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artilhar

제2장

Autor:
봉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씁쓸하게 아려왔다.

세상 어느 여인이 화려하고 성대한 혼례를 꿈꾸지 않겠는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게는 이번 생에 결코 허락되지 않을 꿈이었다.

나는 이내 쓸데없는 감상을 떨쳐냈다.

"소첩이 오늘 밤 안으로 전부 확인하여, 내일 아침 일찍 황궁으로 올려 보내겠사옵니다."

살그머니 몸을 굽혀 인사를 올린 뒤, 다시 손끝을 움직여 하던 일에 집중했다.

그때, 고도진이 미간을 팍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 물건들이 황궁으로 갈 것이라는 걸 네가 어찌 아느냐? 네게 주려고 준비한 것일 수도 있지 않으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소첩, 제 분수 정도는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전하, 부디 소첩을 놀리지 마시옵소서. 사흘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사온데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이옵니다."

고도진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내일 이것들을 모조리 황궁으로 보내도록 하거라."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소매를 펄럭이며 돌아섰다.

문가에 다다랐을 때였다.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소매 속에서 자그마한 도자기병 하나를 꺼내 옆에 내려놓았다.

"밤이 깊었다. 그러니 일찍 쉬거라. 혼례 준비는 내일 해도 늦지 않다."

그 도자기병이 무엇인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경성에서 이름난 성심당의 물건이었다.

귀부인들만 쓴다는 최고급 손 연고.

고도진이 떠난 후에도, 나는 쉬지 않았다.

사흘은 정말이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내가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할 시간도 따로 남겨두어야 했으니까.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모든 장부 정리가 끝났다.

나는 그것을 집사에게 넘겼다.

하인들이 내 지시대로만 움직인다면, 앞으로의 혼례 준비에 차질이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

숨을 돌리고 나니, 어느새 황궁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간단히 씻고 채비를 마친 뒤 하인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향했다.

무려 칠년 만이었다.

황궁은 내 기억 속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 그대로였다.

세월의 흔적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법에 따라 비빈들에게 인사를 올린 뒤, 마지막으로 윤채영의 침궁에 도착했다.

예물을 모두 전달한 뒤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때, 윤채영이 불쑥 내 손을 붙잡았다.

"칠년 만에 만났는데 언니랑 담소도 나누기 싫은가 봐?"

"어머나, 세상에. 채원아. 지난 칠년 동안 대체 무슨 고생을 한 거야? 이 손 좀 봐, 어쩌다 이리 거칠어졌담..."

말을 마친 윤채영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마치 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가슴 아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가증스러운 연기였다.

그러더니 그녀는 황급히 하인을 시켜 연고 한 병을 가져오게 했다.

"도진 오라버니도 참. 난 늘 궁에만 있어서 이런 건 필요도 없는데, 어제 기어코 사람을 시켜 보내셨지 뭐야."

"어쩜 너를 챙길 줄도 모르시는지. 내가 왕부에 들어가면, 너를 대신해서 단단히 따끔하게 일러둘게."

그 연고를 발견한 순간.

나는 속으로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어제 고도진이 내게 준 것은, 그저 윤채영에게 보낸 김에 덤으로 얹어 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윤채영은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내 위에서 군림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얄팍한 속내를 들춰낼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으나 주변의 궁인들은 오히려 공주가 정이 깊다며 칭송을 늘어놓기 바빴다.

잠시 후, 손 연고 자랑을 끝낸 윤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다짜고짜 내 팔짱을 끼고는 어화원을 거닐며 그동안의 고충을 들어주겠다며 우겨댔다.

예법에 얽매인 탓에, 딱히 거절할 핑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와 함께 어화원으로 향했다.

잔잔한 호숫가에 다다랐을 때였다.

주변의 궁인들을 모두 물리치자 마침내 그녀의 추악한 본색이 드러났다.

"너 같은 못 배운 멍청이랑 말 섞으려니 정말 피곤해서 죽는 줄 알았네."

그녀는 걸음을 멈추더니 혐오스럽다는 듯 내 팔을 홱 뿌리쳤다. 그러고는 비단 수건을 꺼내 연신 제 손을 박박 닦아댔다.

"됐어, 빙빙 돌려 말하기도 귀찮으니까 본론만 말할게."

그녀가 손을 뻗어 호수 수면을 가리켰다.

"네 그 촌뜨기나 다름없는 꼴 좀 봐. 그런 꼴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도진 오라버니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도진 오라버니 같은 영웅에겐 나 같은 공주만이 걸맞아."

"체면 때문에 나랑 아바마마가 가만히 있는 걸 모르는 거야?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멀리 좀 꺼져줄래?"

잔잔한 호수 수면 위로 나와 윤채영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칠년간의 고생에 밤까지 꼬박 새운 나는 형편없이 말라붙어 있었다.

혈색 하나 없는 칙칙한 피부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반면, 평생을 떠받들려 살아온 윤채영은 달랐다.

화려한 옷차림에 뽀얀 피부.

마치 한 마리 공작새처럼 온몸에서 사람을 매혹하는 생기와 활력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와 다툴 생각은 없습니다. 원한다면, 그냥 가져가세요."

Continue a ler este livro gratuitamente
Escaneie o código para baixar o App

Último capítulo

  • 부디 이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않기를   제10장

    심건우의 공적 덕분에 나 역시 정경부인으로 책봉되었다.평온한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갔다.어느덧 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우리 아들 온유는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소년으로 자라났다.심건우는 여전히 나라와 백성을 가슴에 품은 승상이었고, 나는 그런 그의 곁을 온화하게 지키는 부인이었다.어느 날, 나는 온유를 데리고 저잣거리에 다과를 사러 나갔다.길모퉁이에 들어섰을 때였다.누더기를 걸친 채 몰골이 흉흉한 걸인 하나가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그의 몸에서는 역겨운 악취가 진동했고, 헝클어진 머리칼이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다.그가 앙상하게 마른 손을 내밀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부인, 제발 적선 좀 베풀어 주십시오. 먹을 것 좀 주십시오..."온유는 깜짝 놀라 내 등 뒤로 쏙 숨어버렸다.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시녀를 시켜 은전 몇 잎을 꺼내 그에게 건네라 일렀다.하지만 그는 은전을 받지 않았다.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익숙하면서도 지독히 낯선 얼굴이 드러났다.고도진이었다.오 년 만에 마주한 그는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과거의 늠름하고 위풍당당했던 기백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오직 얼굴 가득 깊게 파인 풍상과 처절한 회한만이 맴돌고 있었다.심지어 두 눈은 끔찍하게 탁해져 있었다.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찢어질 듯한 고통과 애절한 구걸로 가득했다."채원아..."그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이윽고 눈시울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정말 너구나... 네가 살아 있었어..."한편, 내 마음속에서는 그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나는 그저 담담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채원아, 내가 잘못했다."그는 바닥에 꿇어앉아, 나를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그때는 내가 미안했다. 눈이 멀어서 네 진심을 알아보지 못했어. 너를 홀대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너에게 상처를 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그의 말이 띄엄띄엄 이어졌다.목소리에는 뼈저린 회한이 서려 있었

  • 부디 이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않기를   제9장

    "그리고 너."고도진은 윤채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의 두 눈에는 짙은 혐오감이 가득했다."오늘부로 너와 나는 끝이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그가 손을 번쩍 치켜들더니 그대로 윤채영의 뺨을 향해 매몰차게 후려쳤다.찰싹!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윤채영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무자비한 따귀에 그녀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도진을 쳐다보았다."... 감히 날 쳤어?"고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볼 뿐이었다.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인 윤채영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홱 돌려 황궁을 향해 뛰쳐갔다.이 소식은 순식간에 아바마마의 귀에 들어갔다.그는 본래부터 고도진의 공이 황권을 위협할 만큼 커진 것을 몹시 꺼림칙하게 여겨왔었다. 그런데 이제 감히 공주를 구타하고 황실의 위엄마저 짓밟았으니...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그는 당장 어명을 내렸다."당장 저놈을 옥에 가두어라!"고도진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은 즉각 변방으로 전해졌다.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파장이 일었다.변방의 장수들은 대부분 고도진이 직접 발탁하고 키워낸 자들이었다.그렇기에 그들은 고도진을 향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품고 있었다.주군이 억울하게 옥에 갇히자, 장수들의 분노가 맹렬히 들끓었다.그들은 빗발치듯 상소를 올려 황제에게 고도진의 석방을 청원했다.심지어 변방에서 직접 군대를 집결시키는 자들마저 생겨났다.당장이라도 궁으로 쳐들어가 고도진을 구출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곤 했다.그렇게 조정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과거 구 귀족들이 심건우를 모함했던 까닭은 단 하나였다.그가 추진하려던 변법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위협했다는 것.모든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자,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아바마마는 그제야 깨달았다.자신이 지난 수년간 그토록 철저히 기만당해 왔다는 사실을.심건우가 정말 역모를 꾀한 줄 알았다.고도진이 윤채영을 진심으로 은

  • 부디 이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않기를   제8장

    "심건우,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난 상관없어. 남은 평생, 내가 네 곁에 있을게."심건우는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두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그래."그날따라 햇살은 눈부시게 따스했고,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우리는 이 아담한 저택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황궁의 음습한 권력 암투도, 왕부의 피 말리는 기 싸움도, 변방의 핏빛 칼부림도 없는 곳.이곳엔 오직 소박한 일상의 평온함과 서로의 체온을 보듬는 온기만이 맴돌았다.심건우는 마을에 작은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그리고 나는 집안일을 도맡으며 간간이 그를 도와 책을 필사하기도 했다.한가로운 날이면 강가를 함께 거닐고, 나란히 앉아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시와 노래를 나누고, 다가올 미래를 함께 꿈꾸었다.비록 가진 것 없는 소박한 삶이었지만 그 하루하루는 벅찬 행복으로 가득했다.일 년 뒤.우리는 사랑스러운 아들을 얻었다.이름은 심온유.늘 평안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이름이었다.반면, 경성의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내가 '죽은' 후, 고도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그는 왕부의 하인들을 대부분 내쫓고 화려했던 저택을 냉궁처럼 삭막하게 방치했다.그 어떤 연회에도, 조정의 국정에도 완전히 손을 뗀 채 온종일 내 위패 앞을 지키며 폐인처럼 시들어 갔다.윤채영에게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첫날밤이 지난 후.그는 단 한 번도 윤채영의 처소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그녀가 정성스레 보낸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간곡한 알현 요청마저 차갑게 무시했다.처음에는 윤채영도 조신하고 현숙한 척 연기를 하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하지만 어떤 노력도 고도진의 굳어버린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윤채영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평생을 오만방자하게 살아온 공주가 이런 수모와 냉대를 견딜 리 만무했으니까.혼례를 올린 지 일 년이 되던 날.고도진이 돌연 출가하여 승려가 되겠다고 선언했다.남은 생을

  • 부디 이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않기를   제7장

    아무도 감히 나서서 그를 말리지 못했다.모두가 잠든 깊은 밤.빈소에는 오직 고도진만이 남아 있었다.그가 손을 뻗었다.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레 관을 어루만졌다."채원아, 내가 잘못했다..."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이곳 일을 다 정리하고 나면, 바로 너를 찾으러 가겠다..."하지만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그가 깊은 후회 속에 허덕이고 있을 때, 황후마마가 보낸 자들이 이미 은밀히 묘지로 숨어들었다는 사실을.칠 년 전의 약조대로였다.그들은 어둠을 틈타 내 무덤을 파헤치고, 관 속에서 나를 꺼냈다.무리를 이끈 자는 황후마마의 심복, 이씨 어멈이었다.죽음에서 돌아온 나를 보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이내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공주마마, 황후마마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공주마마는 더 이상 황실의 사람이 아니며, 두 번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잣돈이니 앞으로는 알아서 잘 살아가십시오."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칠 년의 인내.칠 년의 희생.칠 년의 기다림.마침내 이 순간, 그 모든 것에 마침표가 찍혔다.나는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이씨가 데려온 자들이 미리 준비된 마차에 나를 태웠다.이윽고 마차는 서쪽을 향해 내달려 경성을 벗어났다.내 애증이 얽힌 그곳을 영원히 뒤로한 채.밤낮없이 이어지는 고된 여정이었다.그렇게 한 달 남짓이 지났을 무렵.마침내 마차가 강남의 한 작은 마을에 멈춰 섰다.나는 마차에서 내렸다.눈앞에 펼쳐진 익숙하고도 낯선 골목길을 마주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이곳은 바로 심건우의 고향이었다.칠 년 전, 나는 한 시회에서 심건우를 처음 만났었다.그는 그해 조정을 휩쓴 장원이었다.드높은 재학을 갖춘 데다 천하를 품을 만큼 원대한 뜻을 지니고, 변법을 통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사내.나는 그의 이상과 뜨거운 열정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 역시 나의 총명함과 강인함을 알아봐

  • 부디 이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않기를   제6장

    손끝이 내 피부에 닿은 순간, 뼈를 깎는 듯한 차가운 냉기에 그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채원아..."그가 내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그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제발 나 겁주지 마라. 응?"그가 손을 뻗었다.내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고, 이내 맥박을 짚었다.느껴지지 않았다.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 순간, 고도진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쿵!그가 침상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두 손으로 내 옷소매를 사력을 다해 꽉 움켜쥐었다.너무 힘을 준 나머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이윽고 칠 년 간 변방에서 함께 보낸 수많은 기억들이 성난 해일처럼 밀려와 그를 집어삼켰다.처음 군을 따라나섰던 날.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전장에서 입술이 파랗게 질려 떨면서도, 끝내 병사들의 해진 옷을 기워주던 나의 모습.군영이 기습을 당했던 날. 자신을 대신해 화살을 맞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억지로 미소 지으며 부디 옥체를 보존하라 말하던 그 순간.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날. 홀로 독사굴에 뛰어들어 구사일생으로 뱀의 쓸개를 구해왔건만, 눈을 뜬 자신은 오직 윤채영만을 찾으며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그 야속함.그리고 그들의 첫날밤. 차가운 목소리로 빚을 졌다고 읊조리던 날과, 윤채영에게 털옷을 벗어주라 명하던 단호함, 가법으로 다스리라 포효하던 광기 어린 분노까지.그가 애써 외면하고 당연하게만 여겼던 나의 모든 희생이, 이제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참혹하게 난도질하고 있었다."채원아... 내가 잘못했다..."그가 목메어 울먹였다.통제할 수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 손등을 적셨다."너한테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를 그렇게 고생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제발 일어나 봐, 응? 내가 다 보상하마.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건 다 너에게 줄 테니까, 제발 죽지 말거라..."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절망적인 오열을 토해냈다.그는 차갑게 식은 내

  • 부디 이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않기를   제5장

    하인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얼음장 같은 바늘이 되어, 붉은 비단으로 가득한 신방을 찢고 들어왔다.같은 시각.나는 왕부에서 가장 외딴 별채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가사약의 효능이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나갔다.맥박이 멈추고 숨결이 사그라들었다.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마치 정말로 황천길에 들어선 듯했다.담장 몇 개를 사이에 둔 신방은, 틀림없이 숨 막히는 정적에 휩싸였을 것이다.고도진의 손은 아직 윤채영의 면사포에 머물러 있었다.원앙이 수놓아진 붉은 면사포가 살짝 들려 있었는데 그 틈으로 공들여 화장한 그녀의 반쪽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그는 마치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화려한 촛불이 그의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그때, 윤채영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분노를 터뜨렸다.거칠게 고도진의 손을 쳐낸 그녀는 곧바로 문가의 하인을 향해 매섭게 호통을 쳤다."방자하구나! 진북왕부의 유일한 안주인은 바로 나다! 윤채원은 그저 왕비 자리나 꿰차고 있던 쓸모없는 년 아니더냐! 죽었으면 죽은 것이지 어찌 이리도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당장 네놈들의 목숨을 거두기 전에 입 다물지 못할까!"쿵!하인은 사색이 되어 털썩 무릎을 꿇었다.이윽고 바닥에 머리를 짓찧으며 연신 목숨을 구걸했다.그럼에도 윤채영은 끊임없이 악담을 퍼부어댔다.고도진의 몸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그것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었다.그저 벼랑 끝에 몰린 듯한 끔찍한 불안감이었다.마치 수년간 그를 지탱해 주던 보이지 않는 기둥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처럼, 그의 세상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칠 년 전 변방의 흙먼지.독사굴에 불던 피비린내.깊은 밤 군영을 밝히던 등불.그리고 내가 그를 대신해 맞았던 칼날과, 그를 위해 구해온 뱀의 쓸개까지...그가 애써 외면하고 당연하게만 여겼던 그 모든 기억들이 지금 이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그는 내가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여겼을 것이다.마치 말 없는 돌멩이처럼, 아무

Mais capítulos
Explore e leia bons romances gratuitamente
Acesso gratuito a um vasto número de bons romances no app GoodNovel. Baixe os livros que você gosta e leia em qualquer lugar e a qualquer hora.
Leia livros gratuitamente no app
ESCANEIE O CÓDIGO PARA LER NO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