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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Penulis: 정대천
윤서령은 두어 마디만 꺼냈을 뿐인데 신수빈이 이토록 길고 또렷한 말로 반격해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하였다.

무어라 되받아쳐야 하나 궁리하던 찰나, 신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작은아씨도 머지않아 혼사를 앞두고 계시지요. 저와 서방님, 그리고 시부모님께서 작은아씨의 혼수를 성심껏 마련해 드릴 터이니 훗날 시집을 가시면 그 집안의 일원이 되시는 겁니다. 혹여 그 집에서 아씨를 모욕하거나 업신여기면 저희가 마땅히 나서서 도와드릴 것입니다. 허나, 장차 시집갈 몸이 자꾸 친정에 손을 벌리면 저희 부부나 시부모님께서야 입 꾹 다물고 도와줄 수 있겠지만 남편 집안 식구들은 아닙니다.그들은 아가씨를 비웃을 것이지요. 이 이치는 작은아씨께서도 아셔야 합니다."

신수빈은 큰며느리는 어미와도 같다는 태도로 나서서 조곤조곤 타일렀고, 그 말에 성이 치민 윤서령은 눈을 부릅떴으나 도무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씨 부인은 딸을 감싸고 싶었으나 신수빈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만들 하거라.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무슨 말을 그리도 길게 하느냐. 도가 지나치다."

"어머님의 말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신수빈은 부드럽게 받아쳤다.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청하는 속이 뒤집어졌다. 어떻게 해도 결국엔 아씨 탓이 된다! 한 달 남짓 전부터 아씨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듯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불평을 몇 마디 내뱉었을 터인데 이제는 모든 말을 꾹 삼킨 채 웃으며 받아넘긴다.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탈을 쓴 부처 같아 슬펐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윤서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이마에는 응축된 노기가 가시지 않아 어디서 불쾌한 일을 겪었다고 대놓고 광고하는 듯했다.

신수빈은 그런 서방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시원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듯하였다.

윤서원은 서씨 부인께 인사를 올린 뒤, 곁에 앉은 신수빈을 향해 한마디 하였다.

"어머니 곁엔 더 있지 않아도 되니 돌아가 단장하거라. 마상서 댁에서 오늘 밤 연회가 있어 부부동반으로 초대받았다."

신수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전생에는 마상서의 연회 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그때는 어떤 연회건 간에 초대장이 그녀 손에 들어온다 한들 윤서원은 늘 주서화와 함께 참석하고 그녀는 제외시키곤 하였다.

그런 그가 왜 이번엔 자신을 데려간다는 것인가?

신수빈은 의심스러워 멍하니 있자 윤서원이 다시 다그쳤다.

"멍하니 뭐하는 것이냐? 어서 준비하거라. 함께 가야 하거늘."

거절할 수 없었다. 신수빈은 마지못해 자기 처소로 돌아와 단장에 나섰다. 그런데 평소라면 그녀가 머무는 창란원에는 절대 발걸음 하지 않던 윤서원이 그날 따라 그녀를 뒤따라왔다.

"이 옷으로 입거라. 색이 곱고, 네 피부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구나. 더없이 곱게 보일 것이다."

신수빈은 준비된 옷과 장신구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평소 더위를 잘 타 시원한 옷차림을 즐겨 하였기에 연사로 만든 치마저고리를 한 벌 지어 입었다. 살갗에 닿는 촉감이 서늘하고 자태는 나풀거리며 아리땁고 요염하여 그녀의 가냘프고도 탐스러운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처음 그 옷을 입었을 때 청하조차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본 것을 보면 그 옷차림이 분명 고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옷은 어디까지나 사가에 있을 때나 입는 것이지 외출용 연회복으로는 부적절하였다.

"다른 옷으로 입겠습니다. 이 옷은 연회에 입기엔 사뭇 가벼운 듯하여…"

윤서원은 손을 휘저었다.

"괜찮다. 사사로운 연회일 뿐이다. 격식은 갖추지 않아도 된다."

그러고는 신수빈을 깊이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부인을 이 세상 첫째가는 미인이라 한다. 그 명성에 어울리게 치장해야 하지 않겠느냐?"

신수빈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의 눈빛엔 차디찬 무언가가 스쳐갔다. 마치 독사에 물린 듯 서늘하였다.

윤서원이 밖으로 나간 뒤에도 그녀는 불길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청하가 입혀주는 복식을 거울 너머로 바라보며 그녀는 내심 더 깊은 불안에 잠겼다.

신수빈은 장신구함에서 한 쪽 옥패를 꺼내어 청하에게 건넸다. 그 옥패는 혼례 첫날 아침, 깨어났을 때 목에 걸려 있던 것이다.

처음엔 윤서원이 준 것이라 여겨 소중히 간직해왔지만 환생 후 그날 밤의 사내가 이도현이었음을 알고 난 뒤 옥패는 버리지 않고 간직해두었다. 언젠가 요긴할 때를 위해서였다.

오늘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유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 옥패를 지녀야 할 것 같았다.

마차에 올라 마상서의 부로 향했다. 마상서는 이부 상서로, 일품의 내각 대신이었고 올해 환갑이 넘은 원로였다. 그런 마상서가 무슨 연유로 실권도 없는 평양 후부 공자를 초대한단 말인가?

"서방님과 마상서는 언제부터 친분이 있었습니까?"

"지난 진휼 때, 마상서께서 내 능력을 높이 사셨다.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는 사이지. 오늘은 사적인 잔치니 인원도 적다. 나와 마상서 두 사람뿐이다. 걱정 말고 따라오너라."

그러고는 신수빈의 손등을 가만히 덮었다.

그 순간, 신수빈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필사적으로 참았기에 그의 손길을 뿌리치진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빼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 가로등마다 불이 켜졌고 거리는 귀가하는 사람들로 분주하였다.

마침 마차는 한 기루 곁을 지나고 있었고 그곳에는 화려하게 단장한 기녀들이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좋은 집안의 여인들은 그곳을 일부러 돌아갔고 사내들은 기웃거렸다.

그 광경을 본 신수빈은 순간 머릿속에 윤서원이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고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서방님, 며칠째 집안일과 어머님의 병환을 돌보다보니 몸이 좋지 않습니다. 괜히 불편을 드릴까 염려되어 오늘 연회는 사양하고자 합니다."

"괘념치 말거라. 연회 중간에 피로하시거든 마가 안채의 방에서 쉬면 된다."

신수빈은 윤서원의 집요한 태도를 보며 자신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가슴속 깊이 싸늘한 한기가 퍼졌다.

그가 자신을 이토록 요염하게 치장시킨 것은 결국 이도현의 침소에 들게 하려던 계책이었다. 만약 이도현이 거절했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기꺼이 넘겨졌을 것이었다. 아마도 이도현이 자신의 저지로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번엔 내각 대신에게 눈을 돌린 것이 분명했다.

짐승만도 못한 작자, 인간의 탈을 쓴 추물이었다!

신수빈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베고 싶었다. 하지만 마차는 이미 마가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가 내리자, 윤서원은 그녀 뒤에 선 청하를 보고 손을 내저었다.

"여기서부턴 네가 필요 없다. 마차꾼 따라 먼저 돌아가라. 이따 내가 부인과 함께 돌아가겠다."

청하는 의아했지만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그때 신수빈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청하를 불렀다.

"아차, 깜빡했구나. 내 처소 작은 부엌에 약을 달이는 중이니 돌아가거든 잊지 말고 챙기거라."

그녀는 청하에게 다가가며 손에 든 옥패를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걸 들고 섭정왕 저택으로 가거라. 그분께 가서 날 구해 달라 간청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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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9화

    이도현은 왕부로 돌아온 뒤에야 공기가 지나치게 싸늘하다는 걸 느꼈다. 오후 내내 감돌던 따뜻하고 다정한 기운은 이미 온데간데 사라진 뒤였다.그는 침상에 누운 채 오후의 일을 곱씹었다. 눈만 감으면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던 신수빈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기억은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들 만큼 아찔했다.결국 이도현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지난 반년 넘게 홀로 잠든 날이 훨씬 많았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걸까. 분명 오후에 바라던 바를 이루었건만, 지금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그녀를 떨쳐낼 수 없었다.심장이 불길에 타오르는 듯 답답했다. 그는 결국 침상에서 내려와 그녀를 찾아가려 했지만,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신 가는 윤 가와 달랐다. 신씨 부인과 신 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에 대한 반감만 더 깊어질 게 분명했다.그는 가슴속 불길이 오후부터 그녀에게 붙잡힌 채 좀처럼 꺼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린 듯,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유모와 청하는 방 안에서 어린 공자를 안고 놀아주고 있었다. 아이는 밤낮이 바뀐 탓인지, 지금 한창 기운이 넘치는 참이었다.이도현이 들어오자 유모와 청하는 뜻밖이라는 듯 깜짝 놀랐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예를 올렸다.어린 공자가 왕부에 머문 뒤로, 왕야가 이곳에 직접 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많아야 청하나 유모를 앞채로 불러 아이 상태를 물어보는 정도였다.이도현은 천천히 다가와 유모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아이는 잘 자라고 있었다. 산후 기간이 지나고 나서는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올랐고, 통통한 작은 얼굴에는 태어났을 때의 허약한 기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무엇보다 아이는 신수빈을 꼭 닮아 있었다. 사내아이인데도 어딘가 고운 분위기가 어려 있었고, 벌써부터 장차 어떤 풍채로 자라날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이도현은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아 들었다.평소 아이를 자주 돌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작은 녀석은 낯을 가리지 않았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8화

    신수빈은 비록 밖에 있을 때는 늘 온몸에 피로를 짊어진 채 살아갔지만, 가족들 앞에 서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껏 갑옷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정 씨의 팔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형수님, 오늘은 형수님이랑 같이 자고 싶어요.”정 씨가 신 가에 시집온 지도 어느덧 십 년이었다. 그녀가 막 시집왔을 무렵, 신수빈은 아직 어린아이였고 정 씨는 늘 그녀를 데리고 놀아주었다. 밤마다 곁에 눕혀 재우던 날도 많았으니, 두 사람 사이는 친자매나 다름없었다.정 씨는 아직도 어린 시절처럼 자신을 따르는 신수빈을 보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짐짓 놀리듯 말했다.“이제 애 엄마가 다 되었는데도 어릴 때랑 똑같구나. 얼른 씻고 오거라. 내가 네 오라버니께 말씀드리고 오마.”신수빈은 얌전히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씻고 나오자, 정 씨는 이미 자기 처소에서 목욕을 마친 뒤 침의로 갈아입고 와 있었다.신수빈은 약까지 먹은 뒤 정 씨와 발끝을 맞댄 채 한 침상에 누웠다.평소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목덜미에 남은 붉은 자국 몇 개 정도만 보였지만, 얇은 침의 차림으로 옆에 돌아누우니 옷깃 사이로 드러난 가슴 언저리의 흔적들까지 숨길 수 없었다.정 씨는 그 자국들을 보고 속으로 절로 혀를 찼다.역시 무장 출신 사내들은 거친 법이었다. 섭정왕 역시 애초에 여인을 살살 다룰 성정은 아닌 듯했다.신수빈은 몹시 피곤해 보였지만, 정 씨에게는 떠나기 전 꼭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이번에 호국사로 들어가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호국사는 황실 사찰이었다. 섭정왕이라 한들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빈아, 나는 지금 아들만 셋에 딸까지 하나 있지 않느냐. 네 오라버니가 더는 내가 출산으로 고생하는 걸 원치 않아서, 다섯째 동생에게 부탁해 약왕곡에서 피임환을 받아오게 했단다. 매달 월경이 끝난 뒤 한 알씩 먹으면 몸도 상하지 않고 아이도 생기지 않아. 내일 떠날 때 한 상자 챙겨주마.”신수빈은 오늘 내내 바로 그 일을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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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6화

    신수빈은 손끝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이도현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귓가에는 여전히 쉰 숨을 섞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맴돌았고, 목덜미에는 뜨거운 숨결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천장 위로 흔들리는 술 장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왜 정과 욕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는지. 그의 손길과 움직임에 휩쓸리던 순간, 그녀는 거의 자기 자신조차 아니게 되어 버렸으니까.그는 마치 그녀를 부서뜨렸다가 다시 빚어내려는 사람 같았다.신수빈은 목덜미에 닿는 축축하고 간질이는 감각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도 이도현은 다시 열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왕야, 이제 돌아가야 해요…”이도현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직 급하지 않다.”“해시가 되면 통행이 금지된단 말이에요!”신수빈이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하자, 이도현은 한 손으로 그녀의 두 손목을 붙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눈가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아직 이르다. 한 시진도 넘게 남았으니 충분하지.”시작하기 전에는 분명 단 한 번뿐이라고 약속해 놓고, 이제 와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신수빈은 화가 치밀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런데도 이도현은 오히려 더 즐거워하는 듯했다.“왕야는 정말 약속을 안 지키… 읍…”입술이 막혀 버리자, 원망 섞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그렇게 등불이 성안을 밝히고 밤빛이 짙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이도현은 그녀가 내일 호국사로 떠나면 한동안 장안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가족들과 나눌 이야기도 있을 테니, 더 붙잡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렀다.결국 해시가 되기 전, 그는 직접 신수빈을 신 가로 데려다 주었다.마차 안에서 신수빈은 꾸벅꾸벅 졸았다.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이도현은 품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5화

    술이 몸속에서 서서히 퍼지자, 그녀의 얼굴도 은근히 달아올랐다.신수빈은 살짝 취기가 오른 채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귓가에 숨을 불어넣듯 속삭였다.“왕야께서는… 어떻게 먹여 드릴까요?”이도현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취기에 젖은 그 눈빛은 평소와는 또 달랐다. 정이 어린 시선, 흐릿한 눈동자.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오래도록 눌러 두었던 열기와 욕망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것을 느낀 그는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그는 그녀를 그대로 안아 들고, 곧장 안쪽 온돌방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런데도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왕야, 배부르게 드시려면 힘도 있어야죠.”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더 빠르게 안으로 향했다.주인이 낮잠을 청할 것을 알고 있었던 정원 하인들은 이미 방을 데워 두었고, 침상도 정갈히 정리해 둔 상태였다.이도현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침상 위에 내려놓고, 신발과 버선을 벗겨 주었다.“힘이 있는지 없는지는… 곧 알게 될 거다.”그가 몸을 낮춰 다가오려는 순간, 신수빈은 몸을 굴려 안쪽으로 빠져들며 웃었다. 그리고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왕야, 오늘은 오라버니께도 신 가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렸고, 내일 아침엔 호국사로 가야 해요. 왕야께서 너무 거칠게 굴어서 또 며칠을 꼼짝 못 하게 되면… 일이 틀어지지 않겠어요?”이도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신혼 첫날밤을 떠올렸다.이성을 잃은 채, 거의 벌을 주듯 몰아붙였던 그날 이후로 그녀는 심한 상처를 입었다.이내 이도현은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당겼다.그리고 몸을 낮춰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이젠… 그러지 않겠다.”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왔다.이마에서 눈가로, 뺨에서 입술 위로. 애정 어린 온기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스며들었다.“지금은… 너를 입 안에 넣어 두고, 가슴 위에 올려 두고 싶을 정도니까…”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4화

    “왕야, 어떠셨어요?”이도현은 속옷 차림으로 서서, 그녀가 건넨 수건을 받아 들었다.그는 신수빈을 흘긋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감히 나를 이렇게까지 부려 먹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신수빈은 수건을 받아 들며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어째서 부려 먹는 거예요. 다른 부부들도 다 이렇게 살잖아요. 왕야께서도 가끔은 땅에 발을 붙이고…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느껴 보셔야죠.”그녀는 그를 밀어 자리에 앉힌 뒤, 미리 준비해 둔 술을 가져오게 했다.“이 술 한번 드셔 보세요. 금릉의 명주예요. 금자에게 시켜 오라버니께 부탁해 가져온 거예요.”그제야 이도현은 그녀가 오후 내내 자리를 비운 이유를 알았다.예전에 남방의 난을 평정하러 내려갔을 때, 그는 어머니의 여동생을 찾기 위해 금릉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일이 워낙 바빠, 이렇게 한가롭게 술과 음식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차려 놓은 것이었다.“수고가 많았군.”신수빈은 술을 따라 두 잔을 채웠다. 그러고는 그중 한 잔을 들어, 잔잔히 웃으며 그에게 내밀었다.“이 첫 잔은… 지난 한 해 동안 저를 아껴 주고 품어 주신 왕야께 드립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젖혀 단숨에 술을 비웠다. 곧이어 다시 한 잔을 따랐다.“이 두 번째 잔은… 저와 신 가를 위해 애써 주신 왕야께 드리는 잔이에요. 입으로는 감사하다는 말을 제대로 못 했지만, 마음으로는 늘 깊이 고마웠습니다.”그녀는 또다시 술을 비웠다.세 번째 잔을 들려는 순간, 이도현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린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됐다. 아직 약도 먹고 있잖느냐. 술은 더 마시지 않는 게 좋다.”신수빈은 본래 술에 약했다. 방금 두 잔을 연달아 비운 탓에, 이미 살짝 취기가 올라 있었다.“괜찮아요… 세 잔은 채워야 마음이 놓여요.”이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서서히 번져 가는 몽롱한 기색과 붉게 물든 두 뺨이 그의 마음을 단숨에 흔들었다.그는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70화

    윤서원은 그저께부터 몸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지금의 냄새는 말 그대로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신수빈은 코와 입을 감싸 쥐며 말했다.“도련님, 잠시만 참아주세요.”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라면 이 정도는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윤수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윤서원은 눈을 부릅뜨고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입가 한쪽이 돌아간 채로 그저 침만 흘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윤수혁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다시 나아질 수는 있는 것입니까?”신수빈은 코를 막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죽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앞으로 정상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82화

    ”지방 관원들과 하도 관아 역시 선을 지키고는 있습니다. 대규모로 범람해 큰 수해가 나지 않게 막으며, 극히 일부 백성들만 피해를 입히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큰 문제로 번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신도연이라는 자가 굳이 단번에 근본부터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일이 꼬여버린 것이지요. 게다가 그는 섭정왕이 직접 지명한 인물이라 여기저기에 제약이 많습니다.”어쨌든 장 가가 가장 큰 몫을 챙긴 상황에서 이 일을 잘못 처리했다가는 불길이 제 몸을 태우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정양왕비의 말을 들은 태후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92화

    신병문은 지금 온 세상의 권세를 틀어쥔 섭정왕이 몹시 못마땅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누이가 이도현의 곁에서 애써 비위를 맞춰주며 지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 팔에 드러났던 얼룩진 멍 자국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니, 그가 뒤에서 누이를 얼마나 짓밟아 왔는지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굳이 그에게까지 몸을 낮춰 부탁할 필요는 없다. 네가 보기에 그가 써 주는 것이 가장 좋다면 오라버니가 알아서 방법을 찾아 그에게 청하면 된다. 그러니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신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91화

    그날 오후 윤수혁은 무혁을 시켜 상자 하나를 보내 왔다.사람들은 모두 그 상자가 윤서원에게 주는 것이라 여겨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신수빈이 상자를 열었는데, 안에는 인피면구 세 장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편지를 펼쳐 보니 인피면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윤수혁이 적어 보낸 내용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몇 번이고 눈으로 훑어 본 뒤 청하를 불러 물을 떠 오게 하고, 편지에 적힌 대로 직접 시험해 보았다.인피면구는 놀라울 만큼 얇아, 얼굴에 밀착시킬 때 거울을 보며 가장자리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붙여야 했다. 다시 거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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