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그래, 내가 왕야를 너무 높게 본 거였네.’이도현은 아이를 안고 있으니 검을 드는 것보다 더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아이를 다시 유모에게 넘기며 말했다.“잘 돌봐라. 필요한 게 있으면 관가에 말하면 된다.”“예.”이도현은 후원을 떠난 뒤, 딱히 할 일도 없는 김에 다시 근정전으로 향했다.이리저리 생각하던 끝에, 사람을 시켜 조서를 하나 작성하게 하고, 도장을 찍은 뒤 내시를 시켜 윤 가로 보내게 했다.신수빈이 윤 가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는 막 큰 마님의 영전 앞에서 종이를 태우고 있었는데, 뜰 밖에서 내관이 조서를 전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외원 관사가 들어와 아뢰었다. 궁에서 조서가 내려왔으니 부인은 나가 받아야 한다고 했다.신수빈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외원으로 나가 조서를 받으러 갔다.마침 곧 산후 한 달이 되는 시기라, 추위도 크게 두렵지 않았다.신수빈과 윤 가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조서를 받았다.조서에서 자신을 ‘호국부인’으로 봉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신수빈은 한동안 멍하니 굳어 있었다.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몇 번이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내시가 조서를 끝까지 읽고 나서야 사람들은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신수빈을 바라보았다.신수빈 역시 이도현이 자신에게 이런 봉상을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어젯밤에도 그는 이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게다가 이 ‘호국부인’이라는 작위는 일반적인 고명과는 차원이 달랐다.역사적으로도 그 영예를 받은 이는 극히 드물었고 국가에 지대한 공을 세우지 않고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칭호였다.“부인, 조서를 받으시지요.”“신첩, 성지를 받들며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신수빈은 머리를 조아려 조서를 받았다.내시는 이도현의 심복 중 하나였기에 신수빈에게도 각별히 예를 갖추었다. 그는 조서를 건네며 축하 인사를 덧붙였다.“부인께서 조정과 사직을 위해 기울이신 공은 장안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장차
왕부 전청에서는 신병문이 직접 나와 맞이하고 있었다.관사는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 없어, 결국 이 일은 후원까지 전해졌다.신수빈은 오라버니를 보자마자 먼저 그의 상처를 물었다.신병문의 부상은 이미 다 나은 상태였다.그는 잠시 시선을 내려, 동생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왕야께서는… 이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계시느냐?”요즘 밖에서는, 왕야가 성으로 돌아온 날 하늘에서 길조가 내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뒤늦게 사정을 아는 이들이 퍼뜨리길 그 길조라는 것이 사실은 왕야부에 어린 공자가 태어난 일이었다고 했다.신수빈은 고개를 저었다.“저는 막 깨어났을 때, 왕야께서 이 아이의 출생을 문제 삼아 해를 가하거나 내쫓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성을 잃은 채 왕야에게 이 아이가 그의 아이라고 말해버렸죠. 헌데 왕야께서는 그때 제가 지나치게 불안해 허튼소리를 한다고 여겼는지, 일부러 속이려는 말이라 생각했는지 믿지 않았어요. 당시 이 아이의 출생 월을 바꾸기 위해 약을 써서 태의를 속였는데, 지금은 그가 직접 태의에게 확인까지 마친 터라 믿을리가 없죠.”신병문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나는 처음엔… 그가 이 아이를 신 가로 보내버릴 줄 알았다. 헌데…”그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그가 너를 위해 이 정도까지 양보할 줄은 나도 몰랐다. 지금 상황이야말로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너는 결국 윤 씨 집안의 사람이니… 만약 이 아이가 네가 낳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의 혈통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헌데 지금처럼 이도현이 대외적으로 이 아이가 자신의 장자라고 밝히고, 생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면 너에게도, 이 아이에게도 좋은 것이다.”신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문득 오라버니가 찾아온 이유를 떠올리고 물었다.“윤 씨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윤씨 큰 마님께서 별세하셨다. 그 집안에서 부고를 전하러 신 가에 사람을 보냈더구나. 그래서 너를
신수빈은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지금 말한 게 윤수혁 아주버님입니까? 윤 가의 서장자요…?”“그래, 그자다.”이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제법 애정이 담겨 있었다.“며칠 전에 직접 만나봤다. 관직은 없었고 지난 몇 해는 강호를 떠돌았다고 하더구나. 대신 그 사이에 능력 있는 사람들과 대유학자들을 여럿 사귀었더라. 꽤 쓸 만한 재목이다. 지금 조정은 인재가 부족한 때니, 충분히 중용할 만하다.”그러자 신수빈의 머릿속에 행궁에서 있었던 그날의 일이 스쳤다.윤수혁과 또 다른 자가 벌였던 암살 시도…그 당시 윤수혁은 분명 그자는 자신의 은인의 아들이라고 말했었다. 비록 이도현과 원한이 있긴 하나, 자신은 암살에 가담하지 않고 그저 그를 구하러 왔을 뿐이라고…신수빈은 여전히 마음 한켠이 불안했지만, 윤수혁이 셋째 오라버니와 나누던 치수와 백성을 위한 마음, 그리고 전투에서 보여준 그 두려움 없는 모습이 떠올랐다.이도현의 판단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가문에서 눌려 뜻을 펴지 못하던 그가 이제 이도현의 눈에 들어 새로운 길을 얻은 셈이니 그에게도 이것은 분명 빛이 비치는 길이었다.“왜 말이 없느냐? 피곤한 게냐?”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신수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대답했다.“왕야께서 사람을 쓰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상벌을 분명히 하시는 것도 재능을 품고도 뜻을 펼치지 못한 이들에겐 큰 복일 테고요.”진심이 담긴 듯한 그녀의 칭찬을 듣자, 이도현의 얼굴에 은근한 자부심이 번졌다.“그럼. 나는 여덟 살 때부터 부황께서 곁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게 하셨다. 이후로는 함께 전장을 누비며 항복한 장수들과 새로 투항한 세력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곁에서 보고 배웠지. 그런 세월이 쌓여 자연히 몇 가지는 익히게 된 것이다.”신수빈은 그가 부모를 이야기할 때마다 표정이 달라진다는 걸 알아차렸다. 조금 더 환해지고 생기가 돌았으며 평소의 침착함 대신 청춘의 기백이 스며들었다.그만큼 그는 부모의 사랑 속에서 자라온
이도현은 다른 부탁일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단순해,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냐? 내일 바로 내관을 장 씨 집안에 보내, 태후께서 궁중에서 적적하시니 서 씨의 딸을 불러 곁에 두려 하신다고 전하겠다. 며칠 뒤에는 태후의 몸이 편찮다는 이유로, 다시 서 씨 쪽에서 사람을 데려가게 하면 될 터.”“그럼 제가 서 씨를 대신해 왕야께 감사드립니다.”이도현은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그녀가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갑자기 거리를 둔 듯, 지나치게 공손해진 태도 때문이었다.“앞으로 너와 나는 부부가 될 사이인데, 어찌 이리 낯설게 구느냐. 사람들 앞에서나 보이던 그 태도를 내게 보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오히려, 네가 장난치는 것이 더 마음에 든다.”신수빈은 이미 자신의 영화와 몰락이 모두 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가 마음을 써준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그에게 맞춰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왕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당시 포위를 뚫을 때, 넷째 오라버니께서 공을 세우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하셨겠지만… 그와 함께 위험한 순간들은 버텨낸 이들은, 모두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왕야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상을 내리셨습니까?”그녀의 그 태도를 보자, 이도현은 비로소 익숙함을 느꼈다.사람은 말을 너무 단정 지어서는 안 되는 법…예전에는 그녀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가를 요구할 때면, 목적이 뚜렷한 여인은 싫다며 거절했지만, 지금은 어떤 모습이든 그저 좋을 뿐이었다.“물론이다. 나는 군을 다스릴 때, 상벌을 분명히 하는 것을 가장 중하게 여긴다. 전사한 그 젊은 장수들은 공후의 예로 후하게 장례를 치르게 했으며, 그들의 가족과 처자에게도 충분한 포상을 내렸다. 자식이 없는 이들에겐, 같은 집안에서 양자를 들여 향화를 잇게 했지.”그 모든 일은, 이미 그가 막 조정에 복귀했을 때 처리해 둔 것이
이도현은 그 순간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 그는 그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저 빼어난 용모만 보고 기껏해야 침상 위의 아름다운 존재쯤으로 여겼다. 심지어 함부로 대하는 등, 가볍게 여긴 적도 많았다.그 생각이 스치자 마음 한켠에 묘한 미안함이 일었다.“감사를 전하려 해도 되려 남처럼 느껴지고... 가끔은 본왕이 떠날 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세상 모든 일이 내 손 안에 있는 듯 자신했으면서도 정작 너를 이런 위험에 빠지게 했으니... 부끄러워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은 그저 이 세상 가장 좋은 것들을 네 앞에 가져다 두어 보상하고 싶을 뿐이다.”신수빈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다시 눈을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손을 그의 어깨에 올리고는 목에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를 낳던 날, 자객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을 때 말입니다. 저는 왕야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는 왕야를 뵙지 못할까 봐…”이도현은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날의 위태로움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그는 이미 몇 차례나 경고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신수빈을 해하려 들었다.모친과의 옛 정을 핑계 삼아 참고 또 참았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다 닳아버린 것 같았다.더 이상 태후의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면 그 자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방법쯤은 얼마든지 있었다.이도현은 그녀를 품에 더 끌어안으며 낮게 말했다.“본왕은 네가 억울한 일을 겪은 것을 안다. 장 가는 이미 세습 왕작을 박탈당했다. 앞으로는 감히 너를 해칠 자도 없을 것이다.”신수빈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는데, 눈빛에는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아주 옅은 기대가 담겨 있었다.“장 가뿐입니까? 왕야께서는 장춘도장이 성 안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해친 것이 누가 사주한 것인지 정말 짐작하지 못하시겠습니까?”이도현은 그녀가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
밤에 섭정왕부로 돌아온 이도현은 신수빈이 집으로 가겠다는 말에 곧바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아직 산후도 끝나지 않았는데, 무엇이 그리 급한 것이냐.” “윤 가에서 여러 번 신 가에 사람을 보내 저를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매번 오라버니께서 핑계를 대며 돌려보내긴 했지만 이제 곧 한 달이나 되어갑니다. 설도 다가오고 있으니, 이제는 정말 돌아가야 합니다.”이도현은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이틀 뒤에 돌아가거라.”그녀가 입을 열려 하자 일부러 덧붙였다.“딱 이틀이다.”신수빈은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어차피 돌아가야 할 일인데, 이틀 빠르든 늦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이도현은 그녀의 투덜거림을 무시한 채, 아이를 데려가라는 손짓을 했다.이때 의녀가 약을 들고 들어왔다.이미 스무 날 넘게 약을 먹어온 신수빈이었기에,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힐 정도였다.“거기 두거라.”의녀가 약을 내려놓고 물러났다.이도현은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직 그대로인 약그릇을 보고 물었다.“왜 약을 먹지 않느냐.”“너무 씁니다.”신수빈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왕야, 저는 지금도 여전히 윤서원의 부인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마당에 계속 이곳에 둘 수는 없지요. 우선 그를 데리고 함께 장안으로 돌아가려 합니다.”이도현은 원래 신수빈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선황의 제향을 준비해야 했고 그녀를 돌볼 시간도 없었으며 호심도에서와 같은 일이 또 생길까 두려워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어제 크게 놀랐으니 오늘은 편히 쉬거라. 내일 본왕이 사람을 보내 너를 데려가게 하겠다.”“왕야께서 정사에 바쁜데 굳이 마음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금자와 은보만 함께하면 됩니다.”이도현이
잠에서 깨어난 윤서령은 온몸에 멍 자국이 가득한 채 알몸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애써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건 이도현이 사람들을 시켜 자신에게 억지로 약을 들이부었던 순간뿐, 그 뒤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하필 그곳에서 참기 힘든 통증이 밀려왔다. 윤서령의 뺨이 이내 붉게 달아올랐다.‘섭정왕께서 당시 꽤 화가 나 보였는데 결국은 나를 총애했단 말인가?’어제 입었던 옷은 이미 찢겨 입을 수 없게 되었고 곁에는 새 옷 한 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윤서령은 아랫
마님이 걱정할까 두려웠던 금자는 섭정왕의 좌시위에게 부탁해 많은 상처약을 보내오게 했다. 신수빈은 이도현의 겉옷을 벗기고 조심스레 피 묻은 속옷을 벗겼다. 검은 겉옷에서는 피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연한 속옷은 그의 상처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오른팔의 속옷은 거의 붉게 젖어 있었고 찰나의 그 한 번 움켜쥔 것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신수빈은 이전에 감싸 두었던 붕대를 한 겹씩 벗겼다. 비록 눈앞의 이 남자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디찬 뼈가 드러난 상처는 그녀조차도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이
“본왕이 너를 대하는 것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냐?”억지로 화를 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본래의 위협이라곤 전혀 없었다. 귓가에 스치듯 낮고 허스키하게 들려오는 음성에 신수빈은 자연스레 그의 진짜 감정을 분간할 수 있었다.“족합니다. 한데 남녀의 일에서 좋고 나쁘다는 기준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자신만큼은 그 속에 담긴 차가움과 따뜻함을 아는 법이지요. 저도 한때는 꿈꾸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혼례를 올리고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을요. 한데 저는 결국 잡으려 하면 흩어지고 닿으려 하면 멀어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