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지율은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화야 씨, 몸이 아픈 게 아니에요. 마음이 힘든 거예요.”그러자 주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율이 화장실을 나오자 고지후와 고윤택도 문밖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고지후가 물었다.“지율아, 괜찮아?”고윤택도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엄마, 오늘 몸 안 좋으면 집에서 쉬어요. 우리 안 놀러 가도 돼요.”하지만 하지율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걱정하지 마.”하지율은 아침도 거의 먹지 못했다.식사를 마친 뒤 네 사람은 차를 타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고지후는 운전석에 앉아 못마땅한 마음으로 운전하면서 수시로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확인했다.뒤에는 하지율과 고윤택, 주용화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고윤택은 주용화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하지율에게 붙어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꼭 세 사람이 진짜 한 가족이고 고지후만 운전기사인 것 같았다.그제야 고지후는 하지율이 왜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는지 이해했다.주용화는 하지율이 쉽게 떼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놀이공원에 도착하자 고윤택은 신이 난 토끼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세 사람 앞을 오갔다.고지후는 차분히 고윤택의 말을 들어 주면서 가끔 조심하라고 당부했다.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하지율에게 말했다.“우리 혼인 신고한 날이 며칠이었는지 기억나?”하지율과 주용화가 동시에 고지후를 바라봤다.고지후는 주용화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딱 7년 전 오늘이야.”고지후와 이혼한 뒤 하지율은 고지후의 생일조차 거의 잊어 가고 있었고 결혼한 날짜는 진작 기억 저편으로 밀려난 상태였다.고지후가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자 하지율은 고지후가 어제 굳이 함께 놀이공원에 오겠다고 한 이유를 알아차렸다.현 연인에게 전 연인은 언제나 거슬리는 존재였다.특히 그 전 연인이 외모도 능력도 빠지지 않는 남자라면 더했다.주용화는 고지후의 말을 듣고도 미소를 지었다.“결혼
그 순간, 하지율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하지율은 자신이 정말 모질고 상처가 되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당당하고 강한 사람 같던 주용화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출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하지율은 목이 꽉 막힌 듯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하지율이 걸음을 멈추자 주용화가 천천히 다가오려 했다.그 순간 하지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몇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 뒤, 하지율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고 뒷모습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주용화는 멀어지는 하지율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 따라가지는 않았다....또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세수하던 하지율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고작 몇 마디로 주용화를 포기하게 만드는 건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았고 더는 미룰 수 없었다.며칠째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하지율의 안색은 아주 좋지 않았다.하지율이 방으로 돌아온 뒤 주용화는 더 이상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집으로 돌아간 건지는 알 수 없었다.씻고 방을 나온 하지율은 아래층에 내려오자마자 식당 쪽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었다.“우와, 화야 삼촌이 요리도 할 줄 알아요? 진짜 대단하네요! 삼촌은 못하는 게 뭐예요?”곧이어 주용화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윤택이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삼촌한테 말해. 요즘은 바쁘지 않으니까 네 엄마랑 같이 매일 여기서 윤택이랑 있어 줄 수도 있어.”그러자 고윤택은 기뻐하며 환호했다.“진짜예요? 너무 좋아요! 이따 놀이공원 가면 화야 삼촌이랑 꼭 대결할 거예요.”하지율이 식당으로 들어서자 훤칠한 주용화가 식탁 앞에서 접시를 놓고 있었다.식탁 위를 보니 하지율과 고윤택이 좋아하는 음식이 대부분이었다.누가 봐도 주용화가 직접 만든 아침이었다.하지율이 주용화를 바라보며 물었다.“어젯밤에 안 갔어요?”주용화가 대답하기도 전에 고윤택이 먼저 나섰다.“네. 어제 삼촌은 저랑 같이 잤어요.”고윤택의 말에 하지율은 가슴이
“또 헤어지자는 말을 하면... 저도 화낼 겁니다.”주용화가 웃지 않으니 평소의 밝고 부드러운 모습은 사라지고 차가운 인상만 남았고 온몸에서 풍기는 기세마저 서늘했다.하지율이 주용화를 알고 지내는 동안, 주용화가 자신에게 이렇게 차가운 얼굴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손형원이 하지율과 반년 가까이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정도가 전부였다.평소 주용화는 하지율과 다투지도 않았다.둘 사이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늘 먼저 사과하고 한발 물러섰다.그런데 이번에는 하지율이 몇 번이고 헤어지자고 하자, 주용화는 확실히 얼굴이 굳어 있었다.하지율은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하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주용화가 하지율의 손목을 낚아채 품으로 끌어당겼다.주용화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워졌다.“지율 씨, 분명히 방법은 있을 겁니다. 지금도 보세요. 저는 멀쩡하잖아요.”하지만 하지율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고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하지율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화야 씨는 많은 일을 겪었으니 사람의 추한 면도 많이 봤겠죠. 사실 저도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에요. 저는 그렇게 고결한 사람도 아니고요. 정말 고결했다면 손형원 씨의 지분도 받지 않았겠죠. 제가 화야 씨와 함께하기로 한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화야 씨가 저를 너무 많이 도와줘서 제가 갚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화야 씨와 함께하면 앞으로도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물론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마음은 제 일이나 제 아이에 비하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하지율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 갔다.“전에 화야 씨가 그랬잖아요. 제가 화야 씨한테 주는 마음이 너무 적다고요. 맞아요. 저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그중에서 화야 씨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은 10분의 1도 안 될지도 몰라요.”하지율은 주용
옆에서 듣고 있던 고윤택도 신이 나서 말했다.“맞아요. 저도 화야 삼촌이랑 같이 놀러 간 지 진짜 오래됐어요.”그러고는 하지율을 빤히 바라봤다.고윤택의 눈빛에는 차마 거절하기 힘든 기대가 가득했다.“엄마도 내일 같이 갈 거죠?”하지율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렇다고 여기서 순순히 승낙해 버리면 자신이 세운 계획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하지율이 대답하지 않자 순간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았다.그때 고지후가 입을 열었다.“그럼 다 같이 가지.”주용화가 고개를 돌려 고지후를 바라보며 웃었다.“고지후 씨도 같이 가실 겁니까?”말투에는 은근한 거부감이 묻어 있었지만 고지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세 식구가 함께 있을 기회가 별로 없으니 놓칠 수 없죠.”그러고는 고윤택을 내려다봤다.“윤택아, 그렇지?”고윤택은 원래 주용화와도 자주 어울렸고 주용화를 아주 좋아했다.그러면서도 당연히 엄마 아빠와 함께 있고 싶었다.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놀러 간다니 더 바랄 게 없었다.고윤택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율은 고지후를 한번 바라본 뒤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저녁 식사는 고지후가 자기 집에서 불러온 도우미들이 준비했다.하지율은 기분이 좋지 않아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고지후 역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그나마 주용화와 고윤택이 식사 중 최근 있었던 재미있는 일을 주고받아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지는 않았다.고윤택은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고 온 탓에 저녁을 먹고 나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졸려 했다.그래서 하지율은 고지후에게 고윤택을 먼저 방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고윤택이 자리를 뜬 뒤에야 하지율은 옆에 있던 주용화에게 말했다.“화야 씨, 오늘은 여기서 윤택이랑 있을게요. 집에는 안 갈 거니까 먼저 돌아가요.”그러자 주용화가 하지율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러면 언제 돌아올 겁니까? 내일요?”하지율은 주용화가 거절하기 어려
주용화는 하지율이 고윤택을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고윤택에게 다시 완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고지후와 재결합한다고 해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그때 고지후가 말했다.“난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너랑 윤택이만 무사하면 돼.”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주씨 가문 사람들은 성격이 극단적이고 집착도 심하잖아. 정말 주용화 씨가 너한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하지율은 고개를 숙여 눈에 떠오른 감정을 감추며 말했다.“그럴 일은 없어. 화야 씨는 절대 날 해치지 않아.”다른 남자를 이토록 굳게 믿는 하지율을 보자 고지후는 마음이 씁쓸해졌다.“그러면 다행이고...”그때 하지율이 말했다.“오늘 밤에는 안 돌아갈 거야. 화야 씨가 조금 있다가 찾아올 수도 있으니 문 잘 잠그고 절대 열어 주지 마.”고지후는 할 말을 잃었다.‘왜 이렇게 몰래 바람이라도 피우는 기분이지?’게다가 고지후는 전남편에서 졸지에 불륜 상대가 된 셈이었다.몇 초간 어이없어하던 고지후가 대답했다.“알겠어.”하지율은 고지후와 더 할 이야기가 없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용화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주용화는 평소처럼 맑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지율 씨, 듣자 하니... 윤택이가 왔다면서요?”하지율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네? 누구한테 들었는데요?”“지율 씨...”하지율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화야 씨, 저를 감시하고 있어요?”잠깐의 침묵 뒤 주용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지율 씨가 걱정돼서 그런 겁니다.”하지율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저를 컨트롤하는 건 싫어요. 오늘은 여기서 윤택이랑 있을 거예요. 집에는 안 들어갈게요.”말을 마친 하지율은 주용화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몇 초 뒤 다시 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주용화의 이름을 본 하지율은 아예 휴대전화를
고지후는 묵묵히 하지율을 바라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실 고지후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한참 뒤에야 고지후가 입을 열었다.“네 마음속에서는... 용화 씨가 윤택이보다도 더 중요한 거야?”고지후는 예전에도 하지율에게 이 질문을 여러 번 했었다.하지만 하지율은 한 번도 정면으로 대답한 적이 없었다.이번에는 달랐다.하지율은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말했다.“그래. 화야 씨는 누구보다도 중요해. 그러니까 절대 죽게 두지 않을 거야. 미쳐 버리게 두는 건 더더욱 안 돼.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고지후는 동공이 순간 수축했고 손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자신의 전처이자 자기 아이의 엄마인 여자가 다른 남자를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었다.주용화를 치료하기 위해 자기 아이까지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고지후는 지금 자신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깨달았다.하지율은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용화를 사랑하고 있었다.어쩐 일인지 고지후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예전에는... 나도 그렇게 사랑했어?”하지율은 고지후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지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러다가 옅게 웃었다.“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사람과 다른 여자를 위해 날 버린 사람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어? 지후 씨, 화야 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도 자신이 당신을 정말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마음도 별거 아니었더라고. 당신을 만나면서 남을 사랑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걸 배웠어. 그리고 화야 씨를 만나고 나서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전부 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내줄 수 있느냐는 결국 그 사람이 그럴 가치가 있느냐에 달린 거야. 화야 씨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고지후는 하지율의 뜻을 알아들었다.주용화는 그럴 가치가 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그
“아무리 권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해외에서 나댈 수는 없으니까요.”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임채아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다른 건 참을 수 있지만... 선생님을 공경하지 않는 건... 전 정말 용납이 안 됩니다.”그러면서 지난번 대회장에서 하지율을 마주쳤을 때, 하지율이 현성 대가에게 눈곱만큼도 예의를 보이지 않았던 일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곧이어 하지율에 대한 남은 호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레이나가 콧방귀를 뀌었다.“저런 인물이 무대에서 활개를 치다니, 음악가의 수치와 다름없
그날 밤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연정미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몇 번이나 그대로 잠들 뻔했다.그러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문 쪽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꾸벅꾸벅 졸던 연정미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어서 곧바로 몸을 바로 세우고 문 쪽을 바라봤다.밖에서는 손형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보현 오빠, 어제 정미한테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서 무슨 일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되어서 보현 오빠한테까지 연락할 수밖에 없었어요.”단보현이 말했다.“내가 사람 시켜 조사해보니 연정미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은 여기였어.”손형서
손형서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주용화 앞으로 내밀고 저도 모르게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얘기했다.“화야 씨, 뭐 마실래요?”주용화는 메뉴판을 받지 않고 말했다.“연정미 씨 말로는 여기 라테가 대표 메뉴라던데요. 라테로 할게요.”손형서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었다.“정미가... 왜 그걸 화야 씨한테 말했죠?”이 카페는 연정미가 예전부터 자주 오던 곳이었다.주용화가 태연하게 답했다.“지난번 같이 식사했을 때 들었어요.”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그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둘은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나눴
결국 하지율이 나서서 말했다.“아버지, 오빠, 지금 중요한 건 범인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수습하는 게 중요해요. 이런 소문이 계속 돌면 회사 이미지도 타격이 큽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 회사 협력사 중에는 연정미 씨 때문에 붙은 곳도 많아요. 저런 얘기를 들으면 계약을 취소할 수도 있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재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회의실에 또렷하게 퍼졌다.“큰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정미 아가씨 쪽에서 거의 성사됐던 협업이... 또 하나 취소됐습니다.”최근