, 결국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이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감정이 앞선 선택은 아니었다.

동료로서의 신뢰와 가문의 결정이 결합된 시작.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시간이 쌓이면서 관계는 변해갔다.

수술실에서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연스럽게 기대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어갔다.

큰 사건 없이도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고, 힘든 순간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는 관계.

처음에는 ‘맺어진 관계’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관계는 점점 ‘선택한 관계’로 바뀌었다.

약속으로 시작된 결혼은 결국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부부의 관계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유봄은 그 안에서 태어나, 부모가 쌓아온 그 단단한 관계의 흔적을 보며 자라왔다.

유봄은 원래부터 조용한 아이는 아니었다.

어릴 적 그녀는 여느 소녀들처럼 잘 웃고, 재잘재잘 말을 쏟아내며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아이였다.

작은 일에도 눈을 반짝이며 반응했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끝없이 이야기하곤 했다. 부모 역시 그런 유봄을 보며 바쁜 일상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수술과 연구로 지친 하루 끝에,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유봄의 밝은 에너지였다.

그 시절의 유봄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 모든 흐름은 한 순간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부모님의 이혼.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어머니가 집을 떠난 날.

그날 이후 유봄의 세상은 조용히 방향을 바꿨다.

이전처럼 마음껏 웃고 떠들던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도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말은 줄어들었고, 표정은 차분해졌다.

스스로를 다잡는 법을 먼저 익히게 되었고, 어린 나이였지만 혼자 버티는 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변화를 쉽게 알아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겉으로는 여전히 밝고 예의 바른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알 수 있는 차이가 있었다.

그 이후의 유봄은, 쉽게 기대지 않고,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하나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었다. 

떠나버린 어머니의 기억.

유봄은 타고난 머리와 집중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부재를 겪은 뒤, 그녀에게 공부는 자연스럽게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그렇게 쌓인 시간은 결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인 한국대학교 의과대학에 수석 입학, 수석 졸업.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온 끝에, 지금은 외과 펠로우로 자리 잡아 누구보다 단단한 실력을 갖춘 의사로 성장해 있다.

할아버지에게 유봄은 단순한 손녀가 아니었다.

자신의 성향과 태도를 그대로 닮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존재였다.

차분함, 판단력, 그리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까지 유봄을 볼수록 그는 자신을 보는 듯한 확신을 느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선택은 분명했다.

대한병원의 후계자는 오직 유봄뿐이라는 것.

겉으로는 말수가 적고 엄격해 보이지만, 그속에서 유봄을 향한 애정과 기대는 누구보다 깊었다.

유봄이 흔들릴 때면 가장 먼저 그 곁을 지켜주는 사람, 그리고 아무 말 없이도 그녀의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존재.

할아버지에게 있어 유봄은 자랑스러운 손녀이자, 미래를 맡길 수 있는 후계자였다.

서로의 가문을 이어주자는 그 약속은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동시에 한 사람의 인생을 맡기겠다는 책임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의 기대와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딸, 유봄의 어머니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마음 한편에 오래도록 남은 죄책감이 되었다.

그 약속의 끝에서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그로 인해 손녀가 겪게 된 변화까지.

어릴 적 밝고 재잘거리던 유봄이 점점 말이 줄어들고, 혼자서 감정을 삼키는 아이로 자라가는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적어도 유봄만큼은 지키겠다고.

더는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고.

겉으로는 엄격하고 무뚝뚝했지만 속에서는 손녀를 향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봄을 담다   14

    그동안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이진성은 요즘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매일이 초췌했고, 밤이면 술로 시간을 버티듯 지새웠다.그 영향은 수술에서도 드러났다.늘 정확하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판단도 예전 같지 않았다.완벽하던 그의 균형이,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유지원은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유봄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진성을 완전히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스쳤다.모처럼 일찍 퇴근한 날.유지원은 일부러 지하주차장에서 이진성의 차 옆에 서 있었다.한참을 기다린 끝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이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를 확인한 순간, 유지원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교수님.”그의 앞에 선 그녀는 잠시 눈을 마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드릴 말씀이 있어요.”이진성은 이미 지친 기색으로 얼굴을 찌푸렸다.“내일 얘기해요.”신경질적인 말투로 짧게 내뱉은 그는 그대로 차 문을 열려 했다.그 순간, 유지원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책임지세요.”이진성의 손이 멈췄다.“책임지실 행동 하셨으면… 책임지셔야죠.”차갑게 내려앉은 말.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지원을 바라봤다.눈빛이 순간 굳어졌다.이진성의 시선이 굳은 채로 멈췄다.그때 유지원이 한 발 더 다가오며 말했다.“회식 날… 기억 안 나세요?”잠깐의 침묵.“교수님이… 제 선을 넘으셨어요.”차분하게 내뱉는 말이었지만, 그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이진성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그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유지원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을 이었다.“…이 일, 제 동생 유봄도 알고 있어요.”그 한마디에 이진성의 표정이 굳었다.하지만 사실은 유봄이 이 일을 알 리 없었다.이미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그녀였다.확인할 수도, 따질 수도 없는 상황.유지원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미소가 스쳤다.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말을 듣는 순간, 이진성의 손에서 차키가 힘없이 떨

  • 봄을 담다   13

    이진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기억이 나지 않는 공백만이 남아 있었다.출근한 이진성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한 하루를 시작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늦더라도 답장을 주던 유봄의 연락이 오지 않았다.“…왜지.”짧게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봤지만 상황은 같았다.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그리고 유봄을 직접 찾아 나섰다.이진성은 유봄이 자주 머물던 병동 스테이션으로 향했다.하지만 그곳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유봄 선생님, 혹시 어디 계신지 아세요?”오더를 정리하던 간호사에게 조용히 물었다.간호사는 잠시 확인하더니 말했다.“유봄 선생님, 오늘 휴가 내셨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이진성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휴가요?”짧게 되묻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스며 있었다.“네, 어제 당직도 대신 서주시고… 오늘은 쉬신다고 전달받았어요."‘어제… 연락도 없었고.’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빠르게 떠올랐다.이진성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그의 표정에는 점점 더 짙은 걱정이 번지고 있었다.유봄이 며칠째 휴가를 내고 있다는 소식에 유철중 이사장은 자연스레 걱정이 들었다.늘 바쁘게 움직이던 손녀였다.웬만한 휴가도 반납하며 병원에 남아 있던 아이.“유봄이 휴가를 냈다고?”짧게 되묻는 목소리에는 놀람과 함께 미묘한 염려가 섞여 있었다.단 한 번도 오래 쉬는 법이 없던 손녀였기에, 이번처럼 연달아 자리를 비우는 건 분명 평소와 달랐다.유철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조용히, 유봄의 상태를 확인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일주일 후.유철중 이사장은 손녀와의 점심 약속을 잡은 장소로 향했다.직접 얼굴을 보고 상태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하던 차 먼저 유봄에게서 연락이 왔다.약속 장소에서 마주한 손녀의 모습은 그의 기억보다 한층 더 야위어 있었다.유철중은 말없이 유봄을 바라보았다.걱정이 섞인 시선이 자연스럽게 머물렀다.유봄은 마주 앉은 할아버

  • 봄을 담다   12

    이진성은 곧바로 유봄에게 왜 안 오냐며 문자를 보냈지만,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나이 든 교수들은 1차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자리를 뜨고, 남은 자리는 젊은 이진성에게 맡겨졌다.혼자 남은 그는 전공의들이 건네는 술잔을 거절하지 못한 채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술을 받아 마셨다.술자리가 무르익자, 평소 이진성을 흠모하던 여전공의들이 하나둘 가까이 다가왔다.“교수님, 여자친구 있으세요?”“진짜 궁금했어요.”너도나도 웃으며 던지는 질문들.평소라면 끝까지 절제했을 이진성이었지만, 오랜만에 마신 술에 그는 꽤 취해 있었다.느슨해진 표정, 그리고 보기 드문 부드러운 미소.“있습니다.”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한 여자친구요.”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이진성은 흐릿한 눈으로 웃으며 덧붙였다.“곧… 결혼할 겁니다.”단정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그의 말을 들은 순간, 주변에 있던 전공의들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진짜요…?”“결혼이요…?”놀란 기색이 먼저 번졌고 이내 어딘가 씁쓸한 기류가 따라붙었다.이미 누군가의 남자라는 사실 하나로, 자신들에겐 애초에 기회조차 없었다는 걸 깨달은 듯, 전공의들의 얼굴에 조용한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그 말을 들은 유지원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도 모른 채 주먹을 꽉 쥐었다.그 시각, 응급 상황을 정리한 유봄은 그제서야 이진성의 문자를 확인했다.잠시 망설이다가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얼굴이라도 보고 갈까…’그녀는 그렇게 결심하고, 회식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유봄은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이진성에게 줄 숙취해소제를 고르며 안으로 들어섰다.그 안쪽 테이블에는 이진성의 동기들이 앉아 있었고, 고깃집에서 스쳐 봤던 그를 떠올리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걔, 대학 때는 연애 관심도 없던 놈 아니었냐?”“그러다 갑자기 유봄이랑 사귄다니까 좀 이상하긴 하더라.”“유봄 배경 모르는 사람 없잖아

  • 봄을 담다   11

    유지원의 눈빛이 서서히 식어갔다.“또… 유봄이야.”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어릴 때부터 그랬다.비교의 대상은 언제나 유봄이었고, 결과는 늘 같았다.더 인정받는 사람,더 사랑받는 사람.그리고 결국 선택받는 사람.“없었으면…”아주 작게, 스쳐 지나가듯 흘러나온 말.유봄만 아니었다면 이 병원도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였을지도 모른다.그리고이진성.그 남자 역시.차트를 내려놓는 순간, 유지원의 시선이 다시 엽서에 꽂혔다.나의 사랑, 유봄.짧은 한 줄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입술이 미세하게 굳었다가, 이내 풀렸다.“…그래.”아주 작게 흘린 말.전부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유봄이 다 가져가고 있다면 하나쯤은, 자신이 가져와도 되지 않을까.그녀의 눈빛이 천천히 식었다.그리고 또렷해졌다.이진성.그 남자만이라도 유봄에게서 뺏고 싶다는 욕망이,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 잡았다.유지원의 손이 잠깐 멈췄다.방금 전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지시를 쏟아내던 선배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이거 빨리 처리해.”“그건 왜 아직도 안 끝났어?”당연하다는 듯 내리꽂는 말투.설명도, 배려도 없이 쏟아지는 지시들.입술이 천천히 굳어졌다.지금까지는 참고 넘겼다.인턴이니까, 당연한 과정이라고.하지만 그 선을 넘는 순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웃기네.”작게 흘러나온 말.‘내가 누군데.’지금 이곳에서,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인턴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그건 ‘모르고 있어서’일 뿐이었다.유지원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자신이 대한병원장의 큰딸이라는 사실을 밝혀,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다 같이 구내식당으로 향하던 길, 유지원은 그날도 선배 레지던트의 잔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그때 저 앞에서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대한병원 원장 유재원.그리고 내과 과장 김순철 교수.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유지원의 걸음

  • 봄을 담다   10

    그날 밤.이진성은 혼자 서 있었다.머릿속에는 계속 같은 장면이 맴돌았다.유봄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남자,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시선들.“…하.”짧게 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들었다.더 이상 애매한 위치에 둘 생각은 없었다.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유봄을 자신의 사람으로.그는 조용히 결심했다.청혼하겠다고.그리고 같은 시기.대한병원 인턴 오리엔테이션 날.유지원은 병원 복도를 따라 걷다가,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이진성.단정한 가운, 흐트러짐 없는 태도, 그리고 한 번 보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분위기.유지원의 걸음이 멈췄다.“…누구지.”짧게 중얼거린 말.하지만 시선은 이미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그 순간 유지원 역시 한눈에 빠져버렸다.인턴 배정 희망서를 받아 든 순간, 유지원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다른 인턴들이 과를 두고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펜은 이미 한 곳에 멈춰 있었다.일반외과.원래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과였다.힘들고, 거칠고, 버티기 어려운 곳.하지만 유지원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이진성.그 한 사람.단상 위에서 내려오던 순간 스쳐 지나간 그 눈빛.차갑게 정리된 말투, 그리고 쉽게 가까이 갈 수 없을 것 같은 거리감까지.오히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유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체크를 마쳤다.며칠 뒤, 일반외과 첫 출근.스테이션은 예상대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짧게 오가는 지시, 빠르게 움직이는 발걸음들.그 혼잡한 흐름 속에서, 유지원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그리고 찾았다.이진성.차트를 넘기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모습.군더더기 없는 동작, 짧고 정확한 말.멀리서 보기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결이 달랐다.유지원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쳤다.하지만 현실은 단순하지 않았다.젊은 나이에 조교수 자리까지 오른 이진성은, 애초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병원 안에서 그의 위치는 분명했다.실력으로 올라온 사람, 그리고 그만큼 철저하게

  • 봄을 담다   9

    강민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멈춰 있던 일들이 거짓말처럼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엉켜 있던 인허가는 다시 흐름을 찾았고, 막혀 있던 자금 라인도 그의 지시 한 번으로 방향이 잡혔다.흔들리던 현지 파트너 역시, 직접 나선 그의 한마디에 태도를 바꿨다.처리는 빠르고, 판단은 정확했다.불필요한 과정은 과감히 잘라내고, 핵심만 남기는 방식.짧은 시간 안에 상황은 눈에 띄게 정리되고 있었다.하지만 강민재는 알고 있었다.지금 해결되고 있는 것들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일 뿐이라는 걸.이 사태의 뿌리는 더 깊숙이 박혀 있었고, 한 번의 정리로 완전히 끝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겉을 정리하는 것과, 완전히 잘라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그는 창가에 서서 잠시 도시를 내려다봤다.차갑게 정돈된 유럽의 풍경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들이 얽혀 움직이고 있었다.“……”짧게 숨을 내쉰 그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이번 건은 단기간에 끝낼 일이 아니었다.겉으로는 빠르게 수습하고 있었지만, 남아 있는 문제들까지 완전히 도려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최소 몇 달.그는 머릿속으로 일정을 다시 정리했다.본사와의 조율, 현지 라인 정리, 새로운 구조 재편까지.모든 걸 끝까지 잡으려면,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강민재는 망설이지 않았다.이미 선택한 일이었고, 시작한 이상 끝을 내는 성격이었으니까.“정리한다.”짧게 중얼거린 말처럼,그의 시선은 다시 냉정하게 가라앉았다.이번에는 단순한 해결이 아니라,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였다.늦은 밤, 일정이 겨우 끝난 뒤였다.강민재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창가에 섰다.하루 종일 이어진 회의와 정리, 끝없이 이어지는 보고들로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그는 말없이 위스키를 한 잔 따랐다.잔에 부딪히는 얼음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낮게 울렸다.한 모금.목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감각이, 쌓여 있던 피로를 조금씩 눌러내렸다.창 너머로는 유럽의 밤거리가 펼쳐져 있었다.정돈된 가로등, 잔잔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