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봄의 곁에 서 있는 사람.
그 사실 하나가 만들어내는 무게와 의미를 그는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로 인해 생기는 주변의 반응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별히 과시하지는 않았지만, 유봄과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안정감과, 그 관계가 외부에 주는 영향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선 속에서도, 이진성은 유봄을 중심에 두고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이진성은 병원 안에서는 늘 한 발 물러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능력 있는 의료진 중 한 명일 뿐, 유봄과의 사적인 관계는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 점이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유봄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남자들, 업무를 빌미로 말을 건네거나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시선들. 그 모든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미세하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쉽게 나서지 않았다. 관계를 드러내는 순간 생길 수 있는 파장, 유봄이 감당해야 할 시선과 부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봄과의 통화는 언제나 이진성의 마음을 미묘하게 풀어주곤 했다. 짧은 말 한마디,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안부조차도 그의 긴장을 자연스럽게 낮춰주는 힘이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통화가 이어지는 동안, 이진성은 곧 이상한 점을 느꼈다. 유봄의 목소리가 평소와 같지 않았다. 평소보다 조금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미세하게 힘이 빠진 듯한 톤.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느낌이 섞여 있는, 그런 목소리였다.“…오늘 무슨 일 있었어?”
짧게 물었지만, 답을 듣기 전부터 이미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유봄은 잠시 말을 고르듯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그냥."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이진성의 표정이 바뀌었다.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결정을 내렸다.“지금 갈게.”
말이 끝나자마자 통화를 정리하고, 그는 곧장 차로 향했다.
지체할 이유를 찾지 않았다. 엔진을 걸고, 핸들을 잡은 그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이미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유봄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것. 차는 빠르게 도로로 나섰고, 이진성은 평소보다 더 집중된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유봄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차가 유봄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이진성은 문을 열고 내려 주변을 한 번 훑어본 뒤, 곧바로 유봄을 찾았다. 그리고 집 앞 대문 근처,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봄은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차가 멈추자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짧게 스치는 눈맞춤. 이진성은 가까이 다가가며 유봄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전화에서 느껴졌던 미묘한 떨림이 아직 남아 있는지, 얼굴빛은 어떤지. 다행히 큰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여전히 어딘가 가라앉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유봄 앞에 멈춰 섰다. 집을 함께 사용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안으로 들어가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문 앞이라는 이 거리감이 오히려 더 선을 분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잠깐, 그 공간 안으로 함께 들어가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현실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괜찮아?”
짧은 한마디였지만, 시선은 유봄의 얼굴에 고정된 채였다.
유봄은 아무 말 없이 이진성의 품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듯 숨을 고른 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괜찮아…”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와 함께,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신호였다. 이진성은 아무런 질문도 더 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유봄을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 안긴 유봄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가볍게 느껴지는 몸, 그리고 조금은 힘이 빠진 듯한 어깨. 이진성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손끝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마치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이. 유봄이 그의 가슴에 기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다. 집 앞이라는 공간, 늦은 시간, 혹시 모를 시선들. 그 모든 것보다 지금 품 안에 있는 유봄이 더 중요했다. 조용히 안아주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이진성의 마음은 이상할 만큼 안정감으로 채워졌다. 말없이 이어지는 포옹 속에서, 그는 자신이 지금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행복한 상태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감정은 어느 한순간 완전히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유봄을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이진성 안에서는 그녀를 더 가까이 두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분명하게 고개를 들곤 했다. 유봄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잠시라도 머무르는 순간, 혹은 누군가가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장면을 볼 때, 이진성의 내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보다 더 확실하게, 자신의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 그녀를 잃지 않고 싶다는 감정과, 타인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게 지키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가 함께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진성은 스스로 그 선을 인지하고 있었고, 유봄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그 표현 방식은 절제되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차분함을 유지하면서도, 내면에서는 그녀를 향한 소유욕과 보호 본능이 미묘하게 맞물려 흐르고 있었다. 그에게 유봄은 단순히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이자 언젠가 더 확실한 형태로 이어가고 싶은 사람이었다.그리고 서울.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 기사를 보고 있었다.휴대폰 화면 속 건배하는 두 사람의 사진.손에 들린 커피잔이 살짝 멈췄다.서울, 오전.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막 커피를 들던 순간, 휴대폰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대한병원 유봄 × 한양병원 최재성… 제주 만찬 밀월?’강민재의 시선이 멈췄다.사진.은은한 조명 아래, 와인을 들어 올린 두 사람.서로를 향해 웃고 있는 장면.손에 쥔 종이컵이 미세하게 찌그러졌다.거래처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요즘 의료계도 연예계 못지않네요. 저 두 사람,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강민재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껐다.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눈빛이 완전히 식어 있었다.“오늘 일정, 전부 취소하세요.”비서가 당황했다.“대표님? 오후 이사회가”“온라인으로 돌리세요. 급한 일 있습니다.”짧고 낮은 목소리.그는 바로 차에 올랐다.김포공항.수속도 기다림도 길게 느껴졌다.탑승구 앞에서 휴대폰을 다시 열었다.기사 조회수는 이미 수십만.댓글은 더 자극적으로 변해 있었다.‘공동 연구? 그 핑계로 사귀는 거 아냐?’‘둘이 케미 미쳤다.’‘한양·대한 합치면 국내 최강.’강민재의 턱선이 단단해졌다.강민재는 유봄을 믿는다.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는지,어떤 선을 지키는지 누구
박수가 다시 터지고 유봄이 단상에서 내려왔다.사람들이 몰려들었다.질문을 던지고, 악수를 청하고, 명함을 건넨다.그 중심에 선 유봄.유지원은 그 장면이 못마땅했다.“저렇게까지 떠받들 일인가…”제주 학회 마지막 날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연회장에 원탁들이 둥글게 놓여 있었다.학회 공식 만찬.잔잔한 클래식 연주와 은은한 조명 아래, 의료계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유봄은 심플한 블랙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과하지 않게 올린 반머리, 얇은 진주 귀걸이.낮의 단정한 발표자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차분하지만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감.최재성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시선을 멈췄다.‘…역시.’실력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한데, 이 여자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유봄이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 우연처럼, 그러나 의도적으로 그녀의 오른쪽 자리는 최재성이었다.“오늘 발표, 인상 깊었습니다.”잔을 들어 가볍게 건네며 그가 말했다.“특히 출혈 상황에서 전환 속도. 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현장에서 더 대단했을 것 같네요.”유봄은 미소 지었다.“과찬이에요. 교수님 세션도 잘 들었습니다. 췌담도 케이스 접근법, 많이 정교해지셨더라고요.”“정교해졌다는 말은… 예전엔 거칠었다는 뜻입니까?”장난기 어린 질문.유봄은 눈을 맞추며 담담히 답했다.“예전엔 공격적이셨죠. 지금은 계산적이시고요.”최재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주 국제컨벤션센터 대강당.로봇수술 세션의 마지막 발표자가 단상에 올랐다.“대한병원 일반외과, 유봄입니다.”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홀을 채웠다.최재성은 프로그램북에서 시선을 들었다.유봄.이름을 보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하지만 직접 마주하는 건 몇 년 만이었다.조명이 그녀를 비추자 강단 위에 선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단정하게 묶은 머리, 절제된 화장, 깔끔한 화이트 수트.그녀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장식보다 눈에 띄었다.발표가 시작됐다.복강경 전환 없이 고난도 골반 종양을 로봇 단일공으로 집도한 케이스.영상이 흘러나오고, 그녀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이 구간에서 혈관 변이가 예상되어 접근 각도를 15도 수정했습니다.”단순한 성공 사례가 아니었다.위험 요소, 판단 근거, 술기 선택 이유까지 정확했다.최재성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여전하군.’아니, 더 날카로워졌다.질의응답 시간.국외 교수가 집요하게 물었다.“그 상황에서 conversion risk는 없었습니까?”잠깐의 침묵.유봄은 눈을 들어 질문자를 바라봤다.“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술은 위험을 피하는 게 아니라 통제하는 거니까요.”담담하지만 확신에 찬 대답.청중석 여기저기서 고개가 끄덕여졌다.최재성은 그 순간 확실히 인정했다.라이벌, 그리고 아름답다.실력 있는 의사가 아름다울 때의 파괴력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세션이 끝나고 로비.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질문이 쏟아졌다.
한강 위로 바람이 스쳤다.유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 파티.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참석했던 자리.유봄도 그날을 기억했다.할아버지가 드물게,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부탁했었다.“체면상 한 번만 얼굴 비춰다오.”그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결국 그 자리에 나갔다.화려한 조명과 웃음소리, 계산적인 시선들.그런 자리는 늘 숨이 막혔다.그러다 갑자기 들려온 외침.“사람이 쓰러졌어요!”그 순간, 망설임은 없었다.집안의 체면도, 드레스도, 시선도 다 사라지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유봄은 한강 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저도 억지로 나갔던 자리였어요.그냥… 사람이 쓰러졌다길래 움직였을 뿐이에요.”강민재가 웃었다.“그게 당신이야.”유봄은 그를 올려다봤다.몇 년 전,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간 두 사람.그때 이미 시작됐던 인연이, 이제야 제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큼 가슴 깊이 내려앉았다.강민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한강 위로 번지는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어른거렸다.“나… 당신 찾으려고 꽤 헤맸어.”유봄이 고개를 갸웃했다.“저를요?”“응. 파티 끝나고 나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지.근데 동유럽 출장이 겹쳐서 몇 달을 한국에 없었어.돌아왔을 땐 이미 흔적도 없더라.”그는 작게 웃었지만, 그 안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그래서 그냥… 인연이 아닌
식사가 끝나고, 세 사람은 한정식집 현관 앞으로 나왔다.밤공기가 선선했다.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돌계단 아래로 수행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강두수 회장은 외투를 걸치며 유봄을 향해 몸을 돌렸다.“봄아.”이제는 이름도 자연스럽게 불렀다.“이제 편하게 우리 집에도 놀러 오너라.눈치 보지 말고.”그리고 옆에 서 있는 강민재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이놈이 열받게 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고.”지팡이로 바닥을 툭 치며 덧붙였다.“내가 이 녀석 혼꾸녕을 제대로 내줄테니.”강민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할아버지, 누구 편이세요?”강두수는 단호했다.“당연히 봄이 편이지.”유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님.”그러다 눈을 맞추며 덧붙였다.“건강 조심하세요. 무리하지 마시고요.”그러자 강두수가 껄껄 웃었다.“손주며느리가 유명한 의사인데 뭐가 걱정인가?”“이제 나는 든든해.”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만족이 어려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강두수는 타기 전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둘이 잘 어울린다.”짧은 한마디.그러고는 차에 올랐다.검은 세단이 천천히 출발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그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했다.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강민재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합격이네.”
차창 밖으로 한정식집의 한옥 지붕이 보였다.잠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서 내렸다.이번에는 강민재가 먼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놓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한옥 안쪽 가장 깊은 별실.창밖으로 작은 정원이 보이고, 대청마루 너머로 은은한 조명이 비쳤다.잘 다려진 한지 메뉴판과 정갈하게 세팅된 놋그릇들.그 앞에 앉은 사람은 강두수 회장이었다.겉으로는 태연했다.지팡이를 옆에 세워두고 차를 한 모금 마시는 모습은 언제나처럼 묵직했다.하지만 잔을 내려놓는 손끝에 아주 미세한 긴장이 스며 있었다.몇 년 전부터였다.“여자친구 있습니다.”그 한마디만 남기고 한 번도 제대로 소개하지 않던 손주.그 고집 센 놈이 오늘에야 정식으로 인사를 시키겠다 했다.어떤 사람이기에.기업가 집안의 딸도 아니고, 정략적으로 얽힌 관계도 아니고, 손주가 저리도 단단히 마음을 준 여자라니.강두수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궁금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걱정은 없었다.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민재가 그렇게까지 아끼는 여자라면…’괜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손주놈은 일은 차갑게 해도 사람 보는 눈만큼은 정확했다.자신을 닮았으니까.문밖에서 직원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회장님, 손님 도착하셨습니다.”강두수는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심장이 아주 조금 빨리 뛰었다.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대기업 총수다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그래, 어디 한번 보자.’손주놈이 그토록 좋아한다는 여자.그 문이 열리는 순간을 조용히 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