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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작가: 정대천
윤서령은 두어 마디만 꺼냈을 뿐인데 신수빈이 이토록 길고 또렷한 말로 반격해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하였다.

무어라 되받아쳐야 하나 궁리하던 찰나, 신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작은아씨도 머지않아 혼사를 앞두고 계시지요. 저와 서방님, 그리고 시부모님께서 작은아씨의 혼수를 성심껏 마련해 드릴 터이니 훗날 시집을 가시면 그 집안의 일원이 되시는 겁니다. 혹여 그 집에서 아씨를 모욕하거나 업신여기면 저희가 마땅히 나서서 도와드릴 것입니다. 허나, 장차 시집갈 몸이 자꾸 친정에 손을 벌리면 저희 부부나 시부모님께서야 입 꾹 다물고 도와줄 수 있겠지만 남편 집안 식구들은 아닙니다.그들은 아가씨를 비웃을 것이지요. 이 이치는 작은아씨께서도 아셔야 합니다."

신수빈은 큰며느리는 어미와도 같다는 태도로 나서서 조곤조곤 타일렀고, 그 말에 성이 치민 윤서령은 눈을 부릅떴으나 도무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씨 부인은 딸을 감싸고 싶었으나 신수빈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만들 하거라.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무슨 말을 그리도 길게 하느냐. 도가 지나치다."

"어머님의 말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신수빈은 부드럽게 받아쳤다.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청하는 속이 뒤집어졌다. 어떻게 해도 결국엔 아씨 탓이 된다! 한 달 남짓 전부터 아씨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듯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불평을 몇 마디 내뱉었을 터인데 이제는 모든 말을 꾹 삼킨 채 웃으며 받아넘긴다.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탈을 쓴 부처 같아 슬펐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윤서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이마에는 응축된 노기가 가시지 않아 어디서 불쾌한 일을 겪었다고 대놓고 광고하는 듯했다.

신수빈은 그런 서방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시원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듯하였다.

윤서원은 서씨 부인께 인사를 올린 뒤, 곁에 앉은 신수빈을 향해 한마디 하였다.

"어머니 곁엔 더 있지 않아도 되니 돌아가 단장하거라. 마상서 댁에서 오늘 밤 연회가 있어 부부동반으로 초대받았다."

신수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전생에는 마상서의 연회 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그때는 어떤 연회건 간에 초대장이 그녀 손에 들어온다 한들 윤서원은 늘 주서화와 함께 참석하고 그녀는 제외시키곤 하였다.

그런 그가 왜 이번엔 자신을 데려간다는 것인가?

신수빈은 의심스러워 멍하니 있자 윤서원이 다시 다그쳤다.

"멍하니 뭐하는 것이냐? 어서 준비하거라. 함께 가야 하거늘."

거절할 수 없었다. 신수빈은 마지못해 자기 처소로 돌아와 단장에 나섰다. 그런데 평소라면 그녀가 머무는 창란원에는 절대 발걸음 하지 않던 윤서원이 그날 따라 그녀를 뒤따라왔다.

"이 옷으로 입거라. 색이 곱고, 네 피부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구나. 더없이 곱게 보일 것이다."

신수빈은 준비된 옷과 장신구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평소 더위를 잘 타 시원한 옷차림을 즐겨 하였기에 연사로 만든 치마저고리를 한 벌 지어 입었다. 살갗에 닿는 촉감이 서늘하고 자태는 나풀거리며 아리땁고 요염하여 그녀의 가냘프고도 탐스러운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처음 그 옷을 입었을 때 청하조차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본 것을 보면 그 옷차림이 분명 고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옷은 어디까지나 사가에 있을 때나 입는 것이지 외출용 연회복으로는 부적절하였다.

"다른 옷으로 입겠습니다. 이 옷은 연회에 입기엔 사뭇 가벼운 듯하여…"

윤서원은 손을 휘저었다.

"괜찮다. 사사로운 연회일 뿐이다. 격식은 갖추지 않아도 된다."

그러고는 신수빈을 깊이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부인을 이 세상 첫째가는 미인이라 한다. 그 명성에 어울리게 치장해야 하지 않겠느냐?"

신수빈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의 눈빛엔 차디찬 무언가가 스쳐갔다. 마치 독사에 물린 듯 서늘하였다.

윤서원이 밖으로 나간 뒤에도 그녀는 불길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청하가 입혀주는 복식을 거울 너머로 바라보며 그녀는 내심 더 깊은 불안에 잠겼다.

신수빈은 장신구함에서 한 쪽 옥패를 꺼내어 청하에게 건넸다. 그 옥패는 혼례 첫날 아침, 깨어났을 때 목에 걸려 있던 것이다.

처음엔 윤서원이 준 것이라 여겨 소중히 간직해왔지만 환생 후 그날 밤의 사내가 이도현이었음을 알고 난 뒤 옥패는 버리지 않고 간직해두었다. 언젠가 요긴할 때를 위해서였다.

오늘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유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 옥패를 지녀야 할 것 같았다.

마차에 올라 마상서의 부로 향했다. 마상서는 이부 상서로, 일품의 내각 대신이었고 올해 환갑이 넘은 원로였다. 그런 마상서가 무슨 연유로 실권도 없는 평양 후부 공자를 초대한단 말인가?

"서방님과 마상서는 언제부터 친분이 있었습니까?"

"지난 진휼 때, 마상서께서 내 능력을 높이 사셨다.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는 사이지. 오늘은 사적인 잔치니 인원도 적다. 나와 마상서 두 사람뿐이다. 걱정 말고 따라오너라."

그러고는 신수빈의 손등을 가만히 덮었다.

그 순간, 신수빈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필사적으로 참았기에 그의 손길을 뿌리치진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빼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 가로등마다 불이 켜졌고 거리는 귀가하는 사람들로 분주하였다.

마침 마차는 한 기루 곁을 지나고 있었고 그곳에는 화려하게 단장한 기녀들이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좋은 집안의 여인들은 그곳을 일부러 돌아갔고 사내들은 기웃거렸다.

그 광경을 본 신수빈은 순간 머릿속에 윤서원이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고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서방님, 며칠째 집안일과 어머님의 병환을 돌보다보니 몸이 좋지 않습니다. 괜히 불편을 드릴까 염려되어 오늘 연회는 사양하고자 합니다."

"괘념치 말거라. 연회 중간에 피로하시거든 마가 안채의 방에서 쉬면 된다."

신수빈은 윤서원의 집요한 태도를 보며 자신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가슴속 깊이 싸늘한 한기가 퍼졌다.

그가 자신을 이토록 요염하게 치장시킨 것은 결국 이도현의 침소에 들게 하려던 계책이었다. 만약 이도현이 거절했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기꺼이 넘겨졌을 것이었다. 아마도 이도현이 자신의 저지로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번엔 내각 대신에게 눈을 돌린 것이 분명했다.

짐승만도 못한 작자, 인간의 탈을 쓴 추물이었다!

신수빈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베고 싶었다. 하지만 마차는 이미 마가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가 내리자, 윤서원은 그녀 뒤에 선 청하를 보고 손을 내저었다.

"여기서부턴 네가 필요 없다. 마차꾼 따라 먼저 돌아가라. 이따 내가 부인과 함께 돌아가겠다."

청하는 의아했지만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그때 신수빈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청하를 불렀다.

"아차, 깜빡했구나. 내 처소 작은 부엌에 약을 달이는 중이니 돌아가거든 잊지 말고 챙기거라."

그녀는 청하에게 다가가며 손에 든 옥패를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걸 들고 섭정왕 저택으로 가거라. 그분께 가서 날 구해 달라 간청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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